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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 일흔여덟번째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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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의 난지도 |
2009. 09. 07.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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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고지도를 보면 한강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여러 곳에 있던 섬과 백사장, 절벽 등이 사라져버렸다. 난지도도 그러하다. 한백겸(韓百謙)이 노년 그곳에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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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진산인 삼각산이 북으로 한 자락 뻗어나가 큰 길을 넘어 서쪽으로 끊어질 듯 말 듯 너울너울 이어 나가다가, 물을 만나면 멈추고 기가 뭉쳐 언덕이 되고 빙 둘러 골이 되는데, 이곳이 촌락의 주거지다. 한강이 동남에서 흘러와 용산을 지나 희우정(喜雨亭) 아래 이르면 넘실넘실 두 갈래 물로 나누어진다. 그 큰 줄기는 기세가 넓고 깊은데 서쪽 강안을 따라 북쪽으로 가서 곧장 바다로 나아간다. 또 한 줄기는 동쪽으로 꺾었다가 서쪽으로 휘어 굽이굽이 돌아 마을의 동구를 안고 흘러가는데 10여 리쯤 가서 행주성 아래 이르고 다시 큰 강과 합쳐진다. 두 강 사이에 섬이 있어 삼각주를 형성하는데 벼와 기장이 무성하다. 마을에 사는 사람들은 늘 물을 건너 왕래하면서 경작을 한다. 그 이름을 수이촌(水伊村)이라 한다. 여름과 가을이 교차할 때마다 장맛비로 물이 크게 불면 두 강이 합쳐져 바다처럼 넓어지고 물빛이 하늘에 이어지는데, 마을 이름이 아마도 이 때문인 듯하다.
내가 무신년(1608) 여름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아우 유천자(柳川子)의 작은 전장이 곧바로 북쪽 몇 리쯤 떨어진 곳에 있어 궤연(几筵)을 모시고 머물게 되었다. 또 그리 넓지 않은 밭이 이 마을 북쪽 산기슭 아래 있어 이를 떼어 나에게 주었다. 이에 내가 초가 몇 칸을 지어 농막으로 삼았다. 상을 마치고 나서 몸을 일으켜 조정으로 가자니 병이 들었다. 또 아침저녁 몸 보전하기도 어려웠기에 짐을 싸서 선산으로 돌아가려 하니 늙어 버렸다. 고향으로 돌아갈 마음을 잊지 못하고 세사의 갈림길에 방황하다 머리가 부질없이 허옇게 세었는데, 이 한 구역을 돌아보니 오히려 고향과 같은 연민이 생길 것이라, 잠시 쉴 곳으로 삼아 여생을 보내기로 하였다. 전장의 초막 위에 다시 작은 초가를 하나 얽고서 병든 사람이 거처하기에 편하도록 하였는데 겨우 비바람을 가리고 무릎을 들일 정도에 그쳤다.
처음에는 사나운 서리가 밤에 내리고 숨어 있던 벌레들이 구멍에서 기어 나왔다. 오직 내 한 몸 보존하는 것이 급선무였기에, 사실 기이하고 빼어난 땅을 찾아다닐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그러나 이미 거처를 정하고 나서 이곳에 앉고 이곳에 눕고 이곳에 노닐다 보니, 그 산빛과 물빛이 나의 그윽한 흥취를 도와주는 것이 또한 족히 한둘이 아니었다. 앞에는 강 너머로 광주의 청계산(靑溪山), 과천의 관악산(冠嶽山), 금천의 금주산(衿州山), 안산의 소래산(蘇萊山)과 같은 들이 강안을 따라 봉우리가 이어져 하나로 빙 둘러져 있다. 봉황새가 춤을 추고 용이 날아오르는 모습이 다투어 창앞에 펼쳐진다. 왼쪽으로는 저 세 산봉우리를 잘라놓은 천 길 높이의 절벽이 서 있어 늠름하여 범할 수 없는 기세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먼 포구와 아스라한 멧부리가 눈길 끝에 가물거려 광대한 도량이 희미하게 보이는데, 그 안에 황무지를 포용하고 있는 듯하다. 어찌 잠시 돌아보는 사이에 이처럼 기상이 같지 않을 수 있는가?
문을 나서면 마주하는 것이 선유봉(仙遊峯)이다. 한 점 외로운 산이 날아가다 강가에 떨어진 듯하여 마치 여러 용이 구슬을 다투는 것 같다. 주위를 돌아보면 가장 먼저 눈 안에 들어오는 것이 소요정(逍遙亭)이다. 백 길의 두 기둥이 물 가운데 마주 세워져 있어 흡사 신선의 저택에 문을 열어놓은 듯하다. 돛을 단 조각배가 바람을 따라 왕래하느라 점점이 출몰하니, 이들은 들판 너머 큰 강에서 늘 마음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들이 아니겠는가? 늙은 소가 송아지를 데리고 예닐곱 마리가 떼를 지어 물을 마시기도 하고 누워 있기도 하니, 문 곁에 푸른 들판에서 늘 스스로 기르는 것들이 아니겠는가? 아침 안개와 저녁 노을, 가을 달빛과 봄날의 꽃 등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이 끝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눈앞에 거두어 들여 간직하여 우리 집의 재산으로 삼는다. 다만 한 쪽 면에는 보이는 것이 없는데 허공에 걸린 듯한 벼랑과 끊어진 산기슭이 병풍을 쳐놓은 것 같은 형세여서 삭풍이 요란하게 불 때 등에는 따뜻하게 햇살을 쪼일 수 있다. 선유(先儒)가 음양 체용(體用)의 수를 논하면서 “천지는 동쪽, 서쪽, 남쪽을 볼 수 있지만 북쪽은 볼 수 없다.”1)고 하였으니, 이 땅은 정말 천지자연의 형세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도성에서의 거리가 30리도 되지 않아 대궐의 풍경소리가 때때로 귀에 들린다. 벼슬아치들이 전장을 구하여 은거하고자 하면 이곳만큼 편한 곳이 없다. 그런데도 100년 동안 버려 두어 관리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아마도 귀신이 숨기고 아껴두었다가 나를 기다린 것이라 하겠다. 이 때문에 생각을 해보았다. 사람의 편안한 거처는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 있다. 지난 생애를 돌아보니 허다하게 다닌 곳 중에 이곳 같은 데가 없었으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이에 수이촌을 물이촌(勿移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우리말로 글자의 음이 같기 때문이다. 그 집에 편액을 달아 구암(久菴)이라 하였으니, 예전 호를 그대로 두고 새로운 뜻을 붙여 장차 은거하여 생애를 마칠 참이다. 오래가도록[久] 바꾸지[移] 않을 것이 바로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아, 선비가 제 일을 바꾸고 백성이 그 거처를 옮기는 것은 모두 혈기가 왕성하여 다른 것을 그리워하는 데서 연유한다. 이제 내가 늘그막에 이승을 떠날 때 되니 만사가 흐트러졌다. 앉으면 서는 것을 잊고 누우면 일어날 것을 잊는다. 그러니 할 일을 바꾸어 무엇을 구하겠으며, 거처를 옮겨 어디로 가겠는가? 오직 바꾸지 않는 것이 오래갈 수 있는 방도이다. 오래가면 편안하고 편안하면 즐겁다. 즐거우면 그만두려 해도 되지 않는 법이라 비록 바꾸려 하더라도 또한 될 수 없을 것이니, 내 몸을 온전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2) 마침내 글을 적어 내 뜻을 보인다.
1) 蔡元定이 “一奇二耦對待者, 陰陽之體, 陽三陰一, 一饒一乏者, 陰陽之用, 故四時春夏秋生物, 而冬不生物, 天地東西南可見, 人之瞻視, 亦前與左右可見, 而背不可見也.”라 한 주장이 許衡의 『魯齋遺書』에 보인다. 2) 증자(曾子)가 병이 났을 때 제자들을 불러 “이불을 걷고 내 손발을 보아라. …… 지금에야 내가 몸 훼상됨을 면한 줄 알겠다[啓予足 啓予手 而今而後吾知免夫].” 하였다. 《 論語 泰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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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성평사(錦城平沙)_겸재 정선_간송미술관 소장 ▶ 최완수(崔完秀)의『겸재 정선 진경산수화(謙齋鄭敾眞景山水畵)』(범우사)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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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백겸,〈물이촌 구암의 기문(勿移村久菴記)〉,《구암유고(久菴遺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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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지도는 조선후기 지도에는 중초도(中草島)라 되어 있고 그 물가 마을을 수생리(水生里)라 하였다. 불광천과 홍제천이 한강과 만나 형성된 모래섬이다. 1978년부터 1993년까지 서울시민이 버린 쓰레기를 덮어썼다. 조선시대 이 일대는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라 효령대군의 희우정(喜雨亭)과 심정(沈貞)의 소요정(逍遙亭) 등 이름난 정자가 있었다. 다행이 지금은 하늘공원이 조성되어 다시 아름다운 풍광을 돌려받았다.
지금으로부터 500여 년 전 그곳에는 물이촌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수이촌(水伊村), 수이촌(水移村)으로도 썼지만 물이촌이라 읽었다. 물이촌을 글로 후세에 알린 사람은 한백겸(1552-1615)이다. 한백겸은 《동국지리지(東國地理誌)》, 《기전고(箕田攷)》 등을 저술한 뛰어난 학자다. 특히 《기전고》는 청나라 장생목(蔣生沐)의 《별하재총서(別下齋叢書)》에 수록된 이래 근대 중국의 총서에도 포함되어 있으니, 조선의 저술로는 드문 예라 하겠다.
한백겸은 1610년 호조참의로 있던 중 모친상을 당하였다. 느지막이 시작한 벼슬길인 데다 벼슬살이 자체를 즐기지 않아 물러나 살고자 하였다. 마침 아우 물이촌에 전장을 구입하여 소유하고 있던 한준겸(韓浚謙)이 형을 위하여 땅을 떼어 주었다. 이에 한백겸은 그 마을 이름을 물이촌(勿移村)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 집에 이름을 구암(久菴)라 하였다. ‘구암’과 ‘물이’를 합하여 오래도록 은거의 뜻을 바꾸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이다. 구암은 북쪽 언덕 아래 있었는데 그 곁에 대나무 수백 그루를 심었으니 다시 대나무의 곧은 정신을 배우려 한 것이었다.
훗날 이 땅은 채팽윤(蔡彭胤)에 의하여 다시 한 번 빛이 났다. 채팽윤은 1686년 한후상(韓後相)의 딸과 혼인하였으니, 한백겸은 그에게 처고조부가 된다. 채팽윤이 초례를 올린 것이 바로 이 물이촌이었다. 당시 구암은 이미 허물어져 노비들의 거처로 변해 있었다. 채팽윤은 처고조부가 남긴〈물이촌 구암의 기문〉을 쓸쓸히 읽었다.
그 후 충청도 남포(藍浦)의 현감으로 있던 채팽윤은 1706년 부인 한씨를 잃었다. 가난하여 부인의 묘 자리를 구하지 못하여 안타까워하다가 장인의 도움을 받아 이듬해 처의 널을 싣고 천리 길을 가서 물이촌에 장사를 지냈다. 이로써 채팽윤은 물이촌 사람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을 불러 한백겸 생전에 있던 계를 다시 조직하였다. 그리고 채팽윤은 오래 뜻을 바꾸지 않겠다는 ‘구암’과 ‘물이촌’의 정신을 사모하여 자신의 집을 ‘물이소(勿貳巢)라 붙였다. 두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한결같아 지는 조그만 집이라는 뜻이다. 〈수촌수계서(水村脩稧序)〉라는 글에 이러한 사연을 적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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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종묵
*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 * 저서(역서) - 해동강서시파연구, 태학사, 1995. - 한국 한시의 전통과 문예미, 태학사, 2002. - 누워서 노니는 산수, 태학사, 2002. - 浮休子談論, 홍익출판사, 2002. - 조선의 문화공간(1-4), 휴머니스트, 2006. - 우리 한시를 읽는다, 돌베개,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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