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증산도 개벽문화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7)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7. 11. 2. 23:04

김철수 교수의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7)보천교의 만주이주 계획

1923년, 김좌진 장군이 보낸 밀사 유정근이 체포되면서 김좌진과 차경석의 관계가 발각

되었고, 보천교를 만주로 불러들여 같이 활동하려던 계획이 무산되었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 일제강점기 만주는 조국을 떠나 뜻을 품은 민중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독립운동의 전초기지였다.

1920년대 보천교의 만주이주 계획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총독부가 만주이주를 

강요했다는 설과 이상호가 주장했다는 설이 그것이다. 전자는 ‘1925년 음력 4월에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시모오카 쥬지(下岡忠治)가 차경석을 찾아왔다. 그는 시국대동단의 확장이라는 

명목으로 보천교인의 만주이주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차경석은 응하지 않았다. 시모오카 국장은 문정삼에게 권총을 주어 자신의 요구에 불응한 차경석을 살해하도록 지시하였다.

’(이강오, 1966)는 내용이다.

 

조선총독부의 권력자가 차경석을 만나 보천교의 만주이주를 요구한 구체적 이유가 궁금하다. 

시국대동단의 활동 확대와 관련되었다고는 하지만, 명확한 답은 아닌 것 같다. 차경석은 논란이 된 시국대동단을 해체시켜 버렸다. 문제가 해결된 것 같지만, 소위 괘씸죄에 걸려 차경석의 살해 시도까지 있었다 한다. 이 역시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리고 같은 해, 보천교 내에서 또 다시 만주 이주 및 만주개척 문제가 불거졌다. 시기가 

비슷한 점으로 보아 전자의 같은 사안인 듯싶다. 그러나 이때는 이상호에 의해서였다. 

그는 보천교 혁신운동을 주도하다가 만주로 도주한 보천교 간부였다. 그가 교주 차경석에게 

보천교인의 만주이주를 요구한 내용을 『보천교연혁사』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보천교연혁사

1925년 3월 말경, 이상호가 차경석을 찾아왔다. 그는 교주를 만난 자리에서 3가지 제안을 

했다. 그 중 두 번째가 만주이주에 관한 제안이었다. 곧 ‘만주개척을 위해 보천교도 50 호를 

이민시키면 외무성에서 만몽(滿蒙) 개척비로 10만원을 주겠다 하니 교도를 이주시키고, 

보조금 10만원 중에서 일부를 당국자에게 사례하고 나머지는 보천교에서 사용함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차경석은 단호하게 ‘만주 이민은 불가하다’고 

답한다. 그 이유가 이렇다. ‘외무성 보조금을 끌어 쓸 수 있을지라도 후일에 그 보답이 지극히 

어려우므로 그 말을 듣고 좇을 수 없다.’

물론 위의 두 이야기의 진위는 불분명하다. 전자는 식민권력자가 시국대동단을 빌미로, 

후자는 보천교 간부가 지원금을 빌미로 만주이주를 요청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차경석은 이런 요구들에 단호한 의지로 거절하였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차경석이 원천적으로 만주이주를 거부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다만 식민권력의 제안과 일본 외무성의 도움을 싫어한 것이다. 말 그대로 차경석은 

만주이주는 생각한 바이지만, 시기도 고려해야 하고 또 식민권력의 도움을 받는 만주이주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었다. 주지하다시피 당시 만주지역은 살길을 찾아 이역만리까지 이주한 

동포들의 삶의 터전이었고, 특히 군중지반과 민족운동의 역량이 강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에 유리한 지역이었다. 곧 국내에 비해 독립군들이 보다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지역으로 독립자금을 전달하기에도 용이했던 것이다.

여기에 종교집단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종교가 1910년에 만주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 

독립운동의 거점을 확보하였고, 당시 천도교 연합회도 만주의 고려혁명당 조직에 참여하여 

독립운동에 가세하고 있었다. 전북·익산 등지에 거주하던 오지영 등의 천도교인들이 

1926년 3월 전북과 충남지역에 거주하는 교인 222명을 이끌고 길림성 화전현(樺甸縣) 화수림자(樺樹林子)에 집단 이주했다. 그리고 1919년 3·1 민족독립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했던 승려 백용성(白龍城 1864-1940)도 간도의 용정에 대각교당의 토지를 마련하여

 불교 홍포와 독립자금 지원 등에 참여했다. 또 서간도의 핵심 독립운동조직인 서로군정서도 

1921년 5월에는 본부를 길림성 액목현으로 이동하여 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로 삼는 등 

만주지역은 독립운동의 터전이었다.

차경석도 보천교의 만주이주를 끊임없이 고민했다. 이미 대종교를 바탕으로 독립투쟁을 

전개하던 김좌진 장군이 만주이주와 독립운동의 협력제의를 해왔던 터였다. 이상호도 

1924년 8월에 보천교 혁신운동으로 배신한 간부였지만 중국으로 도주한 뒤 만주에서 

보천교인의 만주이주를 계획하고 있었다. 교주를 다시 만나 용서를 구하는 이상호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을리 없었을 것이다.

그의 제안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었다. 이 무렵 보천교 간부들은 위기에 처한 보천교의 

활성화를 위해 대안을 마련코자 회의를 거듭하여 왔다. 그러한 대안 가운데 하나가 포교의 확대와 활동무대의 확장을 위해 만주로 나갈 생각이었다. 마치 대종교처럼. 그러나 자금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