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열전(東夷列傳)》
- 공빈(孔斌 : 공자의 7대손)- (出 東國烈傳)
공빈(孔斌)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약2300년전) 사람으로 위(魏)나라의 재상이었다. 공자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공빈(孔斌)은 일반책에서 찾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의 공겸(孔謙)이라는 이름을 노년에 공빈(孔斌)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史記 참고)
홍사--<<동이열전>> 의 내용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
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해석--
동방에 오래된 나라가 있는데 동이(東夷)라 한다. 훌륭하신 단군(檀
君)이 계셨는데 구이(九夷:동이9족)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셨다.
요 임금 때의 일이다.
순임금은 동이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와서 임금이 되어 훌륭한 정치를 하였다.
동이의 나라에는 자부선인(紫府仙人:배달 국 제14세 치우환웅 당시의 선인) 이라하는
도통한 분이 계셨는데 '황제 헌원(중국인의 시조)' 씨가
그 문하에서 내황문(內皇文)을 배웠다.
그는 '염제신농' 씨의 뒤를 이어 중국의 임금이 되셨다. 중국의 고대 나라인
하나라 우임금의 '도산회의(塗山會議)'에 동이의 부루(夫婁:단군 조선 제2세 단군)께서
친히 와서 나라의 경계가 정해졌다.
동이인 유 위자(有爲子:제13세 흘달 단군 당시의 선인)는 하늘이 내신 성인인데
그 분에게서 '중국'이라 하는 이름을 얻었고 이윤(은나라 건국 공로자)이
그 문하에서 배워서 은나라 탕임금의 현명한 신하가 되었다.
"동이는 그 나라가 비록 크지만 남의 나라를 업신여기지 않았고, 그
나라의 군대는 비록 강했지만 다른 나라를 침범하지 않았다. 풍속이
순박하고 후덕해서 길을 가는 이들이 서로 양보하고, 음식을 먹는 이
들이 먹는 것을 서로 양보하며, 남자와 여자가 따로 거처해 함부로는
섞이지 않으니, 가히 '동방예의군자국'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은나라
기자(箕子)가 주나라 신하가 되지 않고 동이땅(단군조선)으로 갔다"
나의 할아버지 공자(孔子)께서 동이에 가서 살고 싶어 하셨다.
나의 벗 노중련도 동이로 가고 싶어한다. 나도 역시 동이에 가서 살고 싶다.
예전에 동이의 사절단이 온 것을 보니 대국인다운 모습이었다. 동이는
대강 천년 이상 전부터 중국과 우방이었으며 사람들이 서로 왕래했다.
위나라 安釐王 10년 곡부에서 공빈 씀"
한민족 정통사서[환단고기]단군한국 제12대 아한(阿漢) 단군천왕(天王)의 역사
[하(夏)나라의 망조(亡兆)가 무르익다]
서기전1799년 임술년(壬戌年)에 하(夏)나라 사람이 들어와 걸왕(桀王)이 무도하여 스스로 망할 것이라 전하였다.
걸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인데, 말기에 달기(妲妓)라는 여자에 빠지고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여 나라의 정세(政勢)가 극도록 불안하게 되었던 것이며, 이에 제후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이고 하나라의 제후국에 해당하는 상(商)나라의 탕(湯)이 군사를 일으키곤 한 것이다.
서기전1833년에 송화강의 북쪽에서 외뿔짐승(一角獸)이 출현한 것은 하(夏)나라의 망조(亡兆)를 나타낸 자연현상이 될 것이며, 서기전1813년에 상탕(商湯)이 군사를 일으키자 하나라 걸왕이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하였던 것이고, 이에 단군조선이 군사를 내어 탕을 치도록 하니 탕이 사죄하므로 군사를 물렸던 것이 된다.
그런데, 하나라 걸왕의 폭정이 멈추지 않고 계속되므로 상탕(商湯)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고, 결국에는 단군조선의 국자랑(國子郞) 사부(師傅)가 된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의 제자였던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둔 탕(湯)이 단군조선의 도움으로 서기전1766년에 하나라를 멸하고 상(商,殷)나라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하(夏)나라는 서기전2224년에 우(禹)가 단군조선의 사자(使者) 유호씨의 명을 받아 유상(有象)과 함께 순임금을 협공하다가 창오(蒼梧)의 들에서 우의 군사가 순임금을 죽였고, 이에 우가 권력욕에 눈이 멀어 단군조선의 명을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하며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독단(獨壇)을 설치하여 결국 단군조선을 반역하였던 것이고, 정식 천자국(天子國)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후대에 하나라 왕이 단군조선에 예를 표하면서 묵시적(黙示的)으로 천자국을 인정받은 것으로 된다.
하(夏)나라 말기에 상탕(商湯)이 군사를 일으켜 공격을 해오자 단군조선에 구원을 요청한 사실로 보아 하(夏)나라는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서의 천자국(天子國)임을 스스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 되고 실제로 망하기 이전인 서기전1813년과 서기전1767년 등 두차례 이상 군사적 구원을 받은 사실이 있기도 하다.
[은탕의 재상 이윤(伊尹)의 스승, 유위자(有爲子)]
서기전1797년 갑자년에 하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상(商)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마다하고 단군조선에 많이 망명하였다. 이윤(伊尹)이 상(商)나라 탕(湯)의 재상이 되어 탕을 도와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쳤다. 이에 이윤의 스승이었던 유위자(有爲子)가 “이는 사람을
사랑하고 하늘을 따르는 일이지만 이윤(伊尹)이 아니면 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때 하나라 사람들이 단군조선에 대거 망명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역사적 망명 사건은 이후 중국역사에서 종종 나타나며, 하(夏)나라의 건국 당시인 서기전2224년경에도 하나라 시조 우(禹)가 단군조선을 반역하여 자칭 하왕(夏王)이라 하면서 단군조선의 정치제도를 흉내내어 마음대로 제후를 봉하고 조공(朝貢)을 받는 등 폭돌한 정치를 펼치므로, 이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라의 땅에서 탈출하여 단군조선 직할 영역으로 망명하였던 사실도 있었다.
이윤(伊尹)이 처음부터 상탕(商湯)의 사람이 아니었으나, 상탕이 결국 이윤(伊尹)을 재상(宰相)으로 등용하면서 본격적으로 세력이 팽창하고 민심(民心)을 얻음과 더불어 하(夏)나라를 멸할 자신감을 갖게 되었고, 결국에는 단군조선의 군사적 후원까지 얻어 천명(天命)이라는 명분(名分)하에 하나라를 멸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위자 선인은 서기전1950년경 이전에 출생하여 서기전1797년 현재 약150세이던 때가 되는데, 이윤이 상탕의 재상이 되어 본격적으로 하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하나라는 이미 기울었고 이 하(夏)나라를 경략할 인물로 곧 이윤만이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서기전268년에 지었다는 위(魏)나라 사람이자 공자(孔子)의 7세손으로 전하는 공빈(孔斌)의 홍사(鴻史) 서문에도 유위자(有爲子) 선인(仙人)의 제자이던 이윤(伊尹)이 은탕(殷湯)의 재상(宰相)이 되었다라고 적고 있기도 하다.
이에 앞서 유위자 선인은 서기전1833년에 송화강 북쪽지역에 출현한 외뿔짐승을 하(夏)나라의 망조(亡兆)로 내다보았고, 서기전1797년에 이르러 유위자(有爲子) 선인이 하(夏)나라를 대신할 은(殷)나라는 이윤(伊尹)의 보좌(輔佐)로 이룰 것이라 단정한 것이 된다.
[우가(牛加) 홀달(屹達) 즉위]
서기전1783년 무인년(戊寅年)에 상나라 사절이 처음으로 입조하였다. 이해 7월에 아한(阿漢) 천왕이 붕하고 우가(牛加) 흘달(屹達)이 즉위하였다.
이때, 상(商)나라가 하나라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어느 정도 힘을 과시하던 때가 되는데, 상나라의 상국(上國)이 되는 하(夏)나라를 무시하고 하(夏)나라의 상국(上國)이 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에 직접 사절을 파견하여 예를 표한 것이 된다. 이때까지 단군조선은 하(夏)나라 정세를 관망한 것이 되며 하나라와 상나라 중 어느 나라를 후원할지는 도(道)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정하였던 것이 된다.
이 흘달(屹達)을 대음달(代音達)이라고도 하고, 제15대 대음(代音) 천왕의 대음(代音)을 후흘달(後屹達)이라고 하는데, 흘달(屹達)이 클달(泰地)의 음차가 되는 글자라면, 대음달(代音達)의 대음(代音)은 대음(大音)으로서 “큼”을 나타낸 이두식 표기가 되는 것이라 보이기도 한다. [끝]
홍사(鴻史)-동이열전
홍사(鴻史)-지은이:지광한(池光翰)
생몰년대 : 1695(숙종21)∼1756(영조32)
출생지 : 충북 청주 와송리
조선후기의 학자. 자(字)는 휘보(輝甫), 호는 설악(雪嶽), 본관은 충주,
1695년(숙종 21년) 을해(乙亥) 정월 19일 인시(寅時)에 청주(淸州) 와송리(臥松里)에서
출생(出生)하였다. 7세에 소학(小學)을 그 선친(先親)에게서 배우고 9세에 벌써 문리(文理)가 통(通)하여 사략(吏略) 칠권(七卷)중 시(詩)·부(賦)·책(策) 등 문장(文章)을 쉽사리 풀이하니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 일컬었다.
16세까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두루 섭렵하고 주역(周易)을 읽는데
어머니 이씨(李氏)가 병(病)이 들어 공이 시약(侍藥)을 함에 효성을 다하였다.
17세가 되어서는 서전(書傳)을 천독(千讀)을 하고 의방서(醫方書)를 읽어
약방문(藥方文)을 내어 손수 지어 봉양하기도 하였다. 1712년(숙종38년) 임진(壬辰)에
송씨가문(宋氏家門)과 혼인(婚姻) 하였으니 이 때 공(公)의 나이 19세였다.
21세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고 23세 때는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이듬해 24세 되던 2月에 아버지 궤연( 筵)을 모시고 문의(文義) 신지(新池)로 이사하여 집이 극빈한 까닭에
땔나무를 하러 가는데도 책을 끼고 가고 하는 것을 본 나무꾼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한다.
34세때 청주병영(淸州兵營)을 지내다 병사(兵使) 이봉상(李鳳祥),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과 더불어 시율(詩律)을 지으며 읊고 조금 그곳에서 머물었는데 1728년(영조4년) 3월 15일 이인좌(李麟佐) 적변(賊變)이 일어나(戊申政變) 조정에서는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보내어 토벌하는데 이봉상(李鳳祥)과 남연년(南延年)도 참여하여 살해되었다.
이 일을 당한 공(公)은 왕록(王綠)은 먹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때 몸만 빠져 나와
집에 돌아와서 가묘(家廟)을 땅에 묻고 처자를 거느리고 산중(山中)에 들어가 피난하였다가 5월에 아산(牙山)에 가서 이봉상(李鳳祥) (시호 忠愍)에게 제향(祭享)하였다.
1731년에는 함안(咸安)의 안인촌(安仁材)으로 이사하여 홍사(鴻吏; 史의 오타가 분명)를 지었다. 혹은 지씨홍사(池氏鴻史)라고도 하는데 반고(盤古)에서부터
명(明)나라까지 제왕통기(帝王統紀) 16편(編) 열전 32편(列傳 32篇) 등이다.
지광한(池光翰)의 홍사(鴻史) 서문 에 공빈(공자의 7대손)이 썼다는
동이열전의 서문을 썼다는 내용을 인용함.
홍사의 소재-현재 두 곳
소재-- 1-군산대 박물관
2- 역사학자 송모씨가 가지고 있다고 함
(이건 필사본인듯)
홍사(鴻史) 이책은
중국 안리왕(위나라 제7대왕) 10년,
즉 서기전 267년 공자(孔子)의 7세 후손인 공자순(孔子順)이 서문을 쓴 책으로
발해 대야발이 단기고사의 서문을 쓴 시기가 서기 729년이므로 무려 단기고사보다 996년전에 서문이 쓰여진 책으로 소개되고 있습니다
참고바랍니다
< 홍사(鴻史)서문 >
동방에 나라가 있었으니 가로되 동이라 별의 분포로서는 기미(箕尾)이고 땅은 선비(鮮卑)에 접해 있었다 처음에 단군신인(檀君神人)이 있어 드디어 구이(九夷)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니 요(堯)와 더불어 나왔다 우순(虞舜)이 동이에서 났으니 포의자(浦衣子)로부터 수학(受學)하였다 중국에 들어 와서 천자가 되어 백왕을 뛰어 넘는 정치를 했다.
광성자(廣成子)는 남보다 월등한 지혜의 도학(道學)이 있어 황제(황제)가
그의 내문(內文)을 받아 요제(堯帝)에게로 그 대를 이은 임금이었다 소련(少連) 대련(大連)이 거상(居喪) 석달을 게으르지 않고 피눈물로 3년을 잘했으니 나의 부자(夫子 = 孔子)가
착하다고 칭찬했다. 하우(夏禹)와의 도산회의(陶山會議)에서 부루사자(扶婁使者)를 보내어 국경을 정하였다. 유위자(有爲子)는 한얼이 낸 선인으로서 그 빛나는 이름이 중국에 넘쳤다.
이윤(李尹)이 그 문중에서 수학하였다. 은나라 탕(湯)이 이윤을 불러 현인(賢人)을 물으니
동방(한국)을 가르쳐
- 그 나라는 국세가 크지만 교만하지 아니하고
- 그 나라는 군사가 강하나 침략하지 아니하며
- 그 나라는 풍속이 어질어 가는길을 양보하고
- 그 나라는 배곺은 사람에 밥을주어 안굶기며
- 그 나라는 남녀가 거처를 달리하여 유별하고
- 그 나라는 남녀가 자리를 한테하여 안앉으니
가히 예의 바른 동방의 군자국이다
이런 고로 은태사(殷太師) 기자(箕子)도 주(周)나라에 신하될 마음이 없고,
동이(東夷) 땅으로 피해 살았다 나의 선조인 부자(夫子 = 孔子)도 더럽지 아니한 동이에
살고자 했다 나의 벗 노중연(魯仲連)도 또한 동해(東海)를 밟고져 하는 뜻이 있었다.
나 또한 동이에 살고 싶은 뜻이 있다. 지난해 동이 사절의 입국하는 그 늠름한 모습을
보았는데 과연 대국(大國)다움의 금도(襟度)가 역력하였다 대저 동이는 수천여년 이래로
우리 중화와 우방의 우의가 있었다.백성들이 서로 가서살고, 와서 살아 접하는 기회가
끊이지를 않았다 나의 선조 공부자(孔夫子)께서도 동이가 더러운 곳이 아니라고 한
그뜻이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또한 여기에 있었다
고로 나 또한 느낀바 있어 그 실정을 기록하여 뒷 사람에게 보이고져 한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주(周)나라 난왕(난王) 47년 癸巳也)
곡부(曲阜) 공자순(孔子順) 기(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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