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신 할머니
"나는 어떻게 태어났어요?" 어릴 때 흔히 하는 질문 중의 하나가 이 말이다. 내가 살던 고장 (부산에서도 ‘영도’라는 섬 같지 않은 섬) 에서는 "영도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했다. 이 얼마나 서럽고 서러운 말인가! 어둡고 더러운 다리 밑이 바로 자기 출생의 근원지라니.
내가 어렸을 당시 사람들은 아직 6.25 전쟁의 기억과 그 후의 핍박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영도다리는 부산으로 몰려온 무수한 피난민들이 거쳐갔던 곳으로, 이 시대를 회상하게 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다리 밑에서 주워왔어." 어른들이 반은 위협용으로 반은 농담으로 아이에게 한 소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일까? 불행히도 나는 어린 시절 나의 탄생에 대해 어떤 신비한 상상을 해 본 기억이 없다.
"엄마, 난 어떻게 태어났어?" 나의 어린 딸아이도 내게 똑같은 질문을 해온다. 글쎄... 하고 뜸을 들이며 궁색한 답변을 찾고 있으면, 아이가 먼저 유치원과 책에서 배웠다며 엄마 아빠가 서로 사랑해서 태어난 것이라고 아는 척을 한다. 생물학적으로 아기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쉽게 풀어놓은 동화책들을 통해 아이는 스스로 궁금증을 해소하는 듯하다.
그러나 너무도 분명하게 정의되는 사람의 탄생과정에서 과연 우리 아이는 어떤 상상을 갖게 될까? 어쨌든 나보다 나은 상상을 할 것 같다. 딸아이는 우리 민족의 설화를 동화책을 통해 접하면서 아기를 점지해주는 삼신할머니에 대한 상상을 그림으로 그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아이가 묘사한 삼신할머니 상은 한국적인 요정의 모습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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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삼신할머니는 할머니가 아니고 아가씨이다. 머리는 고동색이고 치렁치렁해서 묶었다. 치마는 명주치마이고 그 위에 진달래 모양으로 오색실로 수를 놓고 신은 곱디고운 꽃신을 신고 기다란 하늘색의 진주 목걸이를 하고 연꽃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있다. 손오공처럼 구름도 타고 있고 금빛의 지팡이도 들고 있다. 아기를 점지할 때는 금지팡이로 허공에 원을 그리면 되고 낳게 할 때는 진주목걸이를 산모 배에 대고 손으로 문지르면 아기를 낳게 된다."
딸아이가 상상하는 삼신할머니는 꼭 서양 동화나 만화 속의 예쁜 여주인공 같다. '오색'과 '구름', '꽃'처럼 삼신할머니와 관련된 전통적인 상징들이 서양 신화의 요정이 지니는 (금)지팡이와 뒤섞여 혼재한다. 아기를 점지하는 삼신할머니의 모습은 요정과 같았다가 다시 산모의 출산을 도울 때면 배에 대고 손으로 문지르는 것은 전통적인 삼신할머니 상에 부합해 보인다. 진주목걸이만 제외한다면 말이다.
아이가 그려낸 삼신할머니는 우리 신화와 서양의 신화, 일본 만화 등에서 가져온 여러 요소가 혼합된 형태를 띤다. 이런 삼신할머니 그림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좋을까? 내가 민속신앙의 전승에서 갈등과 단절을 경험한 세대라면, 딸아이는 완전히 서구화된 삶 속에서 전통문화를 동화나 신화로서 받아들이고 있다. 추상적이고 허구적인 상으로서.
◆ 우리의 어머니가 간직해 오신 삼신신앙 |
우리 어머니의 세대는 다르다. "가난했지. 그리고 옛날에 무슨 약이 있어야지." 삼신신앙에 대한 나의 질문을 받자 어머니는 이 말부터 앞세우지만, 자손을 내려주는 삼신에 대한 경외심은 변함 없어 보인다. 어머니에게 가시화될 수 있는 삼신할머니 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신령한 힘을 지닌 삼신이라 알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에 어머니가 어렸을 때부터 보아 온 삼신께 기도드리는 큰어머니의 모습과 시집을 간 후로 시할머니와 시어머니의 모습이 겹쳐진다. 충북 옥천으로 시집을 와서 대개 농사를 짓고 살았던 어머니가 들려 준 삼신신앙은 이렇게 정리된다.
안방 시렁에는 일년 사시사철 쌀 두 되 정도를 넣은 '삼신주머니'를 매달아놓았다. '삼신주머니'는 바로 삼신의 신체(神體)로서, 아기의 잉태와 순산, 무병장수, 자손번성과 가내 평안 등을 관장하는 가신(家神)을 모신 것이다. 산모의 산통이 시작되면 시할머니나 시어머니가 목욕재계한 뒤 삼신의 신체 앞에서 정성어린 기도를 드렸다. 삼신상에는 미역과 쌀, 정한수를 올려놓고 두 손바닥을 마주 대고 비비면서 아기의 순산을 빌었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삼신할머니께 비나이다..." 이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삼신할머니께 드리는 축원기도 자료를 찾아보니 내용이 이러하다.
"삼신할머니가 입을 복도 많이 붙여 주고, 먹을 복도 많이 붙여 주고, 짧은 명은 길게 하고, 긴 명은 쟁반에다 서리 서리 서려 놓게 점지하시고, 앉아서 천 리 보고, 서서 구만 리 보시는 삼신할머니가, 섭섭한 일 있더라도 무릎 밑에 접어놓고 어린 유아를 치들고 받들어서 먹고 자고, 먹고 놀고, 아침 이슬에 외붇듯이, 달 붇듯이, 더럭더럭 붇게 점지하여 주십사. 명일랑 동방삭의 명을 타고, 복을랑 석승의 복을 타고, 남의 눈에 꽃으로 보고, 잎으로 보게 점지하오소사."
아기를 출산하면 즉시 삼신상에 올려진 미역과 쌀로 국과 밥을 지어 삼신할머니에게 고맙다고 상을 차려 올리고 다시 산모와 아기의 무탈함을 빌었다. 아무리 빈궁한 때라도 삼신상에는 반드시 쌀로만 지은 흰밥과 미역국을 올렸다. 하루에 세 번, 끼니때마다 삼신상을 차렸는데, 산모에게는 이 상에 올렸던 밥과 국을 그대로 먹게 했다. 삼신상은 기도를 드리는 시할머니나 시어머니가 차렸는데, 출산 후 삼일 동안은 한번도 거르지 않고 끼니때마다 하루 세 번씩 올렸고, 그리고 나면 첫 이렛날, 둘째 이렛날, 셋째 이렛날(삼칠일)에 새로 국과 밥을 떠놓았다. 좁은 안방에서 오가는 사람의 발에 걸려 엎어 질까봐 상 대신 깨끗한 짚을 깔아 사용하기도 하였단다.
삼신할머니께 드리는 기도는 삼칠일이 지난 후에도 계속된다. 특히 어린아이가 아플 때면 삼신 앞에 그 어머니와 할머니가 맑은 물 한 그릇을 떠놓고 빌었다. 옛날 예방주사나 치료약이 귀하던 때에 동네에서 홍역으로 죽은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이가 홍역을 할 때도 삼신할머니에게 빌었다.
귀한 자손을 내려주고 무탈하게 자라도록 보살펴 줄 때는 삼신할머니가 자애롭기 그지없는 신이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 만은 않았다. 삼신할머니는 또한 무서운 신이기도 하다.
당시 사람들은 삼신을 노하게 하면 아이를 잡아간다고 믿었다. 아이에게 병이 생기면 어른의 행실이 잘못되어 '부정타서' 그런 것이라 여기고 아이의 어머니나 아버지가 삼신에게 받는 '벌'로서 물을 10대접 정도 먹고 삼신할머니에게 살려달라고 빌었다. 또 아이가 홍역과 같은 병에 걸리면, 부모는 한 겨울이라도 홑바지 홑저고리에다 소멍에를 뒤집어쓰고 자신이 짐승보다 못한 인간이니 잘못을 용서해주고 부디 아이를 살려달라고 삼신할머니께 빌었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유아가 정상이 아닐 때는 삼신에 대한 두려움과 자책감이 얼마나 심하였을까.
◆ 문명의 보급에 밀려 서서히 자취를 감춘 삼신신앙 |
어머니가 안방에서 삼신의 신체를 걷어 내린 것은 1960년대 중반 무렵이다. 일곱 남매 중에 막내딸을 낳기 직전인데, 이때는 같은 동네 여러 집에서도 삼신의 신체를 치웠다고 한다. 의료혜택과 전기, 라디오와 TV, 도로 등의 문명시설이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추정되지만 자세한 자료조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어야겠다.
끝으로 다음 편의 글에도 연결되는 성찬경의 시 <삼신할머니>를 소개한다. 이 시에는 민간에서 믿어온 삼신의 두 모습이 희화적으로 묘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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