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오의 눈물 : 창오(蒼梧)는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산으로, 순(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어 이곳 기슭에 묻혔다고 한 데서 붕어(崩御)한 임금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붕어한 신종(神宗)을 위해 애곡(哀哭)했던 소식(蘇軾)의 눈물을 말한다. 2) 축신(逐臣) : 조정에서 쫓겨나 귀양 간 신하를 말한다. 3) 선실(宣室) : 제왕이 거처하는 정실(正室)로, 여기서는 편전(便殿)을 가리킨다. 4) 이성(二聖) : 본래 당(唐)나라 때 풍질(風疾)이 있었던 고종(高宗)을 보좌해 수렴청정(垂簾聽政)하여 위세가 황제와 다름없었던 측천무후(則天武后)를 당시 사람들이 풍자하여 말한 것인데, 여기서는 북송(北宋) 때 어린 철종(哲宗)을 보좌하여 태황태후(太皇太后)로 수렴청정하였던 선인후(宣仁后)를 가리킨다.
이 시는 숙종(肅宗) 때 활동하였던 학자 임영이 지은 장시(長詩)의 도입부이다. 이 시의 제목 ‘이성일어고신애(二聖一語孤臣哀)’는 명대(明代)의 문인 서애(西涯) 이동양(李東陽, 1447~1516)이 지은 「기재탄(奇才歎)」이라는 악부시(樂府詩)에 나오는 한 구절로, ‘이성(二聖)의 한 마디 말씀에 외로운 신하 슬픔에 북받치네’라는 뜻이다. 이동양은 중국 역사상의 여러 일들을 소재로 하여 일련의 연작 고악부(古樂府)를 지었는데 그의 문집인 『회록당집(懷麓堂集)』 권1, 권2에 수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고악부를 따로 떼어내 친절한 주석을 더하여 『서애의고악부(西涯擬古樂府)』라는 서명으로 간행되기도 하였는데, 아마도 임영은 이 책을 읽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동양의 「기재탄」은 북송(北宋)의 문인 동파(東坡) 소식(蘇軾, 1037~1101)이 만년에 입은 지우(知遇)를 노래한 것이다. 임영은 「기재탄」을 읽고, 세상을 떠난 신종(神宗)이 소식을 아꼈던 일화에 감격하여 그 역시 이 작품을 통해 소식을 노래하였다.
희령(熙寧) 연간(1068~1077)에 신종은 왕안석(王安石)을 중용하며 신법(新法)을 펼치고 있었는데, 이에 반대하였던 소식은 신법당(新法黨)의 미움을 받아 항주 통판(杭州通判)으로 폄적(貶謫)되었다. 이것은 그의 기나긴 귀양 생활을 예고한 것으로, 이후 그는 밀주(密州), 서주(徐州), 호주(湖州), 황주(黃州), 상주(常州) 등을 전전하게 된다. 원풍(元豐) 3년(1080)에 그가 시를 지어 신법이 백성들에게 불편한 점들을 풍자하자, 어사대(御史臺)에서 그가 지은 시들을 가지고 옥사(獄事)를 일으켜 사형에 처하려 했다. 하지만 신종이 그를 가엾게 여겨 사면하면서 황주 단련부사(黃州團練副使)로 안치(安置)하였다. 또 신종은 여러 차례 그를 다시 서용(敍用)하려고 했지만 번번이 집정자들에게 저지당하였다.
한번은 신종이 재상 왕규(王珪)와 채확(蔡確)에게 “국사가 지중하니 소식에게 명하여 돌보게 해야겠소.”라고 말하자, 왕규가 난색을 표하기에, 신종은 증공(曾鞏)을 대신 등용하고, 소식은 여주(汝州)로 옮겨주면서 “소식이 폄적되어 허물을 뉘우치며 보낸 세월이 매우 오래되었구나. 인재는 참으로 얻기 어려우니, 차마 끝내 버리지 못하겠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신종이 붕어(崩御)하고 철종이 즉위하면서 정국이 바뀌자, 소식은 다시 조정에 들어와 예부 낭중(禮部郎中) 등을 거쳐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시독(侍讀)을 겸하게 되었다. 철종(哲宗) 원우(元祐) 2년(1087) 소식이 대궐에서 숙직할 때 영종(英宗)의 후(后)이자 신종의 모후(母后)로, 어린 철종을 도와 섭정(攝政)하였던 선인후(宣仁后)가 소식을 불러 편전(便殿)에 입대(入對)하게 하고 물었다.
“경은 지난해 무슨 관직을 지내셨소?” “신은 상주(常州) 단련부사(團練副使)였습니다.” “어떻게 대번에 한림학사(翰林學士)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오?” “태황태후(太皇太后)와 황제폐하를 조우(遭遇)해서입니다.” “아니라오.” “그렇다면 대신들이 천거한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라오.” “신이 비록 보잘것없지만 감히 다른 방법으로 나아오지 못합니다.” “이는 선제(先帝 신종)의 뜻이라오. 선제께서 매번 경의 문장을 풍송(諷誦)하실 때면 반드시 ‘기재로다, 기재로다[奇才奇才]’라고 감탄하셨는데, 끝내 경을 등용하지 못하셨을 뿐이었소.”
이 말을 듣고 소식은 자기도 모르게 곡을 하다 목이 쉬었는데 선인후와 철종 역시 그를 따라 울었고 좌우에 있던 이들 모두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임영은 23살 되던 현종(顯宗) 12년(1671) 정시(庭試)에 합격하여 환로(宦路)에 잠시 몸을 담고 있다가 이내 물러났다. 이후 숙종의 지우를 입어 중간에 출사하기도 했지만 숙종 연간 정국이 여러 번 뒤바뀌는 과정을 바라보며 정치를 향한 열정이 점점 가라앉았고, 소신을 지키기 위해 출사보다는 은거를 지향하여, 영동(嶺東)의 통천(通川), 충청도 부여(扶餘), 전라도 용담(龍潭)과 진안(鎭安) 등으로 옮겨 다녔다. 이 시를 지을 당시 그는 42세의 나이로 고향인 나주(羅州)의 회진(會津)에 돌아와 살고 있었는데 젊은 시절의 지나친 공부로 인해 얻은 병이 점점 깊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나섰다가 이제는 늙고 병든 몸으로 고향에 돌아온 그에게 소식의 인생 역정(歷程)은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으리라. 먼 지방들을 적관(謫官)으로 떠돌다 만년에 비로소 조정으로 돌아와 뜻을 폈던 소식과 달리 몇 차례 출사와 은거를 반복하다가 만년에 결국 고향으로 돌아갔던 임영은 비슷하면서도 상반된 인생을 살았으니 말이다. 갖은 풍상(風霜)을 겪고 쉰이 넘은 나이로 조정에 돌아와 엎드린 노신(老臣)의 눈물을 바라보며 임영은 무슨 감회에 젖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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