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한강의 얼음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4. 3. 10. 11:38

- 삼백열한 번째 이야기
2014년 2월 24일 (월)
한강의 얼음
  한겨울이면 몇 차례 한강의 결빙 소식을 접하곤 한다. 한강대교 교각의 일정 지점을 기준으로 처음 결빙된 시점과 며칠째 결빙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지를 언론은 자세히 보도한다. 한강의 결빙이 겨울 추위를 가늠하는 척도처럼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 겨울에는 2월이 다 끝나도록 한강이 꽁꽁 얼었다는 보도를 거의 접하지 못했다. 그만큼 평균보다 기온이 높았다는 뜻이다. 과거에도 기상 이변이 없지는 않았지만, 지구촌 곳곳에서 온난화에 따른 이변이 속출하는 때인 만큼 겨울에도 얼지 않은 한강이 무심하게 봐지지 않는다.

  옛날에도 한강의 결빙은 주요 관심사였다. 한강이 얼면 세곡(稅穀) 운반이 중단되고, 어획에 차질이 빚어지며, 수로를 통해 도성으로 왕래하기 어려워졌다. 반면 한강이 얼지 않으면 다른 문제가 발생하였다. 바로 다가올 봄부터 가을까지 사용할 얼음을 비축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제때에 한강이 얼지 않으면 재난으로 여겨 기한제(祈寒祭)를 지냈다. 이는 기상이 계절에 맞지 않은 것에 대한 우려인 한편, 한강에서 채취한 얼음이 국가 운영에도 영향을 미치는 사안이었음을 말해준다.

  지금의 빙고는 옛날의 능음(凌陰)1)이다. 동빙고는 두모포에 있는데, 얼음을 넣는 창고가 하나뿐이라서 국가의 제향에 쓰이는 수요만 담당한다. 얼음을 저장할 때는 봉상시가 주관하며 별제 두 사람이 함께 검찰한다. 또 감역부장과 벌빙군관의 감독하에 저자도2) 부근에서 얼음을 채취하는데, 이것은 개천(청계천) 하류의 더러움을 피하기 위함이다. 서빙고는 한강 하류 둔지산 기슭에 있는데, 빙고가 8채(梗)나 되므로 모든 국용 및 여러 관사와 고위 관료가 모두 이 얼음을 쓴다.
  얼음은 두께가 4치가량 언 뒤에 채취 작업을 하는데, 그때는 여러 관사의 관원들이 동원되어 경쟁을 하므로 군인이 많아도 잘 채취하지 못한다. 그래서 강촌 백성들이 얼음을 채취하여 군인들에게 팔곤 한다. 또 칡 끈을 얼음 위에 걸쳐 놓아 넘어지는 것을 방지하고, 강가에는 땔나무를 쌓아두어 동상에 대비하며, 의원과 약을 갖춰 두어 병들거나 다친 사람을 치료하는 등 사고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다.
  8월에 군인들을 보내서 고원(雇員)의 인솔하에 빙고의 천정을 수리하고, 대들보와 서까래가 썩은 것을 갈고, 담이 허물어진 것을 고친다. 또 압도(鴨島)의 갈대를 베어다가 빙고의 상하 사방을 덮는데, 갈대를 두껍게 덮으면 얼음이 녹지 않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담당 관원이 밤낮으로 술을 마시며 얼음 저장하는 일을 하리들에게 맡기곤 하였다. 계축년(1493)에 얼음 저장이 허술하게 되자 상이 노하여 담당 관원들을 모두 파직하였다. 그 때문인지 갑인년(1494)에는 얼음 저장이 잘 되어 을묘년(1495)의 국상(國喪)과 중국 사신 접대에도 얼음이 부족하지 않고 가을까지 빙고에 얼음이 남아 있었다.

1) 능음(凌陰) : 주(周) 나라 때 얼음을 저장했던 지하 창고이다.
2) 저자도 : 지금의 금호동과 옥수동 남쪽 한강에 있었던 모래섬으로,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만나는 지점에 형성된 삼각주였다. 한강에서도 경관이 아름답기로 이름난 곳이었다.


今之氷庫, 卽古之凌陰也. 東氷庫在豆毛浦, 只有一庫, 以供祭祀之用. 其藏氷時, 奉常寺主之, 與別提二人同力檢察. 又有監役部將伐氷軍官, 監取於楮子島之間, 所以避開川下流之汚也. 西氷庫在漢江下屯知山之麓, 庫凡八梗, 諸國用諸司諸宰樞皆須用之. 氷堅四寸然後始役. 當其時, 諸司之員, 爭相務勝, 軍人雖多, 不能善取, 村民鑿取賣於軍人. 又施葛繩於氷上, 以防顚躋; 設柴木於江邊, 以救凍人. 又置醫藥, 以濟疴傷, 其備患深矣. 當初八月, 多給軍人於氷庫, 庫員率軍人, 修理庫井, 樑桷之敗者易之, 墻籬之毀者改之. 又庫員一人往鴨島, 刈取葭薍, 蓋覆庫之上下四傍. 多積而厚藏之, 則氷不消融. 前者官人等日夜縱酒酣醉, 以藏氷之事, 委諸下吏. 癸丑年藏氷疏漏, 上怒皆罷. 甲寅年官吏用心藏氷, 故乙卯年國之大喪, 使臣宴需, 氷用不乏, 至秋庫有餘氷.
 
- 성현(成俔, 1439~1504), 『용재총화(慵齋叢話)』

  
  옛날 중국에서는 대부 이상만이 집에 얼음을 저장해 둘 수 있었다 한다. 겨울에 채취한 얼음을 이듬해 가을까지 보관하기 위해서는 특수한 시설과 관리가 필요했는데, 일반 백성들로서는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사철 얼음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지증왕 때 처음으로 얼음을 저장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고려 충렬왕 때 누구나 얼음을 저장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최이(崔怡)가 얼음을 사사로이 저장하였다는 이유로 탐욕스럽고 사치하다는 비판을 받았던 것을 보면 개인이 얼음을 저장하는 데는 여전히 제약이 따랐던 듯하다. 조선에서도 원칙적으로 얼음을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였으나, 성종 무렵에는 일부 종실이나 권력층에서 사빙고(私氷庫)를 설치하였고,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민간 장빙업(藏氷業)이 크게 발달하였다고 한다.

  얼음은 삼동설한인 12월에 한강에서 채취하여 저장했다가 이듬해 춘분에 처음 꺼내어 사용하였다. 빙고는 동빙고와 서빙고 외에 궁궐 안의 내빙고 두 곳이 더 있었으며, 지방의 지정된 고을에도 빙고를 두었다. 저장된 얼음은 제향과 각종 행사 때, 그리고 궁궐 내의 음식을 보관하는 데 쓰였고, 국상이 있는 경우에는 수개월 동안 시신을 보존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 여름철에는 정2품 이상의 관료 등에게도 나누어주었고, 의료기관의 병자와 감옥의 죄수들에게도 지급하여 무더위에 목숨을 잃지 않도록 했다. 그러므로 1년 동안 사용할 얼음을 미리 저장했다가 용도에 맞게 사용하는 일은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엄동설한에 꽁꽁 언 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저장하고 도성 안으로 운반해 들이는 일이 쉬웠을 리는 없다. 부역으로 나갔건 고용되었건 간에 이 일에 동원되었던 민초들이 겪었을 고충은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때로는 동상에 걸리거나 부상을 입기도 했고, 강에 빠지는 일도 잦았다. 채취할 때 담당 관원들의 부정과 횡포도 심했고, 빙고로 운반하여 저장하는 일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상고온으로 얼음이 얼지 않는 것이었다. 한강이 얼지 않으면 가을까지 사용할 얼음을 확보하는 데 비상이 걸렸으며, 멀리 떨어진 강 상류나 계곡의 하천에서라도 얼음을 채취하여 빙고로 운반해야만 했다. 이렇게 되면 얼음의 품질도 떨어지지만, 얼음 채취에 동원된 사람들이 더 큰 고역을 치러야 했다. 뒤늦게 추위가 몰아닥쳐 한강이 얼면 미리 저장했던 얼음을 두고 새로 얼음 채취 작업을 했으므로 이중의 어려움이 따랐다.

  조선 후기에는 도시 인구가 증가하고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민간의 얼음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한강 주변에 무수한 사빙고가 생겨났고, 얼음은 더 이상 권력층과 부유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민간에서 자유롭게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 되었다. 국가가 얼음을 저장하고 관리하는 정책을 더는 고수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민간 장빙업자와 빙계(氷契)가 수차례 분쟁을 벌이는 등 얼음에 관련된 이권 다툼도 그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지방관으로 있을 때의 경험을 토대로 강에서 얼음을 채취하여 운반하는 대신 도성 안에서 얼려 보관하고, 민간업자의 얼음 판매를 금지시키는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대형 제빙공장에서 하루 수백 톤의 얼음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지금으로서는 옛날에 얼음이 국정의 중요 사안이었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는다. 가정에서도 얼음을 얼릴 수 있고, 필요할 경우에는 무한정 살 수 있는 세상이니 말이다. 여름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땀을 뻘뻘 흘리며 얼음을 사다가 수박 화채를 만들어 온 가족이 둘러앉아 먹던 기억도 흐릿해진 지 오래다.

  이제 곧 음력 2월이다. 옛날이라면 빙고를 열어 얼음을 꺼냈을 춘분도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올겨울 같은 기상이라면 얼음 부족으로 발생할 여러 문제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고민이 깊었을 듯하다. 민간에서는 얼음 값 폭등으로 갖가지 피해가 발생했을 테고, 기층민들은 무더위를 견딜 얼음을 구하기가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이제는 한강이 얼지 않아도 일상생활에 영향을 주지는 않는다. 지구촌 곳곳이 기상이변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상황에서 이 정도의 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100년 전 연평균 80일이었던 한강의 결빙 일수가 이제는 15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듯하다. 겨울철 이상고온이 당장 올여름의 기상에 어떤 영향을 줄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 됐건 겨울은 추워야 제격이다. 별다른 추위 없이 겨울이 끝나간다는 생각을 하니 꽁꽁 언 한강의 칼바람에 뼛속까지 시려오는 한겨울의 정취가 그리워진다.


  

  
조순희 글쓴이 : 조순희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역서
    - 『홍재전서』, 『국조보감』,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 번역에 참여
    - 『국역 기언 5』, 민족문화추진회, 2007
    - 『국역 명재유고12』, 한국고전번역원, 2008
    - 『국역 허백당집3ㆍ4』, 한국고전번역원, 2011~2012
    - 『국역 회재집』, 한국고전번역원, 2013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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