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얕게 볼지언정 깊게 보지 말고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0. 7. 6. 11:47

고전의 향기 - 백 스물 한 번째 이야기

얕게 볼지언정 깊게 보지 말고
   낮게 볼지언정 높게 보지 말라

2010. 7. 5. (월)

  글을 읽으면서 깊은 뜻을 얕게 보는 것이야 당연히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지만 얕은 뜻을 깊게 보는 것 역시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깊은 뜻을 얕게 보는 것은 식견과 안목이 부족해서 그런 줄 다 알 테지만, 얕은 뜻을 천착하여 깊게 보는 것을 대개 정밀하고 심오한 견해로 생각하기 쉽다. 낮은 이치를 높게 보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얕으면 얕은 대로 깊으면 깊은 대로 낮으면 낮은 대로 높으면 높은 대로 여실(如實)히 보는 것이 이치를 참으로 아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다면 식견이 부족하거나 자기 생각,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앞섰을 터이다. 고전을 파고들다 보면 누구들 언뜻언뜻 탁견(卓見)인 양 한 기특한 생각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 적이 없으리오. 그렇지만 한갓 자기 생각에 그치는 그러한 것들을 거듭해서 비우고 고인(古人)을 온전히 이해하려는 애정이 없다면, 어떻게 아득한 시대의 간격을 넘어서 고전의 실지(實地)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겠는가.

  보내온 편지를 자세히 보건대 내 뜻을 잘 이해하지 못한 점이 있으니, 대략 말해 보겠네. 그대의 편지에서 “만약 오로지 내면을 돌이켜 보기만 할 뿐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소홀히 여기면 결국 한 쪽으로 치우친 강서선학(江西禪學)처럼 되고 말 것이다.” 하였고, “한번 질의(質疑)하고자 했다가 도리어 죄과(罪過)에 빠지고 말았다.” 하였고, 또 “의리(義理)의 핵심이 되는 곳에 대해 어찌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여, 어투에서 불평스런 기상을 몹시 드러내는 것 같았네. 전일에 내 편지는 그냥 붓 가는 대로 써서 답을 보낸 뒤 까마득히 잊고 있었네. 알지 못하겠네만 그 편지에서 그대로 하여금 강서선학을 공부하게 한 무슨 대목이 있었으며, 또 의리의 핵심이 되는 곳에 대해 공으로 하여금 입을 다물고 말하지 못하게 한 적이 있었던가?
  주자(朱子)는 문인(門人)에게 독서하는 법을 말하면서,
  “글은 차라리 얕게 볼지언정 너무 깊게 보아서는 안 되고, 차라리 낮게 볼지언정 너무 높게 보아서는 안 된다.”
하였고, 또,
   “그대는 글을 볼 때 의론을 세우기를 좋아하는데, 이는 먼저 자기 생각으로 남을 볼 뿐 도리어 성현이 하신 말씀을 가져다 내 가슴 속을 적시는 것은 아닐세. 이후로는 그저 있는 그대로 보도록 하게.”
하였네.
  내가 공의 독서를 보면, 언제나 자기 견해를 주장하여 굳이 글 뜻을 깊고 높게만 보려 하였네. 이런 까닭에 한 권의 책을 읽고 하나의 이치를 알 때에도 미처 침잠하고 진밀(縝密)한 공부를 하지 못하고 먼저 자기 견해를 주장하여 기필코 글 뜻을 자기 뜻에 맞추려고 하더군. 여기에서 어서 머리를 돌리고 빨리 발길을 돌리지 않으면, 이런 습관이 오래 굳어진 나머지 자기 견해를 내세우는 성향이 강해지고 겸허한 마음으로 남의 견해를 받아들이는 태도가 적어져서, 결국 심성(心性)에 나쁜 영향을 끼치고 진덕수업(進德修業)의 큰 공부에도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을 걸세.
  세상은 쇠퇴하고 학문은 단절되어 사람들의 마음이 인욕(人欲)에 함몰되어 버린 이 때 그대들 몇 사람이 급변하는 세상 풍파 밖, 한적한 초야에서 서로 어울려서 경서를 읽는 냉담(冷淡)한 생활을 하면서 옛 선왕(先王)의 유택(遺澤)을 노래하고 육경(六經)의 유지(遺旨)를 강론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크게 기쁜 일이요 좋은 소식인가. 이러한 까닭에 나도 그대들을 매우 아끼는 마음에서 자신의 부족한 점은 헤아리지 않은 채 기필코 그대들을 잘 다듬어서 한 점 하자 없는 옥처럼 훌륭히 성취시키고자 하였네. 그래서 그 동안 그대가 편지로 질문하면 곧바로 수긍하고 듣기 좋은 말로 인정해 주지 않았던 걸세. 이것이 바로 내가 매양 그대의 견해에 반대했던 까닭일세.
  옛날에 백낙천(白樂天)은 시 한 수를 지으면 반드시 이웃 노파에게 가 물어보고 그 노파가 이해하겠다고 하면 기록해 두고,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면 버렸네. 그대들이 나를 멀리하지 않는다면, 내가 그대들을 위해 백낙천의 이웃 노파가 되고 싶은데 그대는 허락해 줄 수 있겠는가?

 

[細觀來諭, 有未悉愚意者, 請畧布之. 公書云:“若一意反觀內省而脫畧於講討, 則未免江西1)一偏之歸.” 又云:“一欲質疑, 反陷罪過.” 又云:“義理頭腦處, 寧容噤嘿不言乎?” 辭氣之間, 太涉發露有不平底氣像. 前日愚書, 信筆書報後, 茫然忘失, 未知有何語句敎公以江西之學, 亦何嘗於義理頭腦處敎公以噤嘿不言乎? 嘗聞朱子語其門人以讀書之法曰: “文字寧看得淺, 不可太深; 寧低看, 不可太高.”2) 又曰: “公看文字, 好立議論. 是先以己意看他, 却不以聖賢言語來澆灌胸中. 自後只要白看乃好.”3) 愚嘗觀公之讀書, 每欲自主議論而必求其深高. 故讀一書得一理, 未及加沉潛縝密之功而先自主張, 必欲求合於己意. 若或於此不能亟回頭疾旋踵, 則膠滯之久, 自用勝而欠遜志虛受之義, 未必不爲心術之害而有妨於進德修業之大功矣. 當此世衰學絶人心陷溺之餘, 公輩數人, 相携於寂寞之濱滄桑局外, 自做冷淡生活, 歌詠先王之遺澤, 講論六經之遺旨, 是何等大歡喜好消息耶! 是以, 區區相愛之至, 不量自己之有無, 必欲其玉成而無一疵焉, 前後盛問之來, 不能言下領會而爲巽與之言. 此所以愚昧之見每見阻於高明者也. 昔白樂天作詩一篇, 必就問于鄰嫗, 嫗曰能解則錄之, 曰不能解則棄之. 愚於諸公, 若蒙不遐, 思欲爲白氏之鄰嫗, 公能肯許否?]

 

1) 江西 : 송(宋)나라 유학자인 육구연(陸九淵) 계통의 학자들을 가리킨다. 육구연은 강서(江西) 금계(金谿) 사람으로, 자가 자정(子靜)이고 호가 상산(象山)으로, 주희(朱熹)와 같은 시대 사람이다. 그의 학풍은 책을 읽고 이치를 토론하는 강학(講學)을 중시하지 않고 실천에 힘쓰며 돈오(頓悟)를 중시하여 선학(禪學)과 같은 성향이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그래서 강서선학(江西禪學)이란 말이 생겼던 것이다.
2)《주자어류(朱子語類)》120권〈우록(㝢(宀/禹)錄)〉에 보인다.
3)《주자어류》114권〈덕명록(德明錄)〉에 보인다.

 

- 안정복(安鼎福),《순암집(順菴集)》6권,〈권기명에게 답함[答權旣明書]〉

 

 ▶ 독서당계회도 부분_일본 개인 소장_우리 그림 백가지(현암사) 인용

 

[해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이 녹암(鹿庵) 권철신(權哲身 1736~1801)에게 보낸 편지이다.

  순암과 녹암은 모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제자인데 두 사람의 성향이 매우 달라서 거의 상반된다 할 수 있다. 녹암이 정주(程朱)의 학설에 거침없이 이견을 제기하고 서학(西學)에도 관심을 가지는 것을 순암은 아주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고인의 글을 읽으면서 자기 견해를 경솔히 주장하는 것을 경계했고 녹암이 이에 반박하는 서한을 보낸 데 답한 것이 이 편지이다.

  녹암의 아우인 이암(移庵) 권일신(權日身 1751~1791)은 바로 순암의 사위이다. 순암은 이 형제를 비롯한 일군의 소장학자들이 보이는 급진적인 성향을 깊이 우려하여 누누이 타이르고 경계하였다. 그러나 이암은 신해사옥 때 순교하고, 녹암도 결국 경신사옥이 일어난 이듬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다가 목숨을 잃고 말았다. 백낙천의 노파를 자임하기까지 했던 순암의 간절한 정성도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던 것이다.

  퇴계 이황도 고봉 기대승에게 자신의 독서 방법을 말하면서 “얕으면 얕은 대로 두고 감히 천착하여 깊게 보지 않으며, 깊으면 깊은 데까지 나아가고 감히 얕은 데 그치지 않는다.[淺則因其淺 不敢鑿而深 深則就其深 不敢止於淺]” 하였다. 순암은 이러한 학문 자세를 잘 배웠다. 그래서 정주(程朱)의 학설과 다른 견해를 주장한 데 대해 그는 “정주가 이미 알고도 하찮게 여겨 울타리 가에 버린 것[笆籬邊物]인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반박하기도 하였다. 매우 근후(謹厚)하지만 오늘날에 와서는 보수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것이다.

  세상에는 녹암과 같은 사람도 필요하고 순암과 같은 사람도 필요하지만, 역사에서는 녹암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인물은 시대에 앞선 선각(先覺)이라 하여 높이 평가되고, 순암과 같은 생각을 가진 인물은 보수적이라 하여 높이 평가되지 못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평가도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호오(好惡)에서 나온 것일 뿐 그들이 살았던 당대 현실과는 무관할 수 있다. 또한 우리의 호오는 그저 우리의 호오일 뿐 인간의 삶의 진실과 다를 수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수백 년 동안 거의 제자리만 맴돈 정주학(程朱學)에 식상한 나머지 무턱대고 선각을 찾고 새로운 것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 새로운 해석은 번득이는 재치, 문득 떠오른 단상(斷想)에서도 나올 수 있지만 인간의 삶에 필요한 진리는 오랜 연찬(硏鑽)을 통해 얻어진 식견과 안목, 그리고 무엇보다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 바탕 없이는 결코 바로 볼 수 없다.

  오늘날 사람들은 대개 녹암을 보고는 통쾌하게 여기고 순암에 대해서는 답답하게 여길 것이다. 순암과 같은 학자의 고루한 생각이 세계사의 진운(進運) 속에서 우리의 역사를 후퇴시켰다고 가슴을 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삶의 진리가 실종되어 가고 진실보다는 각색된 해석이 더 판을 치는 지금, 나는 순암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수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2007)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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