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는 상한을 어떻게 보았는가 혹 자료가 나올까 하여
조선왕조실록에서 傷寒을 검색 해보았지요
아래 보는 것과 같이 초기에는 많이 나오더니 후기에는 거의 언급이 없네요.
상한(傷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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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가지 자료를 가져 왔는데...
세종 64권, 16년(1434 갑인 / 명 선덕(宣德) 9년) 6월 5일(경술) 2번째기사
외방의 유행·전염병을 치료하는 방법을 방문으로 써서 주지시키도록 하다
경험양방(經驗良方)으로 상한역려(傷寒疫癘)에 한 자리[同床]에 거처하여도 서로 감염되지 않는 방문은, 매일 이른 아침에 세수하고 참기름[眞香油]을 코 안에 바르고, 누울 때에도 바른다. 창졸간(倉卒間)이라 약이 없으면, 곧 종이 심지를 말아서 콧구멍에 넣어 재채기를 하는 것이 좋다.”
감염을 우려 하여 그 예방법이 특이 합니다.
장중경 집안에서 상한으로 많이 죽었던 것으로 보아 열성전염병으로 보는 사람도 있던데(장티푸스로...)
이 사료를 보아서는 수인성 질환인 장티푸스는 아닌것 같고
참기름을 코안에 바른다니까, 호흡기감염으로 보아야 하겠지요.
선조 9권, 8년(1575 을해 / 명 만력(萬曆) 3년) 2월 29일(무술) 1번째기사
강원 감사가 평해 군수 차식이 상한에 걸려 죽었다고 치계하다
강원감사 차식이 상한으로 죽었다는 사료가 있지만 상한이 집단 발병하여 많이 죽었다는 사료는 못 보았어요.
연산 21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1월 4일(병오) 3번째기사
대사헌 구치곤 등이 관직 제수를 신중히 할 것, 경연을 열 것 등을 아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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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곤 등이 다시 김효강·강선·신계원(愼繼源) 등 및 이거·이전 등의 일에 대하여 논란하였는데, 들어 주지 않았다.
。” 傳曰: “近因感冒, 未御經筵。 且於大祥祭, 沐浴傷寒, 以致久廢。 然近日當調理, 御朝講。”
致崐等更論金孝江、姜善、愼繼源等及李琚、李詮事, 不得聽
그리고 위 사료 처럼 감기(感冒)와 구별 한 것으로 보아
일반감기는 같지 않고 더 독한 것 즉 독감(인플루엔자) 정도 되지 않나 생각 됩니다.
선조 1권, 즉위년(1567 정묘 / 명 융경(隆慶) 1년) 11월 22일(계유) 3번째기사 또 유지(有旨)가 있었다. “내가 어진 선비를 만나고 싶은 생각이 하루가 급하다마는 나이가 많은 사람이 이렇게 날씨가 추워 혹시라도 한기에 병이 나서 길을 못 떠나게 될까 염려된다. 그대는 지속에 구애받지 말고 날씨가 따뜻해진 다음 천천히 올라오라.” | ||||
○又有有旨曰: “予欲見賢士之心, 一日急於一日。 年高之人, 如此隆寒, 或慮傷寒, 不克就途。 爾其勿拘遲速, 待時日溫和, 從容上來。”
인조 50권, 27년(1649 기축 / 청 순치(順治) 6년) 5월 1일(기미) 2번째기사
약방 도제조 김자점이 병세의 차도를 문안하다
약방 도제조(藥房都提調) 김자점(金自點) 등이 아뢰기를,
○藥房都提調金自點等啓曰: “玉候調攝, 比前如何?” 答曰: “近得傷寒, 而不至大段矣。” 藥房入診後啓曰: “聖候乃是感風之證, 請劑藥以進。” 上從之。
사람이 죽을 정도로 심한 병처럼 올라 있는 것도 있지만, 별로 심각하게 보지는 않은 경우가 많아요.
중종 73권, 27년(1532 임진 / 명 가정(嘉靖) 11년) 10월 28일(임인) 2번째기사
세자가 시약하게 하다
암튼 한가하기에 찾아 본 것입니다.
장중경 친척의 7/10이 수년안에 죽을 정도의 전염볌으로 본 것은 아닌 것 같더라구요.
전염병은 여역(癘疫)으로 다르게 기록이 나오니까요.
연산 22권, 3년(1497 정사 / 명 홍치(弘治) 10년) 3월 17일(기미) 2번째기사
영안도 감사 여자신이 삼수·갑산의 전염병 창궐을 급보하다
역대 중국 의학을 통해서 보면
상한론이 변증법적인 진단 치료원칙을 세워 임상 의학의 발전에 기초를 마련했다고는 하지만
수많은 의학의 일부 한 지류라 볼수 있고, 우리나라 조선시대 초반에는 그 기록이 있으나
중후반에는 거의 없는 것이 특히 동의보감이 나온 이후에는 거의 없는 데
상한이 의학에서 멀어진 것인지 병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 것이지 모르겠네요.
상한을 다룬 책으로 보이는 상한류서(傷寒類書)에 대한 기록이 아래 처럼
조선초기에 국한 되는 것 같고
이에 반해 황제내경 소문은 고루 나오고 있어요.
참 할일 없다고요?
ㅎㅎ
역사를 더틈어 보아 상한론이 우리나라 의학의 어느 위치에 있는 가를 함 본거지요.
상한류서(傷寒類書)
국역 5건
세조 32권, 10년(1464 갑신 / 명 천순(天順) 8년) 1월 2일(을묘) 4번째기사
예조가 의원 취재 때 강할 의서에 대해서 아뢰다
【 태백산사고본】 11책 32권 1장 B면
취재(取才)
조선시대에 과거와는 별도로 하급관리나 서리를 뽑기 위해 실시하던 특별채용시험.
과거를 치르지 않고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었으나,
과거보다 격이 낮아서 중요한 자리로 승진하기는 어려웠다. -천거
여기서 보면 내경 소문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서야 익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의원의 제일 고위직을 취재 할 때 강(講)한 것으로 보면......
素問
국역 12건
태종 24권, 12년(1412 임진 / 명 영락(永樂) 10년) 8월 7일(기미) 2번째기사
사관 김상직에게 충주 사고의 책을 바치도록 명하다
의학에서 공부할 게 참으로 많다는 게
조선시대 의자들이 공부하고 참고 했던책이 저리도 많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