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증산도 개벽문화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5)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7. 11. 2. 23:18

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5)보천교의 고민과 행동


- 1924년 갑자년에 가지는 보천교 내부의 고민

"1924년 갑자년에 천자등극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보천교 내부에서는 보천교의 부침(浮沈)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1923)를 넘기면서 당시 보천교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기로에 서 있었다. 

1924년 2월의 자료에는 이러한 보천교의 고민과 행동방향에 관한 내용이 보인다. 

“보천교의 부침(浮沈)은 실로 기로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략> 

독립운동을 시도해도 손병희의 3·1운동(1919. 3.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 분명하며, 연기(延期)의 방책으로 만주방면으로 차경석 이하 출동하여 일대(一大) 포교(布敎)를 시도함으로써 

기대를 실현 □□□□□□ 이에는 상당한 비용과 당국의 주목을 받아 생각보다 효과 심히 

적어서 채용하지 못했다. <중략> 교도(敎徒)의 신용 상 제 1로 천도교당 이상의 교당(敎堂) 

신축, 학교의 신축, 사회사업 시설을 경영하여 인기를 획득하는 수단으로는 100만 엔의 

자금을 요하고 있다.”

이 내용은 당시 보천교의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보천교는 재편된 내부조직(60방주제 등)을 토대로 1920년대 들어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고 차칭·타칭 600백만이라는 교도를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앞서 보았듯이 3·1민족독립운동 이후에는 군자금 모집과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와도 연결되어 활동하여 왔다. 그러나 1924년에 들어서면서 기로에 선 것이다.
 
왜 이 해가 고민인 것일까? 1924년은 갑자년이다. 그런데 보천교는 1921년 황석산에서 

고천제(告天祭)를 하면서 시국(時國) 건설을 내세웠고, 갑자년이 되면 교주 차경석이 천자(天子)의 자리에 오르고 그를 보필하던 사람들도 재상(宰相)의 자리를 얻는다고 선전하였다.

 소위 ‘갑자년(1924) 천자등극설’이다.(물론 이 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며 본 칼럼에서도 뒤에 다루기로 하겠다). 이러한 천자등극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보천교 내부에서는 보천교의 부침(浮沈)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보천교 정책의 

중대문제로서 분기점을 맞게 된 것이다. 보천교의 고민과 행동방향이 논의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과 같은 독립운동을 시도해도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인원으로만 본다면 충분한 숫자이지만, 성공하기에는 이미 대내외적 환경이 녹록치 않았다. 식민권력의 집요한 공작과 

끊임없는 감시도 강화되었고, 보천교의 대외적 이미지도 천자등극설로 긍정적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전 해에도 소위 ‘불온문서 사건’을 경험한 터였고, 

혹여 성공한다 해도 3·1운동에 미치기에는 역부족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대안이 필요했다. 신도들과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각종 방안들이 제시되었다. 김좌진과 유정근이 계획했던 ‘만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방안’도 있었고 ‘천도교당 이상의 교당[聖殿] 

건축 방안’과 ‘학교 신축’ 및 ‘사회사업 시설 경영 방안’ 등이 제시되었다. 

비록 100만 엔의 큰 자금이 필요했지만.

먼저 만주 방면으로 진출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 ‘보천교의 

만주 이주계획 이야기’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다만 소위 ‘조만식 사건’(안후상은 ‘권총단 사건’이라 명명한다)의 신문(訊問) 과정에서 나온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조사관이 물었다.

“권총을 가지고 자금을 모집하고, 그 금액을 지금 공사가 중지중인 보천교 성전을 완성하려는 목적이 아닌가?” 대답은 이러하였다.
“자금을 얻어 만주개척을 하려는 생각이었다. <중략> 성전공사의 사실은 들은 기억이 없다.”
다시 물었다.
“만주개척을 해 가면서 독립단의 사업을 원조할 생각이었는가?”
대답은 간결했다.
“그렇다.”
그리고 교당 건축안은 실제로 실행되었다. 1920년 무렵, 조선의 3대 건축물은 조선총독부, 

천도교 대교당, 명동성당으로 알려졌다. 

특히 김구는 임시정부 귀국 연설에서 이렇게 연설하였다.
“천도교 대교당이 없었으면 3·1운동이 없었고, 임시정부가 없었고, 독립이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천도교 대교당과 중앙총부의 건설비가 27만원이었다. 보천교는 결국 이후 보천교 

중앙 본소 성전을 신축하게 된다. 거의 100만원을 들여 공사를 진행했다 하니 

‘천도교당 이상의 교당’의 방안은 이루어진 셈이다.

마을 안에 있는 석축으로 보천교 본소 시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제공=김철수 박사)

학교 설립의 경우는 보흥여자사립수학(普興女子私立修學)을 들 수 있다. 종래 보천교도들은 

자녀들에 대해 소위 신학문을 가르치지 않는다는 방침을 따르고 있었다. 그러나 차경석의 

여동생인 차윤숙은 보흥여자사립수학의 설립을 주장하였다. 이 학교에서 자녀들은 신지식을 

함양하고 장래 사회에서 활약함으로써 보천교 진흥을 꾀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차윤숙의 객실(客室)을 교실로 충당하고, 경북 의성군 의성면 출신의 교도인 김옥선(18세)을 

교사로 채용하였다. 여기에 15명의 여학생을 모집하여 별도의 일과표를 만들어 매일 오전 9시

부터 오후 4시까지 교습시켰다. 여학생만을 위한 학교라는 점이 다소 아쉽지만(그러나 당시 

사회상황을 고려할 때 여학생만을 위한 교육기관 설립도 중요한 의미를 갖기도 한다), 

보천교는 나름대로 신지식을 지닌 인재양성에 힘 쏟고 있었다.

또 뒤에서 적을 기회를 마련하겠지만, 보천교 본소가 있는 대흥리에 기산조합을 설립하여 

생활이 어려운 노동자들의 생활과 권익을 보호하기도 했다. 보천교는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고민했던 방안을 하나하나 행동으로 옮겨 나갔던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