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폭군이었는가? | ||||||||||||||||||||||||||||||||||||||||||||||||||||||
[오마이뉴스 김정봉 기자] '역사는 승리자의 것'이라는 말이 광해군 묘 앞에 서면 실감이 난다. 폐위된 왕이라 군묘(君墓)의 형식에 따라 간소하게 꾸며지긴 했으나 죽어서도 이 정도 대접 밖에 못 받으니 보기에 딱하여 애가 탄다. 어머니가 쉬고 있는 곳에 묻어 달라는 유언이 있었다고 하지만 광해군이 묻힌 곳은 너무나 외져 찾아가기 힘들다.
인조반정 이후 강화도로 유배 간 광해군은 15년 동안 위리안치 형벌을 받았다. 위리안치 형벌은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는 형벌을 말하는데, 광해군 묘 둘레에 철망이 쳐 있어 마치 죽어서도 위리안치 형벌을 받는 듯하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에서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인물과 사랑받지 못하는 인물이 나온다는 재미있는 기사가 있었다. 사랑받지 못하는 인물로 전두환(제5공화국,mbc)과 선조(불멸의 이순신, kbs)가, 사랑받는 인물로 광해군(불멸의 이순신)을 들고 있다. 광해군은 '백성이 하늘'이라는 혁신적인 말을 하면서 정략적인 이해보다는 백성을 위하는 입장에서 모든 일을 처리한 반면, 선조는 백성의 소리를 듣지 못하고 왕위 유지에만 급급하였기 때문에 그런 평가를 받았다 한다. 광해군의 이런 생각은 그가 왕위에 있는 동안 정책에 그대로 반영하면서 실천해 간다. 그가 내놓은 정책의 근저에는 백성이 자리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1608년에 즉위하게 된다. 즉위과정도 평탄치 않았다. 선조에게는 부인이 8명, 자녀가 15명이 있었는데 첫째부인인 의인왕후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 공빈 김씨에게는 임해군과 광해군이 있었으나 임해군은 왕이 될 재목이 못되었으므로 광해군이 자연스럽게 세자로 등장한다.
순탄치 않은 즉위 과정 결과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폐하고 강화도로 귀양 보냈다가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시키는 폐비살제(廢妃殺弟)를 범한다. 후대에 광해군을 폭군으로만 기억하게 한 결정적 오점을 남기게 된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왜와의 쌍방간의 전쟁이 아니라 명의 개입에 따라 자연스럽게 동아시아 전쟁의 성격을 갖게 된다. 임진왜란은 조선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명 또한 조선에의 파병으로 쇠락의 길을 재촉하였다. 이 와중에 여진족의 힘이 강해지면서 동아시아의 힘의 균형이 서서히 깨지고 있었다.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바뀌고 있는 지금의 정세와 그리 다르지 않다.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둘러싸고 단순하고 편안한 상황이 언제 있었겠느냐 만은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는 상황에서 생존을 모색해야하는 상황이 그 때와 별 반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의 대내적 정책과 대외적 정책(외교정책)은 동아시아의 질서가 재편되고,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나오게 된다. 밖으로는 새로운 질서의 태동 속에 생존을 모색해야 했고 안으로는 흐트러진 민심을 수습하고 국가기강을 확립해야 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은 광해군에게 왕권중심의 일원화된 지배체제를 요구하였다. 이리하여 광해군은 명분보다는 실리와 공리를 중시하고 왕권에 의한 경제권 장악을 시도하여 농민층을 보호하고 지주와 기득권층에 반하는 경제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대동법의 시행은 그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이는 경제적 기득층의 이익의 일부를 희생시킨 정책으로 경제적 기득 보수층의 심한 반발을 야기한다. 이는 붕당정치에 길들여진 선조(宣祖)대의 붕당체제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명분과 의리에 얽매이지 않고 현실과 실용을 중시하는 정치의식은 대외정책에서 빛을 발한다. 명나라의 파병요구에 대해 파병불가피론자들은 명은 부모지국(父母之國)이요,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구해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이 있다고 주장하고 파병에 대한 대의명분을 주장한 반면 광해군은 조선의 어려움을 감안하여 파병을 회피하려는 자세를 취하였다. 결국 외교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가피하게 파병을 하게 되지만 명의 요구에 밀려 파병하게 된 도원수 강홍립은 후금과 조우하게 되자 출병의 부득이함을 알려 화약을 맺는다. 이러한 조선군의 의도적 투항이 광해군의 밀명에 의한 건지에 대해서는 학자간의 논란이 많지만 광해군의 명과 후금에 대한 중립적 태도는 외교사에 남을 만한 역사적인 것이었다. 광해군은 명에 대해서도 상당한 눈치를 본 것으로 보인다. 광해군은 겉으로는 친명(親明)을 과시한다. 후금에 끝까지 항전한 김응하의 절의를 책으로 반포하는 하는 한편, 김응하의 항전사실을 표창한 것처럼 꾸몄다. 특히 중국사신이 다니는 길목에 김응하를 추모하기 위한 사당을 짓게 하여 명은 '부모지국'이요, 명과 조선은 '혈맹관계'임을 드러내 보인다. 조선의 투항이 의도된 것이 아니라 불가피한 조치였음을 명에게 알리려 했다. 한편 광해군의 후금에 대한 정책은 본심은 견제를 하되 관계는 끊지 않는 기미책(羈靡策)이었다. 후금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여 관계는 단절하지 않으면서 필요할 때는 견제하되, 정복하거나 지배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대응을 피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단한 정보수집을 통해 방어책도 마련한다. 명에 대해서는 겉으로는 친명을 천명하면서 후금에 대해서는 유연한 외교적 태도를 취하여 두 세력 사이에서 생존을 모색하게 된다. 실제로 인조반정이후 대후금 정책이 강경책으로 선회하기까지 조선은 후금으로부터 이렇다 할 피해를 입지 않았다. 위에서 정책으로 들고 있는 탈붕당정치와 경제면에서의 개혁적인 정책은 기득세력의 반발을 가져오기에 충분했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며 인조반정을 이끈 세력들은 표면적으로는 광해군의 현실적ㆍ실리적인 외교정책과 폐비살제의 실수를 폐위의 이유로 들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탈붕당정치의 정치의식 속에 진행된 대동법과 같이 기득세력의 목을 죄는 정치에 반발한 쿠데타라 할 수 있다.
광해군은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붕당정치를 배격하고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려는 정치의식을 갖고 있었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기보다는 실리와 효율 그리고 현실지향적인 중립외교를 하였으며 기득세력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개혁적인 경제정책을 수행한 왕이었다. 그 이면에는 백성이 있었고 국가 재건이라는 사명이 있었던 것이다. /김정봉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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