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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李退溪先生(이퇴계선생)의 學問(학문)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9. 2. 18:11

李退溪先生(이퇴계선생)의 學問(학문) 


                           一岡(일강) 金振圭(김진규)

지나간 음12월초 8일이 우리나라가 輩出(배출)한 名賢(명현) 退溪先生(퇴계선생)님의 忌日(기일)이였다.
文化部(문화부)에서도 이달을 退溪先生(퇴계선생)님을 追慕(추모)하며 높은 學德(학덕)을 再照明(재조명) 해보는 달로 정하여 發表(발표)하였다.
退溪(퇴계) 李滉(이황)선생은 조선시대의 대학자이며, 本貫(본관)은 眞城(진성)인데 禮安(예안) 출신이다.

12세때 숙부 李 (이우)로부터 학문을 배우다가 1523년(중종 18년) 성균관에 입학, 28세에 진사가 되고 34세에 式年文科(식년문과)에 乙科(을과)로 급제하였다.
후일 그는 朱子(주자)의 一元的(일원적) 理氣二元論(이기이원론)을 발전시켜 당시의 학계에 큰 영향을 던졌다.

1. 退溪先生님의 出生
先生의 諱(휘)는 滉(물깊고 넓을 황)字요, 雅號는 退溪陶山翁(퇴계도산옹) 退陶(퇴도) 陶翁(도옹)으로 불리어졌고 諡號(시호)는 文純公(문순공)이시다.

先生의 어머님이신 정경부인 박씨는 孔子(공자)가 房(방)으로 들어오는 胎夢(태몽)을 꾸고 선생을 낳았다고 해서 뒷날 그집 문을 聖臨門(성임문)이라 칭하며, 先生의 胎室(태실)을 지금까지 文化財(문화재)로 指定保存(지정보존)하고 있다.

先生은 朝鮮朝(조선조) 10대왕인 燕山君(연산군) 7年 음11월25일에 탄생하시여 宣祖(선조) 3년 음12월 8일에 돌아가셨으니 그동안 中宗(중종), 仁宗(인종), 明宗(명종), 宣祖(선조)의 五代(5대)임금을 거치셨다.

退溪先生(퇴계선생)은 朝鮮(조선)의 朱子(주자)요, 東方(동방)에서 탄생한 百世(백세)의 스승이시다. 先生(선생)의 學問(학문)하심은 남을 받아들임이 넓고 깊으며, 두텁게 배우고, 精巧(정교)하고, 緻密(치밀)하게 생각하시어 마침내 德(덕)과 知慧(지혜)를 함께 닦으시고 그 가르침이 넓고 멀리 미치었다.

따라서 모든 儒家(유가)를 集大成(집대성)하고 위로는 끊어져가는 학문의 줄을 잇고, 아래로는 뒷 사람에게 門(문)을 열어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이름은 온 세상에 널리 알려져 朝鮮(조선)의 큰 哲人(철인)이 되셨으니 우리의 자랑이요 우리나라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2. 先生의 一生동안 主要한 事項
선생님의 문집이나 退溪先生硏究(퇴계선생연구)에 관한 文獻(문헌)의 年譜(연보)를 통하여 主要한것만 살펴본다. 燕山君(연산군)7년 辛酉年(신유년) 11월25일 己亥日辰時(기해일진시) 예안현 온계리 자택에서 탄생하였다.
선생의 나이 2살 때 아버지 贊成公(찬성공)이 돌아가셨다.
6세때 처음으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12세 때에 숙부에게 論語(논어)을 받아 공부하였다고 하며, 20세 때에 이미 周易(주역) 工夫(공부)를 거의 다 했으며, 周易의 뜻을 窮理(궁리)하느라고 침식을 잃을 程度(정도)였다고 한다.

12세에서 20세에 이르는 약 8년 동안, 周易을 3000讀(독)하여 오묘한 자연의 이치를 모두 깨달았고, 공부가 완성단계에 이르렀음을 추정할 수 있다.
21세에 許氏(허씨) 부인과 혼인하고 27세에 慶尙道(경상도) 鄕試(향시) 進士科(진사과)에 首席合格(수석합격)하였고, 이어서 生員試(생원시)에 次席合格(차석합격)하였는데 그해에 許氏婦人(허씨부인)을 잃었다.

30세에 權氏(권씨) 부인과 재혼하고 32세에 司馬試(사마시)에, 34세에 科擧(과거)에 級弟(급제)하고 官界(관계)로 나가게 되었다.
36세에 戶曹佐郞(호조좌랑)에 제수되고 37세에 어머니 朴氏(박씨)가 돌아가셨다.
40세에 司諫院正言(사간원정언)과 刑曹正郞(형조정랑)에 제수되었다.
47세에 安東副使(안동부사)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48세에 단양군수 풍기군수에 제수되었고, 54세에 刑曹(형조) 兵曹(병조) 參議(참의)로 제수, 56세 때 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를 완성하였으며 57세에 啓蒙傳疑(계몽전의)를 완성하고 58세에 工曹參判(공조참판)에 제수되어 68세 까지 崇政大夫(숭정대부)로 승진하고 議政府(의정부) 右贊成(우찬성)에 이르렀다.

그 뒤 弘文館(홍문관) 藝文館(예문관) 大提學(대제학) 知經筵(지경연) 春秋官(춘추관) 成均館事(성균관사)를 兼(겸)하였다. 또 判中樞(판중추)부사 겸 知經筵(지경연) 春秋館事(춘추관사)가 되고 12월에는 聖學十圖(성학십도)와 箚子(차자)를 宣祖(선조)께 올렸다.

70才에 상소를 올려 모든 職名(직명)을 거두워 줄것을 임금에게 要請(요청)하였으나 允許(윤허)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先生(선생)께서는 易東書院(역동서원)에 나아가 心經(심경)과 啓蒙傳疑(계몽전의)등을 講義(강의)하였다.

이해 음력 12월초 8일 酉時(유시)에 臨終(임종) 부음이 전해지자, 先生(선생)은 領議政(영의정)에 제수되고 그 후 大筐輔國(대광보국) 崇祿大夫(숭록대부) 議政府(의정부) 領議政(영의정) 겸 領經筵(영경연), 弘文館(홍문관) 藝文館(예문관) 春秋館(춘추관) 관상감사에 追贈(추증)되었다.

다음해 3月에 安葬(안장)하였으며 神位(신위)을 伊山書院(이산서원)에 奉安(봉안)하고 釋菜禮(석채례)를 지냈으며 2연후에 陶山書院(도산서원)을 건립하고 1576년 선생의 위패를 陶山書院(도산서원)에 奉安(봉안)하고 釋菜禮(석채례)를 行하였다.
그리고 12月에 宣祖(선조)로부터 文純(문순)이라는 謚號가 내려졌다.

3. 退溪先生의 學問과 대표적인 思想
선생의 학문과 사상이 높고 高潔(고결)하며 감히 어느누구도 추종을 不許(불허)하지만 필자는 文獻(문헌)을 통하여 세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 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의 편찬이다.
선생께서는 일찍이 반평생 동안 精力(정력)을 기울여 朱子書節要(주자서절요)를 편찬하여 後學들이 공부할 수 있는 門(문)을 열어 놓은 것이다.
이 책은 朱子思想(주자사상)의 精髓(정수)를 모았으므로 朱子(주자)에 入門書(입문서)가 되며 그편찬 의도는 다음과 같다.
(가) 精力(정력)을 節約(절약)하고 살펴보기에 편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 全(전체)을 간추려 주요한 것 만을 뽑아서 요점을 窮究 (궁구)하기에 쉽게 함이다.
(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道學(도학)을 깨닫기에 편하게 함이다.
(라) 朱子學(주자학)을 널리 전파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이 冊이 발간되어 세상에 나오자 실로 學問振興(학문진흥)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은 말할 것도 없다.

둘째: 聖學十圖(성학십도) 작성이다.
이것은 退溪先生(퇴계선생)의 사상을 총정리 분류하여 가장 종합적이고 개괄적으로 갖추어 놓은것으로 宣祖(선조) 元年(원년) 12월에 임금에게 올린 것이다.
이때 선생의 나이 68세로 만년에 이르기까지 심사숙고하여 聖學(성학)의 큰 줄거리(大綱領)와 心法(심법)의 至極(지극)히 主要(주요)한 것을 體認(체인)하셔서 마음으로 깨달으신 것들 이다.
선생께서 獨創的(독창적)으로 도표의 形式(형식)을 빌려 사람들에게 聖學(성학)에 入門(입문)하는 것을 가르치신 것은 결국 간결하고 명료하게 聖學(성학)을 표시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 聖學十圖(성학십도)는 宋, 明理學(송, 명리학)을 녹여서 다시 빚은 사상적 精髓(정수)요, 先生思想(선생사상)의 論理構造(논리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李朝理學史(이조이학사)에 빛나는 金字塔(김자탑)이라 하겠다.

聖學十圖(성학십도)를 列擧(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第1   太極圖(태극도)
第2   西銘圖(서명도)
第3   小學圖(소학도)
第4   大學圖(대학도)
第5   百鹿洞規圖(백록동규도)
第6   心統性情圖(심통성정도)
第7   仁說圖(인설도)
第8   心學圖(심학도)
第9   敬齋箴圖(경재잠도)
第10 夙興夜寐箴圖(숙흥야매잠도)

셋째: 啓蒙傳疑(계몽전의) 著述(저술)
선생께서는 朱子(주자)의 [易學啓蒙(역학계몽)]을 깊이 硏究하여서 獨創的(독창적)으로 이 啓蒙傳疑(계몽전의)를 著述(저술)하셨으니 이는 宇宙大自然(우주대자연)과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 심오한 이치를 밝혀내고 그것의 결론이 닿는곳을 알아 내어 기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啓蒙傳疑(계몽전의)는 하늘과 땅의 現像變化(변화)의 數(수)가 마땅히 그러하여야 할바와 그렇게된 까닭을 탐구하고 검토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聖學十圖(성학십도)를 구체적으로 정밀하게 展開(전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로 이 啓蒙傳疑(계몽전의) 속에는 退溪先生의 宇宙觀(우주관), 事物觀(사물관), 周易觀(주역관)등을 찾아볼 수 있으며 道學(도학)의 총체적인 集大成(집대성)이라고 할 수 있다.

河圖(하도)와 洛書(낙서)에서부터 太極(태극), 兩儀(양의), 四象(사상), 八卦(팔괘)의 원리와 變易(변역), 交易(교역)의 理致(이치)를 說破(설파)하였으니 과연 先生의 높은 學問의 경지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4. 結論(결론)
이상과 같이 대략 알아 보았으나 先生님이 돌아가신지 약 4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後生(후생)들 정신속에 깊이 남아있으며 선생의 학문적인 업적은 국내보다도 해외에서 더 알려져 [朝鮮의 朱子]로 불리우고 있다.
동양은 물론이고 서양에까지도 그의 학문이 높이 평가되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1989년에는 中國北京(중국북경)에서, 1990에는 소련 모스크바에서 退溪學國際學術會議(퇴계학국제학술회의)가 각각 열려 社會主義(사회주의)사회에서 소홀히 했던 人本主義思想(인본주의사상)을 모색하는 機會(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따라서 先生이 남긴 遺事(유사)는 후세에 龜鑑(귀감)이 되는 바가 많았다.

마지막으로 선생의 업적을 대략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가) 출세보다는 학문을 권한 어머님의 영향을 받아서 한평생 性理學硏究(성리학연구)에 沒頭(몰두)하였다. 
나) 뜻 없는 官職(관직)에서 72번이나 벼슬을 사양하였고 따라서 朱子學(주자학)을 發展(발전)시켜 退溪學(퇴계학)을 鼎立(정립)하였다.
다) 수많은 제자를 길러내어 나라 발전의 中興期를 맞게 하였다.

[誠(성)]을 基本으로 一生동안 [敬(경)]을 實踐(실천)하고 앎과 行함이 일치하는 지행병진을 학문의 기본자세로 삼아 儒學(유학)의 면모를 一新(신)케 하신 선생의 업적은 아무리 높여도 오히려 말이 부족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욱 우리들의 가슴에 커다란 감명을 준 일은 제자들과 學問討議中(학문토의중) 앉은채로 殞命(운명)하신 그 숭고한 敎育愛(교육애)와 人間愛(인간애)는 어느 누구보다 고귀하고 참된 敎育者의 귀감이며 李退溪 先生(이퇴계 선생)이 아닌 다른 분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우리 모두 한번쯤 우리의 마음에 이 숭고한 退溪先生(퇴계선생)의 사상과 업적을 새겨둘 必要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출처 : 김민영
글쓴이 : 땡땡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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