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선생 건강교실/약리학강의

동양의학 혁명 총론-관형 찰색 (6편)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10. 19. 20:48

 

6. 관형찰색

 

藥의 香, 産地, 形, 質, 色 가운데에서 이번에는 色을 한번 살펴볼까요. 色을 봄에 있어서는 五色을 보기에 앞서 먼저 그것의 광택을 봐야 합니다. 광택이란 疏密 즉 성기냐 치밀하냐를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각각 그 고유의 광택을 유지하는 것일수록 좋겠지요. 배 껍질이 사과 껍질처럼 반들거린다거나 수박 꼭지가 말라비틀어져 거무스름하다면 이건 틀린 거죠. 먹어보나마나입니다. 이렇게 藥物의 광택을 본 다음에는 厚薄 즉 두께의 두껍고 얇음을 보고, 그 다음에는 氣의 升・降・浮・沈을 보고 난 뒤에 맛을 봅니다. 

"方藥合編"의 藥性歌에서 蓽撥을 찾아보면 "蓽撥辛溫下氣易 痃癖陰疝霍瀉痢"라고 되어 있고 入手足陽明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맛이 매우므로 당연히 陽明經으로 들어가겠지요. 필발의 맛은 순수 辛味로 다른 맛과는 거의 복합이 되지 않는가 봅니다. 또 下氣를 주로 한다고 했는데 이것도 이해를 잘 해야 합니다. 이것은 氣를 위로 올려줌으로써 아래가 뚫어지게 한다는 뜻입니다. 銀丹에 제일 많이 들어가는 薄荷는 맛이 조금 맵습니다. 신미가 많지요. 辛味는 발열성인데도 박하는 해열제로 쓰입니다. 외워서 될 일이 아니지요. 그런데도 박하의 신미만을 쫓아서 박하를 上焦의 발산에 쓰면 안되겠지요. 박하사탕을 먹어보세요. 가슴속이 시원해지는 가을 기운(凉)이 있습니다. 박하를 가을에 채취함은 지극히 당연하겠지요. 天氣란 춘하추동 중의 어느 氣를 받느냐 하는 것이고 그 약의 성질은 아마도 더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氣와 味를 두루 살피지 않으면 큰일나지요. 

사람을 볼 때는 성격과 체격을 다 보아야 합니다. 그저 체격만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파악해선 안되지요. 뚱뚱한데도 少陽之氣가 강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매사 복합적으로 잘 관찰해서 이해하고 난 뒤 六經的으로 분배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맛은 거두는 (收歛) 성품이 있고 少陰은 익히는 (熱) 작용이 있으며 번성을 시키므로 꽃의 화려함에 대비를 시켜 설명했던 적이 있지요. 少陽은 발산작용에 살기를 동반하고, 陽明은 발산작용에 凉한 느낌을 동반합니다. 太陽은 유연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이 곧 風・寒・署・濕・燥・火이지요. 

色을 살펴보면 청색이나 녹색은 대체로 厥陰의 기운을 많이 내포하고 있다고 봅니다. 대체로 발산하고 動하는 성질이 있는 白光에 비해, 안으로 위축이 되고 모이는 성질의 靑은 靜하는 기운이 있습니다. 少陰은 赤, 太陰은 黃, 少陽은 白色光, 陽明은 白色, 太陽은 黑色인데 灰色은 어디에 해당할까요? 검정에 흰색을 합친 것이므로 陽明과 太陽의 혼합이지요. 스님들의 회색옷은 인간의 마음을 動하게 하는 것의 근본인 少陰君火의 妄動을 다스리기 위해서 少陰을 치는 두 가지 색깔을 혼합해서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옷색깔만 척 보고도(의상이든 장신구든) 그 사람의 성품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과일은 풋 것일 때는 파랗고 신데, 익으면서 점점 노랗게 변해가면서 (太陰으로 변하면서) 그 맛이 달콤해지지요. 이러한 色에 대한 이론은 사람들이 잘 아는 편입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수박은 파란 색인데도 어째서 맛이 달지요?"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닙니다. 기실은, 그동안 죽 보아왔듯이 예외가 더 많지요. 매사를 이론에 대입시키려 하지 말 것이며 어느 한 가지 면을 쫓아 속단하지 말 것을 여러차례 역설해 온 것도 그때문이었습니다. 이제 그런 질문을 하실만큼 아셨으니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보도록 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나하나 깨우쳐 갈 때 여러분은 상상할 수 없으리만큼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한그루의 나무에서 열리는 과일이지만 그것의 색깔이 변함에 따라 맛도 따라서 변화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을,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심어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엔 모양(形)을 살펴봅시다. 식물의 대체적인 모양에 회전을 하는 것, 즉 말려 있는 것은 厥陰에 가깝습니다. 잎이 은빛을 칠한 듯 솜털이 보송보송 나서 물방울을 떨어뜨리면 그대로 미끄러져 내리는 건조한 것은 陽明에 가깝겠지요. 陽明之氣를 지닌 담배는 마른 땅에서 자랍니다. 배수가 조금만 더디어도 이내 잎이 상하고 맙니다. 진흙에서 자라는 미나리가 濕하리라는 건 이제 질문을 할 필요도 없겠지요. 과일이 덜 익어서 파랄 때에는 딱딱하지만 노랗게 익으면 무르고 연하고 부드럽게 되지요. 시고 파란 것은 움츠리고 팽팽한 긴장성을 갖지만, 바나나와 같이 달고 노란 것은 연하고 부드럽습니다. 이런 太陰에 해당하는 식물이나 뚱뚱한 사람은 少陰에 해당하는 식물이나 사람(마른 사람)보다 씨앗을 생산한다거나 자식을 낳는 점에서 비교가 안될 정도로 뒤떨어집니다. 中和에의 푸근함으로 종족번식에 대한 집착이 없지요. 花草가 가련한 것일수록 꽃을 많이 피우고, 바짝 마른 사람들이 일찍 결혼을 하는 것도 다 한가지 脈絡인 것입니다. 

지금은 학교 교수라는 사람들이 엉뚱한 연구만 하니 학생들은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四柱觀相쟁이에게 가서 공부하고, 내일은 五運六氣 선생 찾아가고, 무면허돌팔이에게 가서 배우고, "黃帝內經"의 대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산 속에 들어가 보기도 하고 이 말 들으면 이 말이 옳고 저 말 들으면 저 말이 옳고 갈팡질팡, 횡설수설 하다보면 6년입니다. 그나마 그렇게 찾아 다니는 사람은 또 다행일지도 모릅니다. 방학 40일 동안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들은 학년의 고하를 막론하고 정신적인 방황을 많이 하신 분들이라 생각됩니다. 

환자가 오면, 역대 돈 잘 번 한의사의 처방 메모나 잔뜩 모아 놓고 그것 컨닝하느라 급급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絡石이 腰痛에 좋다고 하니까 絡石을 쓰고, 은방울 꽃이 좋다고 하니까 은방울 꽃을 쓰는 이런 기이한 술법, 기이한 비방 너무 좋아하지 마세요. 두통에 지렁이 갈비가 좋다니까 "지렁이 갈비 구해와라"하고, 두통에 印堂이 좋다니까 무조건 印堂을 쓰고는 환자앞에서 폼 잡느라고 퉁기고 돌리고 야단입니다. 기본적인 迎隨補瀉, 圓補方瀉도 모르는 주제에 퉁기고 긁는 것은 또 무슨 경우입니까? 

요즘 침은 일본식 실침으로 가늘고 아프지 않은 데다, 환자 눈치를 슬금슬금 보면서 무려 백개씩이나 꽂아대는 작태 정말 한심합니다. 補瀉法도 모르고 일본식의 가는 침을 쓰면서 일본 흉내 내는 몰골, 이건 망할 징조입니다. 얼마전 漢醫學을 韓醫學으로 바꾸었는데 漢에서 韓으로 바뀌었다고 내것으로 금새 되는 것입니까? 남 흉내 내는 것을 한의학이라 해도 됩니까? 우리 고유의 방법을 쓸 때 진짜 한의학이 되는 것이지요. '漢'자나 '韓'자나 그게 뭐가 그리 큰 의미입니까? 그저 껍데기, 겉치레만 좋아해 가지고... 韓醫學으로 명칭을 바꿔놓고 주체성을 많이 강조하는데, 실제 우리 民族醫學을 개발해 낸 주체적인 사상이 있고나서 주체가 있는 것이지 그런 노력도 없이 이름만 바꾸면 주체성이 찾아집니까? 

여러분들이 "舍岩針法"책에서 舍岩針의 효능을 보셨더라도 임상에 들어가면 충격받는 일이 많을 것입니다. 

어! 一度에 快差하더라. 이것은 여러분들이 시골로 의료봉사가면 하루에 두 서너 건씩 접하게 되는 일입니다. 여름방학 때 의료봉사 갔던 어떤 학생은 膀胱炎으로 출혈을 하며 10년동안 전국에 있는 종합병원에 다 돌아다녀도 낫지 않았던 환자를 足太陽膀胱經 正格 한 방에 낫게 해 주었다나요. 정말 듣는 것보다 실제 임상에서 놀라운 것은 舍岩針法 밖에 없습니다. 

지금 우리 한방계는 급합니다. 외부에 눈을 돌릴 틈이 없습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의학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직관의 개발이 필요한 것입니다. 객관적인 직관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다분히 자기성찰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제가 강연을 통해서 누누이 주장하는 '자기관찰의 방법'은 최고의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흔히 死體實驗이나 動物實驗으로 대체되어지는 인간의 생리, 병리의 연구방법은 아주 보잘것 없고 졸렬한 방법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生理・ 病理현상은 생체의 조건하에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심적 활동의 복잡미묘한 현상이므로 死體나 動物의 실험으로 파악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과 미움, 욕심과 공포, 희열과 분노, 안심과 놀람 등의 복잡한 정신활동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생은 그대로가 하나의 우주입니다. 이러한 것을 이미 生의 활동이 정지된 死體의 해부학적인 구조를 관찰한다 해서 나타날 리가 있겠습니까? "내가 나를 관찰할 수밖에 없구나"하는 결론의 필연성과 당연성을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이런 무의미한 시도로부터 자유로와야 합니다. 

분하면 열이 오르고 숨이 차고 上氣가 되는 등의 육체적인 반응이 수반되는데 이 분노라는 情的인 현상과 빨간색의 상기된 물질적 현상 사이에는 어떠한 금을 그어 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긴장하면 땀이 난다든가, 신경만 쓰면 소화가 안된다는 등의 모든 감정과 육체의 반응은 서로 상관관계가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의학은 인간학일진대 살아있는 인간을 그 대상으로 하는 학문임이 분명합니다. 經絡의 존재가 死體에서 발견될 수 없는 것은 인간의 의식활동과 감정활동의 통로가 경락이므로 이미 死體에서는 감지될 수 없음도 자명합니다. 死體가 공포를 느끼고 추워 떨거나 즐거움을 느껴 웃을 수는 없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동의학자는 가장 가까운 자신을 관찰해야 하고 스스로 '자신에게서 배우는 법'을 터득해야 합니다. 경전이나 의서의 이론에 의한 참고는 곧 자기 확인의 통로가 되어야 합니다. 경전이나 의서의 복잡미묘한 응용적 처방보다는 먼저 자기 자신의 구조, 심리적인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커다랗게 묶을 수 있는 어떠한 이론체계가 나온다면 그런대로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먼저 이론을 외워서 자신의 규격이나 특징을 맞추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자신의 內面洞察을 통한 자아의 이해는 모든 인간의 생명활동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가 될 것입니다. 옛날 아테네의 哲人 소크라테스의 명제인 '너 자신을 알라'는 이 한마디의 경구는 곧 동의학자에게 필수불가결한 말입니다. 남을 알기 전에 나를 아는 현명함은 곧 우주의 신비를 풀어나가는 작업의 핵심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곧 우주의 축소판 모델이자 우주 그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세계와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는 깊은 통찰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생리를 좀 더 근본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습니다. 직관의 출발은 자신의 심리적인 움직임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는 민감성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아니 그것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학문적인 타협이나 아전인수격인 인용으로부터 탈피해야 합니다. 어떠한 동양철학적인 개념을 증명시키기 위해서 굳이 서양의 물질적 과학적 개념으로 설명을 해야만 합니까? 동양의 모든 영적이며 지적 철학적인 용어가 모조리 서양용어로 되어 있음은 이상한 현상입니다. 임상가들이 현실 적응상 西洋醫學的 병명을 쓰거나 진단학적용어를 암기함이 혹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환자의 신뢰를 얻거나 설명의 편의상 방편으로 꼭 필요한 정도 이외에, 東醫學的 개념을 일부러 학문적으로 결부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요? 소위 痒疹漢治라는 명분은 흡사 동서양의 지혜를 총동원한 고도의 지성적 산물같은 냄새를 풍기지만, 실제의 치료 관점에서 보면 위험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마른 사람이 중이염으로 왔다고 가정합시다. 이 사람은 두말 할 나위없이 陰虛하므로 위궤양이든 머리의 병이든 다리의 병이든 어떤 병이든 일단 陰을 먼저 보충시켜주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이런 경우 六味地黃湯이나 十全大補湯을 쓸 수가 있겠지요. 반면에 뚱뚱하게 살이 찐 사람이 中耳炎으로 왔을 때에는 袪濕利尿, 發汗을 적당히 해주고 또 조금, 데워줄 필요가 있으므로 附子 조금 升麻 조금, 半夏・南星・薏苡仁은 좀 많이, 麻黃 조금, 利尿劑는 많이 씁니다. 이렇게 袪濕・利尿・發汗을 시켜주면 귀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위장도 좋아지고, 몸이 붓는 것도 좋아지고 신경통도 좋아진다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우리 한방의 '전체적인 관점'입니다. 

陰虛浮腫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方藥合編"上統 40번 六味地黃湯을 한번 볼까요. 거기에 보면 腎水가 부족할 때 쓴다고 쓰여 있고 뒤로 쭉 넘어가면, "陰虛浮腫에는 熟地黃을 조금 줄이는 듯 하면서(숙지황은 너무 많이 쓰면 泥滯物質이 되어 通氣에 방해가 됨) 牛膝, 車前子, 肉桂를 써라"고 되어 있습니다. 아니? 浮腫에는 보통 五苓散, 四苓散(下統 10번), 木通, 澤瀉, 猪苓, 車前子 등을 넣는데 왜 六味地黃湯을 쓰는가 하는 겁니다. 六味란 물을 더 넣어주는 작용을 하는데 말입니다. 이것이 바로 한방의 특성입니다. 

중국빵 중에 '공갈빵'이라고 껍데기만 있고 속이 빈 바삭거리는 빵이 있듯이 사람이 부었더라도 너무 허하여 껍데기만 부은 (가물때 땅의 표면이 붕 떠오르듯이, 특히 논바닥 같은 곳)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利尿가 안되서 그렇다고 보고 利尿劑를 써서야 되겠습니까? 이때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스프레이로 물을 뿌려주면 가라 앉겠지요. 이것이 바로 기가 막힌 직관입니다. 그러니까 陰虛浮腫이 되어 浮하게 뜬 사람에게 계속 이뇨제를 쓴다는 것은 그 사람을 죽이는 일입니다. 제 경우는 六味地黃湯 10첩으로 깨끗이 고쳐 준 적이 있습니다. 얼른 보면 결코 말라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얼굴을 잘 보면 안색이 부황 뜬 것처럼 보이게 마련입니다. 못 먹어서 부황이 있는 사람에게 蔘出健脾湯(上統 21번), 平胃散(下統 22번)을 써서야 되겠습니까? 삭힐 것은 별로 없고, 소화력은 왕성해지니 위장이 제살마저 소화시켜버릴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겐 熟地黃이나 龍眼肉, 麥門冬, 天門冬 등이 좋은데 구할 수가 없다면 묵을 사먹인다거나 쌀로 미음이라도 해 먹여야지, 소화제를 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소화제 먹고 체하면 무얼로 소화시킬 겁니까? 

그러므로 우리 한방은 병명위주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그저 위궤양에 ××탕, 신경통에 ××탕 이런 암기식의 痒疹漢治 치료법 같은 것은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습니다. 사람이 말랐는지(燥), 뚱뚱한지(濕) 정도도 살펴볼 필요조차 없는 획일적인 처방의 암기는 극히 비논리적이며 터무니없이 불합리한 것입니다. 무리한 인용과 陰陽觀없는 한방지식의 남용은 심각한 진리퇴행의 현실을 낳고 있습니다. 해가 거듭될수록 전대보다 못하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언뜻보면 매우 조직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는 西洋醫學체계가 실제 임상에서 어떻습니까? 갈수록 패배감이 짙어가는 지금의 현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갈등없는 진료태도는 學問觀의 뚜렷한 정립에서 비롯됩니다. 

진찰이론과 처방이론의 어긋남에서 오는 위화감은 실로 대단합니다. 우리 집안엔 부자들이 많으니 개업해서 보약이나 팔아먹지 뭐, 대충 보약이나 팔아먹는데 陰陽觀 필요있나! 철따라 歸脾湯이나 팔아 먹고 精力制 따위의 비싼 약이나 팔아 먹고 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한의사 면허증 반납하고 식품영양사 자격증이나 가져가세요. 질병과 싸움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 "雙和湯이나 十全大補湯사세요. 陽氣不足이나 早漏症 치료합니다"하고 돌아다니게 될 겁니다. 지금은 졸업생이 많으니 경쟁은 치열한데, 연구나 공부는 안하고, 양의학자들이 버리고 있는 이론을 교과서로 배우고 있습니다. 양의사들이 한의학을 전공한 사람을 우습게 안다면,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의원 경영상의 테크닉 개발에나 몰두하는 한의사가 있다면 그는 병에 도전하는 원리의 갈등으로 해서 학문적 배경의 확신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한의사로서 陰陽, 寒熱, 虛實, 經絡에 대한 임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한방책을 공부해서 무엇을 하자는 겁니까? 洋方書籍은 어디까지나 참고사항이지요. 여러분 학교에서 공부는 하세요. 교수들도 먹고 살아야 되니까. 그러나 잊어버리세요. 여러분들이 한의사로 존재하려면 陰陽觀부터 공부하셔야 됩니다. 洋藥師들이 지금 한의사들이 공부하는 傷寒論을 공부해서 洋藥을 韓藥의 이론으로 처방을 내린다면 그 洋藥은 韓藥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 한방에서는 利尿劑를 단순히 이뇨제로만 쓰는 것이 아닙니다. 아주 간단하고 좋은 처방을 하나 일러드리지요. 소아가 3개월 이상 설사를 하면, 白朮 40g, 車前子 20g (白朮은 조금 炙하는 것이 좋음)이면 됩니다. 옛날에 傷寒論 교수가 대학교 6년 동안 이 처방 하나면 본전 빼는 거라고 한 처방입니다. 설사에 補脾除濕시키고 運脾시키는 白朮을 쓰는 것은 이해가 가는데 이뇨제인 車前子를 왜 쓰는지 이해가 안가지요? 간단합니다. 오줌으로 나가야 할 것이 똥으로 나오니까 利水를 시켜주면 될 것 아니겠어요? 설사의 치료방법은, 무조건 收歛之劑로 틀어막는 것이 아니라 먼저 利尿를 시키는 것입니다. 숯가루로 된 돼지표 구리겔이라는 약이 있었는데, 이것은 大腸을 거두어서 건조하게 하여 틀어막는 방법이므로 아무리 효과가 좋다해도 그건 제 2의 방법이지요. 한방에서 설사는 제일 먼저 利水부터 시킵니다. 자꾸 물설사가 나오는데 그걸 틀어 막아서 어쩌자는 겁니까? 大腸을 틀어 막으면 小腸으로 넘어오고 小腸을 틀어 막으면 胃腸으로 넘어오는데 이런 식으로는 결국은 토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利尿를 시키면 아무탈 없이 낫습니다. (車前子는 氣를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利尿를 시킵니다). 이건 기가 막힌 처방입니다. 

蔘出健脾湯보다 더한 처방을 써도 利尿劑가 들어가지 않으면 설사가 잘 낫지 않습니다. 특히 물만 먹으면 洞泄하는 증세에는 반드시 이뇨제가 들어가야 합니다. 설사에 利尿를 시키지 않아서 나중에는 六味地黃湯으로 陰虛를 보충시켜 주어야 하는 경우도 자주 생깁니다. 의사는 뜻을 얻어야 됩니다. 양약사가 이걸 가만히 보니 아주 재미있는 이론이거든요. 그래서 소아들 설사에 라식스란 이뇨제를 조금씩 넣어 줘보니 100% 잘 듣더라군요. 그러나 이것은 한방이론입니다. 한의사가 한의학적인 관점을 가지고 양약을 썼다면 그 양약은 곧 한약이 되는 것입니다. 洋藥師들은 機轉 이외의 것은 모릅니다. 

반면에 우리의 처방은 어떻습니까. 신 맛이 필요한데 五味子도 떨어졌고 木果도 다 떨어졌다면 가까운 약국에서 비타민 C를 사다가 빻아서 넣어 줄 수도 있겠지요. 기본적인 觀만 있다면 우주 만물이 다 한약이 될 수 있습니다. 양약도 陰陽醫學的인 관점에서 보면 전부 한약이지요. 그러므로 이런 관점을 터득하기까지는 양방의 외우는 지식을 그저 졸업에 지장없을 만큼만 들어두세요.깊이 한방의 관점을 터득한 후에 洋藥觀을 가지고 양방의 허점을 구별하고 또 그 장점을 취하셔야지요. 지금은 스님(僧)도 아니고 俗漢도 아니예요. 

우리 四溟大師의 스승인 西山大師께서 "末世가 되면 박쥐중(낮엔 머리 깎고 다니며 반야심경 외우고, 저녁엔 가발 뒤집어 쓰고 요정출입하는 중)이 많이 생길 것이다" 라고 하셨는데, 앞으로는 陰陽五行觀을 말하지 못하는 벙어리 東洋醫學者가 창궐할 것입니다. 스님도 아니고 속한도 아닌, 東洋學者도 아니고 한의학자도 아닌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外典을 공부하는 것은 칼로 흙을 베듯 아무 득이 없습니다. 

여러분 원전으로 돌아가라는 저의 간절한 충고를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벙어리 염소중과 같은 교육으로 인해서 저는 대학 졸업 후 13년간을 고군분투해 왔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은 제 전철을 조금 덜 밟으세요. 제가 10년을 고통 받았다면 여러분은 1년만 받고, 여러분들의 후배는 1개월만 받고, 그러면 나날이 달라져서 우리 한의학의 정신적인 풍토가 개선이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성인의 지혜를 아는 사람이 한의학을 연구하여 허준과 같은 사람이 한번 더 탄생되면 국위선양 뿐만 아니라 인류건강의 기초가 달라질 것입니다. 제 강의에 잡다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여러분들에게 이론을 넣어줘서 잘 먹고 잘 사는 한의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니고 동양의학이라는 병의 원리에 도전하는 학문에 대한 확신감을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이 신념, 신념만 가지고 가신다면 저의 입장에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학문과 임상 즉 기초와 임상이 분리된 것 같은 대학의 학문풍토는 과감하게 지양되어져야 합니다. 나는 기초교실에 있으니까 임상에는 약하다느니, 나는 임상을 주전공으로 하고 있으니까 기초에는 약하다느니 하는 무책임한 태도 따위는 이론과 실제의 분리에서 오는 공허를 메꾸려는 자기도피요 자기합리화일 뿐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은 오직 원리의 터득을 기초로 한 임상태도이며, 원리는 동양고대의 지혜로운 陰陽五行의 원리에 대한 재조명과 깨달음입니다. 그것을 여러분들이 깊이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東洋醫學革命小考에서, ①비방위주의 아집적이고 자기보호적인 태도의 축출 ②혁명이란 의문없이 일어날 수 없다 ③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할 줄 아는 진리에 대한 무지의 고백 #4 전통의학을 보전하려면 서양의학을 흉내내지 말라 등의 얘길 했습니다. 물질분석에 지친 서양의 모든 학계가 이제 동양의 종교를 탐사하러 오는 이때, Ego의 확대만을 위한 야심의 학자들로 득실거리는 대학풍토는 참으로 한심스럽고 참담하기 짝이 없습니다. 

대학 6년간 周易卦象 하나도 들어보지 못한 채 숱한 해부학적 낱말의 기억만을 강요당하는 학문풍토에서 직관을 공부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미끈하게 조직화된 과학적 논리에 물든 西洋醫學 체계의 연구가나 교수들이 잘 알지도 못하고서 韓醫學을 경멸 조롱하는 이 현실 속에서 상해가기만 하는 자존과 비하의식의 회복은 오로지 참된 동양의학관의 재정립으로써만이 가능합니다. 제가 대학 다닐 때, 한 조직학 교수는 강의시간에 아예 노골적으로 韓醫學을 경멸하길 예사로 했습니다. 

여러분! 조직화 되어서 얼핏보면 대단한 것 같지만 실제로 실천적이지 못한 학문이 과학입니다. 물론 우리가 연구해야(科學을) 될 부분이 없지는 않겠으나 그보다 한 걸음 앞서 강조하는 것이 바로 직관입니다. 구겨진 자존과 비하의식은 오직 참된 동양의학관의 재정립으로써 일으켜 세워져야 합니다. 비웃음만 당하는 동양적 직관적 방법이란 과연 그토록 어리석은 것인가? 그런데 直觀의 세계를 현재의 서양학자들은 또 왜 그렇게도 갈구하는 것일까요? 

直觀! 이것이야말로 열쇠요 해답입니다. 이것이 곧 혁명의 주춧돌입니다. 직관은 주관인가? 객관인가? 보편타당하다고 알려진 상식이 직관인가? 나만이 알고 있는 인식의 독특성이 직관인가? 혹은 안다는 상태의 변형이 직관인가? 이러한 모든 추측은 직관의 주체가 아닙니다. 마치 죽음에 대한 추측이 죽음 그 자체가 아니듯이 말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기억을 쓰지 말라는 겁니다. 직관은 지식이 동원되는 마음의 세계가 아닙니다. "저기 있는 꽃이 무엇이니? 수선화! 으응 수선화로구나. 그래 알았어" 그런데 수선화라는 이름을 안다고 수선화 전체를 안다 할 수 있을까요? 

시골사람 두명이 만나서 서울에 가본 척을 하느라고 남대문 문지방 너비를 문제로 서로 다툽니다. "33.3cm야", "아니야 38.99cm야", "아니야!" "맞아!..." 이렇게 싸우는 모습을 본 서울 사람이 "남대문에는 문지방이 없소 당신들은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오"라고 했다. 실지로 그 시골사람이 남대문을 다녀왔고 남대문에 문지방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직관이란 기억이나 지식과 별개의 것인데... 꽃이름이 무슨 소용입니까. 아하! 머리 끄덕끄덕 하며 저게 수선화로구나 하면 끝입니다. 그것에 대한 직관, 직관으로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 공부가 지금 너무 없어요. 서양에서도 이젠 외우고 분석하고 쪼개는 학문은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서양 물리학계의 최고봉인 카프라(Fritjof Capra는 미국의 물리학 잡지에 수차 현대 소립자 물리학과 동양철학과의 비교논문을 발표한 바 있으며 또한 L.A의 선센터에서 선공부를 하기도 한 동양통의 물리학자다. 현재 미국 Berkely대학에 재직 중이며 '현대물리학과 동양사상'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이런 통찰은 갑자기 일어나는 경향이 있는데 책상앞에 앉아 등식을 풀고 있을 때가 아니라 욕탕속에서 심신을 녹이고 있을 때나 숲속이나 해변을 거닐고 있을 때처럼 허심할 때 홀연히 떠오르는 특성이 있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양의학을 공부하고 "黃帝內經"을 공부하고 있는 사람이 虛心이니 마음을 비우는 것이니, 觀心이니 道의 이야기를 믿지 않으면 되겠어요. 公案法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저는 항상 이 虛心을 이야기합니다. 마음을 비우라고 합니다. 어떤 학생은 公案法이 안풀리니까 "에이! 나는 할 수 없구나 술이나 먹자" 하고는 술을 아무 생각없이 한 잔 들다가 문득 어떤 느낌이 와 닿아 "음 혹시 이것 아닐까"하며 제게 전화를 합니다. 그럴 때 맞는 답이 나오는 수가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는 항상 지식이 활동을 하는데 어떤 순간에 그 마음이 싹 비게 됩니다. 

일본에는 지금 아이디어맨 전문교육장이 있습니다. 이 아이디어맨을 교육시킬 때 절대로 똑같은 코스로 출퇴근을 시키지 않을 뿐 아니라 전공이 공학이면 엉뚱하게 미술책을 자주 읽으라고 하다가도 어느날은 요리책을 읽으라는 식의 전혀 엉뚱한 교육을 시킨답니다. 이렇게 아이디어 학교를 2년간 수료하고 나면, 회사에서 100명의 사람이 생각을 해도 안되는 것을 이 사람은 현장에서 척척 해결을 해 낸답니다. 한 회사에 아이디어맨 세 사람만 있으면 그 기업을 살리는 것은 일도 아니라고 장담을 합니다. 그 훈련방법은 다름아닌 '기억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안해 보던 일, 안해 보던 습관, 안 보던 책, 안 먹던 음식... 이런 것과 마주칠 때 과거로부터의 기억이 배제됩니다. 바로 아이디어맨과 같이 창조적인 사람들이 우리 학계에 자꾸 태어나야 합니다. 기존의 교수들이나 舍岩針法을 흉내내는 사람보다는 창조적인 사람, 깨어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한방에 다각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적활동에 골몰하고 나서 잠시 쉬는 틈에 직관적 마음은 솟아나는 듯하며 이것이 과학적 연구에 희열을 가져다 주는 명석한 통찰을 갑작스럽게 생겨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직관적 통찰은 그것이 일관성있는 수학적 체계로 형성되고 일상언어로 해석되어 보완되지 않는다면 물리학자들에게는 無用한 것입니다. 저는 公案을 통해서 여러분의 직관의 세계를 열고, 다시 수학적인 체계로 五運六氣로 들어가서 虛心의 세계를 가르치는 것이므로 직관과 知의 양면을 다 보완하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카프라도 지적인 활동과 직관적인 활동의 이러한 상호보완작업이 이루어져야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은 너무 지적인 활동에 대해서만 골몰해 왔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에게 주로 직관세계를 역설하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몇 가지 처방, 鍼術 및 技術을 습득하기는 쉬우나 제가 강조하는 상상력 추리력은 습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노력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이 애를 쓰다가 지치는 어느 순간에 깨달음이 올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닌 六臟六腑에 대해, 五行을 그릇으로 하고 六氣를 내용물로 하는, 卦象을 한번 그려 보시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유물적, 유심적 取象을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足厥陰肝經의 卦象은 重風巽이고 유물적 取象은 피리, 유심적 取象은 책사러 서점가는 것(지식욕의 충족을 위해서)으로 할 수 있겠지요. 아무튼 取象이나 확대 해석을 많이 하도록 노력하십시오. 

六臟六腑의 卦象은 다음의 도표와 같습니다.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肝과 三焦, 心과 膀胱, 脾와 大腸, 肺와 胃, 腎과 小腸, 心包와 膽의 卦象이 각기 서로 그 형태가 거꾸로 되어 있지요.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小腸의 짝이 심장인 줄로만 알고 계셨지요? 그런데 五運六氣上의 짝은 전혀 다릅니다. 위의 그림을 보세요. 五運六氣上 小腸의 짝은 腎臟입니다. 

"黃帝內經"에 보면 "腎이 虛할 때 小腸을 補하라"라든가 "肺가 實할 때 胃를 瀉하라"는 등의 이론같지 않은 이론이 자주 나오는데, 이 이론에는 깊은 뜻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무튼 心包의 짝이 痰이 되고, 大腸의 짝이 脾臟이 되고 膀胱의 짝이 心臟이 되고, 三焦의 짝은 肝이 됩니다. 

이를테면, 우리 舍岩針法에서는 足厥陰肝經의 병을 手少陽三焦經으로 고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런 경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으로 들어가서 상상하고 추리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됩니다. 그러다가 행여 臟腑의 개념을 다른 방향에서 이해하게 될 지도 모르지 않겠어요? 足少陽膽經을 보면 巽風과 震雷가 만나서 雷風恒이라는 卦로 풀이됩니다. 그렇다면 雷風恒이라는 卦의 내용 즉, '우뢰하고 바람이 만나서 恒이라'는 것이 足少陽膽經의 성격 일부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볼수 있겠지요. 이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각론에 들어가기 전에 이해하셔야 됩니다. 

手少陽三焦經의 熱을 足厥陰肝經으로 치료를 한다고 하면 "뭐?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냐?" 우리가 열심히 연구안한 것이지 결코 엉뚱하거나 틀린 것이 아닙니다. 12臟腑와 연결지은 卦象을 周易책에서 찾아 깊이 연구해 보시기 바랍니다. 周易의 12괘상 읽어보신 다음 각 경락마다 유물적 유심적 取象 다섯 가지씩 해 보세요. 예를 들면, 足少陽膽經의 유물적 取象은 五行上 그릇은 나무(膽木)이고 내용물은 六氣 중 少陽相火之氣이지요. 따라서 나무(木)를 體, 相火를 用이라 할 수 있겠지요(참고: 君火는 지글지글 타오르는 불, 相火는 光明 즉 빛과 같은 것임) 또 '바람 속의 등불'의 경우는 바람이 그릇, 등불이 내용물이 되겠지요. '물속의 물고기'는 물이 器, 물고기가 質이 됩니다. 여러분 그릇과 내용물의 개념을 확실히 파악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取象을 할 때 보다 넓고 깊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足少陽膽經의 유물적 取象은 '나무 횃불'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요. 取象이란 사리를 따지는 것이 아니므로 좀 엉터리같은 이야기라 해도 그 뜻만 부합되면 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유심적 取象을 해 봅시다. 木과 少陽相火之氣가 서로 부딪쳤을 때의 상황은 어떤 것일까요? 木은 厥陰風으로 주로 명예욕, 지식욕, 권력욕 같은 것이고, 少陽相火之氣는 권력에 관계되는 망신, 지식의 망각, 명예를 이루지 못한 비애감, 초조감, 수치심 등이므로 足少陽膽經의 유심적 取象은 '강의실에서 수업 도중 창피를 당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지요. 왜냐하면 지식욕을 가지고 강의실에 들어갔는데 망신을 당했으니까요. 이렇게 각 경락의 이미지를 유물적으로 유심적으로 取象을 많이 해 보아야만 周易 책에 兌卦는 少女요, 무당이요, 새끼달린 말이요... 하고 적어 놓은 뜻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런 복합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면, 환자가 왔을 때 "음~! 너는 노란 바탕인데 붉은 색이 떠오르는군! 아하! 기본이 土인데 火가 떠오르고 있군, 삐쩍 말라서 陽明燥金인데 의외로 몸이 冷하군 太陽寒水가 들어갔구나! 그러니 어떤 臟腑가 나쁘겠구나"하는 것을 추리할 수 있지 않겠어요? 여러분! 이런 상상 공부가 우습게 여겨질지 모르나 공부 중에 제일가는 공부올시다. 周易이 곧 인간사일진대 우리 한방도 인간사로 풀어 나가야 된다고 저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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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남촌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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