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국조오례의』 서문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1. 5. 5. 20:37

고전의 향기 - 백 예순 네 번째 이야기

오례(五禮)가 국가 이념의 중심이 되다 -『국조오례의』 서문

                                                                          2011. 5. 2. (월)

  『국조오례의』는 신숙주(申叔舟)ㆍ정척(鄭陟)ㆍ강희맹(姜希孟) 등이 왕명을 받아 오례(五禮)의 예법과 절차 등을 그림을 곁들여 1474년(성종 5)에 편찬한 책이다. 국가의 기본예식인 오례 즉, 길례(吉禮)ㆍ가례(嘉禮)ㆍ빈례(賓禮)ㆍ군례(軍禮)ㆍ흉례(凶禮)를 규정하고 있으며, 『경국대전』과 더불어 국가의 기본 예전(禮典)이 되었다. 그 구성은 예종별(禮種別)로 되어 있는데, 흉례가 91개조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다음으로는 길례가 56개조, 가례가 50개조로 많고, 군례와 빈례는 각각 7개조와 6개조로 소략하다. 길례에는 사직ㆍ종묘와 각 전(殿) 및 산천 등 국가에서 제사를 드리는 의식 등을 기록하였으며, 가례에는 조서(詔書) 및 칙서(勅書)를 받는 의식, 조참(朝參)과 상참(常參), 납비(納妃)ㆍ책비(冊妃) 등 왕실의 혼례 절차, 세자의 관례, 책례, 입학례, 양로연(養老宴)에 관한 내용 등을 기록하고 있다. 빈례에는 중국 사신 및 일본ㆍ유구국 등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의식 등을 기록했으며, 군례에는 친사(親射)ㆍ열병(閱兵)ㆍ강무(講武)에 관한 군사 의식을 기록하였다. 흉례에는 왕의 국장(國葬)을 비롯하여 왕실의 상장례 의식과 절차를 기록하고 있다.

  조선은 건국 후 유교이념을 국시(國是)로 하고 이를 체계화한 예서 편찬에 주력하였다. 1394년 정도전(鄭道傳)이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제정하면서 국가의 이념을 개설적으로 밝혔으나, 구체적인 내용에 부족한 점이 많아 새로운 예제(禮制)의 제정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에 세종이 처음으로 허조(許稠) 등에게 오례에 관한 것을 저작하도록 명했는데 완성되지 못하였고, 다시 세조가 강희맹(姜希孟 1424~1483) 등에게 명하여 편찬하게 했으나 탈고하지 못하다가 성종 대인 1474년에 마침내 『국조오례의』가 완성된 것이다. 이 책을 기본으로 하여 1744년(영조 20)에는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가, 1751년(영조 27)에는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 등이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에 규정된 각종 의례는 대부분 궁중에서 사용하기 위한 것이어서 사대부나 서인(庶人)들을 위한 규정이 많지 않으며, 또 그 내용도 형식적인 것이 많아서 민간에서는 널리 시행되지 못하였다는 한계점도 지니고 있다. 그렇지만 『국조오례의』는 조선시대에 유교적 정치이념을 바탕으로, 예교(禮敎)질서가 정립되어 갔음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써 그 가치가 크다. 강희맹이 쓴 서문에는 『국조오례의』가 편찬된 과정과 함께 오례를 유교 이념의 중심으로 삼아 국가체제를 정비하고자 한 조선사회의 국정 방향이 잘 나타나 있다.

 

  「공손히 생각하여 보건대, 우리 태조 강헌대왕께서는 큰 창업을 빛내어 여시고, 규범을 만세에 드리우셨다. 태종 공정대왕께서는 기업(基業)을 이어받아서 더욱 전왕의 공렬(功烈)을 빛내었으나, 때가 바야흐로 혼미한지라 그 제작에 겸양하여 겨를이 없었다. 우리 세종 장헌대왕에 이르러서는 문치(文治)가 태평에 도달하여, 마침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맞이하였다. 이에 예조판서 신 허조에게 명하여 여러 제사의 차례 및 길례 의식을 상세히 정하도록 하고, 또 집현전 유신들에게 명하여 오례 의식을 상세히 정하도록 하셨다.[恭惟我太祖康獻大王 光啓鴻業 垂範萬世 太宗恭定大王 丕承基緖 益光前烈 而時方草昧 其於制作 謙讓未遑 及我世宗莊憲大王 文致太平 適當千一之期 乃命禮曹判書臣許稠 詳定諸祀序例 及吉禮儀 又命集賢殿儒臣 詳定五禮儀]」

  「모두 두씨(杜氏)의 『통전(通典)』1)을 모방하고, 두루 여러 서적에서 채집하였으며, 겸하여 중국조정의 『제사직장(諸司職掌)』ㆍ『홍무예제(洪武禮制)』2)와 우리나라의 『고금상정례(古今詳定禮)』3) 등의 책을 사용하여 참작해서 빼고 더하였다. 성심으로부터 재가를 받았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고 빈천(賓天 : 임금의 사망)함이 이에 닥쳤으니, 아 애통하도다. 생각건대, 우리 세조 혜장대왕께서는 화가위국(化家爲國)하여 법을 세우고 기강을 펴서 빛나도록 새롭게 하셨는데, 오히려 조문이 크고 번거로워[浩繁] 앞뒤가 어그러질까 염려하여 감히 의거하여 법으로 삼지 못하셨다. 이에 조정의 신하들에게 명하여 『경국대전』을 나누어 편찬하게 하시고 또 세종조에 제정했던 오례의에 의거하여 옛것을 상고하고 지금의 것을 실증하게 하셨다. 일에 시행하여 무방할 만하기를 기약하며 이름하여 말하기를 “오례의”라 하고 「예전」의 끝에 붙이셨다.[悉倣杜氏通典 旁采羣書 兼用中朝諸司職掌 洪武禮制 東國今古詳定禮等書 叅酌損益 裁自聖心 未及施用 而賓天斯迫 嗚呼痛哉 惟我世祖惠莊大王 化家爲國 立經陳紀 煥然一新 猶慮條章浩繁 前後乖舛 未敢據以爲法 爰命朝臣 分撰經國大典 且依世宗朝所定五禮儀 考古證今 期可以施於事而無妨 名曰五禮儀 附于禮典之末]」

 

1) 중국 당(唐)나라 두우(杜宇)가 지은 것으로 중국 고대부터 당 현종(玄宗)까지의 제도를 8부문으로 나누어 엮은 책이다. 특히 『통전』은 200권 중 절반이 예제(禮制)에 관한 것이고 항목도 길례ㆍ가례ㆍ빈례ㆍ군례ㆍ흉례로 나누고 거기에 관련되는 세부항목이 배열되어 있어 상고(詳考)하기에 편리하므로『오례의』편찬 시에 크게 중시되었다.
2) 명나라 개국 이래의 예제(禮制)를 일신하기 위하여 각종 사전(祀典)을 상고하여 제작한 것으로, 홍무(洪武)연간에 간행ㆍ반포되었다. 진하례의(進賀禮儀)ㆍ출사례의(出使禮儀)ㆍ서압체식(署押體式)ㆍ관리봉급(官吏俸給) 등 11개 항목으로 분류하여 사례를 적고 있다.
3) 고려 인종 대 최윤의(崔允儀)가 만든 책으로, 고려 초기 이래의 유교경전에 대한 이해와, 고려왕실과 문반관료와의 정치권력구조 상황이 만들어냈다. 이후 『고려사』 예지 편찬의 기초 자료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주례적 요소에 바탕을 두고 당에서 정리된 오례의 개념, 즉 왕실중심의 정치적 질서를 중시하는 예제(禮制)를 추구했다.

 

  「신 희맹과 이조판서 신 성임이 실제로 이 명령을 받아서, 글을 아직 탈고하지 못했는데 문득 예척(禮陟 : 승하)하셨다. 그 뒤 예종 양도대왕 및 우리 주상전하께서 선왕의 뜻을 추념하여 이 사업을 더하여 완수하셨다...(중략)... 갑오년(1474) 여름이 지나 비로소 능히 책이 완성되어 본뜨고 인쇄하여 장차 발행하였다. 신이 가만히 살펴보건대, 예를 기술한 것이 3천 3백 가지의 글이 있기는 하나 그 요점은 길ㆍ흉ㆍ군ㆍ빈ㆍ가(吉凶軍賓嘉)라고 말하는 다섯 가지에 불과할 뿐이다. 제사로 말미암아 길례가 있고, 사상(死喪)으로 말미암아 흉례가 있으며, 대비와 방어로 말미암아 군례가 있고, 교제와 관혼의 중요함으로 말미암아 빈례와 가례가 있다. 예는 다섯 가지에 갖춰져서 사람 도리의 처음과 끝이 구비되었으니, 천하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자는 이를 버리면 할 수가 없다.[臣希孟與吏曹判書臣成任 實膺是命 書未脫稁 奄爾禮陟 厥後睿宗襄悼大王 及我主上殿下 追念先志 俾完斯事 ... 越甲午夏 始克成書 摸印將行 臣竊觀 記禮者有三千三百之文 然其要則不過曰吉凶軍賓嘉五者而已 由祭祀 有吉之禮 由死喪 有凶之禮 由備禦 有軍之禮 由交際冠婚之重 有賓與嘉之禮 禮備乎五者 而人道之始終具焉 欲爲天下國家者 舍是無以爲也]」

 

 ▶ 국조오례의 중 길례 _ 제사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다 

 

「지금 이 책은 다시 역대 성인의 췌마(揣摩 : 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림)의 공을 거쳐 그 정밀함이 지극하다. 위로는 조정으로부터 아래로는 사대부와 서인에 이르기까지 각각 정해진 예가 있어 서로 넘지 않으며, 천경지위(天經地緯 : 영원히 변하지 않을 떳떳한 이치)와 곡례(曲禮 : 의식이나 행사에서의 자세한 예절)의 소소한 예절이 찬란하고 문란하지 않으니, 실로 우리 동방 만세의 훌륭한 책이다. 아 예악은 반드시 백년을 기다린 뒤에야 흥한다. 그러므로 주나라는 후직(后稷)이 기업(基業)을 창시한 것으로부터 문ㆍ무왕을 거쳐 수백 년이 지나 성왕에 이르러서야 크게 갖추어졌다. 우리 조정은 태조께서 개창하신 이래로부터 열성(列聖 : 代代의 임금)들이 서로 받들어서 깊은 인정(仁政)과 두터운 은택을 쌓은 지가 이미 오래이니, 어찌 형통(亨通)4)하고 아름다운 모임이 바로 오늘에 있지 아니하겠으며 세상을 다스리는 제작의 성함이 성상(聖上)을 기다림이 있지 아니하였겠는가. 그러한 즉 이 책의 시행이 마땅히 주나라의 『의례』 한 책과 더불어서 아울러 불후(不朽)로 전해질 것은 의심할 바 없을 것이다.

  성화(成化) 10년(1474) 여름, 5월 상한(上澣: 10일) 추충정난 익대순성 명량좌리공신 숭정대부 행 병조판서 겸 지경연 춘추관사 진산군 신 강희맹은 삼가 서문을 쓴다.[今是書更歷數聖人揣摩之功 極其精密上自朝廷 下至士庶 各有定禮 不相踰越 天經地緯 曲禮小節 粲然不紊 實吾東方萬世之令典也 嗚呼禮樂必待百年而後興 故周自后稷肇基 歷文武數百年 迄于成王而大備 則我朝自太祖開創以來 列聖相承深仁厚澤 積累也旣久 豈非亨嘉之會 正在今日 而經世制作之盛 有待於聖上歟 然則是書之行當與周家儀禮一書 並傳不朽也 無疑矣 成化十年夏 五月上澣 推忠定難翊戴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 行兵曹判書 兼知經筵 春秋館事 晉山君 臣姜希孟謹序]

 

4) 『소학』 「소학제사(小學題辭)」에 "원(元)은 시절에 있어서는 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인(仁)이 되며, 형(亨)은 시절에 있어서는 여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예(禮)가 되며, 이(利)는 시절에 있어서는 가을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의(義)가 되며, 정(貞)은 시절에 있어서는 겨울이 되고 사람에 있어서는 지(智)가 된다.[元於時爲春 於人爲仁 亨於時爲夏 於人爲禮 利於時爲秋 於人爲義 貞於時爲冬 於人爲智]"는 구절이 나온다.

 

   

글쓴이 /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 주요저서
-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 일지사, 2000
- 하룻밤에 읽는 조선사, 램덤하우스, 2003
- 조선 최고의 명저들, 휴머니스트, 2006
- 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 책과 함께, 2007
- 이지함 평전, 글항아리, 2008
-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새문사, 2009 등

'놀라운 공부 > 옛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한시모음  (0) 2011.05.12
[스크랩] 한시모음  (0) 2011.05.12
문득 나를 돌아보다  (0) 2011.05.05
차선(次善)에 머물지 말자  (0) 2011.04.07
퇴계(退溪)와 고봉(高峯),  (0) 2011.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