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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왕국 신라(新羅) - 진국(辰國)의 비밀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11. 19. 16:53

 

 천년왕국 신라(新羅) - 진국(辰國)의 비밀
1. 서문(序文)
대체로 한민족의 고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신라라는 국가에 대해 부정적이다.

그 까닭은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대장군 김유신이 당나라의 도움을 얻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켜 한민족의 활동범위를 축소시켜 버렸고, 정작 신라 자신도 당나라에 굴복하는 형세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중대(中代) 신라의 이야기이고,

상대(上代) 신라까지 싸잡아 그렇게 비난할 수 있을까?/

 

초기 신라와 관련해서 몇가지 의문이 발생하는데 그것은 크게 세가지다.
첫째로 왜 나의 시조 할아버지이신 박혁거세 할아버지는 순장을 하지 않았는가하는 점이다.

당시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자들의 무덤에는 그 이후에 이르기까지 순장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전설상에 전하는 박혁거세 거서간 할아버지의 신화는 몸이 6조각으로 분리되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따로 6개의 무덤으로 나누어 묻었다고 한다. 이는 중앙아시아 바이칼호 연안의 샤먼들이 샤먼으로서의 의식을 할때 이와같은 체험을 한다고 한다. 또 기록에 따르면 남해차차웅, 유리이사금 역시 샤먼 곧 텡그리 또는 제사장이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3대 유리왕은 왜 석씨에게 왕권을 넘겨주었는가 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왜 『삼국사기』에 기록된 일식현상과 홍수나 태풍과 같은 기상현상이 서기 200년까지의 초기 기록 곧 상대(上代) 신라시대에는 양자강유역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아직은 가설이지만, 결과론적으로 보았을때, 신라(新羅)의 영역이 ①양자강 유역에서 ②요서와 요동으로 ③지금의 영남지역으로 급격히 축소되면서 왕권 또한 ①박가에서 ②석씨로 ②석씨에서 ③김씨로 급격히 왕권세력의 권력이 이동해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또 양자강 유역에 원래 라(羅)국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가설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반도 안에 수십개의 소국이 공존할 만한 지역적 분할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면, 이러한 가설들이 삼국사기에 남겨진 기록으로 유추해 볼때 전혀 실현 불가능한 가설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이다.

2. 대진국(大辰國) - 발해만(渤海灣)의 황제국
668년에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뒤 당은 문무왕 9년(669년) 4월에 평양 일대의 주민 38,300호(약 20만명)를 수륙 양로로 당의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이 끌려간 지역은 양자강, 회수 이남과

산동반도 남쪽 등이었다. 부흥운동의 기반을 없애려 한 조치였다. 그럼에도 부흥운동은 계속되었다.

특히 관위가 대형이었던 검모잠은 평양성 함락 1년만인 669년에 평양성을 탈환하는데 성공한다.

당은 고구려 부흥운동을 막느라 백제지역을 소흘히 했고, 이는 신라가 백제지역을 점령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또 669년에는 토번이 동투르키스탄(현재 중국의 신강, 위구르자치구)을 급습해

안동도호부 도호 설인귀를 토번 침공을 막기 위해 소환해 15만 군의 병력으로 670년 4월(문무왕 10년)에 원정을 떠나 참패하고 설인귀를 비롯한 장수들이 모두 포로가 되었다. 설인귀는 단신으로 장안에 돌아와 패전의 책임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직위가 몰수되고 서인으로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을 받는다.

이 패전으로 당은 실크로드의 중요 통로인 타림분지 대부분을 잃었다.

이후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는 요동성으로 옮겼고, 671년 7월에는 반당운동의 중심지였던

안시성을 공략한다. 신라는 이 기회를 활용해 백제지역을 병탄했다. 문무왕 10년(670)년 부터

고립무원이 된 웅진도독부를 대대적으로 공략해 문무왕 11년(671) 6월에는 거의 전 백제 지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토번이 당과 평화교섭을 시작해 신라의 우세는 오래가지 못한다. 토번의 사절이

장안에 도착해 협상을 진행하자 여유가 생긴 당은 말갈과 거란을 주력으로 한대군을 한반도 전선에

투입해 문무왕 12년(672) 7월 당의 장군 고간은 1만명, 이근행은 말갈족 부대 3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해 8개의 군영을 설치했다.

한편 <구당서> 신라전을 보면 문무왕 4년(664)부터 20년(680)까지 기사가 전무하다.

즉 신라와 당의 전쟁에 관해 전혀 기록이 없다.
아뭏든 이근행은 문무왕 16년(676) 윤 3월 말갈군을 지휘해 토번군을 청해(靑海)에서 대파했다.

당 고종은 이 공적을 기려 이근행에게 연국공(燕國公)의 작위를 주었다. 한반도에서 서역의 청해까지 이동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리므로 이근행은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소환돼 철수 했다고 보아야 한다.

즉 675년 늦어도 가을에는 당의 신라 원정군 대부분이 철수한 상태였고 신라가 매초성에서 그 잔여 부대를 격파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결국 당군이 공식적으로 삼국 모두를 지배하려던 의도에서 설치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옮겨 한반도에서 676년 철수하면서 국제전은 일단락 됐고,

신라의 북쪽 경계는 서부는 임진강, 동부는 함경남도 덕원에 이르게 됐다.

문무왕 18년(678) 9월에도 당 고종은 다시 신라에 원정군 파견을 계획했으나 토번이 다시 침략하므로

포기한다. 678년, 이경현이 지휘하는 당군 18만은 청해의 초원지대에서 가르친링이 지휘하는 토번군에

참패한다. 이를 승풍령 전투라고 한다. 문무왕 19년(679)부터는 본격적으로 동돌궐 부흥운동이 일어나

당은 이를 진압하느라 여념이 없게 되어 당이 신라를 공격할 기회는 끝내 오지 않는다.  당은 토번과

해마다 침략해 오는 돌궐을 동시에 막아야 했다.

692년, 당의 장수 왕효걸은 가르친링의 아우 가르다고리가 지휘하는 토번군에 승리해 쿠차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695년 가을 가르친링이 이끄는 토번군이 반격해 와 이듬해 봄에는

장안에서 불과 320Km 떨어진 지점까지 진격했고 이를 막던 왕효걸의 당군은 대패했다. 곧이어 거란족의 봉기(696)와 발해의 건국(698)으로 당은 신라 원정에 대한 미련을 완전히 버릴 수밖에 없었다.

당은 699년 신라의 조공을 받아들이고 신라와의 적대관계를 해소한다.

이런 국제적인 배경에서 고구려 유민이었던 걸대중상의 뒤를 이어 아들인 대조영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집단을 이끌게 된다. 이윤섭, 천하의 중심 고구려, 코리아북케이스, 2004, 326쪽.
대조영은 698년에 동진해 동만주 모란강 유역에 자리를 잡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 국호를

대진(大辰)이라 하였다.

대진(大辰)의 건국에 당과 신라는 긴장하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다.
「대조영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계루(桂樓)의 옛땅을 차지하고 동모산(東牟山)에

웅거해 성을 쌓고 살았다. 조영이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하자 말갈의 무리 및 고구려의 남은

무리가 점점 모여들었다. 성력(聖曆 : 당 측천무후의 연호로 698~699 2년에 걸쳐 사용) 연간에 진국왕에 올라 돌궐에 사신을 보내 통교했다.」 <구당서> 권 199, 하, 북적 열전, 발해말갈.

「삭정군은 본래 고구려의 비열홀군이다. 진흥왕 17년에 비열주를 삼고 군주를  두었다. 효소왕 대에 성을 쌓으니 둘레가 1,180보였다.」<삼국사기> 권35,지리지. 이를 통해 신라는 효소왕대에 동북쪽 국경지대에 성을 쌓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 왜 걸걸중상의 아들 대조영은 국호를 대진(大辰)이라 하였는가?

3. 천마와 자작나무 그리고 신라(新羅) - 진한망국 이주민국
1970년 초는 우리나라가 한창 산업발전의 디딤돌을 놓던 시절이다. 고도(古都) 경주에는 종합개발계획에 따라 미추왕릉지구에 있는 옛 무덤들 중 가장 큰 98호 무덤을 발굴해 전시할 계획이 세워졌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렇게 큰 고분을 발굴해본 경험이 많이 았았던 시절이다. 그래서 먼저 규모가 작은 155호

고분을 시험삼아 발굴하기로 하고 4월 16일에 첫 삽을 떳다. 1973년 8월 20일은 여름 장마가 걷히고

오랜만에 화창해진 늦여름의 어느날이었고 이름난 고대 유물의 발굴이 가끔 우연히 이루어지듯

우리나라 옛 무덤 발굴 역사에 길이 남을 사건 하나가 알려진 날이었다.

 

 주인을 몰라 그냥 155호라고 번호만 붙인 이름 없는 무덤에서 1500년 세월을 묻어둔 컬러 그림 한 점이

선명한 색깔을 뽐내며 찬란한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나무껍질 위에 그려진 그림은 당장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것 같은 천마(天馬)였다. 덕분에 155호 고분이라는 무명의 설움에서 벗어나 `천마총`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김영사, 2004, 53~54.

 

고대인들은 천마(天馬)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을까?
서역 원정으로 천마 1천필을 얻어 기쁨에 넘친 한 무제가 기원전 102년에 지은 <천마가>를 살펴보자
천마가 왔도다.

서쪽 끝으로부터 사막을 건너 뭇 오랑캐를 항복시켰도다.
천마가 왔도다.
샘물에서 나와 호랑이 등뼈 같고, 귀신같은 조화 있도다.
천마가 왔구나.
물 없는 땅을 지나 천리를 거쳐 동으로 왔도다.
천마가 왔구나.
진의 동방으로 왔으니, 장차 그 높은 드날림 누구와 기약하랴.
천마가 오니 높은 문 열었다. 이 몸 솟구쳐 곤륜으로 가리라.
천마가 왔구나.
신룡(神龍)의 짝이로다. 창합(궁궐의 정문)에 노닐어 옥대를 구경하리라.            <한서> 권22, 예악지.

무엇이 한(漢)나라의 전성기를 이룬 무제를 이토록 기쁘게 했을까? 중국 역사에서 북방 유목 민족은

늘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진(秦) 시황조차 국력을 쏟아 만리장성을 구축하지 않았는가.

북방 유목 민족의 최대 무기는 바로 그들의 말이었다. 특히 서역마는 명마로 널리 알려져 있어

한 무제가 탐을 내 한나라가 서역 원정을 하는 원인이 된 것이다.

서역마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대완(大宛)의 한혈마(汗血馬)다.

대완은 현재 우즈베키스탄의 페르가나(Ferghana)에 있었던 나라이며 명마의 산지로 유명했다.

이곳의 말은 앞 어깨에서 피 같은 땀을 흘리므로 한혈마로 불렸다.

한혈마를 처음 중국에 소개한 사람은 한무제때의 장건(張騫)이다. 장건이 3차에 걸쳐 서역 기행을 떠나

이 지역의 정보를 얻어 온 사실은 유명하다. 한혈마를 얻기 위해 한무제는 기원전 104~102년에 걸쳐 2차례 대완에 원정군을 보냈다. 대완의 항복을 받아 3천 필의 한혈마를 얻었으나, 사막을 횡단하는 고된 귀환으로 귀국했을 때는 1천 필만 남았다. 장건이 개척한 동서 교역로는 서역마를 수입하는 통로로 기능했다. 이렇게 개척된 `천마의 길`을 통해 중앙아시아마(西域馬), 몽고마, 중국마가 흉노족, 몽고족, 한족(漢族) 등 여러 족속에 의해 전 세계로 전파됐다. 이윤섭, 천하의 중심 고구려, 코리아북케이스,

2004, 44~47쪽.
경주 천마총에서 발견된 천마도는 가로 75cm, 세로 56cm, 두께 0.6cm로 중형 TV의 화면 정도로 쓰임새는 말다래 또는 장니(障泥)라고도 불리는 말 안장에 늘어뜨려 진흙이 튀는 것을 막는 장식품이다.

말 안장의 좌우에 매달던 것이었으므로 처음 발굴될 떄는 2장이 겹쳐 있었다.
한 장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으나 같은 그림으로 된 나머지 한장은 무사했다. 나무껍질 위에 거의 45도 각도로 14줄의 선을 서로 교차되게 누볐다.  사용 중에 껍질이 찢기고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한 용도였던 듯하다. 위쪽 가운데 부분은 반달 모양으로 얕게 패였고 바깥 둘레는 넓이 1.2cm의 얇은 가죽단으로

안팎을 덧대었다. 말 안장에 매달 수 있도록 좌우에 각각 2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천마도의 경우 나이 40~50년 정도, 지름 약 20~30cm 정도의 나무에 껍질을 벗겨 쓴 것으로 추정된다. 종이가 흔해지기 전이었으니 자작나무 껍질은 천마도처럼 그림을 그리고 불경(佛經)을 새겨 넣는 재료로 안성맞춤이었다. 최근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불경이 발견됐는데, 기원전 1~2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자작나무 껍질에 인도의 옛 문자인 산스크리트어로 석가몬의 가르침과 시를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자작나무 종류의 껍질을 횡단으로 잘라보면 마치 나이테 모양의 흔적이 보인다. 이것은 나이테가 아니고 주피(periderm)라는 조직으로서, 수분을 차단하여 나무 안쪽을 보호하는 기능이다. 주피는 나무의 굵기, 생장 상황에 따라 1년에 두개가 생길 수도 있고 때로는 2~3년에 한개가 생기기도 한다.
자작나무 껍질의 우수한 방수효과는 자작나무가 많이 분포하는 북부지방 사람에게 아주 유용하게 쓰인다. 러시아지방의 아무르 강, 우수리 강의 하류 유역에 거주하는 소수종족 나나이족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배를 타고 연어와 송어를 잡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기술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무대로 살아가는 여진족에게 그대로 전수돼 우리 선조들이 골탕을

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세종 19년(1437) "평안도 연변 고을에서는 겨울철이 되면 도적들이

화피선(樺皮船)을 타고 강을 건너와서 노략질을 하나, 우리는 배가 없어서 잡지 못한다"라고 했으며

다음 해인 세종 20년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다.
그 밖에 활의 제작에도 쓰였는데, 손잡이 부분을 잡을 때 아프지 않게 하기 위해 화피란 이름으로

자작나무나 벚나무 껍질을 발랐다. 하지만 벚나무보다는 자작나무가 더 고급품으로 여겨졌다. 자작나무는 껍질만큼이나 나무속도 황백색으로 깨끗하고 고르다. 추운 지방의 서민들은 이 나무를 쪼개어 지붕을

이었으며, 나무껍질로 시신을 싸서 매장했다. 박상진, 앞의책, 54~58쪽.

바이칼 주변 원주민인 부리야트족에게 있어 능력과 지질을 공동체 일원들에게 인정받는 후 샤먼으로

추대된 사람이 해야 할일은, 길일을 택하여 지정된 장소에 가서 하늘의 신인 `텡그리`에게 제사를 올리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터에는 보통 천상과 지상, 그리고 지하세계를 뜻하는 세 나무기둥(`세르게`라 불림)이 세워져 있고, 제물을 놓는 나무로 된 제사상과 불 지피는 화로, 소원을 빌며 돌을 쌓아 놓는 돌무더기 `오보`(우리의 서낭당)가 있다.
이 성스러운 장소에서 자신의 영적인 일을 우주적으로 확장시켜 알리고 기원하는 것이 샤먼이 되는 의례의 핵심이다. 이 의식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의 우주목이라 일컬어지는 자작나무를 타고 오르내리는 식으로 거행되는데, 이를 통해 자신이 샤먼이 되었음을 하늘에 고하면 주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마을 사람들이

새로 탄생한 샤먼을 나무가마에 태워 동네로 귀환한다.
이들 부리야트족은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정신적 유산에 대한 자부심과 수호정신이 아주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샤먼은 공동체의 안위를 결정하는 중요한 존재로 예로부터 존경의 대상이었던 만큼,

샤먼이 되는 의식 또한 공동체 구성원들 전체의 관심과 승인 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였다. 정재승

엮음,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 정신세계사, 2004, 169~170쪽.
자작나무는 시베리아 등 북부지역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다. 천마총에 말안장 위에 그려진 천마도는 자작나무로 되었고, 이 천마는 북방민족이 타고 다녔던 말이다.
『삼국사기』「신라본기」제1에 보면 "先是 朝鮮遺民"이라 기록하고 이다.

신라를 구성했던 사람들은 앞선시대 고(古) 조선이 멸망하자 진한(辰韓),

또는 삼한관경(나라의 지역을 셋으로 나누어 통치함)으로 다스려졌던 진조선(辰朝鮮)의 망국의

유민들이 이주하여 내려온 것이다. 연산군과 중종 때의 학자인 이맥이 전한 『태백일사』「고구려국 본기」에는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 거서간 할아버지가 북부여 황실의 혈통임을 자세히 다루고 있다.

4. 대부여(大夫餘)
조선은 본래 삼한체제로 이어져 내려왔다. 곧 진한, 번한, 마한의 삼한체제로 중앙의 진한을 단군이

직접 통치하였고, 번한과 마한에 부단군이 각기 통치하는 삼한관경의 통치체제를 보였다. 말하자면 진한을 중심으로 번한과 마한은 두 제후국이었던 것이다.
변한의 지리는 지금의 갈석산과 대릉하를 기반으로 하는 요서지역이었고, 진한의 지역은 지금의 송화강 유역의 하얼빈 및 하얼빈 그리고 만주의 길림(吉林)지역이며, 마한은 백아강을 중심으로한 반도지역이었다.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5, 217쪽. 그러나 군사 쿠데타로 단군에 오른 22대 색불루 단군(기원전 1285~1238) 때에는 진한, 번한, 마한을 각기 독립시켜, 진(辰)조선, 번(番)조선, 막(莫)조선 체제로

분할 시키게 된다. 곧 현재 미국이 50개의 국가들의 연합이듯이 조선 또한 3개국이 조선이란

이름으로 뭉친 국가가 된 것이다.
한편 진조선은 44대 구물단군(기원전 425~397)때에 국호를 대부여로 바꾸게 된다.

5. 진조선(辰朝鮮)
원래 단군의 자리는 아들에게 세습되거나 오가 중에서 덕망이 높은 사람에게 전해졌으나 앞서 이야기

된 것처럼, 진조선의 시작은 21대 소태단군을 보좌하던 우현왕으로 있다가 쿠데타를 통해 단군에 오른

색블루 단군(기원전 1285~1238)때 삼한관경 체제로 시작된 조선을 진조선, 번조선, 막조선으로 나누고

번조선의 30대 부단군에 서우여(徐于餘)를 막조선의 20대 부단군에 여원흥(黎元興)을 색불루 단군이

임명하면서 시작된다. 색불루 단군은 옛 조선의 법도대로 진조선을 직접 통치하며 번조선과

막조선의 부단군들을 정치적으로 통치한다. 그러나 후대에 이르러 각기 독립된 국가와 같은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정리하면 고조선은 건국한 지 1048년이 지난 22대 색불루 단군에 이르러

백악산 아사달(현재 길림성 장춘)으로 천도하게 된다. 안경전, 앞의책, 218쪽.

6. 진한(辰韓)
기원전 2333년 전 초대 단군성조께서는 일신즉삼신(一神卽三神)과 천지인의 원리에 의해

고조선(기원전 2333년~기원전 238)을 진한, 마한, 번한의 삼한으로 나누어 통치하셨다.

이를 삼한관경이라 하며, 진한은 단군왕검께서 직접 다스리고, 압록강 이남의 마한(수도는 지금의 평양)은 웅백다(熊伯多)를 부단군으로, 요하 서쪽의 번한(수도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은 치우천황의 후손인

치두남(蚩頭男)을 각각 1대 부단군으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였다. 안경전, 앞의책, 217쪽.
이에 대해 254년 위나라 왕침(王沈)이 편찬한『위서(魏書)』는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위서』에 이르기를, "지난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라는 분이 계셨다.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창건하여 이름을 조선이라고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대다"고 하였다. 『삼국유사』

「고조선」
단군왕검은 환국과 배달시대의 대도인 신교를 계승하여 신교의 삼신관, 즉 삼신이 품고 있는

광명의 원리를 근본으로 치화(治化)의 도를 역사 속에 실현하셨다.

삼신은 본래 한 하나님이나(三神一體) 만물을 창조할 때 세가지 덕성을 펼치신다.
우리 조상들은 신의 세 가지 본성을 그대로 역사에 구현하는 것을 신을 잘 모시고 신과 하나 되는 진리

체험의 길이라 여겼다. 그리하여 단군왕검은 삼신의 덕성, 즉 조화신, 교화신, 치화신을 바탕으로 조선을 삼한, 즉 진한, 번한, 마한으로 나누어 통치하였다. 신교문화의 삼신사상이 국가 통치원리,

국가 경영원리로 제도화된 것이다.
이 가운데 고조선 강역의 중앙인 만주에 자리잡은 진한이 삼한의 중심으로서 단군왕검이 직접 다스렸다. 그리고 요서와 한반도에 자리 잡았던 번한과 마한은 각기 단군을 보좌하는 부단군이 다스렸다. 진한의

대단군만이 병권을 장악하고, 번한과 마한의 부단군은 대단군의 명을 받들었다. 이를 일컬어

삼한관경이라 한다. 이것은 후에 흉노(단군시대의 조선족), 후금, 백제의 좌현왕 우현왕 제도와

고구려, 고려시대의 삼경제도로 계승된다.

고조선 국가 운영의 기본 원리인 삼한관경제는 고조선사 왜곡의 최대의 핵심 문제로서 한민족사의 뿌리문화(삼신세계관)와 정통성을 바로잡는 가장 중요한 열쇠이다.
일찍이 한말의 애국지사요 민족 사학자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삼한관경이 고조선의 국가 경영 원리였음을 밝혀냈다.
선생은 맨몸으로 북만주를 누비며 한반도의 남족 삼한시대 이전에 만주, 요서,한반도에 걸쳐

광대하게 뻗어 있었던 단군조선의 삼한시대가 실재했음을 입증했다. 그리고 본래 고조선의 통치 강역을 뜻하는 대륙 삼한을 `북삼한(전삼한)`, 고조선이 망하면서 그 유민들이 한반도 한강 이남으로 대거 이주하여 소규모로 재건한 반도삼한을 `남삼한(후삼한)`으로 확연히 구분지어 주었다. 안경전, 앞의책, 214~215

7. 결문(結文
약 5천년 전 인류문명의 발상지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도시왕국 우르크(N.K. 센다즈/이현주, 길가메시

서사시, 범우사, 1999 ; 존 펄린/송명규, 숲의 서사시, 따님, 2002.)에는 길가메시라는 전설적인 영웅이

있었다. 그는 보다 살기 좋은 도시를 건설하여 후세에 남기고 싶어했다. 이런 계획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왕국과 멀지 않은 곳에 아름드리 레바논삼나무가 가득 찬 숲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숲은 길가메시 이전부터 수메르 최고의 신 엔릴의 명령을 받고 숲을 지키는 괴물 훔바바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길가메시는 운명적으로 만난 친구 엔키두와 함께 훔바바를 죽이고 울창한 나무를 베어내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곧 이어 닥쳐온 가뭄의 신은 용케 물리쳤으나 엄청난 홍수는 피하지 못했다.

인류 최초의 환경 파괴에 의한 자연재해의 기록이다. 이후 오늘날까지 이곳은 황량한 사막으로 남게 된다.
이처럼 대부분의 고대문명의 발상지는 생활편의를 위해 분별없이 숲을 망가뜨린 탓에 찬란한 역사를 접어야 했다. 우리나라도 예외일 수 없었는데, 천년 왕국 신라가 멸망의 과정을 밟게 된 여러

이유 중의 하나도 경주 주변의 숲을 가꾸고 보전하는 데 소흘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를 보면 신라 4대 이사금인 석탈해는 어린 시절 토함산에 올라 성 안에 살 만한 곳으로

호공이라는 고위관리의 집을 점찍었다. 그는 속임수를 써 숫돌과 숯을 그 집 곁에 묻어놓았다. 그런 다음 자신의 조상이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시 이웃 마을에 간 사이, 호공의 조상이 그 집을 빼앗아 살고 있다는 거짓말로 호공의 집을 차지했다. 이를 지켜본 남해왕은 석탈해가 지혜롭다고 여겨 맏 딸을 그의 아내로 삼게 했는데, 바로 아니(阿尼)부인이다. 부인의 이름대로 석탈해의 등장은 `아니! 이럴 수가`였다.
분명 사기죄에 해당할 부당한 방법으로 남의 집을 탈취하고도 감옥은 커녕 남해왕의 사위가 되어 훗날 임금으로 출세한 것이다. 박상진, 앞의책, 90쪽. 이 설화에서 당시 신라에는 쇠 만드는 산업이 발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장장이라는 제철기술자가 이웃 마을에 스카우트되어 불려다닐 만큼 대접을

받았으니 말이다.

쇠를 가공하는 첫걸음은 섭씨 1,000도가 훨씬 넘는 온도에서 쇠를 녹이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당시 무슨 방법으로 이렇게 높은 온도를 얻을 수 있었을까? 석탄이 알려지기 전이니 아마 숯을

이용했을 것이다. 따라서 숯굽는 기술이 질 좋은 쇠를 만드는 기본이었다.
신라 초기부터 제철의 연료로 사용된 숯은 삼국통일의 전성기를 거쳐 후대로 내려오면서 차츰 다른

용도로 변해갔다.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얻는 풍족한 자원은 삶의 안락함을 추구한다. 고급 숯은 연기가 나지 않고 열량이 높아 화로라는 난방기구에 제격이며, 집의 아궁이와 벽을 그을리지 않아

밥 짓는 연료로도 그만이다.
이와 관련해『삼국사기』「신라본기」 신라 49대 헌강왕조의 기사를 보면 어느날 신하들과 월상루라는 망루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면서 시중 민공에게 "내가 듣건대 지금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물었다. 민공이 "저도 일찍이 그렇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즉위하신 이후로 태평성대가 계속돼 해마다 풍년이 듭니다. 백성들은 생활이 안정되고 저잣거리에는 기쁨이

넘칩니다."라고 대답했다. 숯이 연료로 쓰일 만큼 일반화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산업용으로

아껴써야 할 숯이 고급관리는 물론 민가에까지 퍼졌으니 수요가 확산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숯은 고급 연료임에는 틀림없으나 자원 낭비가 심하다. 무게로 따져도 질 좋은 숯은 연료가 된

나무의 1/1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수요가 늘어난 만큼 수많은 나무가 잘려 나갔고 자연히

숲은 파괴되었다. 그런데 숯은 주로 무슨 나무로 만들었을까?
사용 목적에 따라 여러 종류의 나무가 쓰였다. 귀신을 쫓는 데는 뽕나무 숯, 고운 가루로 만들어 연마할

때는 버드나무 숯, 다리미질하는 데는 온도를 빨리 올릴 수 있는 소나무 숯을 썼다. 하지만 역시 화력이

은 숯에는 참나무를 따라갈 나무가 없다. 참나무는 비중이 높고 수분이 적어 숯을 만들면 단단하면서

열량이 높다. 그래서 신라 때의 숯은 대부분 참나무로 만들었다. 1996년부터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경주

경마장 건설 예정 부지를 발굴한 결과, 숯을 굽던 피리 모양의 가마가 여러 기 확인되었다.
참나무의 고살은 숯 생산에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다. 백성들의 배고픔과도 관련된다. 참나무의 도토리 열매는 흉년이 들 때 대용식으로 먹을 수 있는 귀중한 식량자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나무가 없어진 민둥산은 가뭄을 몰고 왔다. 이렇게 되면 인심이 흉흉해지고 나라의 기강은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헌강왕의 숯 이야기`가 기록된 해로부터 불과 10여 년이 지난 891년에는 궁예가 명주의 관공서를

습격했으며, 다음 해에는 견휜이 후백제를 세웠다. 숯으로 밥을 지어 연기도 나지 않는 경주의 거리를

보고 임금을 비롯한 지배계층은 `아름다운 서울에서 살렵니다.`를 열창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숯으로

대표되는 신라 말기의 호사스런 생활이 50여 년 뒤인 935년 나라가 송두리째 붕괴되어 버리는 일에

한 가닥의 빌미를 제공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김영사, 2004, 89~93쪽 발췌.
우리가 천년왕국 신라(기원전 57~기원후 935)를 기억하여야 하는 이유는 역사를 잊지 않는자는

반복된 실수를 저지르지 않지만, 역사를 잊은 자는 전대와 같은 실수를 저지르게 마련이기 때문

도기 136년 9월 11일 월요일 늦은 12시 43분
환기 9205년 웅기(신시개천) 5904년 단기 4339년
불기 3032년 유기 2553년 서기 2006년 이슬람력 1385년


  참고서적 : 박창범, 하늘에 새긴 우리역사, 김영사, 2004.
             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김영사, 2004.
             성삼제, 고조선 사라진 역사, 동아일보사, 2006.
             신응수, 천년 궁궐을 짓는다, 김영사, 2002.
             안경전, 개벽실제상황, 대원출판, 2005.
             이병도, 최태영 공저, 한국상고사입문, 1989.
             이윤섭, 천하의 중심 고구려, 코리아북케이스, 2004.
             이학종, 돌에 새긴 희망 미륵을 찾아서, 이끌리오, 2005.
             정재승, 바이칼, 한민족의 시원을 찾아서, 정신세계사,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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