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역사인물

[스크랩] 김시습과 해동전도록, 해동이적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5. 12. 26. 11:38

7.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 1435∼1493)

① 생애(生涯)

  서울 성균관(成均館) 부근의 사저(私邸)에서 출생(出生)한 매월당(梅月堂)은 어려서부터 신동(神童)?신재(神才)로 이름이 높았는데, 3세 때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四方)으로 흩어지네[무우뢰성하처동 황운편편사방분(無雨雷聲何處動 黃雲片片四方分)]’라는 시(詩)를 읊었고, 그에 대한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당시의 재상(宰相) 허조(許稠 : 1369∼1439)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김시습(金時習)의 집을 직접 찾아가, “너는 시(詩)를 잘 짓는다고 하던데 나를 위해 ‘늙을 노(老)’자를 넣어 시 한 수(首) 지어 보아라.”라고 하니, 그 자리에서 ‘노목개화심불로(老木開花心不老 :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는 뜻임)’라는 한시(漢詩)를 지어 올렸고, 크게 감탄한 허조(許稠)가 ”너는 과연 신동(神童)이로다.”라고 칭찬하였다고 함

  이런 이야기가 어느덧 궁중(宮中)에까지 들어가자 학문(學問)을 좋아하는 세종(世宗)은 그를 궁중으로 데려와 관리(官吏)들을 시켜 재능(才能)을 시험(試驗)했는데, 시험관(試驗官)의 무릎 위에 앉은 김시습(金時習)이 즉석에서 자유자재로 시(詩) 몇 수(首)를 지어 보였고, 이 보고를 들은 세종(世宗)은 매우 감동(感動)하여 비단 50필을 하사하는 한편, “장차 크게 쓰겠노라”는 전지를 내렸기 때문에,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오세문장(五歲文章)’이라 하였다고 함

  15세 때 어머니를 여위고 외가(外家)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外叔母)도 별세(別世)하여, 다시 상경(上京)했을 때에는 아버지도 중병(重病)을 앓는 등 가정적 역경(逆境) 속에서 훈련원도정(訓練院都正) 남효례(南孝禮)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으나 앞길은 순탄하지 못했는데, 삼각산 중흥사(三角山 重興寺)에서 공부하다가 수양대군(首陽大君)이 단종(端宗)을 내몰고 왕위(王位)를 찬탈(簒奪)했다는 소식을 듣고 3일을 통곡(痛哭)한 끝에 책을 태워버린 후,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법명(法名)을 ‘설잠(雪岑)’이라 짓고는 북으로 안시향령(安市香嶺)?동으로 금강산(金剛山)과 오대산(五臺山)?남으로 다도해(多島海)에 이르기까지 9년 동안 방랑(放浪)하였음

  세조(世祖) 9년(1463) 효령대군(孝寧大君)의 권유로 잠시 세조(世祖)의 불경언해(佛經諺解) 사업을 도와 내불당(內佛堂)에서 교정(校訂) 일을 보다가, 세조(世祖) 11년(1465) 경주(慶州) 남산(南山)에 금오산실(金鰲山室)을 짓고 거기서 한국 최초(韓國 最初)의 한문소설(漢文小說)인『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쓰는 등 6~7년을 보내고 상경(上京)하여 수락산(水落山) 기슭에 폭천정사(瀑泉精舍)를 세우고 몸소 농사(農事)를 지어 생계를 영위하였으며, 47세 때인 성종(成宗) 12년(1481)에는 환속(還俗)하여 안씨(安氏)를 아내로 맞이하기도 했으나, 이듬해 폐비 윤씨 사건(廢妃 尹氏 事件)이 일어나자 다시 관동지방(關東地方) 등으로 방랑(放浪)의 길에 나섬

  성종(成宗) 14년(1483) 서울에 돌아오자 주변에서 벼슬하기를 권했으나, 정치현실(現實)이 근본적(根本的)으로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여 완강히 거부하던 매월당(梅月堂)은 갑작스런 부인(夫人)의 죽음에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고 실의(失意)와 좌절감(挫折感)에 사로잡혀 기행(奇行)을 저지르다가 다시 방랑 생활(放浪 生活)을 떠나 소양호(昭陽湖) 주변의 청평사(淸平寺)?설악산(雪嶽山) 등지에서 한동안 머무른 후, 마침내 충남(忠南) 부여(扶餘)의 무량사(無量寺)로 가서 세상(世上)을 마침

  끝까지 절개(節槪)를 지키는 한편, 유(儒)?불(佛) 정신(精神)을 아울러 포섭한 사상(思想)과 탁월한 문장(文章)으로 일세(一世)를 풍미한 매월당(梅月堂)은 우리나라 사상사(思想史)에서 우주 만물(宇宙 萬物)의 본질(本質)과 현상(現象)에 대한 체계적(體系的) 설명을 시도한 최초(最初)의 철학자(哲學者)로 평가(評價)받고 있는데, 만유(萬有)의 존재(存在)를 해명하는 논리(論理)로 ‘기(氣)’를 제기함으로써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 1489~1546)에서 혜강 최한기(惠崗 崔漢綺 : 1803~1877)로 이어지는 우리나라 기(氣) 철학(哲學)의 문을 열어놓았음


② 죽음과 관련된 일화(逸話)


    매월당(梅月堂)이 무량사(無量寺)에서 열반(涅槃)에 들 때 스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거든 화장하지 말고 땅 속에다 3년 동안 묻어 둬라. 그 후에 정식으로 화장해 다오.”라고 했다.

    스님들은 매월당(梅月堂)이 원한 대로 시신을 땅에 묻고는 3년 후에 다시 정식으로 장례(葬禮)를 치르려고 무덤을 열었는데, 관을 뜯고 보니 매월당(梅月堂)의 시신(屍身)은 살아 있는 사람과 똑같았다.

    얼굴에는 불그레하게 핏기가 감돌고 있어 누가 봐도 산 사람이지 시신(屍身)이 아니었기에 스님들은 모두들 매월당(梅月堂)이 성불(成佛)했다고 확신했다.

    김시습(金時習)이 열반(涅槃)에 든 지 7년 후의 일이다.

    놀랍게도 제자(弟子) 윤군평(尹君平)이 스승 김시습(金時習)을 개성(開城)에서 만났다.

    “아니 스승님,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선화(仙化)하신 지 벌써 7년이 넘지 않았습니까?”

    윤군평(尹君平)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스승에게 여쭸다.

    “나는 오고 감이 자유자재다. 요새는 서경덕(徐敬德)에게 도(道)를 가르치고 있다. 이곳에 왕래한 지 벌써 2년째가 된다.”라고 대답했다.

    김시습(金時習)이 죽어서 3년이 지난 뒤에도 시신(屍身)은 산 사람과 똑같았다는 이야기는 율곡 이이(栗谷 李珥 : 1536~1584)가 왕명(王命)을 받들어 지은『김시습전(金時習傳)』에도 나온다.


③ 불가 사상(佛家 思想)

  매월당(梅月堂)은 유가(儒家)로서 절의(節義)를 지킨 생육신(生六臣) 중의 한 사람으로서 알려져 있지만 실제 그가 성인(成人)으로 산 기간을 헤아려보면 승려(僧侶)로서 더 오랜 기간을 살았던 뛰어난 선승(禪僧)으로서 불교적 깨달음을 통해 유가적 행동 양식에 갇힌 자신의 우울한 영혼(靈魂)을 구원하고 한량없는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세계에 도달한 것으로 보임

  특히 매월당(梅月堂)이 경주(慶州) 금오산(金鰲山)에 은거(隱居)할 때, 원효대사(元曉大師 : 617~686)의 무쟁비(無諍碑)를 만나게 된 것이 매월당(梅月堂)의 사상 편력(思想 遍歷)의 향방을 결정지은 일생일대(一生一大)의 중대 사건(事件)이었는데, 매월당은 대사(大師)가 지향한 민중불교운동(民衆佛敎運動)에 깊이 공감하여 대사(大師)처럼 ‘불기(不羈)’의 삶을 살아갈 것을 결심하였다고 함

  그리고 매월당(梅月堂)이 남긴 불교(佛敎) 관련 서적으로는『화엄석제(華嚴釋題)』?『화엄일승법계도주병서(華嚴一乘法界圖註幷序)』?『십현담요해(十玄談要解)』?『묘법연화경별찬(妙法蓮華經別饌)』?『조동오위요해(曹洞五位要解)』?『사부산 십육제(四浮山 十六題)』?『향엄삼관(香嚴三關)』등 방대한 분량이며, 이 저작들은 선(禪)의 입장(立場)에서 화엄불교(華嚴佛敎)?천태불교(天台佛敎)?선불교(禪佛敎)를 다룬 것으로 어느 것이든 선자(禪者)의 무애(無碍)한 안광(眼光)이 관철되고 있는 저작들인데, 그리하여 율곡 이이(栗谷 李珥 : 1536~1584)가 매월당(梅月堂)을 일컬어 “선어(禪語)를 좋아하여 현미(玄微)한 것을 밝혀냄에 영탈(潁脫)하여 막히고 걸리는 것이 없었으며, 비록 늙은 승?이름난 승으로 그 학문(學問)에 깊은 자라 하여도 감히 그 말에 대항(對抗)하지 못하였다”라고 평가(評價)한 것은 매월당(梅月堂)의 불교적(佛敎的) 식견(識見)과 성취를 크게 인정한 것임


④ 선가 사상(仙家 思想)

  선가서(仙家書)인『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과『해동이적(海東異蹟)』에는 매월당(梅月堂)이 강원도(江原道) 오세암(五歲庵)에 은거(隱居)하면서 선도(仙道)를 닦은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 있음

 

㉠『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

  다음은『해동전도록(海東傳道錄)』에 나오는 글로 매월당(梅月堂)이 스승을 따라 선도(仙道)에 입문(入門)하는 내용(內容)임


    김시습(金時習)에게 선도(仙道)를 가르친 사람은 ‘김고운’으로 원래 중국(中國) 사람이며 본명(本名)은 ‘설현’인데, 고려(高麗) 때 우리나라에 유람차 왔었다.

    그는 지리산(智異山)에 들렀다가 진인(眞人) 권청을 만났다. 권진인은 영생불사(永生不死)하는 선인(仙人)이 되어 최치원(崔致遠) 선생과 함께 지리산(智異山)에 머문다는 분이다.

    이 권진인이 설현을 선도에 입문시켰는데, 훗날 설현은 명오라는 스님을 서대산에서 만나 그 스님한테서도 8년 동안 가르침을 받아 득도(得度)했다.

    설현은 득도(得度)하자 곧 선계(仙界)로 들어가고자 했으나 도(道)를 전수(傳授)해줄 제자(弟子)를 만나지 못해 인연(因緣)이 닿는 사람을 기다렸는데, 이 때 이름을 ‘김고운’으로 고쳤으며, 이름을 바꾼 뒤에는 경상도(慶尙道)와 강원도(江原道)를 오가며 백여 년 동안 어린이들에게『통감(通鑑)』을 가르쳤다.

    그 사이 많은 사람들과 교분을 맺었으나 누구도 그의 참 모습을 몰랐지만, 김고운은 세종(世宗) 18년(1436)에 드디어 선도와 인연(因緣)이 깊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바로 매월당(梅月堂)이었다.

    두 사람은 춘천(春川)에서 만났는데, 당시 매월당(梅月堂)은 팔팔한 청년이었으며, 또 자기를 극진히 아꼈던 세종(世宗)이 아직 왕위(王位)에 있던 때였으니 세상(世上)에서 큰 일을 하고 싶었기에 김고운이 수도(修道)를 권했지만 매월당(梅月堂)은 관심이 없었다.

    그 후 매월당(梅月堂)이 오세암(五歲庵)에 머물 때 김고운이 그를 찾아왔으며, 그리하여 이번에는 서슴지 않고 김고운을 스승으로 모시고 열심히 선도를 닦았다.

    김고운은 매월당(梅月堂)에게 도를 전한 뒤에 수해선(水解仙)이 되었는데, ‘수해선(水解仙)’이란 몸이 물로 화(化)했다가 선계(仙界)로 올라가는 선인(仙人)을 일컫는 말이다.

 

㉡『해동이적(海東異蹟)』

  다음은『해동이적(海東異蹟)』에 기록된 것으로 매월당(梅月堂)이 제자(弟子)를 가르치는 내용(內容)임 

    매월당(梅月堂)이 오세암(五歲庵)에 머물 때 있었던 일화(逸話)를 이렇게 전한다.

    김시습(金時習)이 일찍이 설악산(雪嶽山)에서 은거(隱居)할 때, 강릉(江陵) 사람 최연이 친구 대여섯 명과 함께 제자(弟子)가 되겠다며 찾아왔는데, 그 인물(人物)됨을 살펴보니 최연이 제일 쓸 만했기에 다른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고 최연만을 제자(弟子)로 삼았다.

    최연은 오세암(五歲庵)에서 매월당(梅月堂)과 함께 지냈는데, 두 사람이 사제지간(師弟之間)이 된 지 어느덧 반 년이 지났다.

    최연은 자나깨나 스승의 곁을 떠나지 않았는데, 밤중에 어쩌다 잠이 깨어 눈을 떠 보면 스승이 온데간데 없었다.

    이런 일이 자주 있자, 최연은 스승이 한밤 중에 도대체 어딜 가서 뭘 하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고, 그래서 하루는 자는 체하고 있다가 스승이 방을 나간 다음 곧바로 뒤쫓았지만, 순식간에 사라져서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몇 번 실패한 끝에 드디어 하루는 스승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김시습(金時習)은 골짜기 하나와 능선 하나를 넘어 넓은 바위가 있는 데로 갔고, 그곳에서는 누군가가 먼저 와서 김시습(金時習)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바위에 앉아 한참 동안 얘길 나눴지만, 최연은 그들이 하는 얘기를 너무 멀어서 알아듣지 못했다.

    그런데 김시습(金時習)은 최연이 몰래 숨어서 엿본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튿날 아침 김시습이 정색을 하고는 “나는 너를 제자(弟子)로 삼을 만하다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가 사람을 잘못 봤다. 네가 너무 번거롭고 조잡하여 더 이상 가르칠 수가 없다. 물러가라.”고 꾸짖었다.

    최연이 백배사죄(百拜謝罪)했으나 스승은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두 사람의 사제관계(師弟關係)는 반 년 만에 깨지고 말았다.

    김시습(金時習)은 도를 홍유손(洪裕孫 : 1431∼1529)?허암 정희량(虛庵 鄭希良 : 1469~?)?윤군평(尹君平) 등에게 전했는데, 이들 세 사람은 모두 유명(有名)한 이인(異人)들이다.

    정희량(鄭希良)은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까지 지냈는데, 연산군(燕山君)이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게 될 줄 알고 미리 종적을 감췄다.


글쓴이 : 박성일

출처 : 피안의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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