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지
종 목 : 사적 제8호명 칭 : 사천왕사지
분 류 : 기타
수 량 : 12,840㎡
지정일 : 1935. 02. 24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1
시 대 : 신라 문무왕
★ 상세설명
四天王寺(사천왕사)는 文武王(문무왕) 19年(679)에 創建(창건)하였으며 記錄(기록)에 의하면 즉上王元年(상왕원년)(674) 唐(당)은 劉仁軌(유인궤)를 鷄林道總管(계림도총관)으로 삼고 신라를 侵攻(침공)하였으나 敗走(패주)하게 되었다.
그 다음해 다시 薛邦(설방)을 將師(장사)로 삼고 鍊兵(련병) 50萬(만)으로 新羅(신라)를 侵功(침공)케 했다.
이 事實(사실)을 金仁問(김인문)이 探知(탐지)하여 入唐(입당)하여 있던 義相法師(의상법사)에게 傳(전)하여 歸國上聞(귀국상문)케하였다.
王(왕)은 그 防禦策(방어책)을 묻자 明朗法師(명랑법사)가 龍宮(용궁)에서 秘法(비법)을 傳(전)해 듣고 왔다 하니 下聞(하문)하기로 하여 묻자 狼山(낭산) 남쪽에 神遊林(신유림)이 있으니 그 땅에 四天王寺(사천왕사)를 創建(창건)하면 될 것이라 하였다.
貞州(정주)에서 使臣(사신)이 들어와 唐兵(당병)이 無數(무수)히 海上(해상)을 돌고 우리 國境(국경)을 들어옴을 보고하자 王(왕)은 明朗法師(명랑법사)를 불러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法師(법사)는 彩帛(채백)으로 假構(가구)를 만들면 될 것이라 하여 彩帛(채백)으로 假寺(가사)를 만들고 풀을 갖고 5方(방) 神像(신상)을 만들어 瑜(유)가(?) 明僧(명승) 12人(인)으로 明朗法師(명랑법사)가 首座(수좌)가 되어 大豆婁秘法(대두루비법)을 행하니 唐兵(당병)은 交戰(교전)도 하기전에 風浪(풍랑)이 일어나 물에 가라 앉았기 때문에 뒤에 절을 세워 四天王寺(사천왕사)라 하였다 」고 있는 것이다. 國家鎭護(국가진호)를 위한 國刹(국찰)이며 寺址(사지)에서 出土(출토)된 文樣塼(문양전) 특히 綠釉(록유)四天王像塼(사천왕상전)은 精巧無比(정교무비)하다.
金堂址(금당지), 塔址(탑지), 2基(기)의 龜趺(귀부)가 있다.
북쪽은 鐵道(철도)로 인하여 파괴되었다.
寺域(사역) 3,884평이다.
★ 연혁(유래)
낭산(狼山) 남쪽 기슭에 위치한 사천왕사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9년(679)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발원하여 세운 절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가 부처의 힘으로 당나라 세력을 물리치고자 하는 호국염원이 깃든 사찰로 사천왕사 성전(四天王寺 成典)을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지금은 금당터·목탑터·건물터와 당간지주·머리 부분이 없어진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2기 등이 남아 있다.
유적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철로를 내면서 파괴되었다.
이 절터에서 출토된 사천왕상전(四天王像塼) 파편은 당시 최고의 조각가 양지(良志)가 만든 힘차고 사실적인 소상(塑像)으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 찾아가는길
경주시 배반동에 있다.
국립경주박물관 앞에서 불국사, 울산방면으로 난 7번 국도를 따라 1.7Km쯤 가면 길 왼쪽으로 광산마을 입구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사천왕사터다.
오른쪽으로는 화랑교육원가는 도로가 나 있다.
주차장은 따로 없다.
절터 앞 당간지주 옆에는 승용차 한 대 정도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으나 대형버스는 근처 신문왕릉 주차장을 이용해야 한다.
오고가는 차들이 많아 차를 돌릴 때 조심해야 한다.
시내에서 불국사나 외동가는 시내버스를 타고 가다 광산마을 입구 사천왕사터에서 내리면 된다. 주변에는 숙식할 곳이 없다.
귀면와
귀면와(鬼面瓦) (귀면기와)
국적/시대 : 한국(韓國) 통일신라(統一新羅)
재질 : 토제(土製) 경질(硬質)
크기 : 높이 : 27.7 cm / 너비 : 23.3 cm / 두께 : 4.6 cm
용도 기능 : 주(住) 건축부재(建築部材) 지붕재(지붕재) 귀면와
(鬼面瓦)
지정구분 : 보물(寶物)
참고문헌 : 황룡사지(皇龍寺址) 발굴보고서(發掘報告書)』 도
판(圖版) 258-2. 『국립경주박물관』1997. 도판 80
출토지 : 경상북도(慶尙北道) 경주시(慶州市)
소장기관 : 국립1(國立1) / 경주(慶州) / 황룡(皇龍)
귀면와통일신라시대에 황룡사(皇龍寺)의 지붕 위에 올려진 이 치미(치尾)는 당시 벽사(벽邪)의 용도와 함께 장식적인 기능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전체 형태는 사각형이나, 밑면은 지붕 위의 기와 등에 걸치는 반원형(半圓形)으로 처리하였고, 테두리는 작은 구슬무늬[珠文]를 일정하게 배치하고, 중앙부는 볼륨감 있게 귀신의 얼굴을 넣었습니다.
귀신은 부릅뜬 두 눈, 양측으로 솟아난 뿔과 그리고 크게 벌린 입에 날카로운 이빨을 무섭게 표현하여 역동적인 느낌을 줍니다.
삼국시대의 귀면와
또한 주위에 수 조의 서기(瑞氣)가 돌아가 여백을 적절히 활용하였고, 양측의 턱면에는 유려한 당초무늬[唐草文]를 배치하였으며, 정부(頂部)에 당시 못을 꽂았던 원공(圓孔)이 있습니다.
사천왕상
수미산(須彌山) 중턱에 살면서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4명의 대천왕상.
(수미산:불교의 우주관에서 우주의 중심을 이루는 거대한 산).
<구사론 俱舍論>에 의하면 세계는 거대한 원통 모양의 풍륜(風輪)·수륜(水輪)·금륜(金輪)으로 떠받쳐져 있고, 금륜 위의 대양에는 다시 9산(九山)과 8해(八海)가 있다. 대양의 중심부에 16만 유순(1유순은 약 7㎞)의 높이로 솟아 그중 8만 유순은 물 속에 잠겨 있다. 정상에는 제석천의 궁전이 있고 중턱에는 사천왕의 거처가 있다. 수미산을 7개의 향수 바다와 금산이 둘러싸고 있으며, 이 외측의 사방에 인간이 사는 섬부주(贍部洲)·승신주(勝身洲)·우화주(牛貨洲)·구로주(瞿盧洲) 등의 4대주가 있다. 섬부주 밑은 8한(八寒) 8열(八熱)의 지옥이며 대양의 외곽을 둘러싼 것이 대철위산(大鐵圍山)이다. 하나의 수미산을 정점으로 하는 이것이 세계의 기본 단위인 1(小)세계이며, 둘레를 맴도는 태양과 달이 여기에 포함된다. 보통 4대주·태양·달·수미산·6욕천·범천(梵天)을 모두 포함하여 1세계로 친다.
사대천왕(四大天王)·사왕(四王)·호세사왕(護世四王)이라고도 한다.
즉 동방에 지국천왕(持國天王), 서방에 광목천왕(廣目天王), 남방에 증장천왕(增長天王), 북방에 다문천왕(多聞天王)을 각각 배치했다.
사천왕은 인도신화에 나오는 야차(夜叉 Yakṣa)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고 있지만 일찍부터 불교에 받아들여져 원시경전인 〈장아함경 長阿含經〉에 나타나고 있다.
사천왕의 조형이 성립된 것은 4세기경 〈금강명경 金剛明經〉·〈관정경 灌頂經〉이 유행하기 시작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처음 인도에서 도상화된 사천왕상은 간다라 출토의 부조(浮彫)와 불전도(佛傳圖) 등에 나타나는 것처럼 고대 인도의 귀인(貴人) 모습을 하고 있으나 중앙 아시아를 거쳐 중국화되는 과정에서 무인형(武人形)으로 변했는데 이는 중국·한국·일본 등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사천왕은 나라와 경전에 따라 조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며 지물(持物)도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칼·창·탑 등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지국천은 수미산의 동쪽을 지키는 동방천왕으로 국토를 수호하고 중생을 편안하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형상은 대개 몸에 갑옷을 걸치고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며 드물게 오른손에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것도 있다.
광목천은 수미산의 서쪽을 지키는 서방천왕으로 항상 깨끗한 눈을 가지고 중생을 살펴서 이익되게 해주는 신(神)이다.
원래 3개의 눈을 가진 힌두교의 시바(Siva) 신에서 유래된 것으로 크고 넓은 눈 또는 진기한 눈이라는 의미에서 나온 말이다.
형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보통 갑옷을 입고 새끼줄[絹索]과 삼차극(三叉戟)을 가지고 있다.
증장천은 수미산의 남쪽을 지키는 남방천왕으로 구반다(鳩槃茶) 등 여러 귀신을 지배하고 항상 중생의 이익을 증진시켜 준다.
그 형상은 갑옷을 입고 왼손은 주먹을 쥐어 허리에 둔 반면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다문천은 수미산의 북쪽을 지키는 북방천왕으로 항상 부처님의 도량(道場)을 수호하면서 설법을 듣는다고 한다.>
인도 고대신화에 나오는 재보신(財寶神)인 구베라(kuvera)에서 유래된 신으로 비사문천(毘沙門天)이라고도 한다.
보통 갑옷을 입은 채 오른손에는 창·막대기·보서(寶鼠)를 가지고 있으나 왼손에는 항상 보탑(寶塔)을 들고 있어 사천왕의 명칭을 확인하는 데 하나의 기준이 된다.
이 천왕은 단독상으로도 숭배되었으며 간혹 그의 비(妃) 길상천(吉祥天)이나 아들인 선이사동자(善師童子)를 함께 표현한 예도 있다.
한편 라마 불교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 계통의 사천왕은 지국천이 비파, 증장천이 검, 광목천이 새끼줄, 다문천이 보서 또는 보탑을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유사 권4 양지사석조(良志使錫條)에 신라 선덕여왕 때 양지(良志)라는 명장(名匠)이 영묘사(靈妙寺)에 사천왕상을 조성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7세기경에는 사천왕상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크게 유행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사천왕사지 출토 녹유사천왕상전(679)을 비롯하여 감은사지 3층석탑에서 출토된 금동사리기에 부착된 사천왕상(682), 석굴암의 사천왕상(750경), 원원사지 탑부조 사천왕상, 염거화상탑 부조 사천왕상(844) 등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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