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1. 정조의 세손 시절 일기에서 시작한 기록 정조는 조선의 국왕 중 여러 면에서 모범을 보인 인물이다. 그 중에서도 매일의 일기를 쓰고 이것을 국정의 기록으로 이어지게 한 점은 국왕 정조의 능력을 다시금 새겨 보게 한다. 1760년(영조 36)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써 온 일기는 왕이 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783년(정조 7) 이후 신하들이 기록하는 방식으로 정착되었지만, 이후의 왕들 역시 정조를 모범삼아 국정 일기를 써 내려갔다. 이렇게 해서 모인 책이 『일성록(日省錄)』이다. 『일성록』의 모태가 된 것은 정조가 세손 때 쓴 일기인 『존현각일기(尊賢閣日記)』였다. 정조는 증자가 말한 ‘오일삼성오신(吾日三省吾身:나는 매일 세 가지 일로 나를 반성한다.)’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일찍부터 일기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이것은 정조가 『일성록』 편찬을 명하면서 증자의 이 글귀를 인용한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1785년(정조 9) 정조는 그가 탄생한 후부터 『존현각일기』에 이르기까지의 내용과 즉위한 후의 행적을 기록한 『승정원일기』 등을 기본 자료로 하여 중요 사항을 강(綱)과 목(目)으로 나누어 왕의 일기를 편찬할 것을 명하였다. 규장각의 신하들이 실무를 맡았고, 책의 제목은 증자의 말에서 따와 ‘일성록’으로 정해졌다. 『일성록』은 조선이 멸망하는 1910년까지 151년간에 걸쳐 이어졌다.
2. 표제(表題), 요점 중심의 기록 『일성록』은 정조의 세손 시절의 일기에서부터 출발했지만, 정조가 왕으로 즉위한 이후에는 국정의 주요 내용들이 수록되었다. 그러나 당시 왕의 비서실에서 작성하는 『승정원일기』가 있었기 때문에 정조는 『승정원일기』와는 다른 방식의 편찬을 지시했고, 결국 『일성록』은 주요 현안을 강과 목으로 나누어 국정에 필요한 사항을 일목요연하게 찾을 수 있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일성록』은 국왕 주변에서 매일 매일의 일과 지시 사항을 요점 정리 방식으로 기록하였다. 신하들이 올린 상소문을 비롯하여, 국왕의 동정과 윤음(綸音:임금이 백성이나 신하에게 내리는 말), 암행어사의 지방 상황 보고서, 가뭄ㆍ홍수의 구호 대책, 죄수에 대한 심리, 정부에서 편찬한 서적, 왕의 행차에서의 민원 처리 사항 등을 월, 일별로 기록하였다. 내용은 주요 현안을 요점 중심으로 정리하고, 기사마다 표제를 붙여서 열람에 편리를 기하였다. 표제어는 대개 10~20개 정도로 구성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년) 3월 4일의 경우 ‘강계의 삼(蔘)값과 환곡의 폐단을 바로잡도록 명하였다.’는 표제어를 기록하여 이 날의 주요 현안이 환곡 문제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1791년(정조 15) 12월 14일의 기록은 ‘승지를 보내 종묘와 경모궁에 나아가 봉심(奉審)하고 적간(摘奸)하게 하였다.’와, ‘부수찬 한광식을 체차하였다.’, ‘백령도에 표류해 온 당선(唐船)에 대해 저들이 원하는 대로 돌려보내라고 명하였다.’ 등 24개의 표제어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 글자 한 글자 붓으로 써 내려간 이 책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용어가 나를 지칭하는 용어인 ‘여(予)’이다. 일인칭 한자인 ‘予’는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국왕을 지칭하는 ‘上 ’과 대비되면서, 왕 스스로가 쓴 일기임을 확실히 증명해 준다. 1791년(정조 15) 3월 5일의 『일성록』 기록을 보자.
「성정각(誠正閣)에서 시원임(時原任) 대신과 각신(閣臣)을 소견하였다. (이하 좌의정 채제공 등 입시한 사람들의 명단을 기록함). 내가 이르기를, “근일 바람이 많이 불어 강나루에 배가 다닐 수 없는데 수향(受香) 행차가 모두 노량을 통해 건넜다고 하니, 노량은 평온한 나루라고 하겠다. 이로써 보건대 주교(舟橋)를 노량에 설치한 것은 참으로 잘 하였다.” 하니 이복원 등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였다. 이복원이 아뢰기를, “신이 일전에 감히 나이를 들어 상소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으니 어찌 민망하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체량하여 주시는 은덕을 입는 것이 신의 구구한 바람입니다.” 하여, 내가 이르기를, “경은 한 번 생각해 보라. 오늘날 조정의 모양이 실로 말이 되는가. 좌의정의 근력이 다행히 남들과 달라 지금 홀로 정승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홍 영돈녕(홍낙성)과 서 판부사(서명응)는 모두 병들고 늙었으니, 이렇게 사람이 없을 때 경의 청을 어찌 들어줄 수 있겠는가? 이런 까닭에 홍 영돈녕의 간청도 들어주지 않았다. 영돈녕은 경에 비해 근력이 더욱 쇠퇴하여 진실로 그 뜻을 한결같이 억지로 어기기 어려우나, 경은 근력과 범절은 영돈녕에 비할 바가 아니니 결코 갑자기 허락하기 어렵다.” 하였다. 채제공이 아뢰기를, “장릉(莊陵:단종의 능)에 절개를 다한 사람에 대해 포양(褒揚)한 조처는 매우 성대한 덕의(德義)였으니, 어찌 이루 다 흠앙하겠습니까.” 하여, 내가 이르기를, “혹 누락된 일이 있을까 염려되니 경은 모쪼록 고적(古蹟)을 살펴서 보고 듣는 대로 진달하라.” 하였다.」
[召見時原任大臣閣臣于誠正閣。予曰。近日多風。津江不得行舟。受香之行。皆由露梁渡涉云。露梁可謂穩津。以此觀之。舟橋之設於露梁。誠善爲矣。福源等曰。然矣。福源曰。臣於日前。敢陳引年之疏。未蒙允許。豈不悶迫乎。特垂體下之恩。是臣區區之望也。予曰。卿誠思之。今日朝著。其果成說乎。左相筯力。辛得異於他人。今方獨賢。而洪領敦寧徐判府事。皆病且老。際此無人之時。卿之所請。豈可聽施乎。以此之故。洪領敦寧所懇。亦未聽施。領敦寧則筋力比卿尤衰。誠難一向强拂。而卿則筋力凡節。非比領敦寧。決難遽許矣。濟恭曰。莊陵盡節人襃揚之擧。甚盛德事也。豈勝欽仰乎。予曰。慮或有遺漏之事。卿須披閱古蹟。隨聞見陳達也。] |
|
|
|
| |
|
|
|
|
|
|
▶ 일성록_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_조선 최고의 명저들(휴머니스트) 인용
|
|
|
위의 기록에서 영조와 신하들이 주고 받은 대화와 함께 당시의 분위기를 구체적으로 접할 수가 있다. 이외에 『일성록』에는 위민 정치를 실천한 정조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격쟁(擊錚: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함), 상언(上言)에 관한 철저한 기록이 그것으로서, 『일성록』에는 1,300여 건 이상의 격쟁 관련 기록이 실려 있다. 정조는 행차 때마다 백성들의 민원을 듣고 그 해결책을 신하들에게 지시한 모습이 나타난다.1)
『일성록』은 기본적으로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와 상호 보완적인 관계가 있다. 그러나 격쟁이나, 상언의 기록처럼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소략하게 다룬 내용들이 다수 수록되어 있고, 국정의 참고를 위해 자주 활용되었다는 점에서는 이들 자료와 차별성을 보인다. 『일성록』에 기록된 수치들이 매우 구체적인 것은 선례를 참고하여 국정을 원활히 이끌어나가기 위함이었다. 또한 『고종실록』이나 『순종실록』이 일제의 주도하에 편찬되어 그 한계가 많은 점을 고려하면 고종, 순종시대 『일성록』의 기록들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일성록』은 정조부터 마지막 왕 순종까지 150년간에 걸친 기록이 2,327책으로 편집되었다. 태조에서 철종에 이르는 실록의 기록이 1,187책(정족산본)임을 고려하면 그 분량이 매우 방대함을 알 수 있다. 『일성록』은 국보 153호로 지정되어 현재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국보 서고에 보관되어 있으며,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는 『일성록』의 세계기록유산 등재를 추진하고 있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일성록』의 번역 사업을 수행하고 있지만, 현재의 번역 진도라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보다 많은 예산과 인력이 확충되어 『일성록』의 완역이 빠른 시일 내에 달성되었으면 한다. 그리고『일성록』,『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을 서로 비교하며 읽는 즐거움도 누렸으면 한다.
1) 한상권, 1996 『조선후기 사회와 訴冤제도』일조각 참조.
|
| |
|
|
|
|
|
|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 일지사, 2000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