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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계봉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7. 11. 24. 14:30

크즐오르다에서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을 만나다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는 항일무장투쟁의 전설 여천 홍범도 장군 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잘 모르고 알려져 있지 않지만 홍범도 장군 묘역 바로 옆에는 독립운동가 계봉우 선생 묘역이 있다.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있는 계봉우 선생 묘소
국내에서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계봉우 선생. 그는 역사학자이자 국어학자로 1880년 함경도 영흥에서 출생하여 평생을 4개의 국가를 넘나들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국내 구국계몽운동을 시작으로 북간도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 상해 그리고 카자흐스탄을 넘나들며 독립운동과 역사 및 국어연구에 힘썼다.
 
그는 항일운동으로 1916년 일본 경찰에 체포돼 3년의 옥고도 치렀다. 북간도로 망명한 선생은 이동휘 선생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으며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북간도 대표로써 상해에서 임시정부 일을 도왔다. 이 때에 월간지 <대진>,<구국일보>, <권업신문>의 기자 등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한 글들을 많이 남겼다. 계봉우 선생은 <권업신문>의 기자로 10여 회에 거쳐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연재하여 독립운동의 의식을 고취시키기도 했다.
 
 선생은 국어학자 뿐만 아니라 역사학자로도 많은 저서를 남겼다. 북간도에서 중등학교 교과서 [조선역사]와 초등학교 교과서 [오수불망] 등을 편찬했으며 이 교과서를 민족 교육 자료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북간도와 연해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 하바롭스크에서도 꾸준히 우리말과 관련 된 책을 집필하고 한인들에게 한글을 보급했다.
 
그러나 그 역시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오게 되었다.  이주 이후에도 선생은 꾸준히 한글 교육과 한국사 연구와 교육에 힘썼다. 이곳에서 선생은 <이두집해>, <북방민족어>, <조선문법>, <조선역사> 등 다수의 책을 남겼다. 특히, <조선역사>는 망명지에서 이뤄낸 한국사 체계화의 결정으로 평가되고 있다. 망명으로 얻은 계봉우 선생의 경험은 한국사를 바라보는 통찰력과 시각을 심어주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집필 된 역사서는 한국 사학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다.
 
그는 크즐오르다에 온 후 80세의 일기로 현지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조선문법', '조선말의 되어진 법' 등 30여 편의 저서를 남기며 국어, 한국문학 등에 대한 연구에 매진했다.
 
계봉우 선생은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고 한인사회당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조명받지 못했다. 우리나라 정부는 1995년이 되어서야 그의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계봉우 선생 묘에 참배하는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
아들 계학림 씨를 만나다.
계봉우(桂奉瑀·1880~1959) 선생의 넷째아들 계학림 씨가 현재 크질오르다에 살고 있다. 겨레얼살리기 국민운동본부는 10월 18일 오전 홍범도 장군과 계봉우 선생 묘를 참배했다. 현장에는는 계봉우 선생의 자손을 만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버스로 이동하는 중간에 연락이 닿아 일행은 계학림 씨를 만나기로 하고 그의 집 근처에 버스를 잠시 세웠다.
 
계봉우 선생 아들 계학림 씨
잠시후 집 문을 열고 나온 계학림 선생. 그는 아흔이 넘는 고령에다 아픈 몸에도 불구하고 나와서 일행에게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명료했다. 많은 고려인이 러시아식 이름을 쓰는 것과 달리 아버지가 지어준 한국 이름을 고집하는 계학림 씨다. 그는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잡으러 온 일본군이 집에 3번이나 불을 지르며 가족들을 괴롭혔던 사실을 증언하기도 했다. 일행은 1백세가 되는 때에 백세연을 크게 열기로 하며 그의 건강을 기원하고 짧은 아쉬운 만남을 뒤로 했다.
 
일정에 없었던 만남이었지만 아들 계학림 선생의 모습만을 보아도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 계봉우 선생을 느낄 수 있었다. 여러 나라를 전전하는 척박한 삶 속에서도 조국의 언어와 역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계봉우 선생의 깊은 뜻을 우리는 고국에 돌아가서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