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 부여(夫餘) - 고대사 논쟁의 핵
1. 서문(序文)
서기 1204년 부터 정착 문명의 정복에 나선 칭기스칸 군대는 순식간에 세계를 삼켜 버린다.
서양의 역대 정복자들, 즉 알렉산더(히틀러와 나폴레옹이 정복한 땅의 합 보다 더 넓은 면적),
히틀러(219만 평방킬로미터), 나폴레옹(115만 평방킬로미터)이 차지한 면적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넓은 땅(777만 평방킬로미터, 손자 쿠빌라이가 차지한 땅을 합하면 1500만 평방킬로미터
이상;타타르, 거란 중앙아시아의 서요, 서하의 탕구트, 콰레즘, 위구르, 압바스, 맘록조, 헝가리,
폴란드, 러시아, 금, 남송 등)을 정복한 것이다.
그런데 이 정복 제국의 중앙 정부격인 원나라는 칭기스칸이 사망한 뒤에도 무려 150여 년이나
칭기스칸 시대를 지속시켰고, 제국이 멸망한 후에도 잇따라 후계 제국들을 탄생시켰다.
중앙아시아의 티무르제국, 인도의 무굴제국, 흑해 연안의 크림칸국, 청나라 등 결고 만만치 않은 위력을
가졌던 계승 국가들을 후세에 남겼다.
또 몽골제국의 시스템은 후에 칭기스칸의 장남 조치의 아들인 바투의 제국
곧 킵차크칸국(유럽에서 알탄 오르도 곧 황금장막)은 4만명의 몽골인이 2천만명을 지배했고,
후에 로마노프제국을 거쳐 소련제국(팍스 소비에티가)에까지 지어졌다. 킵차크 칸국은 16세기에
내부 변화로 크림칸국, 카잔칸국, 아스트라칸국으로 분열됐고 결국 크림칸국에 합병돼 크림칸국은
다시 1783년 러시아로 합병됐다.
일칸국은 원이 주원장에게 밀려 몽골고원으로 돌아간 뒤 철수해야할 몽골고원이 너무 멀리 떨어져
그 자리에서 소멸됐다. 일칸국은 1325년 아부사이드칸이 독살된후 분열됐고 10년후 1336년에
티무르 제국이 탄생한다. 그리고 1526년 티무르의 후손 바베르가 아프가니스탄과 인도에 걸쳐
무굴제국을 건설했다. 무굴은 힌두어로 몽골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1636년 누르하치의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몽골의 릭단칸에 이어 복드세첸칸이라는 이름으로 여진족과 몽골족을 통합하는
칸에 추대됐다. 만몽(滿蒙)연합국의 칸이 된 홍타이지는 여진족으로 구성한 팔기군과 몽골 기마 군단을
앞세워 명을 멸망시키고 원제국을 복원한 청을 건국한다.
한편 「위싱턴포스트」지는 서기 1001년에서 2000년까지의 인물들 중 가장 중요한 인물로
칭기스칸을 꼭으면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고 있다.
몽골인들은 유럽에 흑사병(페스트)을 가져왔다. 페스트균은 동양에서 몽골 유목민들을 거쳐 유럽으로 퍼져 들어왔다(1347년 몽골제국의 일원이인 킵차크칸국; 칭기스칸이 장남 조치(칭기스칸이 젊을때 그의 적에게 빼앗긴 아내가 임신해 돌아오자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고 자신의 아들로 인정해준 적장의 아들)에게
내려준 몽골제국 서방 영지,의 자니 벡 칸 사후 조치의 큰아들계의 후예 톡타미시가 이끄는 기마군단이
제노바 교역소를 포위하고 초원지대에서 흑사병으로 죽은 시신을 끌어 모아 투석기로
시신을 적진에 날림). 동유럽의 러시아 및 각 공국이 반란을 일으키자 . 흑사병으로 유럽인구의
3분의 1(2천 500만명)이 사라지자 개인 노동력의 가치가 높아졌고,
이는 봉건 체제의 기반을 무너뜨려 자본주의가 등장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지나간 1천년에서 가장 거대한 사건은 몽골이라는 한 단일 종족이 전 세계에 자신의 의지를 완벽하게 발휘한 것이다. ... 그와 그의 후손들은 유라시아 대륙에 광대한 자유무역지대를 만들어냈고, 동서양 문명의
연결을 강화했다. 이는 중세의 GATT 체제라 할 수 있다. .... 그들은 인터넷이 발명되기 이미 7세기 전에
전 세계적 커뮤니케이션을 개척해 놓았다. 그는 사람과 기술을 이동시켜 세계를 좁게 만든 인물이다.
샤먼이었던 칭기스칸의 몽골제국은 샤머니즘, 불교, 도교, 이슬람교, 기독교를 뒤섞고 중동의 의술, 점성술, 수학이 중원으로 들어가고 유럽의 문화도 중원으로 들어갔으며, 당송시대의 예술이 유럽에 전해져 14세기 이탈리아 화풍에 영향을 끼친다. (이상 김종래, 밀레니엄맨 칭기스칸, 꿈엔들, 2005년판, 정리)
정리하면, 현재 미국제국과 유로제국, 러시아제국, 중국제국, 인도제국, 중동제국의 시스템의
원형이 몽골제국에서 온 것이라는 것이다. 1천년의 발자취를 남긴 칭기스칸의 발자취를 살펴본
것은 이제 부터 이야기할 2천년전 칭기스칸이 나타나기 다시 1천년전에 발자취를 남긴
부여(夫餘)에 대해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함이다.
2. 원시부여 - 단군왕검의 네번째 왕자 부여(夫餘)
먼저 부여라는 나라이름의 시초는 초대 단군왕검의 막내아들 부여(夫餘)에서 왔다.
첫째인 태자가 부루(夫婁 : 2세 단군, 재위 기원전 2240~2182),
둘째가 부소(夫蘇 : 구려(원시 고구려, 고리국)에 봉해짐),
셋째가 부우(夫虞 : 진번국(요동의 제후국)에 봉해짐, 막내인
넷째가 부여(夫餘)인데, 초대 단군왕검은 막내왕자 부여를 도읍인 아사달의 서쪽인 녹산(鹿山 : 백악산
아사달, 지금의 길림성 장춘)의 제후로 봉한다. 이것이 원시부여, 부여라는 나라 이름의 기원이다.
3. 대부여 - 44대 구물단군
역사를 보면 나라를 운영하다가 도저히 안되면 극적으로 모든 걸 일신하기 위해서 나라이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그 부여의 문화, 부여의 정신, 부여의 역사가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 감동을 줬는지, 44대 구물단군 때 사냥꾼들의 우두머리 우화충의 반역사건(기원전 426년)을 진압하고 나서
국력이 급속도로 쇠약해지자 나라이름을 바꾸게 된다.
이 때 나라 이름을 조선에서 대부여(大夫餘)로 바꾸게 된다.
4. 북부여 - 해모수 단군
47대 고열가 단군의 제위시 드디어 대부여가 쇠퇴하자 서방족의 진시황제 때인기원전 239년에
웅심산(熊心山)에서 해모수(解慕漱)가 군사를 일으키자 고열가 단군은 제위를 버리고 산속으로
은거하여 쫓겨들어가고 해모수는 단군에 즉위하여 나라이름을 북부여라 한다. 곧 해모수가
대부여의 중심지인 만주 땅 북쪽만을 차지하여 국통을 계승했기 때문에 나라이름을 북부여라 한 것이다.
5. 동명부여 또는 졸본부여 - 47대 고열가 단군의 후예 고두막한 단군
한편 북부여 4대 고우루(高于婁) 단군 때인 계유년인 기원전 108년에 한무제가 쳐들어와 위만의
손자 우거왕 정권을 멸하고 북부여에 까지 쳐들어 오자 서압록(곧 지금의 서요하)사람
고두막한(高豆莫汗)이 의병을 일으켜 한무제의 군대를 참패시키고 스스로 단군으로 칭하여
나라 이름을 동명이라 하였다. 이 분이 동명성왕이다.
고두막한 시대를 북부여의 5대 단군이라 칭하기도 하고, 후 북부여의 시조라고 일컫기도 한다.
고두막한 단군의 부여를 동명부여라고 부른다. 동명부여는 고두막한의 아들 고무서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기원전 58년에 죽자 딸인 소서노의 남편이자 사위인 주몽 고추모가 북부여 7대 단군의 위를 계승한다. 이를 졸본부여라 하며 후에 주몽 고추모는 나라이름을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국호를
후대에 주몽 고추모를 동명왕으로 추대하였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온조왕」조 본문에는 주몽이 `(동명 또는 졸본)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 후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6. 동부여 또는 가섭원부여 - 북부여 5대 단군이 되었어야할 해부루 단군
고구려를 세운 주몽 고추모가 어릴 때 자랐던 곳이 바로 가원원 땅에 있는 동부여이다. 동부여는
북부여의 해모수(기원전 232~194)의 아들 2대 모수리(기원전 194~169) 3대 고해사(기원전 169~120)의
아들인 4대 단군 고우루(기원전 120~87)의 동생이자 북부여의 5대 단군 계승자여야 했던
해부루(기원전 87~47)가 가섭원 땅에 피난을 가서 세운 나라이다.
해부루는 직계 아들이 없이 양자 금와(기원전 47~6)를 태자로 삼아 단군의 직을 승계한다.
금와는 아들을 많이 두었으며 이중 첫째 아들이 대소(기원전 6~서기 22)이다.
7. 갈사부여 - 동부여의 3대 대소왕의 동생
주몽 고추모는 북부여의 창시자인 해모수의 증손자로, 해모수 또한 고리국 출신 종실 후손으로 239년
북부여를 세워 기원전 232년 5가로부터 단군으로 추대되었는데, 쿠데타를 통해 단군으로 취임한 조선의
삼한 체제를 삼조선 제체로 바꾼바 있었던 22대 색블루 단군의 조부 우현왕 고등의 다른 갈래 후손이다.
색불루 단군은 기원전 1285년~1238년에 재위했으며 21대 소태단군을 보좌하던 우현왕으로 있다가
군사쿠데타를 통해 단군의 재위에 오른다.
해모수의 아들 중 모수리는 기원전 194년에 북부여를 계승하고, 역시 해모수의 아들 고진은 제후국인
고리국의 군왕이 되었다. 또 고진의 손자인 고모수가 옥저 후(제후)이다. 고모수는 일명 불리지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고모수와 하백의 딸 유화부인간의 아들이 주몽 고추모이다. 주몽은 북부여의 7대 단군이 되어 기원전 37년 국호를 북부여에서 고구려로 바꾼다.
고주몽이 동부여에 있을때 얻었던 예씨 부인에게서 난 아들 유리가 졸본으로 찾아오자 기원전 19년에
고구려의 2대 유리명왕이 되며, 3대 대무신열제 18년(기원전 6년)에 동부여의 대소(대소단군 22년)를
공격해 동부여를 멸망시키게 된다. 동부여가 멸망하자 대소의 동생 갈사가 압록곡 부근에 갈사부여를 건국하여 1대 갈사단군이 된다. 갈사부여는 68년 3대 도두 단군때 고구려 6대 태조무열제에 항복하여
역사에서 맥이 끊어진다.
8. 서부여 혹은 연나부낙씨부여 - 동부여의 3대 대소왕의 종제
한편 동부여가 대무신열제에 의해 기원전 6년에 멸망당하자 대소왕의 종제 연나부낙씨가 고구려에 투항하여 연나부(椽那部)의 왕으로 봉해진다. 이를 연나부부여 혹은 낙씨부여라 하며, 494년 고구려
문자명열제때 완전히 복속된다.
9. 남부여 - 백제 26대 성왕
후에 고구려를 세운 주몽 고추모가 둘째 부인 어하라국의 소서노 여왕(북부여 6대 고무서단군의 둘째 딸)
으로 부터 얻은 두 아들이 각기 비류와 온조인데, 유리명왕이 태자가 되자 소서노 여왕은 두 아들과 함께
한강으로 남하하여 비류백제와 온조백제를 건국하게 한다. 후에 비류백제는 온조백제에 병합되고
온조백제는 기원전 18년 개국한다. 후에 523년 성왕때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지만 결국 660년에 신라에 의해 병합된다. 백제는 역년 678년으로 열도에 남은 잔존세력이 670년에 일본으로 분리된다.
10. 결문(結文)
옛 조선의 44대 구물단군(기원전 425~397)이 국호를 대부여로 개칭한 이래 후에 백제의 성왕이 532년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하여 남부여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때인 660년에 멸망하기까지 1천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부여란 이름이 남아 있다.
한국인의 역사속에서 부여의 1천년 세월을 빼버리면 어떤 것이 남는가?
지금 한국사에는 부여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여(夫餘)의 역사야 말로 옛 조선과 후세의 고려까지의 역사를 잇는데 빠질 수 없고,
놓칠 수 없는 역사의 끊어진 연결고리가 아닐 수 없다.
흉노 또는 훈족이 서쪽으로 이주하여 고대 유럽 사회의 전체의 균형이 무너져 민족의 연쇄적인 대이동이 발생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동아시아의 균형이 무너지면 그에 따른 도미노 현상으로 인해 세계의 역사에 연쇄적으로 이동해가 유라시아 대륙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에게 영향을 끼친다.
부여는 명백히 동아시아의 문화적, 군사적 핵심축이다. 고두막한 단군과 한무제와의 싸움에서 한무제가
승리하였다면 한이 부여의 영역을 얻어 세웠다는 사군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말이 된다.
그러나 그 싸움은 고두막한 단군의 승리였고, 한무제의 참패였다.
중국측의 사서인 <사기>에서 조차 하나라 군사가 전투에는 졌는데 고조선이 자중지란을 일으켜 항복해
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이 아니라 고조선이 승리한 전쟁이라는 반증은 여러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과 한과의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데 한의 장군들이 작전 실패의 책임 등을 물어 연이어 처형항하고
있는 기록이 바로 그 반증이다.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선장군 역시 방사가 열구에 이르렀을 때 마땅히 좌장군을 기다려야 함에도 제멋대로 앞서서 서두르다 죽고 잃어버린 병사가 많았기에 당연히 주살되어야 했으나 속을 바치고 서인이 되었다."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6, 111쪽에서 재인용.)
좌장군 휘하의 보병 우두머리인 다(多)는 군사들을 잘못 통솔했다는 책임을 물어 사형에 처해진다. 육로로 침공한 선발대인 좌장군 군대와 바다를 통해 침공한 누선장군의 전과가 신통하지 않자 한무제는 위산을
전선에 추가 투입한다. 초기에 고조선을 침공한 군대가 죄수들로 구성된 비정규군이라면 추가 투입되는
위산의 군대는 황제 직할의 정예군이었으나 위산은 패수를 건너보지도 못하고 회군한다. 그러자 한무제는 위산도 처형한다.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위산에 이어 한무제는 제남 태수 공손수를 파병하여 조선을 침공하라고 추가 파병된 공손수는 도리어 아군 장수인 누선장군을 체포한다. 보고를 받은 한무제는
제남 태수 공손수도 처형한다.
1년간의 전쟁을 통해 고조선 장수를 생포하거나 사살한 전과는 전혀 없이 황제는 직접 파견한 장군들을 차례로 사형에 처한다. 또 전쟁후 논공행상에 있어서도 누선장군은 관직을 박탈당한다.
승리한 장군의 허물은 어떤 식으로든 덮는 게 고대나 현대나 승리한 장군을 우대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사기>의 기록은 전쟁에 참여한 한(漢) 군대의 장군이 모두 징계당했다는 것이다.
그대는 역사의 진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도기 136년 양력9월 9일 음력 윤 7월 17일 토요일 이른 9시 22분
환기 9205년 웅기(신시개천) 5904년 단기 4339년
불기 3032년 유기 2553년 서기 2006년 이슬람력 1385년
참고 서적 :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 역사, 김영사, 2004.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6.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4.
이병도, 최태영, 한국상고사입문, 1989.
계연수, 환단고기, 1901.
이윤섭, 천하의 중심 고구려, 코리아북케이스, 2004
이형구, 발해연안에서 찾은 한국 고대문화의 비밀, 김영사, 2004.
김종래, 밀레니엄맨 칭기칸, 꿈엔들, 2005.
나카무라 사토루 편저, 동아시아 역사교과서는 어떻게 쓰여 있을까?, 에디터,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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