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태어난 경남 함양군 유림면 유평리
이 블로그 집필자 남촌 서호원은
1949년에 이곳에서 태어나
1958경 서울로 부모님 손잡고 상경하여
지금까지 서울생활을 하여 어찌보면
서울 생활이 훨씬 길지만 마음은 언제나 고향에 머물고
잠을 자면 항상 이곳에 추억들이 꿈으로 보여집니다
마을 이름의 변화 -- 유평리(柳坪里) = 버들리 = 버더리
유 평 리 (柳坪里) 유평마을 유래
(전 서기관) 정재건의 글 중에서
@유평마을 행정구역 위치
옛날 예림면, 유등면에 속했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유림면에 편입되었는데 함양에서 남쪽으로 25여리에 있으며, 휴천을 거쳐 유림으로 들어가는 첫마을로 베름바구(花岩)마을, 창촌(倉村)마을, 옥산(玉山)마을 그리고 판문(板門)마을과 버들이(柳坪, 柳等介)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유평(버드리)의 풍수적 명당자리
화장산의 남서쪽 줄기 끝에 다섯 개의 봉우리가 병풍처럼 펼쳐진 오봉산 아래에 있는 명당마을이다. 어느 지관이 마을 뒷산(방아골)에 유지앵소(柳枝鶯巢-버드나무 가지에 꾀꼬리 둥지)라는 명당이 있다 하고, 버드나무가 많다 하여 버들이 혹은 유평이라 불렀 다고 한다. 약 350년 전 부터 청송심씨와 진양형씨가 함께 터를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어 왔으며 정조때 에는 분성배씨가 그리고 순조 때 진양정씨, 하동정씨가 들어왔고 하동정씨가 유지앵소의 명당에 묘를 쓰고 그 아래 남쪽에 서당(景陽齋)을 짖고 후학을 양성하였으 며, 서당 훈장 선생은 문헌공 정여창선생의 12세손인 여암 정도현 선생이시다, 여암 선 생께서 1970년대 말까지 학문을 교수한 곳이며, 유지앵소의 명당 정기와 여암선생의 가르침으로 후학과 후손이 번창하여 정계, 재계, 교육계 유명한 인제들을 많이 배출하고 특히 군 장성(정순민 육군소장과 그 아우 정순현소장) 2명이나 배출한 마을이다
◎ 유평마을의 전설
지금의 마을이 서쪽으로 200여 미터에 위치 하였고 (방아골과 불미기 사이 아래 새터 라는 위치임) 마을에 아주 심술 많은 천석꾼이 살고 있었으며 평화롭고 부자 마을이었는데 심술이 많아 탁발 다니는 스님의 행랑 보자기에 쌀 대신에 소똥을 넣어주었는데 이 도사 스님이 화가 나서 복수심에 아주 안타까운 소문을 내고 다녔다, 소문인즉 앞산(安山) 동쪽 줄기에 20여 미터 높이 솟은 바위가 이 마을로 들어오는 부자운(富者運)을 막고 있기 때문에 큰 부자가 나지 못한다는 소문이였다, 이 소문을 들은 심술 많은 천석꾼이 사람들을 동원하여 앞산의 큰 바위를 깨트려 버렸다
□ 여암 정도현(鄭道鉉)과 경양재(景陽齋)
함양군 유림면 유평마을에 ‘경양재(景陽齋)’라는 재실이 있고, 그 옆에 ‘여암 정도현 선생 유적비’가 있다. 경양재는 한말 함양선비 여암이 학문을 닦으면서 수양한 곳 이다. 평생 주자를 본받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 ‘경양재’를 짓고 학문을 연마한 여암의 이름은 정도현(鄭道鉉)이며, 자는 경부(敬夫)이다. 그는 1895년 휴천면 대천리 고비내(薇川) 마을에서 아버지 재옥(在沃)과 풍천노씨(豊 川盧氏)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河東)으로, 문묘에 배향된 동양 5현의 한분인 일두 정여창선생의 후예이며, 어머니 풍천노씨는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배향된 송재 노숙동(盧叔仝)의 후예인 창현(昌鉉)의 따님이다. 여암은 어릴 때부터 자질이 빼어나 조부 미은공(薇隱公) 환국(煥國)이 매우 기특하게 여기면서 “이 아이는 장차 크게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겨우 말을 배우게 될 무렵 부터 무릎에 앉히고, 성인(聖人)으로부터 한말(韓末)의 인물에 이르기까지 가르쳤다, 학문과 덕이 있고 문묘에 배향되어 제사를 지내는 모든 사람들의 성씨와 본관을 비롯 해서 호와 시호를 외우게 했다. 그러다가 7세 때 학문을 배우기 시작했는데, 모든 글공부나 행동을 소학(小學)을 기 준으로 삼아서 했으며, 소학에 있는 가르침을 생활에 실천하는데 철저하였으니 스승이 “나는 너의 스승이 아니라 네가 내 스승이다”라고 까지 했다고 한다. 책을 들면 모 든 정신을 집중하여 독서를 했기 때문에 침식을 잊고 공부하는 것에 노력했다. 여암은 젊어서부터 교우의 폭을 넓혔다. 죽성 정은교, 명호 권운환, 후산 이도복, 회 산 이택환, 복재 조용숙, 송산 권재규 등 당시 영남 노론 학맥을 이은 선배들을 따라 배웠다. 죽성은 일찍이 복재에게 “일두 집안에 다시 저 사람이 태어났다”라고 했다.
경양재(景陽齋)
1918년 2월 부친의 명을 받들어 간재 전우(艮齋 田愚)를 계화도로 찾아가 폐백을 드리고 제자의 예를 갖추었다. 간재 전우는 노론 학자들의 학통을 이어 이이(李珥)와 송시열(宋時烈)의 사상을 신봉 하고 특히 이이의 학설을 옹호하였다. 어지러운 시대를 살면서 “공자는 이런 시대를 당하면 바다로 떠나갈 것이다. 하였으니 나도 바다로 가겠다”하고 1908년 망국의 한 을 품고 부안의 위도 서쪽 왕등도에 들어 갔다가 고군산을 거쳐 마지막으로 부안의 계화도 양지리에서 은거하며 학문을 닦고 있었다. 당시 간재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는 학도들이 많았다. 여암도 그 중 한사람이다. 간재는 한번 보고 여암의 기량을 헤아렸다. 그리고 이르기를 “옛날 주자가 연평에 게 폐백을 드릴 때가 24세였는데, 이제 그대가 나 같은 천한 사람에게 예물을 가지고 와서 경의를 나타내는 것이 바로 그 나이다. 나는 비록 연평이 되지 못할지언정 그대는 장차 주자같이 되어라”라고 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 ‘우근척여’(憂懃慽勵)의 뜻으로 손수 여암(勵庵)이라고 호를 지어주었다. ‘우근 척여’는 “근심하며 힘쓰고 두려워하며 위태롭게 여겨라”라는 의미로 주역에 나오는 말이다. 뿐 만아니라 스승 간재는 학자가 독서실이 없을 수 없다 라고 하며 편액을 경양(景 陽)이라고 지어 주었다. 경양은 ‘경모호자양(景慕乎紫陽)’에서 따온 말로 주자를 존 경한다 라는 의미이다. 이후 여암은 함양으로 돌아와 스스로 공부를 하면서 의문 사항 이 있으면 편지를 보내 가르침을 받았다.
여암은 몇차례 편지로 가르침을 청하다가 1919년 봄에 영남 지방의 선비들과 다시 공부하기 위하여 간재의 집 문밖에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간재는 ‘보진재’라 이름 붙여 벽에 써서 붙이게 했다. 이로부터 5년을 모시면서 의심 스럽고 어려운 곳을 일일이 물어 질정을 받았다. 이때 간재가 칭찬하여 이르기를 “문리가 조목조목 창달하기를 다른 제자들이 미칠 바가 아니다”라고 했다.
1922년 간재가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1년의 상복을 입었고 30세가 되던 1924년 봄에는 마을 뒤에 서재를 짓고 스승의 유언에 따라 경양재라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원근에서 찾아오는 후진교육에 힘썼는데 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학채를 받 지 않았으며 배우고자 하는 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한편 간간이 산사 등을 찾아 조용히 공부하면서 꾸준히 자신의 학문을 심화시켰다.
당시 일제의 폭정은 날로 심해갔다. 경양재에 일제의 앞잡이들이 침범해 삭발을 강 요한 일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여암은 화가 자신에게 미칠 것을 생각해 가족 모르게 극약을 감추어 두고 있었다. 그는 늘 말하기를 “유학자가 도를 위해 죽는 것과 조정의 신하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그 뜻이 같은 것이다”라며 강제로 삭발과 같은 화를 당하게 된다면 자결하는 것 도 사양치 않는다는 각오로 살았는데 다행히 삭발을 당하지는 않았다.
1967년 봄에 여러 동지들과 더불어 경양재 뒤에 주자 영당을 창건코자 하니 원근에서 사람들이 와서 협력하여 한달여 만에 준공하였다. 또 여암은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에 일이 있을 때는 진심으로 참여를 하였다. 여암은 율곡 이이, 사계 김장생, 우암 송시열로부터 매산홍직필, 전재 임헌회, 간재 전우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노론의 학맥을 이은 선비였다. 후대인들이 이르기를 “간재 전선생의 문하에 학문이 넓고 독실히 행하는 선비가 많았는데 전국에 분포돼 있다.
영남에서 이름난 학자로 한후산, 정창수, 전비천, 정여암, 권추연, 정겸재, 이월연 등 여러 사람들이 있는데 여암이 그 가운데 한 사람이다”라고 했다. 여암은 간재의 영남 제자 중 드러난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여암은 1977년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여암의 유적비. 함양군 유림면 유평마을 경양재 옆에 있다.
◎ 화암(花岩)
베름바구 베름바구 또는 화암(華岩)으로 쓰기도 했으며 위문(位門)이라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조선 선조 때에 강화노(魯)씨가 남원에서 들어와 다래 덩굴과 잡목을 헤쳐내고 터를 잡아 마을을 이루었다 한다
◎ 옥산(玉山)
옥내장터 조선 철종 때에 함양박씨가 석복에서 입촌하여 살았으며 김녕김씨가 영동에서 들어왔고 여흥민씨, 달성서씨 등이 잇달아 들어와서 처음에 작은 마을장터가 개설되면서 유등개라 부르게 되었고 1918년 유림면사무소가 이곳으로 오면서 예림면소로 부르게 되 었는데 1922년 면소가 화촌(베름개)으로 이전하였다, 옥산이라 부르게 된 연유는 마을 뒷산 작은 봉우리에 옥여봉이라는 명당자리가 있고 옥녀봉의 작은산 아래에 있다고 마을을 옥녀동 (玉女洞)이라 이름하였다가 옥산이라고 전해진 것으로 추정한다, 마을앞 내를 옥계, 들판을 옥계들이라고한다
◎ 판문(板門)
늘문이 이 마을을 형성할 때 동리 밖에 판자로 울타리를 치고 동쪽으로 문을 내었다고 하여 판문이라고 전해진다. 삼국시대 석씨들이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하며 조선 정조 때에 달성서씨와 화순최씨, 진양정씨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여러 성 씨가 대를 이어 살고 있다.
◎ 창촌(倉村)
창말 화암마을의 남쪽에, 대천리 고비내의 개천 건너에 있는 마을인데 조선시대에 이곳에 신남창 정부 양곡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마을 이름을 창촌이라 했다
머더리 사람들을 낳아준 어머님 들
누군가 노래했다
고향의 이늑한 엄마의 품이련가?
생각만 해도 눈물이 핑도는 엄마의 품
2014년 7월 재경 버더리 향우회
남촌선생 글중에서 -
나의 고향
남들이 보면 평범한 시골 마을인데
내게는 한 평생 이 마을 향수를 먹고산다
언제나 돌아가고 싶은 곳
탄생지로 돌아와 죽는 연어처럼
늙어서 돌아가 살고 싶은 곳
기억이 가물거리는 나이가 되어도
고향생각은 더욱 뚜렷해지고
타향에서 고향사람 만나면
처음보는 사람라도 그 즉시 형제가 된다.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은
영원히 내 어머니의 포근한 품이다.
약도와 사는 고향사람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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