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하산하는 동자를 전송하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9. 9. 11:20

- 예순여덟 번째 이야기
2013년 9월 5일 (목)
하산하는 동자를 전송하며

불문이 적막해서일까 너는 집을 그리워하여
절간을 하직하고 구화산을 내려가네
너는 대 난간서 죽마 타길 좋아하고
절집에서 공양하는 일은 게을렀지
물 긷는 계곡에서 달 보는 일도 더는 없고
차 우리는 사발 속 꽃놀이도 이젠 그만이구나
자꾸 눈물 흘리지 말고 부디 잘 가거라
늙은 나야 안개와 노을을 짝하리니

空門寂寞汝思家
禮別雲房下九華
愛向竹欄騎竹馬
懶於金地聚金沙
添甁澗底休招月
烹茗甌中罷弄花
好去不須頻下淚
老僧相伴有烟霞

- 김교각(金喬覺, 705~803)
「송동자하산(送童子下山)」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권5 「동시연기(東詩緣起)」>
 


  가을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새벽 잠자리의 서늘함이나 상쾌한 밤 공기, 파란 하늘을 대하노라면 절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평소에 잊고 지낸 지인의 안부도 괜히 궁금하고 그리운 사람은 더욱 그리워진다. 어디 멀리 여행을 가고 싶기도 하다. 또 아침저녁으로 피는 노을은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가. 그래서 진나라 때 장한(張翰)은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고향 강동의 순챗국과 농어회를 즐기며 인생을 자기 뜻에 맞게 살고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는지도 모르겠다.

  이 시의 저자 김교각은 김지장(金地藏)으로 더 잘 알려졌는데, 신라 왕족으로서 중국으로 건너가 구화산(九華山)에서 수행을 하고 교화를 펴 사람들에게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지장이 원래 법명이었다. 이 시에 나오는 동자도 지장을 모시며 차를 끓이고 하다가 고향 생각이 간절하였던 모양이다. 동자가 막상 스님 곁을 떠나자니 눈물을 흘리며 발길을 떼지 못한다. 정이 많은 아이이다. 스님 역시 자상하고 온화한 인품, 깊은 정과 심미적 교양이 문자 속에 가득하다.

  네 번째 구절에 나오는 금지(金地)는 사찰을 뜻하는 말이다. 인도 사위성(舍衛城)의 급고독 장자(給孤獨長者)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경모한 나머지 정사(精舍)를 세워 주려고 기타태자(祇陀太子)의 원림(園林)을 살 때 자신의 신심을 보이기 위해 황금을 땅에 깐 일이 있다. 그 때 세운 사찰이 기원정사(祇園精舍)이다. ‘금모래를 모은다[聚金沙]’는 말은 아쇼카왕의 전생담에서 유래한 말이다. 『현우인연경(賢愚因緣經)』에 부처님이 아난과 함께 탁발을 나왔을 때 전생의 소년 아쇼카가 소꿉놀이를 하고 있다가 무엇인가 공양을 하고 싶다는 마음에 모래를 밥으로 공양하였다는 내용이 보인다. 그러니 ‘금으로 덮인 땅에서 금모래를 모은다[金地聚金沙]’는 말은 사원에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다는 뜻이 되고 그 말 속에는 불문에서 수행을 열심히 해 나간다는 의미가 자연 담기는 것이다.

  여섯 번째 구절의 ‘꽃을 희롱한다[弄花]’는 말도 간단한 말이 아니다. 차 문화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한다. 지금 우리가 차를 마시는 방법은 보통 찻잎을 다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내는 방식이다. 이것을 흔히 포다법(泡茶法)이라 한다. 그런데 당나라 법문사(法門寺) 등에서 나온 다구 중에 차를 가는 맷돌이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당나라 시대에는 찻잎을 쪄서 떡처럼 만든 차 덩이를 구워 다연(茶硏)이라고 하는 작은 맷돌로 갈아 이걸 뜨거운 물에 타서 거품을 내어 먹는 방식을 취하였다. 오늘날 일본에서 흔히 마시는 말차(抹茶)와 같은 방식이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솥에 차 가루를 넣어 달이는 자다법(煮茶法)이고, 다른 하나는 사발에 가루를 넣고 물을 부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점다법(點茶法)이다. 점다법은 송나라 시대에 와서 발달하고 포다법은 명나라 시대에 와서 발달하였으므로, 김지장 스님이 차를 마신 방법은 자다법이라고 볼 수 있다.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에 나오는 한 대목을 읽어 본다.

말발(沫餑)은 탕의 정화(거품을 미화한 표현)이다. 거품이 엷은 것은 말(沫)이라 하고 두터운 것은 발(餑)이라 하며 작고 가벼운 것은 꽃[花]이라고 한다. 그 꽃 중에는 마치 대추 꽃이 둥근 연못가를 표표히 떠다니는 것 같은 것이 있고 물살이 도는 연못이나 구부러진 물굽이에 부평초가 처음 자라나는 것 같은 것도 있다. 또 맑게 갠 하늘에 비늘구름이 떠 있는 것과 같은 것도 있다. 그 말(沫) 중에는 푸른 이끼가 물가에 떠 있는 것 같은 것이 있고 국화 꽃잎이 술 단지 속에 떨어져 있는 것 같은 것도 있다.
[沫餑,湯之華也. 華之薄者曰沫,厚者曰餑,細輕者曰花, 如棗花漂漂然於環池之上, 又如回潭曲渚,靑萍之始生, 又如晴天爽朗,有浮雲鱗然. 其沫者,若綠錢浮於水湄,又如菊英墮於鐏俎之中.]

  시의 내용을 쉽게 풀어본다.

  너는 아직 어려서 절에서 생활하는 게 따분할지도 모르겠구나. 그리고 고향의 어머니 생각이 오죽하겠는가! 이제 너는 이 높은 구름에 가린 구화산을 내려가는구나. 가는 너를 보니 지난 일들이 떠오른다. 너는 위태로운 난간에 올라가 죽마를 타고 노는 것은 좋아하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공부하는 것은 심드렁하게 여겼지. 이제 네가 여기서 가게 되면 계곡에 가서 물을 길을 때 하늘에 뜬 달이 물에 비치고 그 달을 병에 담고 하던 일도 이제 그만이고, 차를 달일 때 꽃처럼 피어나는 다양한 거품을 바라보며 즐기고 또 그 거품을 찻사발에 담곤 하던 일도 이젠 없겠구나. 가기로 했으니 울지 말고 잘 가려무나. 늙은 나는 이제부터 저 안개와 노을을 짝하련다.

  고운당(古芸堂) 유득공(柳得恭)이 그의 필기에서 우리나라 시의 기원을 언급하며 이 시를 소개하였는데, 다른 시들도 다 훌륭하지만, 이 시는 뭐랄까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한없이 인자한 면과 또 일상생활에서 발견하는 아름다움이 시 속에 담겨 있는 것 같다. 뜻과 수사가 모두 빈빈하게 뛰어나다. 1200년 전에 이런 시를 썼다니! 감탄을 금치 못한다.

  원래 지장보살은 “지옥이 텅 비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겠다. [地獄不空, 誓不成佛.]”고 서원을 세웠으니, 지장이라는 법명을 가진 분의 흉금이 어떻겠는가. 송(宋)나라 범중엄(范仲淹)이 「악양루기(岳陽樓記)」에서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 전에 내가 먼저 근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다 즐거워한 뒤에 내가 즐거워할 것이다. [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歟.]”라고 한 포부를 떠올리게 한다.

  중국에는 4대 불교 명산이 있다. 보현보살이 있는 아미산(峨眉山), 관음보살이 있는 보타산(普陀山), 문수보살이 있는 오대산(五臺山), 그리고 지장보살이 있는 구화산(九華山)이 그것인데, 다른 산은 모두 불교 교리에서 온 것이지만 구화산의 지장보살은 신라인 김교각 스님이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떠받들어져 신앙화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또 신라인이라는 점에서 각별히 친근하게 다가온다. 특히 이분이 신라에서 갈 때 선청(善聽)이라고 하는 삽살개와 금지차(金地茶)라고 하는 차, 신라송(新羅松)이라 하는 잣나무, 그리고 황립도(黃粒稻)라고 하는 볍씨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특히 고려 시대에 그려진 지장시왕도(地藏十王圖)를 보면 개가 그려져 있는 것이 눈길을 끄는데, 아닌 게 아니라 보성 대원사에 근래에 지어진 지장전의 벽화에도 뱃전에 선 스님 앞에 삽살개가 그려져 있다.

  불교 문자와 차 문화 전통에 대한 이해, 김지장이라는 인물, 그리고 불화, 이처럼 한 편의 시는 우리에게 많은 공부거리를 선사해 준다. 시를 읽는 어려움이자 동시에 즐거움이다.

 
김종태 글쓴이 : 김종태(金鍾泰) / hanaboneyo@hanmail.net
  • 한국고전번역원 특수고전번역실 선임연구원
  • 주요 약력
    - 고종ㆍ인조ㆍ영조 시대 승정원일기의 번역, 교열, 평가, 자문 등
  • 역서
    - 『승정원일기』고종대, 인조대 다수
    - 『청성잡기』(공저), 『名賢들의 簡札』, 『허백당집』(근간)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