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의 독립운동과 김좌진 장군
한국인 중 보천교나 차경석을 모르는 사람은 많지만 김좌진 장군을 모르는 사람은 잘 없을
것이다. 장군은 1918년 만주로 건너가 만주벌판을 누비며 독립운동에 헌신하였고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독립운동의 영웅이다. 이러한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와도 인연이 있었다는
사실을 안다면 사람들은 종종 놀란다. 2회에서 지적했던 “보천교는 독립운동에 한 푼도
기여한 적 없다”는 비난에 익숙한 독자라면 더 더욱 놀랄만한 이야기일 것이다.
김좌진 장군은 북로군정서 총사령관으로서 독립군 편성에 주력하였다. 그는 1920년 2월에
길림성 왕청현 십리평(十里坪)에 사관양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여 독립군 지휘 간부들을
길러내었다. 이 해 9월에는 처음으로 사관연성소 졸업생 298명을 배출했다. 명실공히 만주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무장독립운동단체를 양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무장투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내기 위해, 그는 군자금 모집과 무기 구입 등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주지하다시피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김좌진 장군은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6일간 청산리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홍범도, 이범석과 함께)에서 큰 승리를 거뒀다.
일제 강점기 민족적 쾌거였고 독립전투의 금자탑이었다. 단비를 기대했던 조선민중으로서는 큰 선물을 받았고 독립에 대한 확신과 심기일전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전투의
승리 이후 만주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일본군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계속 증파되었다.
그들의 만행도 가일층 심해졌다. 일본군은 여기저기서 아무 죄도 없는 재만 한인들에게
패전의 분풀이를 하기 시작했다. 한인부락을 초토화하는 작전도 전개되었다.
김좌진 부대는 후일을 기약하면서 전략상 소련과 만주 국경지대인 밀산(密山)으로 향했다.
무기와 식량의 보급, 앞으로의 행보 등이 큰 문제였다. 독립군이 점점 흩어지기 시작했다.
김좌진 부대는 다시 북만주 지역으로 이동한다. 1922년 김좌진은 수분하(綏芬河. 흑룡강성
목단강에 市지역)와 북만주 일대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재조직하여 총사령관으로 활동하였다.
본부는 중·소 국경지대인 동녕현(東寧縣)에 두었다. 여기서도 김좌진은 당시 총사령관으로서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징모 등에 상당히 고심하였다(박환, 2010).
3·1운동 직후에는 대중적인 지지 속에서 군자금을 모집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20년 일본군의 만주출병 이후부터는 상황이 크게 변했다. 일본군의 횡포에 대한 두려움으로 재만(在滿)
한인사회가 크게 위축되었기 때문이다.
김좌진은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이러한 군자금
모금활동은 주민들로부터 원성을 사게 된다. 당시 주민들은 일본군들로부터는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경제적인 면에서도 생활이 궁핍한 상태였다. 때문에 그들은 독립군의 군자금
모금에도 마음과는 달리 큰 부담을 느꼈던 것이다.
따라서 만주지역의 독립활동을 위한 군자금 모집활동이 국내로까지 확대되었다. 이 때에도
김좌진 장군은 보천교와 연결되었다. 앞에서 보았지만, 이미 김좌진 장군은 1922년 초에 유정근을 밀사로 특파하여 보천교의 차경석에게 협력을 청하는 서장(書狀)을 보낸 상황이었다.
그리고 가능하면 자신이 소속했던 대종교처럼, 차경석의 보천교도 북만주로 옮겨 함께
독립운동에 진력할 것을 요청했었다. 그러나 유정근이 체포되면서 뜻을 이루지 못했고
군자금만 모집해 만주로 보낸 상태였다. 이후에도 필요한 군자금 모집은 계속되었고,
김좌진 장군과 보천교의 접촉도 계속 진행되고 있었다.
차경석, 김좌진 장군에게 군자금을 제공하다
1924년 11월, 일본 관동청 경무국의 보고 내용을 보자.
“근년 김좌진은 자금 부족 때문에 부하를 해산하여 전혀 활동 불능 상태가 되었다.
이번 봄 조선 내 보천교 교주 차경석(車景錫)과 연락하여 만주 별동대로서 행동하게 되었다.
지난 10월 초순 교주 대표 모(某)가 영고탑(寧古塔)에 와서 2 만여 엔의 군자금을 주었다.
이로써 김좌진은 이 돈으로 옛 부하를 소집해 삼차구(三岔口)에 근거를 두고 포교와 무장대의
편성을 계획해 동지를 인솔해 동녕현(東寧縣)에 들어가려 했다.”
‘김좌진, 군자금을 확보하다’ 라는 문건이다. “근년 김좌진은 자금이 부족하여 부하를
해산하고 활동불능 상태가 되어”라 하였다. ‘근년’은 당연히 1923-24년을 말한다. 북만주
지역 단체들은 1925년 3월 10일 영안현(寧安縣) 영안성(寧安城)에서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이 때 김좌진은 대한독립군단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신민부에서도 김좌진은 우선 대한독립군단에서와 마찬가지로 군자금을 모금하는 데 큰 노력을 기울였다. 군자금은 무장투쟁을 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요건이기 때문이다. 군자금이 없으면 무기를 구입할 수 없고 무기를 구입하지
못하면 당연히 군사작전도 할 수 없다.
보천교로 부터 독립자금 2만원을 받았다는 내용의 문서 (자료제공=STB상생방송 화면 캡쳐) |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좌진은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금코자 모연대(募捐隊)를 조직하여
국내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제의 감시로 순탄하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1920년대 이러한 김좌진 장군의 상황을 고려하면 앞의 기록 내용은 매우 일치하는 점이 많아
보인다. 이미 유정근을 통해 일찍부터 접촉했었던 상황에서, 보천교의 차경석에게
만주 별동대 자금을 제공받은 일은 큰 무리가 없다. 그리고 이 자금으로 무장대와 포교를
계획하였다. 김좌진 장군의 정치지향의 키워드는 대종교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종교에
바탕을 두고 독립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러나 김좌진은 동녕현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영고탑으로 되돌아 왔다. 왜냐하면 이 때 최진동(崔振東)이 동녕현에서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최진동은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에서 그를 포함한 한 3형제가 무장독립군을 훈련시켰고, 이후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에도 함께 참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24년 1월, 길림성장(吉林省長)이 동녕현지사(東寧縣知事)에게 “그(최진동)를 단장으로
하는 대한도독부의 독립군의 수가 4,119명, 장총 4,059정, 기관총 27정, 대포가 4문 등이다.” 라고 보고하여 규모가 컸으나, 1924년 9월에 동녕(東寧) 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이 때 김좌진 장군이 보천교로부터 받은 금액이 2만여 원이라 했다. 그런데 다른 자료도
있다. 거기에는 “동녕부에 근거를 둔 김좌진은 9월 상순 태을교 본부(보천교) 교주 차경석으로
부터 5만 엔을 받아 동녕부에서 옛 부하를 소집하여 무력행동에 나섰다”고 기록하였다. 같은
시기의 기록인 걸로 보면 동일사건이기는 한데, 액수가 차이가 있다. 2만원이라 하여도 작지
않은 돈이지만, 5만원이라면 지금 시세로 본다면 20억 정도로 추정 가능하다. 일제시대 1원이 순금 두 푼(750㎎), 1925년 급여 40원이 쌀 2가마에 해당하였다는 사실 등을 고려한다면
당시 1원은 현재 약 4만 원 정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액수라면 부하들을 재소집하여
무장대를 편성할 수 있는 충분한 금액이다. 보천교에 대한 시선을 바꿀 수 있는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