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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당 최후의 해전과 잊혀진 海軍영웅 `시득`[펌]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0. 7. 8. 12:15

[유석재의 新역사속의 WHY] 신라·당 최후의 해전과 잊혀진 海軍영웅 '시득'

 

한반도 지배의 주도권을 둘러싼 나당(羅唐)전쟁은 7년 동안 벌어졌다. 그런데 이 전쟁 최후의 전투는 육상전이 아니었다. 676년(문무왕 16년) 11월 금강 하구에서 벌어졌던 기벌포(伎伐浦) 해전이었다.

이 전투는 한국 전사(戰史)의 미스터리 중 하나다. 분명 그 실체가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는데도 중국 학계에선 "존재하지 않았다"고 강변한다. 그들에게 치욕스러운 전투가 아니었다면 이런 주장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나당전쟁에서 신라의 승리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대는 중국을 통일한 대제국이었고 '정관의 치'로 알려진 전성기 직후였다. 방패막이와도 같았던 고구려마저 사라진 상황이었다. 그런데 작은 신라가 맨몸으로 맞서겠다고?

이 전쟁에서 신라는 세 가지 면에서 유리했다. 첫째 고구려 유민들이 673년 임진강 전선으로 밀려날 때까지 신라군과 함께 분투했다. 675년의 매소성 전투가 있기 전부터 당군은 이미 상당한 타격을 입은 상태였다.

둘째 때마침 지금의 티베트인 토번(吐蕃)이 당나라의 발목을 번번이 잡아 줬다. 7세기 초 손첸감포에 의해 통일왕국이 수립된 토번은 662년부터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당과 본격적인 전쟁을 벌였다.

당나라는 한반도·만주와 티베트·실크로드라는 동·서 양전선에서 동시에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겉으로 보기엔 현대 미국의 '윈·윈(win·win)전략'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는 당나라의 '루즈-루즈(lose·lose)'였다.

설인귀의 대함대, 금강 하구로 진입

설인귀(薛仁貴)·유인궤(劉仁軌)·이근행(李謹行) 같은 당의 장수들이 동서를 오갔지만 패했다. 670년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이 지금의 청해성(靑海省) 대비천(大非川)에서 토번에게 대패할 무렵 신라는 옛 백제 영토를 차지했다.

675년 매소성에서 신라에 대패한 이근행이 재침공하지 못한 것은 676년 초 토번 전선으로 차출된 것과 관련이 있다. 그러나 토번 쪽 상황이 안정되자 당나라는 676년 11월 최후의 신라 침공을 감행한다.

설인귀가 이끄는 대함대가 기벌포로 진입했던 것이다. 중국측은 여기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불신한다. 설인귀가 '상원(上元) 연간(674~676) 사건에 연루돼 유배를 갔다'는 중국측 기록 때문이다.

그런데 '구당서' 위원충전(魏元忠傳)을 보면 설인귀가 676년 이후에도 여전히 처벌받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상원 연간에 유배를 간 것'이 아니라 '상원 연간에 있었던 사건 때문에 나중에 유배를 간 것'이 되는데(경북대 박사과정 이상훈), 그 사건이란 바로 기벌포 해전이었다.

안시성 전투부터 숱한 전장을 누볐던 설인귀는 대형 상륙전을 통해 신라의 숨통을 끊어놓을 계획이었을 것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나선 신라 장군은 17관등 중 8관등인 사찬 벼슬의 시득(施得)이었고, 병선은 고작 100척 정도였다.

이제 세 번째 요인이 나온다. 당 대군에 맞선 건곤일척의 싸움에서 신라는 끈질긴 전의(戰意)와 유연한 전술로 군사적인 열세를 극복했다. 첫 싸움에서 신라군은 패했으나 시득은 물러나지 않고 게릴라전으로 전술을 바꿨다.

23전 22승으로 서해 제해권 장악

시득은 무려 22번에 걸친 기동전을 벌여 당나라 해군을 공격했고 모두 승리를 거뒀다. 마침내 당군 4000명의 목을 베고 설인귀를 패퇴시켰다. 해전에선 전사자 시신이 쉽게 수습되지 않기 때문에 당군의 피해는 더 컸을 것이다.

이후 서해상에선 당군의 군사활동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신라 해군이 서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이다. 시득은 을지문덕이나 강감찬의 반열에 올려야 마땅한 인물이지만 그에 대한 더 이상의 기록은 없다.

아마도 '거대 영웅'으로 추앙된 김유신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일 것이다. 시득의 이름이 희미해지는 동안 오히려 '적장' 설인귀가 한반도에서 추앙되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일어났다.

무속신앙의 대상이 되는가 하면 경기도 파주쯤에서 태어난 인물로 둔갑시킨 설화가 유포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아쉬운 점 중 하나는 이순신 장군을 제외한 숱한 해군의 명장들이 부당하게도 잊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군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결정적인 순간마다 나라를 구했다. 바다를 모르는 권력자들에 의해 홀대받고 망각되기를 반복하면서도 푸른 포말 속에 이름을 묻은 채 언제나 묵묵히 조국을 수호해 왔던 것이다.
출처 : 투가리쉼터
글쓴이 : 투가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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