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신재(愼齋) 주세붕이 흥덕(興德)이라는 지방의 수령으로 부임하는 벗에게 준 송서(送序)이다. 옛날 선비들은 친한 이를 전송할 때면 마음을 담은 글을 지어 노자 삼아 주었다. 그런 글을 송서라고 한다. 지식인 노릇 제대로 하는 사람들의 멋이라고 할 것이다.
지방 고을의 수령은 조정의 중요한 직책에 비하면 하찮은 벼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실상 그 관내에서는 거의 무소불위의 막강한 권한을 휘두를 수 있는 자리이다. 법령을 가지고 손쉽게 고을 백성을 제어할 수 있는데다, 갖은 핑계를 대어 고혈을 쥐어짜도 마땅히 견제하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이른바 ‘갑(甲)질’이 가능한 자리였다.
그는 벗이 이런 권력의 유혹에 빠질까 염려하여, 자신의 수령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하였다. 내 가정을 다스릴 때의 마음으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내 어버이, 내 아내, 내 자식이 그런 환경에 처했을 때 어떤 마음일지를 고려한다면, 절로 훌륭한 치적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말조차도 상투적일 수 있겠지만, 도연명(陶淵明)의 말을 인용하는 대목에서 그 충고의 진정성이 물씬 느껴진다.
“이 자도 남의 소중한 자식이니, 함부로 대하지 말고 잘 대해주거라.”
도연명이 어느 날 자신이 데리고 있던 종을 아들이 있는 집으로 보내면서 당부한 말이다.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종에게까지 이런 배려를 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의 실천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갑질’의 원인은 대체로 ‘갑’으로서의 지위가 오래도록 지속될 것으로 생각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음(陰)이 양(陽)이 되고 양이 음이 되듯이 만물은 늘 순환한다는 것이 이치이다. 오행(五行)의 상극(相克)은 서로서로 물려 있다. 금(金)이 목(木)을 이기지만, 목이 낳은 화(火)가 또 그 금을 이긴다. 당장은 ‘갑’일 수 있어도, 그 ‘을’이 자신의 ‘갑’의 ‘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사마귀가 매미를 잡아먹으려고 노리고 있을 때, 그 사마귀의 뒤에는 참새가 노리고 있고, 또 그 참새의 뒤에는 사냥꾼이 노리고 있다는 고사가 있지 않은가?
‘‘갑’은 자신이 강하다고 생각할 것이고, 마치 정글의 사자나 된 듯이 그 강함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정 강한 자는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부드러운 사람이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사람은 강자가 아니라 소인배이다.
고금을 막론하고 이른바 ‘갑(甲)질’을 하는 부류는 늘 중간치들이다. 권력이든 지위든 정점에 있는 사람은 차라리 여유가 있어서 관대한 반면, 그 아래 있는 사람들이 늘 각박하게 굴고, 권세를 부리려고 한다. 완장을 차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는 것이다.
옛날 중국에 한 마부가 있었다. 그는 재상인 안영(晏嬰)의 전속 마부로서, 늘 기세가 등등하였다.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별안간 이혼을 요구했다. 까닭을 묻자 그의 아내는 말했다.
“재상께서는 6척도 안 되는 작은 몸으로 존귀한 지위에 올라온 천하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십니다. 그런데도 늘 겸손하십니다. 그에 비해 당신은 8척 거구의 몸으로 마부 노릇이나 하면서, 어찌 그리 오만한 것입니까?”
그날 이후로 마부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최근에 마침 몇몇 경영자와 기업의 어처구니없는 행태 때문에 이른바 ‘갑질’이 사회 문제로 부각되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이를 근절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그런 ‘갑질’이 어디 기업에서만 있는 것이던가? 예나 지금이나 등잔 밑은 늘 어두운 법이다.
5월은 가정의 달이다. 그중에는 어버이날도 있다. ‘을’도 자신의 가정에서는 자랑스러운 어버이들이다. ‘갑’의 지위에 있는 자들이 자신의 어버이를 위해주는 마음으로, 다른 어버이의 눈물도 닦아 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