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풍요의 역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0. 10. 1. 14:25

고전명구 - 백 서른 세 번째 이야기

풍요의 역설

2010. 9. 30. (목)

기름진 음식을 배부르게 먹은 자에게는 입에 맞는 맛이 없다.

   
 

飽膏粱之食者。無適口之味。
포고량지식자   무적구지미

- 안축(安軸 1287~1348)
 〈단양북루시병서(丹陽北樓詩幷序)〉, 《동문선(東文選)》

[해설]

  고려 말의 문신 안축 선생께서 관동(關東)을 유람하고 난 뒤 하신 말씀입니다. 기름진 음식이란 곧 멋진 경치를 의미합니다. ‘내가 관동 땅에서 참으로 멋진 경치를 실컷 보았으니 이제 다른 웬만한 경치는 시시해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이라는 말씀.

  휴가를 다녀온 뒤 일상으로 복귀하기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멋진 곳을 다녀왔을 경우 그런 느낌은 더 심합니다. 바다를 본 사람에게 웬만한 물은 물로 보이지 않듯이, 멋진 경치에 빠졌던 사람에게 이제 일상은 시시하게만 느껴집니다. 눈앞에는 휴가지의 멋진 풍광만 아른거리고, 차라리 다녀오지 않는 것이 좋았을 걸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보고 듣는 경험이 지나치게 풍요로운 것도 때로는 독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온갖 매체를 통해 세상의 좋은 것들을 실컷 보고 듣고 경험하는 현대인들은 - 비록 간접 경험이긴 하지만,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실은 - 더 불행한지도 모릅니다.

  지금 내가 처한 처지, 가지고 있는 것의 소중함을 알지 못한 채 저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만 바라볼 때, 나의 일상은 한없이 초라해질 뿐입니다. 결국 남는 것은 결코 채워지지 않을 공허한 욕망뿐. 그러니 때로는 적당한 결핍과 절제가 오히려 약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

글쓴이
조경구(한국고전번역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