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대륙경영[2]
(중국 동해안 진출)
□ 중국대륙의 옥토(沃土)를 백제가 7개 군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아까 어떤 분이 백제가 상해(上海) 등지를 통치했다는데 대해서 말씀하셨지마는 그것은 하나의 가공이 아닙니다. 사실입니다. 이에 대해서 [중국사]가 이렇게 적고 있어요. [동성왕東城王의 국서]인데 오늘은 제가 그 윤곽만 말씀드리고 다음 공청회 때 좀 더 자세한 발언을 하겠습니다.
[중국 25사]의 "남제서 백제전"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내용이 있습니다. 동성왕 재위기간이 31년인데 남제 존속기간도 31년(왕이 5번 바뀜)입니다. 또한 동성왕(東城王)은 중국의 남북조시대의 인물인데 묘하게도 <남제>가 건국하는 해에 <동성왕>이 임금이 되셨고 <남제>가 멸망하는 해에 동성왕도 승하(昇遐)하셨어요.
그러니까 [동성왕 1 대代]하고 <남제>라는 나라의 존속기간이 같습니다. 이런 "미니제국"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정말 <남제>는 "미니왕국"입니다. 이 <남제>라고 하는 나라가 31년 동안 계속되었는데 백제 <동성왕> 역시 31년 동안 재위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31년 동안에] <남제>의 왕은 다섯 사람이나 등락을 합니다. 그러니까 한 임금의 평균 재위기간이 6년 되는 셈이지요.
1. 백제 <동성왕>은 <남제>의 <소란왕簫蘭王>에게 국서(國書)를 보내어 중국 동해안을 7개 구역으로 나누어 7명의 백제장군이 통치하게 하였다.
<동성왕>은 남제(南薺)의 소란(簫蘭)이라는 왕한테 국서를 보냈습니다. "레터 어브 스테이트"(Latter of state) 즉, "국서(國書)" 말입니다. 이 국서의 내용이 <남제서 백제전> 속에 꽉 들어찼습니다. 누구라도 이걸 보고서 놀라지 않는다면 우리 한국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성왕>은 중국의 산동반도에서 남쪽으로 상해까지, 북경에서 동해안을 "7개 지역"으로 분할하여 백제의 장군 7명에게 그 통치권을 위임한다는 글을 전기(前記)의 <남제> <소란왕>에게 국서로 보냈어요. 자! 여기를 보세요. 중국의 지리적인 여건은 동해안에 평야지대가 밀집되어 있습니다. "북경에서 상해까지"의 지도만 봐도 파란 색깔로 칠해진 [평야지대]예요.
(중국지도)
(동해안 지역 옥토는 전부 동이의 땅)
2. 중국 역대왕조는 황무지 고원지대인 [섬서성]에 도읍하고 동쪽의 옥토(沃土)였던 "동이東夷의 땅"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여기에서 여러분들에게 참고적으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중국 역대왕조가 가지고 있던 [수도]가 어딘지 아십니까?
[평야지대]인 살기 좋은 이쪽에 있는 줄 아십니까? 천만입니다. [산서성] 서쪽으로 여기 <태행산맥>이라고 하는 산맥이 흐릅니다. 지도상으로는 이렇게 붉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섬서성(陝西省)에
- 주(周)나라 은(殷)나라 때의 장안(長安), 호경(鎬京)
- 진(秦)나라때의 함양(咸陽)
- 심지어 당(唐)나라 때 서안(西安)이 모두 있습니다.
지금의 지도에도 <호경, 장안, 서안, 함양>은 모두 [섬서성]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섬서성]은 흉악한 산골짜기입니다. 여기에 역대 중국의 수도가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산골짜기에 사는 중국 사람들이 그 동쪽의 살기 좋은 평야지대에 살고 있는 우리 "동이족"을 얼마나 부럽게 여기면서 선망(羨望)의 눈으로 보았겠습니까?
3. 동이(東夷)는 오랑캐가 아닌 어질 인(仁)자와 같은 뜻
그런 까닭으로 저들은 우리를 "동이(東夷)"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夷>라는 글자를 결코 오랑캐 <이>라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설문>이라는 책에서는 "이"자를 "여고문인동(與古文仁同)"이라고 했습니다. 즉 고문의 어질 <인>자와 같은 글자라 했습니다. 뿐만 니라 중국고전은 이 "이(夷)"자를 굉장히 선망하는 찬사(讚辭)를 써서 적고 있습니다.
어제 "동이 가운데서도 예맥........만이 한국 족 "이라고 <김철준> 박사가 말씀 했는데 제발 그런 단정적인 얘기는 하지 마세요. 난 <동이> 뿐만이 아니라 <서이西夷>도 우리 계통이라고 봅니다.
"순동이지인야(舜東夷之人也)" "주문왕서이지인야(周文王西夷之人也)"
이는 맹자의 기록입니다. 그러니 "夷"자는 둘 다 마찬가지이지 어찌 달리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북경에서 상해까지" 중국의 실질적인 가주지역(可住區域 : 사람이 살수 있는 대륙) 그 전부를 7개로 나누어서 백제장군 일곱 사람에게 통치권을 맡기는 글을 <남제>의 <소란>이라고 하는 왕한테 보냈다는 말이에요. 그 당시 <남제>는 <백제>와 우호관계를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말하자면 협조공문이라고 할까요? 그런 친서(親書)를 보냈습니다.
헌데, 중국 사필(史筆)은 예(例)의 그 오만불손(傲慢不遜)한 곡필(曲筆)로서 이 [남제서]에 손질을 했습니다.
4. 백제의 7태수 관할지역 및 8대 성씨는 중국 동해안에 존재
(중국놈들이 사서에 가필을 하였다)
[동성왕]이 <목간나木干那, 찬수류贊首流... 등 7장군을 태수로 임명했는데 그 국서(國書)의 서두에 "신(臣)......가임(假任) 목간나......위광위장군 운운(爲廣威將軍 云云)"이라 하고 끝머리에는 "복원(伏願)......청제 운운(聽除 云云)"으로 기록한 것처럼 조작 했습니다
즉, 동성왕이 31년간 겨우 존속한 남제의 왕한테 "신칭(臣稱)"하고 "신자석수봉운운(臣自昔受封云云)"했을 리가 있습니까?(신이 옛날부터 봉封을 받자옵고....운운) 또한, "臣이 목간나를 임시로 임명 하였사오니.....원컨대 제수(除授)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을 리가 있습니까?
정말이지 이는 "갓뎀 !"이요 "네버 하픈"의 헛소리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가필(加筆)만 빼고 보면 명백하게도 백제의 뚜렷한 영광이 나타납니다. 중국의 동해안을 "원 사이드"하게 지배했다는 말씀입니다.
또 백제 7장군의 성씨만 훑어봐도 사학(史學) 조금만이라도 아는 사람은 깜짝 놀랄 일이 있어요. 왜 그런가 하니 백제에는 본래 8대 성씨가 있는데 중국 [25사]와 우리 [삼국사기]는 이렇게 적고 있어요.
"백제유 대성팔씨 사씨 해씨 진씨 목씨 국씨 연씨 묘씨(혹 묘씨) 협씨百濟有 大性八氏 沙氏 解氏 眞氏 木氏 國氏 燕氏 씨(或 苗氏) 協氏"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백제 8대 성씨가 현재 남북한을 통틀어 단 한 가구도 남지 않았는데 [남제서 백제전]의 7장군 성씨들은 대부분 유서 깊은 8대 성씨들이라는 사실이에요. 더군다나 [동성왕]은 그 장군들에게 중국의 동해안을 지배하는 통치권을 위임하는 글을 적었어요. <아무개 장군은 이러저러한 공로가 있었기 때문에 청하태수(산동성)로 임명한다>는 등의 기록을 남겼단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북조(北朝)가 위(魏)나라인데 다른 기록에서 "위나라의 군대를 무찔러서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붉게 물들였다 降屍丹野“라고 적힌 글을 보면 정말 피가 끓습니다. 아울러 백제 장군들이 임명된 지명들만 대충 훑어 봐도 이는 순수한 중국대륙의 지명들이지 한국의 <동국여지승람> 등 [지리서]나 [사서]에 나오지 않는 이름들입니다(조선, 낙랑, 대방만을 제외하면) 즉, 이들은 <광양태수․광릉태수․청하태수․성양태수․낙랑태수(북평태수)․대방태수(북평태수)․조선태수(북경지방).......>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지명들은 모두 중국 땅에 있는 지명들입니다
[참고]
조선성재금영평부(북경) 경내 (대명통일지) 朝鮮城在今永平府(北京) 境內 (大明一統志)
[지명위치도]
□ [남제서 백제전]에서 [동성왕조 부분]을 없애버렸다.
그런데, 묘한 것은 중국사가(史家)들이 [남제서 백제전]을 보다가 자존심에 걸렸던 모양이에요. 어떤 자가 그랬는지 모르지만 제가 추리하건 대는 [당나라 때]의 사가(史家)의 짓으로 봅니다마는 [남제서 백제전 서두부분]을 "북!" 뜯어냈어요.
백제의 영광이 하늘을 찌르고 중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니까 그게 배가 아팠던 모양입니다. 아마 <문교부>에서 갖고 계신 [25사]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마는 저도 두 질이 있는데 이 두 질(帙)이 다 그래요. 그리고는 빈 공간에다 글자 네 개를 박아 놓았어요. 이것은 중국사가(史家)의 양심을 표(表)한 것입니다. 뭐라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이하결문(以下缺文)"이라고 하는 공란 다음에 계속되는 글의 내용입니다. 사실이 뜯겨 나간 자리에 있었던 백제의 영광이며 [동성왕]의 영광이 통째로 사라졌으니 그야말로 기가 막혔을 거예요.
[남제서 삭제 부분]
정말이지! 여러분들 빨리 남북통일 합시다. 그래서 옛날처럼 자유롭게 중국대륙에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그런 날이 오면 나부터 먼저 중국 땅에 가보아야겠어요. 이 "이하결문"의 공란 속에 들어 있던 글을 찾으러 가겠단 말입니다. 중국 땅에 가면 찾을 가망이 있어요. 나는 중국말을 곧잘 합니다. 거기서 중학교 4학년까지 다녔으니까요. 저기 <송지영> 교수께서 계신데 아마 그분도 중국말을 썩 잘 하실 줄 압니다. 우리 모두 총동원해서 중국에 가서 이를 찾아옵시다. 이것도 국사(國史)를 바로 잡는 작업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튼 이러한 백제의 기록을 외면하고 있는 현 사학계의 아리송한 태도나 그 이유를 모르겠어요.
1. 대륙백제를 외면하지 맙시다 - "우리나라는 3000여회 외침만 받은 역사가 아니다.
아까 서론에서 말씀드릴 때 <식민사관-조선사의 3원칙>을 말씀드리면서 반도사관(공간)과 1000년 사관(시간)까지 말씀 드렸으나 그 정신적인 측면은 일부러 미루고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끝으로 그것을 말씀드리고 결론을 맺겠습니다.
[조선사의 세 번째 측면]은 [정신 문화사적인 측면]인데 그것은 곧 패배주의(敗北主義)입니다.
한국은 외국과 싸우면 지는 나라라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역대 사가가 "침(侵)"자를 정식으로 쓴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한국이 외국을 침략했다"는 글은 거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외국의 침략을 당하는 쪽이 우리가 아닌가? 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최치원>이 당나라의 태사시중(太史侍中)이라는 벼슬아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보면 좀 특이합니다. 거기에는 정식으로 "남침오월운운(南侵吳越云云)"하고 "침"자를 썼어요. 이건 정말 희한한 일입니다.
"고구려 백제가 전성했을 때 강병 백만이 남쪽으로 오나라 월나라(상해등지)를 침략하고 북쪽으로 유주, 연나라(북경 쪽), 제나라(산둥반도), 노나라(산동반도)를 쥐고 흔들어 중국의 큰 적이 되었소이다“
<최치원>의 이 "상태사시중장(上太史侍中狀)"하나만 보아도 백제가 양자강 남쪽까지 세력을 뻗쳤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입니다.
[地圖 - 유․연․제․노․오․월 위치도]
이를 왜 외면합니까? 저는 [문교부]의 어떤 <장학관>이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그의 이름은 압니다마는 실명을 밝히지 않겠습니다(주 : 몇 주 전 언론에 나온 그를 지칭하는 것 같음) <삼청동>에 있는 어떤 연수원에서 이런 강연을 했다고 불평을 나한테 늘어놓는 어느 수강자의 얘기를 얼마 전에 들었습니다. 무슨 얘기냐 하면(이 장학관은 서독까지 가서 장학관 노릇을 했다고 하며 더욱이
현직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한국은 실질적인 역사가 2000년 밖에 안 되고 그 가운데서 독립사는 겨우 200년 정도에 불과하다"고 했답니다.
이런 망국적인 발언이 어디 있어요? 이것을 [망국]이라고 한다고 해서 나를 나무라지 마세요. 한국사가 2000년 밖에 안 된다 했으니 B.C 4세기라고 하면 2400년인데 국사교과서 보다도 400년이나 깎아버렸다고 해서 내가 이렇게 흥분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국사교과서에도 고작 B.C 4세기라고 우리의 건국을 못 박지 않았어요?(요새는 조금 발전해서 B.C 10세기로 그 연대가 올라갔군요)
아까 <김원룡> 박사는
그리고 우리 한국 사람의 조국관은 모두 비통에 젖어 있고 패배주의에 젖어 있습니다.
제가 [문교부]에서 설정한 어떤 교육기관에 가서 강의한 얘기를 해야겠습니다. 피교육자는 바다건너 일본에서 온 남녀교포 대학생들이 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강의를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했습니다. 제 강의를 절반쯤 하였을 때 여학생들이 울기 시작했어요. 왜 울었는가 나중에 알아 봤더니 이유가 있었어요. 여기에 앉아계신 위원님들도 해외에 있는 교포가 흘린 눈물의 뜻을 잘 모르실 거예요. 왜 울었는지 아시겠어요 ?
나는 마지막 날 마지막 시간에 강단에 섰는데 나보다 먼저 나와 꼭 같은 [민족사]를 들고 나와서 강의한 사학자가 있었다는데 그 사람은 첫날에 "우리 한국사는 유사 이래 지금까지 외침을 받은 회수가 936회나 된다"고 하더래요. 그러나 학생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참아 주었겠지요. 다음날 다른 교수가 역시 같은 [민족사]를 들고 와서 강의를 하는데 이 사람은 한술 더 떴습니다.
3,000여회나 외침을 받았다 하더랍니다. 아까 문교부 어떤 장학사의 말처럼 한국사가 2000년 밖에 안 되었다면 3000여회의 외침을 받았다는 이 얘기는 1년에 1.5회 꼴로 외침을 당했다는 말이 아닙니까? 1년에 1번이라도 2000회 밖에 안 되는데 계산한번 해 보세요. 1년에 거의 두 번씩 외침을 당했다는 얘기입니다. 아마 이런 외침의 기록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면 분명히 세계 최고기록만 수록하는 "기네스 북"에 우리민족이 올라가야 됩니다.
패배주의 통계내는 것이 사학의 본분인줄 아는 모양이죠. 정말 왜들 이럽니까?(주 :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러분들은 여대생들이 눈물을 흘린 뜻을 알겠습니까? 제발 이렇게 우리나라의 앞날을 걸머질 동량들에게 왜곡으로서 패배주의라는 큰 짐까지 안기지 마세요.
[고 임승국 교수의 국회 국사청문회 마지막 발언내용]
제가 오늘 이 얘기를 하려고 책 한권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금언(金言)으로 본 한국유사"라는 책인데 이 책의 "캐치프레이즈" 말하자면 선전문구가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제가 한번 읽겠습니다. 여러분들께서도 글을 쓰시고 저서를 남기시는 분들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사를 이런 스타일로 표현해서는 안 됩니다. 자, 보세요. 뭐라고 썼는가 하니
"이 책속에는 우리 조상들의 웃음보다 한숨, 기쁨보다 눈물이 주름져 있다"
참 좋쇠다. 또,
"이 책 속에는 누가 어찌하여 우리나라의 과거는 이렇듯 비참 했던가를 숨김없이 털어놓은 벌거벗은 지난날의 우리 모습 그대로 나타나 있다"
고 했습니다. 여기 또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 두겠습니다. 이런 글 쓰지 마세요. 우리 조국을 패배주의전통에 빛나는 조국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 마음속에 내 조국을 사랑하는 애국심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중략)
우리는 유사이래 우리나라에서 2,000여회 1년에 두 번씩 외침을 당했다고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 나라 위해 애국하고 충성할 마음이 생길까요?
(중략)
자기 조국을 어떠한 눈으로 보느냐? 이것이 애국심이 샘솟는 원천이요 정신전력의 샘터입니다. 새롭게 눈을 뜨고 왜곡과 거짓의 과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위대한 나라에 대한 긍지와 영광이 아롱지는 조국을 발견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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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국회 속기록 소개의 가장 중요한 관점은 [입법기관인 국회 청문회]를 당당히 거쳐 [국사 교과]를 고치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즉,
- 단군조선의 개국 사실과
- 백제의 대륙진출
- 한사군의 명칭 삭제 등이 그것입니다
뜻있는 [민족역사학자]와 [국회의원 19명]의 요청으로 1981. 11.26 ~ 27 양일간 열린 국회 <국사청문회>에서 [식민 강단 사학 측 참여자]가
최영희(崔永禧), 김철준(金哲埈), 이용범(李龍範), 전해종(全海宗), 이기백(李基白), 이원순(李元淳), 안승주(安承周) 7인 이었고
그들을 상대로 당당히 안호상(安浩相), 박시인(朴時仁), 임승국(林承國) 교수 3분이 국회에서 국사교과서 정정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악성 위장병 고치기 클릭->http://cafe.daum.net/skachstj 010-5775 50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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