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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2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7. 11. 24. 14:32

수안 계씨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과 계연수 선생을 생각하며

수안 계씨

우리나라의 계씨는 모두 수안 계씨다. 우리나라에 약 6000여명이 있으며 인구수로 본 성씨 순위로는 290위 정도 된다.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인물로는 가수 계은숙 씨와 야구선수 계형철 전 OB 베어스 투수 그리고 북한의 계순희 전 여자 유도 선수 정도가 될 것이다.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로는 계봉우 선생과 계연수 선생 등이 있다. 

특히 계봉우 선생, 계연수 선생은 당시 독립운동 등의 활약상에 비해 저평가 되다보니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이 두 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수안 계씨에 대해서 알아보면, 수안 계씨(遂安 桂氏)는 황해북도 수안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다. 수안 계씨의 시조 계석손桂碩遜은 중국 명나라 천수天水 사람으로 중국 성양태수城陽太守를 지낸 계경횡桂炅橫의 셋째 아들이다. 「수안계씨족보」에 따르면, 계석손은 명나라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내다가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의 명으로 조선에 예학禮學 전수를 위해 파견되었다. 그 후 조선에 귀화하여 수안백遂安伯에 봉해졌다고 한다. 이로써 수안 계씨가 창성되었다.

시조 계석손의 아들 4형제 대에서 전국으로 이거하였다. 큰 아들인 계원우桂元祐는 선천宣川으로, 둘째 아들인 계원조桂元祚는 강화江華로, 셋째 아들 계원제桂元禔는 강동江東으로 각각 이주하였다. 이후 16세손 계덕룡桂德龍이 삭주朔州에 터를 잡았고 그 자손은 의주義州까지 퍼져 가서 계씨가 평안도를 중심으로 살아가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수안 계씨는 평안북도 선천宣川과 강계江界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의 명문으로 알려져 왔다. 1930년 국세조사 당시 전체 계씨의 97%가 북한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나머지 3%만 남한 지역에 거주하였으며 특히 평안북도 선천군에 대다수의 계씨 집성촌이 있었다.

계봉우(桂奉瑀.1880년∼1959년)

계봉우(桂奉瑀.1880년∼1959년)

 먼저 계봉우 선생에 대해서 알아보자.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는 한글학자이자 역사학자인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이 있었다. 사실 먼 이국땅에서 생을 마감하여 덜 알려진 측면도 있을 것이다. 1880년에 함경남도 영흥군에서 출생한 북우 계봉우 선생은 1911년, 북간도로 망명했고 민족주의 교육에 헌신하면서 『신한독립사』, 『조선역사』, 『오수불망(吳讐不忘)』 등을 편찬하였으며, 북간도 연길 소재 광성학교(光成學校) 교사로 활동하다가 연해주로 건너가 이상설, 이동휘가 주동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와 「건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권업신문勸業新聞」에 10회에 걸쳐 『만고의사 안중근젼』을 연재했다.

거기에서 교직원으로 근무하다가 교육내용이 반일적이라는 이유로 일제 영사관 경찰의 습격을 받고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출옥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한 선생은 중국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북간도 대표의원으로 부임해 1년간에 걸쳐 의정 활동을 했다. 이듬해 중.한 노공동맹연합회 국민회 대표로 참가하기도 했다.
임시정부 간도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간도지방 독립운동단체의 통일 노력과 함께 근대 한민족의 국외 이주와 민족운동에도 지대한 관심을 두고 1920년을 전후로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아령실기(俄領實記)' 등을 발표했다.

1920년에 한인사회당에 가입했고 1921년 6월 자유시 참변 때에는 체포되었다가 다행히 풀려났고 1922년에는 시베리아 남동부 치타주로 옮겨가서 연해주 지역 한인의 이주 개척사 등 항일독립운동의 희귀하고 중요한 내용이 담겨있는 《새바람》을 작성했다.

계봉우는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이주당한 후에도 저술 활동을 계속해 '이두집해(吏讀集解)', '조선문법', '조선말의 되어진 법'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계연수 (桂延壽.1864년 ~ 1920년)

계연수 선생 초상화 (좌측은  오선일씨, 우측은 양종현씨 그림)

 다음으로 알아볼 인물은 수안 계씨로 가장 많은 논란이 있는 독립운동가이자 환단고기 편저자 계연수桂延壽 선생이다. 계연수는 1864년 대대로 조상들이 살아왔던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났다. 27세까지 약초를 캐어서 팔아 생계를 유지하며 여러 양반가와 사찰에서 비장하던 서책과 금석문, 암각문 등 각종 사료를 수집했다. 그가 한민족의 역사를 밝히고자하는 뜻을 이룰 수 있게 된 계기는 해학 이기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독립운동가이자 민족사학자인 이기李沂의 문하생으로 1898년에 『단군세기檀君世紀』와 『태백유사太白遺史』를 간행하였고 1909년 이기 선생이 돌아가시자 단학회의 2대 회장이 되었다. 

2년 후인 1911년에 오동진. 홍범도 장군의 자금 지원을 받아 『환단고기桓檀古記』를 편저하여 30부를 간행했다. 이 책을 통해서 근세조선의 사대주의와 일본 제국주의 식민사관에 의해서 왜곡된 역사가 아닌 9천년 한민족사의 큰 줄기를 바로 세웠지고 본래의 역사를 회복할 수있는 기회를 잡게 되었다. 그 후 계연수는 1919년 임시정부의 이상룡 막하에 들어가 ‘참획군정參畫軍政’으로 공을 세웠다. 그리고 다음해 1920년에 만주에서 일제의 밀정에 붙잡혀 비참하게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유립 선생

이때 환단고기의 편저자 계연수 선생에게는 이유립이라는 걸출한 제자가 있었다. 1907년생인 이유립은 13세인 1919년 10월 부친 단해 이관집 선생을 따라 삭주 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세운 배달의숙이라는 학교에 들어가 계연수 등에게 역사강론을 듣고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유립은  배달의숙 때의 계연수의 모습을 숱이 성긴 수염과 살집이 없는 검은 얼굴 속에서 형형히 빛나는 안광이 인상적이었다고 회고하였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1920년 6월 봉오동 전투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독이 잔뜩 올라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중국군을 강제로 동원하여 토벌작전을 벌이는 참이었다. 그런 와중에 안타깝게도 1920년 8월 15일 계연수 선생은 밀정 감영극에게 잡혀 살해당해 사지가 절단되어 압록강에 버려지고 말았다.  그의 시체를 건져올리는 비극의 현장에 당시 14세의 어린 제자 이유립이 있었다. 후에 이유립에 의해서 계연수 선생의 생애와 면모가 드러나게 된다.

이유립 선생은 해방이 되자 1948년 남한으로 월남하였다. 북한지역에서 내려올 때 『환단고기』 초간본을 가져온 이유립 선생은 1963년 대전 은행동에 정착해서 후학들에게 『환단고기』를 교재로하여 우리 역사를 가르쳤다. 그때 가르침을 받은 고등학생 가운데 양종현와 오선일씨가 있었다.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린 두 고등학생

“(강화도 마리산) 커발한 개천각에는 붓으로 그린 계연수의 초상화도 있다. 계연수 초상화가 나오게 된 연유를 전씨는 “계연수 선생을 비롯해 전해오는 초상화나 사진이 없는 분의 얼굴은 대전에서 ‘오일룡’이라는 필명으로 축구 만화를 많이 그린 만화가 오선일(吳宣日·58)씨가 그렸다. 오선일씨는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한 적이 있어 이 선생의 기억을 토대로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말했다. 오선일씨는 “고등학생 때 나는 친구인 양종현씨와 함께 이유립 선생에게서 환단고기를 공부했다. 그때 내가 받은 호가 ‘단우(檀宇)’인데 ‘단석’이라는 호를 받은 양종현씨와 함께 계연수 선생 등의 초상화를 그렸다”라고 했다.“
 - 신동아 2007년 9월호 제 2부 계연수와 이유립을 찾아서 中 -

좌 : 계연수 선생 초상화, 우 : 계봉우 선생 사진

기자는 계봉우 선생의 사진을 보고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 그림을 대조해보고 깜짝 놀랐다.  같은 수안계씨여서 그런지 몰라도 이유립 선생 제자 두 사람이 그린 계연수 선생의 초상화과 얼굴형과 이목구비가 아주 비슷했다. 이유립은 그림에 자질이 있는 제자 두 학생에게 자신이 직접 보았던 계연수의 몽타주를 열심히 설명했고 이를 들은 학생들은 초상화를 제대로 그려보려 노력했을 것이다. 당시 만화가 지망생이었던 오선일씨(후 오일룡이라는 필명으로 유명 만화가가 됨)가 그린 초상화는 강화도 마리산 개천각에 까지 모셔져 있는 것을 보면 꽤나 비슷하게 그린 초상화로 추정된다. 기자는 계봉우와 계연수. 두명의 사진과 초상화를 보면서 이유립 선생은 분명 계연수 선생을 보았을 것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족보에 없었던 계봉우 선생과 계연수 선생
대한민국에 있는 계씨는 수안 계씨 뿐이다. 그런데 이 수안 계씨의 족보에는 계봉우라는 이름이 없다. 실제로 계봉우의 아들 계학림씨는 몇 해 전 한국을 방문했을 때 족보에서조차 아버지의 이름이 남아있지 않던 현실을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원래 빈궁한 관노(官奴)출신에다 많지않은 성씨여서 그의 가계는 물론, 모친이 장(張)씨라는 것 외에는 부친의 이름조차 아직 알 수 없다고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계연수 선생도 족보에 없다. 수안 계씨 종친회에 확인한 바, 북한 출신 종친들 중 족보에서 누락된 사람이 부지기수이고 일제 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하느라 후손이 끊겨서 이거나 증언자도 없어 족보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란 얘기를 한다.
계연수가 실존인물임을 증명하는 문헌은 『해동인물지』(1969)와 선생이 천부경을 입수하여 세상에 널리 알린 경위가 기록되어있는『정신철학통편』(1920) 등이 남아있다. 
생사를 건 독립투쟁을 벌였던 인물을 증언자가 있고 기록에 분명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족보에 없다는 것을 운운하며 그 존재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환단고기에 담긴 한민족 역사를 부정해야하는 세력들의 야비한 행위로 밖에 볼 수 없지 않을까.

앞서 계봉우, 계연수 선생의 행적과 족보 문제 그리고 초상화 문제를 다루었다. 광복이 된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카자흐스탄 이국땅에는 아직도 한국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가 잠들어있다. 계봉우 선생은 80년의 삶을 한국, 중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 동아시아 4개국을 넘나들며 열악한 환경 속에서 민족의 독립운동과 함께 한국 관련 저술과 교육에 전념하여 '한국학'의 체계를 세운 인물이다. 그는 국어학, 국문학, 한국사는 물론 한국의 경제, 종교, 민속, 음악 등 한국학 전반에 걸쳐 연구하고 저술하였다.

계봉우는 1912년,1936년,1953년 3차례에 걸쳐 『조선역사』를 저술 또는 수정하였다. 선사시대부터 역사를 기술하였고 고구려·백제·신라 중심의 삼국시대를 가야를 추가해 사국(四國)으로 이해하였다. 또한 통일신라와 발해(渤海)를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로 설정하였다. 이런 부분만 보더라도 그의 한국사 저술도 다른 한국학 전반과 더불어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계연수 선생은 한민족사를 제대로 밝힌 인물이다. 그가 펴낸 환단고기는 인류 창세역사와 한민족 9천년사의 국통맥(나라 계보)을 바로 세우고, 인류의 뿌리,원형문화의 실체를 드러낸 역사서이자 문화서다.

계봉우 선생은 1녀 4남의 자식을 두었다. 모두 돌아가시고 막내인  93세 아들 계학림씨가 남아 이렇게 말한다. "우리를 잊지 말아달라." 그의 말은 아버지 계봉우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다. 고려인의 강제이주 역사만을 잊지 말라는 말도 아닐 것이다. “실존 인물인지는 의심되고 있다.”라는 위키피디아 계연수 설명글이 오늘의 현실을 반증한다.

 잊혀진 인물 뿐아니라 잊혀진 우리 역사를 되찾을 때만이 역사마저 왜곡하려는 세력에 맞서 역사운동을 독립운동과 함께 병행해야했던 계봉우, 계연수 선생과 같은 독립운동가와 무명열사들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 될 것이다.

일행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집 안으로 들어가며 손을 흔드는 계학림씨의 모습은 머나먼 타국에 묻혀 역사광복을 온 몸으로 외쳤던 독립운동가들의 쓸쓸한 뒷모습 같아 아쉬움이 더했다.

일행들과 인사 후 손을 흔들며 집으로 들어가는 계학림 선생의 마지막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