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절의를 배격하는 글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9. 2. 23:08

- 이백여든여섯 번째 이야기
2013년 9월 2일 (월)
절의를 배격하는 글 - 정개청의 「東漢晉宋所尙不同說」
  흔히 ‘기축옥사’라고 하는 ‘정여립 모반사건’은 두 가지 점에서 당시 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첫째는 모반자 정여립은 이이, 이발 등 명류와 교유하던 선비였다는 점이다. 문과에 급제했고, 시종신을 거치는 등 정통관료의 코스를 밟던 사람이, 왕족 중 하나를 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나섰으니, 그걸 보는 당시 지식인은 멘붕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또 하나는 범람한 옥사였다. 격화된 당쟁이 반역이라는 휘발성 높은 소재를 만나자, 요원의 불길처럼 번졌으며, 연루자들을 색출해내는 과정인 옥사는 그 외연이 넓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다시 말해 반역을 다스리는 옥사가 상대 당을 탄압하는 모양새로 변질된 것이다. 이런 결과로 희생된 대표적 인물이 최영경과 정개청이다. 특히 정개청은 그가 지은 글이 반역의 증거로 제시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배절의론(排節義論)’으로 불리는 「동한진송소상부동설(東漢晉宋所尙不同說)」*이다.

  동한(東漢)의 ‘절의(節義)’는 공명을 추구하는 것과 비교해 보면 그 고상함이 오히려 어리석음을 깨치고 나약함을 일으킬 만하다. 진송(晉宋)의 ‘청담(淸談)’은 이익에 골몰하는 것에 비하면 그 기개가 또한 인정(人情)을 바로잡고 세상을 진정시키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성인의 학문을 따를 줄 몰라서 의리에 안주하지 않거나, 호기를 부리고 허세를 떨어 나라를 망치고서도 스스로 그 잘못을 모르니, 전혀 교화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

  ‘절의파’는 천하를 깔보며 세상을 우습게 안다. 예의범절 따위에 얽매이지 않으며 바른 본성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래서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만 옳고 남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마침내 간웅(奸雄)이 들고일어나 임금의 자리를 엿보도록 한다. ‘청담가’는 사실상 바람 불고 물결치는 대로 세태를 쫓는 사람들이다. 스스로 부귀는 원하는 바 아니며 빈천도 잊었다고 하지만, 한쪽으론 고상한 척하며, 돌아서서는 권력을 탐하고 재물을 챙긴다. 이들 또한 추종하는 사람들을 허황되고 오만하게 만들어 마침내 퇴폐한 세상을 회복시킬 방법이 없도록 하니, 역시 찬탈의 형세를 지어내게 된다.

  ‘절의파’가 소부(巢父)나 허유(許由)를 흠모하고, ‘청담가’가 장자(莊子)나 노자(老子)를 숭앙하여 쌓여온 폐단이 이에 이르렀지만, 따져보면 모두 수신과 치국의 학문을 모르는 데서 기인한 것이다. 즉 절의는 인륜과 도덕에서 벗어난 독선적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며, 청담은 인간이 사는 이치를 생각하지 않고, 지켜야 할 예의범절을 무시하는 데서 기인한 것으로, 이는 모두 말세에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따라서 성현의 가르침인 중화(中和)의 도리에 죄를 짓는 것은 만고에 변함없이 똑같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거울삼을 만하며 학문에 종사하는 자도 역시 경계해야 할 것이다. 주자의 글을 읽다가 느낀 바 있어 어지러이 몇 자 적는다.

* 「동한진송소상부동설」의 뜻은 동한시대에는 절의를 높였고, 진송시대는 청담을 높였다는 것으로 시대마다 가치관이 달랐다는 의미이다.


東漢節義, 較以功名, 則其高尙, 猶可以激頑起懦. 晉宋淸談, 視之謀利, 則其氣岸, 亦足以矯情鎭物. 其未知從事於聖學, 而不循義理之安, 張皇意氣之發, 以至於亡人之國而不自知其爲非也, 則亦無補於世敎也較然矣.
蓋節義底人, 其心高視天下, 而傲睨一世, 出乎禮義之規, 不屑性命之正. 使天下之人, 皆有以自是而非人, 終至於羣狡竝起, 睥睨神器. 至於淸談之類, 則只是隨波逐流底人. 自以爲不要富貴而能忘貧賤. 然而這一邊, 雖似淸高; 那一邊, 實未免招權納貨, 亦使一時之慕效者, 相率而爲驕虛浮誕, 卒無以爲振起恢復之策, 以成其簒奪之勢.
蓋其節義慕巢許; 淸談祖莊老, 而築底爲獘, 至於如此. 而源其所始, 皆不知有明德新民之學, 而獨善於彝倫之外, 不究其視聽言動之理, 而自逸於檢防之節, 是皆衰世之所尙. 其得罪於聖賢中和之道, 則通萬古而猶必一談. 後之爲國者, 其可監, 而爲學者, 亦可戒也. 讀朱子之書, 因感漫筆焉.
 
- 정개청(鄭介淸, 1529~1590), 「동한진송소상부동설(東漢晉宋所尙不同說)」, 『우득록(愚得錄)』

                    ▶ 정개청의 묘소. 목포시 무안군 몽탄면 명산리에 있다. 
                                   사진은 무안신문에서 전재한 것이다.

  절의와 청담은 동한과 진송시대를 가름하는 대표 사조였다. 효를 강조하여 그것을 충으로 만들어 내 국가의 기본 질서로 삼은 것이 서한(西漢)이라면, 의리를 가지고 충절로 만들어 내어 그것을 왕조 유지의 동력으로 삼은 것이 동한(東漢)의 절의인 셈이다. 그리고 위진(魏晉)의 시대가 열리면서 청담(淸談)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는데, 효, 충, 절과 같은 관계의 긴박에서 피로해진 결과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한 것이다. 그래서 주희는 청담이라는 것이 곧 절의가 변질된 것이라고 하였다. 절의라는 덕목 속에는 이미 청담으로 변질될 요소가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를 부연하여 정개청은 절의가 가진 근본적 문제점은 성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이고, 그 결과 나라를 망치고 천하를 어지럽힌다고 비판한 것이다.

  사미인곡, 속미인곡으로 유명한 정철은 기축옥사의 조사와 처리를 담당했다. 자기 누이가 인종의 후궁이었던 까닭에 어려서부터 궁중 출입이 잦았던 그는 당연히 왕자들과도 친숙했다. 따라서 외척은 아니지만, 임금에게는 오직 충절뿐이라는 오롯한 마음을 갖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함께 신하로 섬기던 임금에게 모반하는 것도 차마 눈뜨고 못 볼 일이거늘, 스스로 임금이 되겠다고 나섰으니, 정철이 보기에, 정여립과 그의 추종자들은, 경을 치고도 남을 놈들이며, 그 자체가 참을 수 없는 모욕이자 변고였다. 그래서 정철이 선조에게 정개청의 「동한진송소상부동설」을 내보이며 절의를 배격하는 역적의 글이라고 몹시 분개한 것이다.

  주군(主君) 관계의 핵심적 요소라 할 수 있는 충절은 군신 간에 지켜야 할 의리가 그 본바탕이다. 그런데 이 의리라는 것은 관계의 유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보니, 도덕이나 혹은 윤리와 충돌될 때 쉽게 유리되어 버리기도 한다. 재미있는 점은 의리가 윤리나 도덕을 벗어 던질 때 오히려 더욱 빛을 발하고 관계가 강고해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윤리를 벗어 던지고 오직 강고함만 남은 것이 이른바 조폭적 의리이다. 절의라는 덕목을 가지고 혁명도 하고 왕조도 유지해 온 것이 동양의 전근대 사회이고, 거기에 치열한 당쟁으로 진영화 되어 버린 것이 조선 시대의 한 단면인데, 그래도 그것이 청담으로 갈지언정 조폭으로 가지 않은 것은 의리가 윤리도덕에 우선해서는 안 된다는 분명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정문 글쓴이 : 서정문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저역서
      - 조선시대 당쟁사를 공부했고, 논문으로는 「고전번역의 역사적 맥락에서 본 비문 문제」 2009, 「고전번역사업의 새로운 목표설정을 위한 시론」 2010 등이 있으며, 번역으로는 『명재유고』공역, 2011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