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스크랩] 황제내경/상한류서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7. 25. 19:57

조선시대에는 상한을 어떻게 보았는가 혹 자료가 나올까 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 傷寒을 검색 해보았지요

 

아래 보는 것과 같이 초기에는 많이 나오더니 후기에는 거의 언급이 없네요.

 

상한(傷寒)

 

태조(0) | 정종(0) | 태종(0) |
세종(4) | 문종(0) | 단종(0) | 세조(4) | 예종(0) | 성종(2) | 연산군(2) | 중종(11) | 인종(0) | 명종(1) | 선조(4) | 선조수정(0) | 광해군일기(중초본)(0) | 광해군일기(정초본)(0) | 인조(1) | 효종(0) | 현종(0) | 현종개수(0) | 숙종(1) | 숙종보궐정오(0) | 경종(0) | 경종수정(0) | 영조(0) | 정조(0) | 순조(0) | 헌종(0) | 철종(0) | 고종(0) | 순종(0) | 순종부록(0)

 

 몇가지 자료를 가져 왔는데...

 

세종 64권, 16년(1434 갑인 / 명 선덕(宣德) 9년) 6월 5일(경술) 2번째기사
외방의 유행·전염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방문으로 써서 주지시키도록 하다

 

 

경험양방(經驗良方)으로 상한역려(傷寒疫癘)에 한 자리[同床]에 거처하여도 서로 감염되지 않는 방문은, 매일 이른 아침에 세수하고 참기름[眞香油]을 코 안에 바르고, 누울 때에도 바른다. 창졸간(倉卒間)이라 약이 없으면, 곧 종이 심지를 말아서 콧구멍에 넣어 재채기를 하는 것이 좋다.”

고 하였다.

 

감염을 우려 하여 그 예방법이 특이 합니다.

장중경 집안에서 상한으로 많이 죽었던 것으로 보아 열성전염병으로 보는 사람도 있던데(장티푸스로...)

이 사료를 보아서는 수인성 질환인 장티푸스는 아닌것 같고

참기름을 코안에 바른다니까, 호흡기감염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선조 9권, 8년(1575 을해 / 명 만력(萬曆) 3년) 2월 29일(무술) 1번째기사
강원 감사가 평해 군수 차식이 상한에 걸려 죽었다고 치계하다

 

강원감사 차식이 상한으로 죽었다는 사료가 있지만  상한이 집단 발병하여 많이 죽었다는 사료는 못 보았어요.

 

 

연산 21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1월 4일(병오) 3번째기사
대사헌 구치곤 등이 관직 제수를 신중히 할 것, 경연을 열 것 등을 아뢰다

,,,

,,,

 

 
하니, 전교하기를,
근일 감기 때문에 경연에 나가지 못하였다. 또 대상제(大祥祭) 때 목욕하고 나서 상한(傷寒) 때문에 오래도록 폐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근일 조리한 후 조강(朝講)에 나가겠다.”하였다.

 

구치곤 등이 다시 김효강·강선·신계원(愼繼源) 등 및 이거·이전 등의 일에 대하여 논란하였는데, 들어 주지 않았다.

 

。” 傳曰: “近因感冒, 未御經筵。 且於大祥祭, 沐浴傷寒, 以致久廢。 然近日當調理, 御朝講。”

致崐等更論金孝江姜善愼繼源等及李琚李詮事, 不得聽

 

그리고 위 사료 처럼  감기(感冒)와 구별 한 것으로 보아

일반감기는 같지 않고 더 독한 것 즉 독감(인플루엔자) 정도 되지 않나 생각 됩니다.

 

선조 1권, 즉위년(1567 정묘 / 명 융경(隆慶) 1년) 11월 22일(계유) 3번째기사
나이 많은 현인에게 날씨가 따뜻해진 연후에 올라오라는 유지

 

또 유지(有旨)가 있었다.
“내가 어진 선비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하루가 급하다마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이렇게 날씨가 추워 혹시라도 한기에 병이 나서 길을 못 떠나게 될까 염려된다. 그대는 지속에 구애받지 말고 날씨가 따뜻해진 다음 천천히 올라오라.”

○又有有旨曰: “予欲見賢士之心, 一日急於一日。 年高之人, 如此隆寒, 或慮傷寒, 不克就途。 爾其勿拘遲速, 待時日溫和, 從容上來。”

 

 

인조 50권, 27년(1649 기축 / 청 순치(順治) 6년) 5월 1일(기미) 2번째기사
약방 도제조 김자점이 병세의 차도를 문안하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자점(金自點) 등이 아뢰기를,
“옥후(玉候)의 조섭(調攝)이 전보다 어떠하십니까?”
하니, 답하기를,
“요즈음 상한(傷寒)을 얻었으나 대단하지는 않다.”
하였다. 약방이 입진(入診)한 뒤에 아뢰기를,
“성후(聖候)는 감풍(感風)의 증세이니 약을 지어 바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藥房都提調金自點等啓曰: “玉候調攝, 比前如何?” 答曰: “近得傷寒, 而不至大段矣。” 藥房入診後啓曰: “聖候乃是感風之證, 請劑藥以進。” 上從之。

 

사람이 죽을 정도로 심한 병처럼 올라 있는 것도 있지만, 별로 심각하게 보지는 않은 경우가 많아요.

 

중종 73권, 27년(1532 임진 / 명 가정(嘉靖) 11년) 10월 28일(임인) 2번째기사
세자가 시약하게 하다

 

“상께서 미령하시기 때문에 세자께서 시약(視藥)해야 합니다. 다만 날씨가 차가와서 감기가 들까 두려우니, 대내에 가까운 따뜻한 곳에 항상 거처하면서 시약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알았다고 전교하였다.
【의원(醫員)이, “오후(午後)부터 열증(熱症)이 있기 때문에 천금루로탕(千金漏蘆湯)을 사용했고, 두 입술이 바짝 말라서 터졌기 때문에 용석산(龍石散)을 썼습니다.” 했다. 그러나 전에 상이 미령(未寧)할 때는 약뿐만 아니라 한번 마시고 한번 먹는 것까지도 아랫사람으로 하여금 모두 알게 했기 때문에 예전 사서(史書)에는 쓰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제조 장순손김안로 등이 비밀에 붙이고, “대왕(大王)은 왕후(王后)와 다르다.” 하면서 미령한 뒤로는 시끄럽게 전파하지 못하게 하고 의원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사관(史官)도 들을 수가 없었다.】

  

○內醫院提調張順孫等啓曰: “自上未寧, 故世子視藥, 但日氣寒冷, 恐有傷寒。 請令常處於近內溫處, 而視藥何如?” 傳曰: “知道。”【醫云自午後有熱證, 故用千金漏蘆湯, 兩唇乾燥折裂, 故用龍石散。 然在前上體未寧之時, 則非徒藥餌也, 一飮、一食, 亦使下人共知, 故前史無不書之。 今則提調張順孫金安老等秘之曰: “大王異於王后, 未寧之後, 不可喧播。” 而使醫莫敢傳說, 史官不得聞。】

 

암튼 한가하기에 찾아 본 것입니다.

장중경 친척의 7/10이 수년안에 죽을 정도의 전염볌으로 본 것은 아닌 것 같더라구요.

전염병은 여역(癘疫)으로 다르게 기록이 나오니까요.

 

 

연산 22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3월 17일(기미) 2번째기사
영안도 감사 여자신이 삼수·갑산의 전염병 창궐을 급보하다

 

영안도(永安道) 1444) 감사 여자신(呂自新)이 급보로 아뢰기를,
삼수(三水)·갑산(甲山) 등 고을에 남녀 노약이 여역(癘疫)1445) 으로 죽은 자 3백 50여 명이나 되오니, 청컨대 의원과 약을 보내어 구호하소서.”
하니, 상이 하유하기를,
“지금 경의 계보(啓報)로 하여 여역으로 사망하는 자가 많음을 알게 되니 매우 측연(惻然)하도다. 곧 의원 두 사람을 보내어 약을 가지고 가서 구호하게 하겠으니, 경 역시 의원의 근로 태만을 살피고 마음을 다하여 치료하여, 구원하여 살린 인구를 기록하여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永安道監司呂自新馳啓: “三水甲山等官男女老弱, 以癘疫死者, 凡三百五十餘人。 請遣醫藥救之。” 上諭之曰: “今因卿啓, 知人物被癘疫死者多, 予甚惻然。 卽遣醫二人, 齎藥往救, 卿亦察醫勤慢, 盡心治療。 其所活人口, 開錄以啓。”

 

 

역대 중국 의학을 통해서 보면

상한론이 변증법적인 진단 치료원칙을 세워 임상 의학의 발전에 기초를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의학의 일부 한 지류라 볼수 있고, 우리나라 조선시대 초반에는 그 기록이 있으나

중후반에는 거의 없는 것이 특히 동의보감이 나온 이후에는 거의 없는 데

상한이 의학에서 멀어진 것인지  병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지 모르겠네요.

 

상한을 다룬 책으로 보이는 상한류서(傷寒類書)에 대한 기록이 아래 처럼

조선초기에 국한 되는 것 같고

이에 반해 황제내경 소문은 고루 나오고 있어요.

 

참 할일 없다고요?

ㅎㅎ 

역사를 더틈어 보아 상한론이 우리나라 의학의 어느 위치에 있는 가를 함 본거지요.

 

 

상한류서(傷寒類書)

 

국역 5건

 
태조(0) | 정종(0) | 태종(0) | 세종(2) | 문종(0) | 단종(0) | 세조(2) | 예종(0) | 성종(1) | 연산군(0) | 중종(0) | 인종(0) | 명종(0) | 선조(0) | 선조수정(0) | 광해군일기(중초본)(0) | 광해군일기(정초본)(0) | 인조(0) | 효종(0) | 현종(0) | 현종개수(0) | 숙종(0) | 숙종보궐정오(0) | 경종(0) | 경종수정(0) | 영조(0) | 정조(0) | 순조(0) | 헌종(0) | 철종(0) | 고종(0) | 순종(0) | 순종부록(0)

 

 

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1월 2일(을묘) 4번째기사
예조가 의원 취재 때 강할 의서에 대해서 아뢰다

 

예조(禮曹)에서 아뢰기를,
“새로 정한 의원(醫員) 취재(取才) 때의 강(講)할 의서(醫書)는, 정(正)·종(從) 3품은 《소문(素門)》을 강(講)하고, 정(正)·종(從) 4품은 《장자화방(張子和方)》을, 정·종5품은 《소아약증(小兒藥證)》·《직결창진집(直訣瘡疹集)》을, 정·종6품은 《상한유서(傷寒類書)》·《외과정요(外科精要)》를, 정·종7품은 《부인대전(婦人大全)》·《산서(産書)》를, 정·종8품은 《직지방(直指方)》을, 정·종9품 이하 생도(生徒)에 이르기까지는 《동인경(銅人經)》을 강하게 하고, 오직 《대전(大全)》·《본초(本草)》·《맥경(脈經)》만은 모두 강하게 하소서.”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32권 1장 B면

 

취재(取才) 

조선시대에 과거와는 별도로 하급관리나 서리를 뽑기 위해 실시하던 특별채용시험.

과거를 치르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었으나,

과거보다 격이 낮아서 중요한 자리로 승진하기는 어려웠다. -천거

 

 

여기서 보면  내경 소문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서야 익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의원의 제일 고위직을 취재 할 때 강(講)한 것으로 보면......

 

 

 素問

 

국역 12건
 
태조(0) | 정종(0) | 태종(1) | 세종(1) | 문종(0) | 단종(1) | 세조(3) | 예종(0) | 성종(1) | 연산군(0) | 중종(0) | 인종(0) | 명종(0) | 선조(0) | 선조수정(0) | 광해군일기(중초본)(0) | 광해군일기(정초본)(0) | 인조(0) | 효종(0) | 현종(0) | 현종개수(0) | 숙종(0) | 숙종보궐정오(0) | 경종(0) | 경종수정(0) | 영조(1) | 정조(3) | 순조(0) | 헌종(0) | 철종(0) | 고종(1) | 순종(0) | 순종부록(0)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8월 7일(기미) 2번째기사
사관 김상직에게 충주 사고의 책을 바치도록 명하다
 
 

 

사관(史官) 김상직(金尙直)에게 명하여 충주(忠州) 사고(史庫)의 서적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 《소아소씨병원후론(小兒巢氏病源候論)》·《대광익회옥편(大廣益會玉篇)》·《귀곡자(鬼谷子)》·《오장육부도(五臟六腑圖)》·《신조보동비요(新彫保童秘要)》·《광제방(廣濟方)》·진랑중(陳郞中) 《약명시(藥名詩)》·《신농본초도(神農本草圖)》·《본초요괄(本草要括)》·《오음지장도(五音指掌圖)》·《광운(廣韻)》·《경전석문(經典釋文)》·《국어(國語)》·《이아(爾雅)》·《백호통(白虎通)》·유향(劉向) 《설원(說苑)》·《산해경(山海經)》·왕숙화(王叔和) 《맥결구의변오(脈訣口義辯誤)》·《전정록(前定錄)》·황제소문(黃帝素問)》·《무성왕묘찬(武成王廟讚)》·《병요(兵要)》·《전후한저명론(前後漢著明論)》·《계원필경(桂苑筆耕)》·《전한서(前漢書)》·《후한서(後漢書)》·《문수(文粹)》·《문선(文選)》·《고려역대사적(高麗歷代事迹)》·《신당서(新唐書)》·《신비집(神祕集)》·《책부원귀(冊府元龜)》 등의 책이었다. 또 명하였다.

 

 

 

의학에서 공부할 게 참으로 많다는 게

조선시대 의자들이 공부하고 참고  했던책이 저리도 많으니.....  

 

출처 : 자연처럼 자연스럽게
글쓴이 : 자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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