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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향기 - 백 열 일곱 번째 이야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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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노인과 허 선생의 역사 이야기 : 거꾸로 보는 중국사 |
2010. 6. 7. (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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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진보하는 것일까. 소달구지의 시대보다 자동차의 시대가 더 나은 것은 사실인가? 하지만, 자동차의 시대에 들어와 교통 사고가 급증하여 더 많은 사람이 죽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교통 수단이 진화해 온 역사에 대해서는 친숙하면서 교통 사고가 진화해 온 역사에 대해서 익숙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왜 우리는 세계사의 진행을 인류 개체가 행복하게 증가해 온 역사로만 기억하고 동물 개체가 불행하게 감소해 온 역사로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인가? 왜 우리는 세계사의 진행을 유럽 문명이 행복하게 건설되어 온 역사로만 기억하고 비유럽 문명이 불행하게 파괴되어 온 역사로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인가? 왜 우리는 중국사의 진행을 도덕적인 이념이 전개되어 온 역사로만 기억하고 부도덕한 욕망이 증대해 온 역사로 기억하지는 못하는 것인가? 역사의 현실은 복잡한데 왜 우리의 역사 감각은 이다지도 일면적인가? 거꾸로 보는 역사의 미덕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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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 노인[實翁]이 말했다. “(중략) 기주(冀州)는 사방 천 리로 중국이라 일컫는다. 산을 등지고 바다에 임하매 바람과 물이 넉넉하고, 해와 달이 맑게 비치매 춥고 더움이 알맞고, 물과 산이 영기(靈氣)를 모으매 선량한 사람들이 탄생하였다. 대개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ㆍ요순(堯舜)이 일어나서 초가집에 살면서 자기부터 검소한 덕을 닦아 백성의 재산을 마련하였으며, 공손하고 겸양한 모습으로 밝은 덕을 몸소 실천하여 백성의 인륜을 바로잡았다. 문(文)의 가르침이 차고 넘쳐서 천하가 화락하였다. 이것이 중국에서 이른바 성인이 공력과 감화로 구현한 지극한 치세였다. (중략) 하후(夏后)가 천자의 자리를 아들에게 전하게 되자 백성이 비로소 제집 이익만 꾀하게 되었고, 탕(湯)ㆍ무(武)가 임금을 내쫓고 죽이자 백성이 비로소 윗사람을 범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이 몇몇 임금의 허물은 아니다. 지극한 치세 후에 점차 쇠란이 일어나는 것은 시세가 절로 그러한 것이다. 하(夏) 나라가 충(忠)을 숭상하고, 상(商) 나라가 질(質)을 숭상했으나 요순 시절에 비하면 이미 꾸민 것이었다. 주(周) 나라의 제도는 오로지 화려하고 사치함만 숭상하고 소왕(昭王)과 목왕(穆王)부터는 임금의 기강이 이미 떨어져 정사가 제후(諸侯)에게 있었고, 한갓 허명만 안고 윗자리에 기생하였으니, 유왕(幽王)ㆍ여왕(厲王)이 망치기 전에 주 나라는 천하에서 없어진 지 이미 오래였다. (중략) 주 나라 이후로 왕도가 날로 없어지고 패도가 횡행하여 거짓 인자(仁者)가 제(帝)가 되고 무력이 강한 자가 왕(王)이 되었으며, 지략(智略)을 쓰는 자가 귀하게 되고 아첨을 잘하는 자가 영화롭게 되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림에는 총애와 녹봉으로 꾀고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는 권모술수를 미끼로 하였다. 절반의 얼굴로 마음을 트며 외눈으로 근심을 막았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투어 사욕만 꾀하였다. 아아! 슬프구나. 천하가 번잡하게 된 것은 이욕을 품고 서로 만났기 때문이다. (중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무와 돌의 재앙은 유소씨(有巢氏)에게서 비롯했고 짐승의 재앙은 포희씨(包羲氏)에게서 시작되었으며, 흉년의 걱정은 수인씨(燧人氏)에서 유래되었고 교묘한 지혜와 화려한 풍습은 창힐(蒼頡)에게서 근본하였다. 봉액(縫掖)의 위용이 좌임(左袵)의 편리함만 못하고 읍양(揖讓)의 허례가 막배(膜拜)의 참다움만 못하며, 문장(文章)의 빈말[空言]이 말타고 활쏘는 실용만 못하고 따뜻하게 입고 더운밥 먹으면서 몸 약한 것이 저 추운 장막에서 우유 먹고 몸 강건한 것만 못하다.’라고 한다. 이는 혹 지나친 의론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이 떨치지 못한 까닭이 여기서 싹트게 되었다. 혼돈(混沌)이 뚫어지매 대박(大樸)이 흩어졌고 문치가 성해지매 무력이 쇠했으며, 처사(處士)가 제멋대로 의논하매 주 나라 도(道)가 날로 위축되었다. 진시황이 서적을 불사르매 한(漢) 나라 왕업이 조금 편케 되었고 석거각(石渠閣)에서 분쟁이 생기매 왕망(王莽)이 왕위를 찬탈했으며, 정현(鄭玄)과 마융(馬融)이 경서를 해설하매 삼국이 분열되었으며 진씨(晋氏)가 청담(淸談)을 일삼자 신주(神州)가 망하였다. (중략) 요(遼)와 금(金)은 서로 주인 노릇하다가 송막(松漠)에서 합쳐졌고, 주씨(朱氏)가 왕통을 잃으매 천하는 오랑캐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천자의 덕이 떨치지 못하고 오랑캐의 운수가 날로 자라나니 곧 인사(人事)의 감응이요 천시(天時)의 필연인 것이다.” 허 선생[虛子]이 말했다. “공자(孔子)가 《춘추(春秋)》를 짓되 중국은 안으로 사이(四夷)는 밖으로 하였습니다. 중국과 오랑캐의 분별이 이와 같이 엄격하거늘 지금 선생님께서는 ‘인사의 감응이요 천시의 필연이다.’라고 하니, 옳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 실 노인이 말했다. “ (중략) 하늘에서 본다면 어찌 안과 밖의 구별이 있겠느냐? (중략) 천지가 변함에 따라 인물이 많아지고 인물이 많아짐에 따라 주객[物我]이 나타나고 주객이 나타남에 따라 안과 밖이 구분된다. (중략) 공자는 주 나라 사람이다. (중략) 《춘추》란 주 나라 역사책인 바, 안과 밖에 대해서 엄격히 한 것이 또한 마땅치 않겠느냐? 그러나, 가령 공자가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들어와 살았다면 중국의 법을 써서 구이의 풍속을 변화시키고 주 나라 도(道)를 중국 밖[域外]에서 일으켰을 것이다. 그랬다면, 안과 밖의 구별과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의리에 있어서 그대로 중국 밖의 《춘추》[域外春秋]가 생겨났을 것이다. 이것이 공자가 성인(聖人) 된 까닭이다.”
- 홍대용(洪大容),〈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실 노인[實翁]과 허 선생[虛子]이 나눈 문답[醫山問答]〉,《담헌서(湛軒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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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견_사시팔경도_국립중앙박물관 소장_우리그림백가지(현암사) 인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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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상대적일 뿐이다.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해 왔던 것이 실제로는 상대적인 것이었음을 알아가는 것, 그것이 실학(實學)이다. 상대적인 것들을 반드시 안과 밖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구획하여 어느 한 쪽에 배치해서 의미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허학(虛學)이다. 사물은 그 자체로서 이해되지 않고 항상 어떤 주어진 의미로서 이해되기 마련인지라 보통 사람들은 수많은 안과 밖의 그물망에 의해 사물에 덧씌워진 의미를 곧 그 사물이라 착각하기 쉽다. 질서와 규범에 의해 존재에 부과된 의미를 존재 그 자체로 오해하기 쉽다. 허학을 하고 있는 까닭이다. 실학은 그러한 그물망을 벗겨낸다. 의미로부터 존재를 풀어 준다. 의미는 비어 있지만 사물은 채워져 있다. 비어 있는 의미를 배우는 학문은 허학이지만 채워져 있는 사물을 배우는 학문은 실학이다. 질서 이전의 존재, 질서에 의해 부과된 의미 이전의 존재, 그런 존재를 꿈꿀 수는 없는 것일까. 참으로 이 세상에 대해 실학을 할 수는 없는 것일까.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이 지은 철학소설 〈의산문답〉은 조선후기의 문제작이다. 중국의 안과 중국의 밖을 가르는 경계에 있는 의무려산(醫巫閭山)에서 실 노인[實翁]과 허 선생[虛子] 사이에 오고가는 철학적 대화는 그 전까지 조선 사회에서 시도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열어 주고 있다. 예문으로 제시된 부분은 〈의산문답〉의 마지막 부분으로 고금(古今)의 변화와 화이(華夷)의 분별에 관해 허 선생이 가르침을 청하자 실 노인이 열변을 토하는 대목이다. 실 노인은 말한다. 역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역사는 상대적인 것이라고. 이제까지 역사라는 존재를 구획해 왔던 ‘안과 밖’의 관념, 곧 문명과 야만의 관념에 근접하는 ‘중화와 오랑캐’의 관념은 실체가 있는 것[實]이 아니라 실체가 없는 것[虛]이었다고. 중국의 역사는 항상 실체적으로 문명의 역사, 중화의 역사, 안쪽의 역사로 생각되어 왔고 거기에 합당한 의미를 갖춘 사실(fact)들이 제시되어 왔지만, 실제로 그러한 사실들과 충돌하는 수많은 반사실(counterfact)들이 감추어져 있었다고. 사실과 달리 우(禹) 임금은 중국에서 세습 왕조를 처음 열어 준 욕망의 임금이고, 탕(湯) 임금과 무(武) 임금은 윗사람에게 대항하여 역성 혁명을 성취한 부도덕의 임금이었다는 것. 사실과 달리 진(秦) 시황제의 가공할만한 분서갱유가 도리어 한(漢) 나라의 행복을 열어 주고, 전한(前漢) 시대의 치열한 경학 논쟁이 도리어 전한의 멸망을 초래하였다는 것. 실 노인은 중국의 역사와 유교 이념 사이의 이러한 모순적인 상황을 천천히 즐기며 이를 천시의 필연으로 본다.
그러나, 허 선생은 실 노인의 설명에 동의할 수 없다. ‘중화와 오랑캐’는 공자가 《춘추》라고 하는 보편적인 고전을 통해서 제시해 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던가. 가치라는 것은 인간 사회에 보편타당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당위적인 것이 아니던가. 이 지점에서 실 노인은 공자를 주 나라 시대에 중국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역사화시킨다. 공자가 역사화되는 순간 ‘중화와 오랑캐’도 주 나라 시대에 중국에서의 ‘중화와 오랑캐’ 관념으로 상대화된다. 이어서 대체역사(alternative history)의 상상력이 발동한다. 실제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만약에(what if)라는 상상을 해 보자. 공자가 조선에 와서 중화 문명을 전파했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조선에서 《춘추》를 지었으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여기서 홍대용이 전하는 메시지가 자못 의미심장하다. 공자의 이념은 공자를 시간적으로 주 나라로 끌어 올려 역사화시켜 보고, 또 공간적으로 공자를 조선으로 데려 와 대체역사화시켜 보는 방법에 의해 매력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역사로 한번 돌리고 대체역사로 또 한번 돌리는 이 기막힌 사유 방식은 참으로 〈의산문답〉의 압권이라 이를만하다. 거꾸로 읽는 역사의 유쾌한 시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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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노관범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박사 * 경제인문사회연구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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