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옛사람의 편지는 그것이 한갓 편지(片紙)일 뿐이랴. 그 사람의 인품이 격조 높은 언어로 여실히 나타나 있어 읽는 사람의 마음을 절로 흐뭇하게 한다. 대문장가(大文章家)로 잘 알려진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이 편지는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지금은 전화와 인터넷이 유행하면서 편지는 거의 쓸 일이 없어졌다. 지루한 기다림은 때로 괴롭지만 조금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오늘날, 편리하지만 어딘가 삶이 허전해졌다. 인간사란 게 무얼 얻으면 반드시 무얼 잃게 마련이란 걸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세상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우리가 옛사람의 글을 읽고 옛사람을 배워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
|
|
|
| |
|
|
|
|
|
|
사흘을 연이어 내린 비에 가련케도 필운방(弼雲坊)의 흐드러지게 피었던 살구꽃이 다 떨어져 녹아서 붉은 흙탕물이 되고 말았네. 일찌감치 이럴 줄 알았더라면 어찌 자네를 불러서 하루 심심찮게 놀아보지 않았겠는가. 긴긴 날 맥없이 앉아서 혼자 쌍륙1)을 갖고 놀았네. 오른손은 갑(甲)이요 왼손은 을(乙)이라 치고 오(五)라 외치고 백(百)이라 외치는 동안 나다 남이다 하는 구별이 생기고 승부에 마음이 쓰여 대적하는 형세가 이루어졌으니, 나는 알지 못하겠네, 내가 내 양손에 대해서도 어느 한 쪽을 편드는 사사로운 마음이 있는 것인가. 저 양손은 이미 이쪽저쪽으로 나뉘었은즉 물(物)이라 할 수 있고 나는 저 양손에 대해 조물주(造物主)라 할 만한데도 사사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한 쪽은 돕고 한 쪽은 억누르는 것이 이와 같다네. 어제 내린 비에 살구꽃은 졌으나 복사꽃은 아직 고우니, 나는 또 알지 못하겠네, 저 대조물주(大造物主)가 복사꽃은 돕고 살구꽃은 억누른 것도 사사롭게 어느 한 쪽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는 것인가. 문득 보니 발 너머로 제비가 지저귀는데 이른바 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2)라 나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글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러나 바둑, 장기와 같은 놀이도 있지 않느냐. 이것이라도 하는 편이 낫단다.3)” 하였네. 내 나이 아직 마흔이 못 되었는데 이미 머리가 하얗게 세었고 정신과 생각이 이미 노인네와 같으니, 제비와 농담이나 주고받는 게 노인네의 소일하는 방법일세. 이러고 있을 때 뜻밖에도 자네의 서찰이 왔으니, 그립던 마음에 퍽 위안이 되었네. 그러나 자줏빛 종이에 부드러운 필치는 문곡(文谷)4)을 빼어 닮아 고아(古雅)한 맛은 있으나 풍골(風骨)이 전혀 부족하니, 이것이 용곡(龍谷) 윤 상서(尹尙書)5)의 글씨가 사대부들의 글씨 모범은 되지만 아무래도 대가(大家)의 풍격은 아닌 것과 같네. 이 점을 알지 않아서는 안 되네. 정존와기(靜存窩記)는 보내온 서찰에서 글을 가지러 오겠다고 한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평소에 남에게 허락을 쉽게 했다는 것을 깨달았네. 이미 이런 군색한 상황을 만났으니, 몹시 후회되고 부끄럽군. 이제 유념해 두었으니 조용히 생각을 가다듬어 글을 지어보겠네만 더딜지 빠를지는 아직 알 수 없네. 이만 줄이네.
1) 쌍륙(雙六) : 쌍륙판에 말을 놓고, 그 말을 움직여 상대방의 궁(宮)에 먼저 들어가는 쪽이 이기는 놀이이다. 말을 앞으로 가게 하는 방법은 6면체의 주사위 두 개를 던져 나오는 숫자에 따른다. 따라서 ‘6면체 주사위가 둘 있다.’라는 뜻으로 쌍륙(雙六)이라 한 것이다. 장기와 바둑이 주로 남성들의 놀이인데 쌍륙은 여성들도 즐기는 놀이였다. 2) 회여지지 지지위지지(誨汝知之 知之爲知之) : 공자(孔子)가 자로(子路)에게 “너에게 안다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이것이 바로 아는 것이다.〔誨汝知之乎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論語 爲政》 3) 그러나……낫단다 : 공자(孔子)가 “하루 종일 배불리 먹고 아무 마음도 쓰지 않고 지낸다면 곤란하다. 바둑이나 장기가 있지 않은가. 이것이라도 하는 편이 그나마 낫다.〔飽食終日 無所用心 難矣哉 不有博奕者乎 爲之猶賢乎已〕” 하였다. 《論語 陽貨》 4) 문곡(文谷) : 숙종 때 문신인 김수항(金壽恒 : 1629 ~ 1689)의 호이다. 그는 서인(西人)과 노론(老論)의 영수였고 전서(篆書)ㆍ해서(楷書)ㆍ초서(草書)를 두루 잘 썼다. 5) 용곡(龍谷) 윤 상서(尹尙書) : 영조 때 사람인 윤급(尹汲 : 1697 ~ 1770)을 가리킨다. 그는 영조 강직한 신하로 명망이 높았고 글씨를 잘 써서 당시 고관대작들의 비갈(碑碣)을 많이 썼다.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얻으면 글씨를 다투어 모방하기 때문에 그런 글씨를 ‘윤상서체(尹尙書體)’라 했다고 한다. 《槿域書畵徵》
- 박지원(朴趾源), 〈남수에게 답함[答南壽]〉, 《연암집(燕岩集)》 |
|
|
|
| |
|
|
|
|
|
|
▶ 벽도홍행도(碧桃紅杏圖)_홍익대학교박물관 소장_한국의 미(민화) 인용 |
|
|
|
| |
|
|
|
|
|
|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족손(族孫) 박남수(朴南壽 : 1758 ~ 1787)에게 답한 편지이다. 조선시대 지금의 종로구 필운동(弼雲洞)은 살구꽃이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라는 시구도 있거니와 살구꽃보다 우리에게 정겨운 느낌을 주는 꽃이 또 있을까. 살구꽃은 피고 지고 처마 밑에서 제비는 지저귀는, 조금 권태로움마저 느껴지는 한낮이 옛날 우리네 마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봄날 풍경이었다. 지금은 생활에 쫓겨 바쁜 나머지 이런 게으름을 피우는 것도 도회 사람에게는 사치가 되고 말았다. 낮은 길고 온 몸이 나른한 봄날, 무료함을 달래려고 연암은 혼자서 쌍륙을 갖고 논다. 요즘 심심한 노인이 화투 패를 떼는 것을 연상하면 된다. 자기 양손으로 쌍륙을 갖고 놀더라도 어느 한 손을 자기로 삼고 어느 한 손을 상대편으로 삼아야 승부가 나고 재미가 있다. 심심파적으로 이런 놀이를 하면서도 연암은 자기가 사심(私心)을 가진 게 아니냐고 농담한다. 연암의 글에는 도처에 농세(弄世)의 해학이 번득이는데 천재(天才)를 자부하면서 불우했던 그가 울울한 심사를 글로 풀다 보니그랬을 것이다. 제비가 《논어(論語)》를 읽고 까마귀가 《맹자(孟子)》를 읽는다는 옛말이 있다. 지지배배 지지배배 지저귀는 제비 소리가 《논어》의 지지위지지 부지위부지 시지야(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를 연상케 하고, 까악 까악 우는 까마귀 소리가 《맹자》의 독악락 여인악락 숙락(獨樂樂 與人樂樂 孰樂)6)를 연상케 하기 때문에 생긴 말이다. 연암이 자신과 양손, 조물주와 살구꽃 복사꽃의 관계를 가지고 조금 부질없고 엉뚱한 생각에 잠겨 있던 차에 문득 처마 밑에서 지저귀는 제비 소리가 “안다는 것을 가르쳐 줄까.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알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걸세.” 하는 것처럼 들린다. 마치 연암에게 정신 차리라고 충고라도 하는 듯하다. 연암은 피식 웃고는 무료함을 달래려고 농담을 건넨다. “너는 글 읽기를 좋아하는구나. 그렇지만 공자님도 말씀하셨지. 나처럼 쌍륙을 갖고 노는 것도 나쁘진 않단다.” 글 쓰는 사람이 글빚에 쪼들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던가 보다. 정존와(靜存窩)란 서재에 대한 기문(記文)을 지어주겠다고 승낙해 놓고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제 독촉을 받은 것이다. 연암은 후회한다고 했지만 이 정도 성가신 일은 차라리 있는 편이 낫다. 이마저 없으면, 너무 심심했지 않을까. 이 글은 읽는 사람의 온 몸을 나른하게 하는 힘이 있다. 굳이 살구꽃이 아니어도 좋다. 봄꽃이 한창인 요즈음,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하루쯤은 이 글 속의 연암처럼 봄날의 게으름을 즐겨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공연히 마음이 바쁜 도회 사람에게는 외려 삶에 활력을 줄 것이다.
6) 독악락 여인악락 숙락(獨樂樂 與人樂樂 孰樂) : 맹자가 음악을 좋아한 제 선왕(齊宣王)에게 한 말로 “혼자 음악을 즐기는 것과 사람들과 함께 음악을 즐기는 것이 어느 것이 더 즐거운가.”라는 뜻이다. 《孟子 梁惠王 下》 |
|
|
|
| |
|
|
|
|
|
|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2007)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