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의 글밭 - 詩.書.畵/南村先生 詩書

수필/소갈비에 양주두병 먹고도 스님인가요? -1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6. 12. 4. 17:48

 

작성일자 : 1986. 9. 18 .수

제    목 : 소갈비에 洋酒 두병 먹고도 스님인가요?

주요내용 : A4용지 50매 분량 - 6회 연재

저자 : 南村 서 호원

1. 이 병기와 밤샘낚시

   아버지의 출가수행으로 빚어진 가족들의 불행

2. 이 병기의 휴가

 0.강원도 산골로 부친면회

 0.양주 죠니워커 2병 다 마신 스님

 0.이 놈아 중이 술, 고기 먹어도 구하여 먹지 않는데 무슨 죄냐

 0.아버님 내말도 들어 보세요

 

 

1985년 3월 15일 선재의 船上生活 할 때다

그 당시 근로자들이 중동 지역으로 대거 나가던 시절

이 중동의 어느 바다에서 배를 타고 해저 유전 개발을 하면서

몇 년 보낼 때 이야기이다.

필자의 1985년 해상생활

 

선상 생활에서 낚시를 하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가 없다.

그들이 공사를 벌이고 있는 해역은 해저에 시설물이 많아서 어업이

금지 되어 있다. 그래서 고기가 유난히 많다. 농담 삼아

물 반 고기반 이라고 할 정도이다. 낚시 대도 릴도 필요 없다.

기계현장에 굴러다니는 묵직한 쇠붙이 하나 주워서 낚시 줄로

연결하고 끝에서 50cm쯤에 낚시 바늘을 몇 개 매어달면 그만이다.

미끼는 소고기나 새우를 쓴다.  식당에 가서 얻어다 쓰는데

별 어려움이 없다.  주로 도미가 많이 잡히고 다른 고기는 이름도

모르거니와 잡혀도 도로 버리고 오직 도미만을 회 쳐서 먹는다.

해저유전 개발은 바다의 깊이와 개발비가 정비례하기 때문에

얕은 바다를 선정 하는데 그들이 공사를 하고 있는 곳도 육지가

보이지도 않는 곳이지만 50m 정도밖에 안 되는 아주 얕은 바다

낚시 줄 60m-70m정도 깡통 같은데 돌돌 감아 놓은 것이 낚시 도구의 전부다. 

이튼 날이 휴일이거나 하면 뜻 맞는 사람들 끼리 대화

나누면서 밤샘 낚시들을 한다.  마침 내일은 쉬는 날이라 선재도 밤낚시를 나섰다. 

낚시도구를 챙겨 나오면서 한방에 있는 이병기씨를 함께 가자고 제의 했다. 

그는 선재 보다 2살 위인데 고생을 많이 했는지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살도 많아 가뜩이나 동안인 선재 보다

나이가 10년은 더 들어 보인다.  산전수전 다 겪어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보여서 선재는 서로 존중하며 잘 어울렸다.

잠자리 정리를 하고 있는 그를 팔꿈치로 툭 치면서 턱으로 낚시를

가리킨다.  그는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잠시 후 그들은 갑판 난간에 앉아 낚시를 드리우고 지난 한주간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대개 선재가 말을 많이 하고 이 병기는 듣는

형태이다. 

본래 말수가 적어 그가 걸어온 인생의 여정에 대해서도

아주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별로 들은바가 없는 정도다.

10분여 침묵이 흐르다가 항상 그러듯이 선재가 먼저 말을 꺼낸다.

 

“요 며칠 동안 고명한 스님들의 수행과정을 그린 책들을 읽고

너무도 깊은 감명을 받아 오늘 저녁은 그이야기 좀 하려고 하는데” 어때요 ?

아니 참 종교는 무얼 했습니까?“

하고는 그쪽 눈치를 살피는데

“종교요? 안다면 다 알고 모른다면 하나도 모르지요”

“무슨 대답이 그래요?

이야기를 듣겠다는 말이요 안 듣겠다는 말이요?“

“아 해봐요 ! 내가 안 듣는다고 말 안할 사람도 아니면서”

선재는 싱긋이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실은 고승 대덕들의

수행 일대기를 읽고 마음에 감동이 격해서

누구에게 이야기 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되어 선재 스스로

내 말 좀 들어 달라는 듯이 반 강제적으로 라도 내뱉고 싶은 심정이

병기는 이미 읽고 하는 말 같다.

 

달마선사에서 육조혜능까지의 수행일화와

심오하고 절묘한 화두의 세계,

여러 가지 창출되는 기적 원효대사와,의상대사의 일대기와 해골 물을 마신 사건

진표율사의 변산 개암사 부사의 방에서 망신참법으로 수행하다가

미륵존불 을 친견한 이야기. 

진묵대사의 곡차에 매운탕 먹고 살아있는 물고기를 배설한 이야기.

그리고 근세사에 이르러 불교를 이끌어 가신 거목 이 성철, 이 청담, 이 효봉,

방 하남, 하 동산 스님들의 이야기 등등

한 시간여 두서없이 이야기를 엮어 가는데 정작 이 병기는 듣는지

마는지 별로 관심이 없는듯하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골똘히 심취한 상태다. 

강 선재는 그저 들어 주는 이 없이 혼자 떠드는 느낌이 들어

그만 중단하고  “내가 하는 이야기들이 관심이 없습니까?”

“사실은 관심 없는 정도가 아니라 듣기가 역겹소!”

“역겹다니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혹시 종교적으로 ....?

이 병기는 대답대신 담배를 한 대 뽑아주며 함께 피워 문다.

담배를 몇 번 깊숙이 빨아서 내뿜은 후에

“이런 이야기는 사생활이 되기 때문에 누구에게도 잘 안하는데

오늘 기왕 이야기가 나왔고 또 우리같이 절친한 사이 어차피

언젠가는 말해야 되겠기에 내 자신의 옛 인생사를 말해줄까 해요”

 

이 병기와 강 선재는 서로 강형, 이형 하고 지내는 사이로서

두 사람 모두 고등학교 정도의 학력 수준이나 책들을 좋아해서

철학지에서 각종교의 경전 까지 두루 읽은 점이 통하여 시간이

되면 깊이 있는 대화를 많이 나누는 사이지만

서로 자기 자신의 과거사에 대해서는 별로 말이 없었다. 

 

“나는 1947년 경남 거창에서 태어 낳는데

내아래 여동생이 하나 있고 위로 누나가 하나 그래서 3남매이고

조상 대대로 농사  지으며 사는 평범한 가정 이었지요”

“6.25 사변 후에 지리산 공비 토벌 중에 거창 지역에 양민들이

무고하게 많이도 희생 될 때 우리 아버지도 그 난을 피해

절에 들어가 잠시 은거 했다고 하는데 자세한 이유는 잘 모르겠고

어쨌든 그때 절에 들어간 아버지는 아주 머리를 깎고 出家를 하고 말았는데

佛家에서는 이것을 出家라하여 속세 적 욕망을 버리고

진리를 찾아 나선 용감한 중생으로 추켜세우는 가 본데

나는 현실을 도피한 비열한 사람으로 생각 합니다” 

“出家는 무슨 현실 도피한 家出 者이지!

이 대목에서 이를 악물고 격앙된 어조로 질타한다.

한 이 서린 듯 “아버지의 출가로 인하여 그렇지 않아도

6.25 사변 직후 지독히 어려웠던 양민들의 생활 이였는데

우리 가족은 더욱 참혹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아버지의 출가 소행에 충격을 받아 쓰러졌는데

우리 어머니는 3년을 시아버지 병수발, 똥오줌 다 받아내는 고난은 물론

아직은 어린 자식들 부양하느라 그야말로 하루하루 뼈를

깍는 고난의 연속 이었지요”

“결국 할아버지도 3년 만에 돌아가시고 그나마 얼마 되지 않는

 논, 밭 전지도 3년 동안 할아버지 약값이야 뭐야 해서 다 팔아 없어졌다고 합니다.

아직 어린 나로서는 모를 일이지만 논, 밭 전지가  처분 된 데에는

더 많은 이유가 있었겠지요.”

“아버지 형제로는 아버지가 3대 독자이고 고모가 한분 있는데

 출가 하여 젊은 나이에 돌아 가셨다고 합니다.

할아버지 입장에서는 3대 독자가 가문을 이어 가업을 세울 생각은 아니하고

釋氏 家門 (석씨가문)에 양자 갔다고 항상 한탄하시던

말씀을 어려서도 많이 들었어요. 

병기야 너는 4대 독자니라 하시며 항상 할아버지 당신 곁에서

잠자리를 함께 하도록 했는데“

“내 위로 누이는 2살 위였으니 1945년생 해방 동이가 되지요.

할아버지가 56년도에 돌아가신 후 어머니와 이제 12살 된 누이가

주린 배를 움켜쥐고 이집 저집 품팔이나 해가면서 살다가

1957년에 누이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답니다. 

어머니 말로는 너무도 배가고파 스스로 목숨을 끓었다고 하시며

수시로 눈물을 흘리시고 격해지면 방바닥을 치며 우시는 것도

여려 번 봤지요.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런 모습을 수없이 보며

자랐고 그때마다 이 세상에  이모든 것이 아버지가 해 나가야할

의무 임에도 외면 한 채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 중노릇만 한다는

아버지가 도무지 사람이라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증오했지요.

“결국 가난 때문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서울이라는 곳으로

올라갔고 대도시에서 어머니는 고무다라 이고 그 당시 서울역

염천교 부근에 형성 되었던 중앙시장에 나가 생선 장사 해가며

입에 풀칠을 했는데 그 고생이야 어찌 다 말로 표현 할 수

있겠어요?

“가정 형편이 그 지경이니 나는 苦學으로 야간 고등학교 까지는

겨우 겨우 다녔고 고등학교 졸업 후에 생업에 뛰어들어 그럭저럭 살다가

여자라고 만나서 결혼식도 못 올리고 살았는데 누이동생

하나 있는 거는 반드시 정식 결혼식 올려서 잘살게 해야 한다고

어머니와 나는 다짐 해 왔는데 75년도 그 애가 49년생이니

나이27살 때 결혼식을 하게 됐지요 그때는 나 역시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동생도 은행에 나가면서 그래도 최소한 먹고 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뗀데 누이동생이 같은 은행에 나가는 대리와 결혼을 하게 됐지

그래서 고향에도 더러 가까운 분들에게 소식을 전하고 외가로도 수 십 년 만에

모두 소식을 전했는데 고향 친지들의 말씀이 아버지를 찾아보라는 거였지요.”

 

이 병기의 낚시 줄이 팽팽해진다.  그래서 고기를 잡아 올리느라

이야기가 잠시 중단 되었다.  이곳의 고기는 50cm~80cm정도 이고

때로는1m짜리 대어도 심심치 않게 올라온다.  그래서 고기를 끌어

올릴 때는 반드시 장갑을 끼어야 한다.  힘 좋은 고기를 만나면

낚시 줄에 손을 다치기 때문이다. 

너무 큰 것은 뱃전의 핸드 레일에 한번 걸어서 올려야 한다. 

올린 고기는 빨간색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홍 돔으로 60cm는 족히 되겠다. 

다시 미끼를 채워 낚시를 드리우고 다시 이야기가 계속된다. 

그래서 어머니께 말씀 드렸더니 내심으로는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있는듯한데

고개를 가로 저으시며

“느그 아배가 오라 칸다고 올 사람이 아이데이, 함부래 말아라”

“그래도 여러 어른들의 말씀이니 모시면 어떻겠습니까?”

“내 평생 그리운 사람이고, 내 평생 미운 사람이고, 평생에 한 맺힌 사람인데

느그가 데려오면 얼굴이나 한번 보제이 하시며

금 새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다 주루룩 흐른다. 

그래서 그해 9월에 결혼 날을 받아 놓고 5월 달부터 수소문하기

시작했는데 몇 년에 한 번씩 바람결에 라도 날아드는 아버지의

소식들을 모아 여기저기 수소문 하며 찾아다니는데

변산의 개암사고창 선운사로 속리산 법주사로 서울 봉원사로 양산 통도사로

참으로 숱하게 다녔지요.  어디로 갔다면 다시 서울로 올라와 직장 다니다

일요일이면 다시 찾아 나서기를 석 달째 겨우 전주 송광사에서 만나게 되었지요.

아버지는 1921년 辛酉生이니까 75년 당시 55세 아버지를 처음 뵐 때는 내심

매우 설레었는데 막상 만나니 혈육의 정을 느낄 수가 없었죠. 

수행에 들어갔다고 해서 하룻밤 기다리다가 아침에 뵙고 큰절을

올렸는데 아버지가 자식 대하듯 하지 않고 스님이 불공 드리러온 신도 대하듯 하니

참으로 기가 막히데요.

기억마저 가물가물 하던 1953년 내가 일곱 살 때 아버지를 마지막

본 것 같은데 22년 만에 만날 아버지께 무엇을 말할까 하고 간밤에

한잠도 못 부치고 지난 세월 서리서리 고생 속에 한 맺힌 이야기를

어디에서부터 끌러볼까 고민 고민 했었는데 막상 아버지와 마주

앉으니 할 말이 없다.  큰절을 올리고 마주 앉았는데 한 10여분

아무 말씀이 없었어요.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기 아내나 자식들의

안부라도 물을 터인데 ...   그래서 내가 먼저 말을 걸었지요.

 -- 제1부끝--


2부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