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길산 등반 후기
南村 서 호원
2010년 3월 28일
새벽에 기온이 영하4도
꽃샘추위 치고는 매우 쌀쌀하다
그러나 근자에 보기 드믄 맑은 하늘이다
2월부터 맑은 날이 거의 없이 연일 찔끔 거렸기 때문에
오랜만에 내민 태양이 매우 반갑다.
참으로 오랜만에 배낭을 지고 청량리역전 포장마차에서 멸치국물에
잔치국수 한 그릇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보니 청량리역에 얽힌
옛 추억이 스물 스물 기어 나온다.
1970년 20여세 때 매주 토요일오후에 이 청량리역 광장은
젊은 청춘남녀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군화를 신고/탄띠를 매고 /군대반합/군대텐트/수통/군용모포까지
그때는 등산 장비가 모두 군용이었다.
요즙 사람들이 보면 매우 우스꽝 스런 등산차림이다
당시 남대문 시장에서 팔리고 있는 군수 물자가
1개 대대 병력을 충분히 무장시킬 수 있는 물량이라고 했다.
아직 캠핑 출발도 안 했는데 벌서 마음이 들떠 통 키타를 치기도 하고
야외용 축음기판을 틀어놓고 춤판을 벌인다. 드넓은 역전 광장이 흥청거린다.
열차가 들어오면 광장을 가득 출렁대던 인파가 일거에 열차로 빨려 들어가
열차 안은 속 절 없이 콩나물시루가 된다. 빽빽이 들어찬 열차 칸
처음 보는 젊은 남녀들이 서로 가슴을 딱 부친 채 부비고 갈 수밖에 없었다.
기차가 청평/강촌 등 강변마다 인파를 뿌리고 지나가면 강변 모든
백사장에 마른나무들을 모아가 불을 피우고 빙글 빙글 돌며 소주먹고
밤새 춤판으로 미쳐 돌아간다. 그때 기타와 태권도를 못하면 간첩이라 했다.
와 후! 피치파티 투나잇/히피히피 세이--- 아 옛날이여 ! ---------!
익크- ! 향우회 후기 글인데 너무 멀리 40년이나 뛰어 가버렸군
하여튼 그런 행각이 10여년 동안 반복 되었다.
오늘의 청량리역은 로마의 파르테논 신전보다도 더 웅장하고
아주 말쑥하게 차린 안내원이 세련되게 맞아주지만
옛날의 낭만이 그립기만 하다.
전철을 타니 등산객으로 가득하다 용문까지 가는 이 전철노선에
유명한 산들이 많다 전철타고 등산가는 참으로 편리한 시대에 산다.
30여분 만에 운길산역에 도착 했다. 허봉호/형남구 등 3-4명의
대원들이 내렸다. 10시 14분이 되니 17명 정도가 모였다.
유림향우회 사상 가장 적은 인원이라 한다.
혹자는 단출하게 좋다고도 했지만 애써 위로 하는 말이다
아무래도 모든 대원들이 모두 모여 반가운 얼굴들로 시끌벅적
하지 못해 아쉬운 눈치 들이다. 인원파악이 끝나는 대로 출발 했다.
송촌리 송성골 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봄 향기가 가득하여
비닐하우스 속 을 들여다보니 빨간 딸기가 오지게 열려 있다.
그 딸기를 따다가 길가에 진열하고 호객을 한다.
그리고 농가를 헐어내고 식당이나 주점으로 개조하여 등산객들을 기다린다.
어느 때 부터인가 등산객들이 매주 주말이면 수백 수천이
몰려들어 이 마을을 기로질러 동네 뒷산으로 오르는 것을 보고
상혼(商魂)이 동했던 것이다. 조용했던 전형적 농가마을이 우리네
등산객으로 인하여 피해를 당하는 것 같아서 다소 민망했다
송촌리의 연세중학교를 지나면 마을입구에서 길이 갈라지는데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올랐다 마을을 벗어나면 울창한 소나무 숲으로
등산로가 이어진다.
마지막 인가를 지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었다.
대개의 등산 코스는 수종사(水鐘寺)에 들른 뒤
산신각 옆으로 500봉을 거쳐 정상에 오르거나,
요사채 앞에서 200m를 내려가 오른쪽 길을
따라 정상에 오른다.
운길산 중턱에 위치한 수종사에는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500년이나 되는 이 나무는 바로 세조가 심은 나무로
나무를 심게된 배경은
조선 세조 5년(1459년) 어느 날 양평에 민정을 살피러 나갔던 세조가
배를 타고 돌아오는데 어디선가 은은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세조는 신하들에게 종소리가 난 곳을 찾게 하여 파보았는데
18나한상이 나왔다. 세조는 그곳에 축대를 쌓고 절을 짓게 하고
수종사라는 이름을 내렸다.
은행나무는 절간 창설을 기념하기 위해 심은 나무라 전해지고 있다.
그 앞이 탁 트인 수종사에서 내려다 보는 경치가 너무 좋아
수종사에서 바라보는 팔당호의 모습을 일찍이 서거정 선생이
동방의 사찰 중 전망이 제일이라고 격찬했을 정도인데
우리는 수종사로 가지 않고 계곡으로 올라가서 수종사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산은 바위가 적고 흙이 많은 산이라서 발바닥이 폭신했다.
만만치 않은 경사의 골짜기에는
노송과 어우러진 전나무, 떡갈나무, 오리목나무, 상수리나무등 수림이 꽤 빽빽하다.
어느 산이나 나무숲 사이로 난 길을 걷는 기분은 상쾌하다.
곳곳에서 소탈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절경들이 발견된다.
산행 중에 바라다 보이는 경치가 일품이다.
산자체의 매력보다는 오르다가 돌아보는 조망경치로 인해서
더욱 사랑을 받는 것 같다
운길산에서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두물 머리가 지척이다.
거대한 물길이 만나 하나로 어우러지는 장관을 조망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가 바로 운길산이다. 드디어 운길산 정상에 도착 했다
북쪽으로 큰명산/ 갑산 뒤로 남양주시 와부읍이고
우측으로는 고래산 넘어로 마석으로 가는 재재고개가 멀리 보인다.
남쪽으로는 조안면이며 왼쪽으로는 양수리가 보이고
북쪽의 대지를 적시며 흘러온 북한강과 저 남쪽 충주를 거쳐 올라온
남한강의 두물의 머리가 만나는 곳
정상에서 두물머리일대의 경치가 조망되고
팔당호의 모습도 한눈에 들어온다.
오른쪽으로 적갑산, 예봉산, 검단산 등이 조망된다.
서쪽으로 아득하게 뻗은 예봉산까지 능선종주를 할 계획이다
4시간 정도 소요된다고 한다.
정산을 능선 따라 넘어 가파른 언덕을 내려서니 작은 평지을 만나서
점심을 먹었다.
집에서 준비해온 산수유를 나누고 산위에서 먹는
막걸리 맛이 일품이다.
식사 후에 능선을 타고 가는 종주 코스에
백년은 넘었을 것 같은 철죽 꽃나무가 꽃눈을 부풀이며 빼곡하게 서 있다
5월이 되면 이곳의 철죽 꽃이 대단한 볼거리가 될 것이다.
운길산에서 적갑산까지 400에서 500고지의 봉우리들이 9개가 있어서
계속 오르락내리락 했다. 하산을 생각하며 운길산을 내려오다가
만나는 9개의 봉우리는 하산이 아니라 이제부터 본격적인 등산이었다.
는 것을 절감 했다
적갑산에 오르니 팡당대교가 바로 아래로 보인다.
적갑산과 예봉산 사이에 페러글라이딩을
타는 활강장이 있다
맞바람도 잘 불어 높이 날아오를 수 있고 고압선도 지나가지 않고
멀리 팔당 강변에 펼쳐진 벌판이 있어 착륙하는데도
아주 좋아서 정말 훌륭한 활강 장으로 보였다.
능선 따라 가는 등산로에는 수 백년 노송들이 늘어서 절경을 만들고 있다.
근자에 왔던 눈으로 수백년 버텨온 노송들의 거대한 가지들이
여기저기 부러져있다.
본래 그 강력하게 부는 바람에는 잘 견디는 고목들이
한밤에 소리 없이 내려 쌓이는 촉촉한 진눈개비에는
그 무계를 이기지 못하여 이처럼 부려지고 마는 것이다.
안락한 도시 생활에서 운동을 않다가 별안간에 이처럼 장거리를
완주 하니 마지막 목표 예봉산을 오를 때는 지친 기색들이 역역하다.
683.2m의 예봉산을 넘어 하산을 하니 5시가 훨신 넘었다,
10시 20분에 시작하여 약 7시간 산행을 한 셈이다.
등반을 마치고 피곤한 다리를 이끌고 팔당역 부근으로 내려가
조그만 식당으로 들어가 옥수수 막걸리로 목을 축이고
거친 보리밥을 두부김치 찌개와 한 그릇 먹으니 피로가 확 풀렸다.
앞으로의 산악회 운영에 대하여 갑론을박했으나 배성규 회장님의
정리로 깨끗이 결론을 맺고 즐겁게 일어나 다시 전철을 타고
서울로 돌아와 다음 달 사랑도 산행을 기약하고 헤어 졌다.
수고해준 배성규 회장님. 유 재현 대장님 서원숙 총무님을 비릇 한
여러 임원님들 덕택에 무사한 산행을 감사드립니다.
참가한 대원들도 유난히 긴 산행 길에 수고 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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