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의 글밭 - 詩.書.畵/南村先生 詩書

수필-소갈비에 양주 두병 먹고도 스님인가요-2편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6. 12. 4. 18:27

 

“제가 아버님의아들 이 병기입니다”

“어제 말을 전해 들어 알고 있다”

“이 절에는 오래 계셨습니까?”

“아니 떠돌이 객승으로 며칠 묵으며 수행중이니라”

“그럼 언제 어디로 가실작정 입니까?”

“떠돌이 객승 무슨 기약이 있으랴 마음 한 점 일어나면

훌쩍 떠나고 발길 닿는 곳이 목적지 이니라”

눈을 지그시 감고 묻는 대로 대답만 하는 이 아버지라는 중이

참으로 야속하고 모멸 차다 지난 세월에 대해 묻기만 하면 폭포수처럼 쏟아내려 하는데 20여년 만에 만나면서도 전혀 무관심하다.  병기는 치미는 분노를 참느라고 얼굴이 달아올랐다. 

욕이라도 퍼부어 주고 싶은 충동을 꿀꺽꿀꺽 참아가면서

모든 준비한 말들을 모두 접어 버리고

찾아간 용무만을 말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 아버님을 찾아뵙게 된데 에는 사실은 ......

여동생 점옥이가  시집을 가게 되어 그때는 좀 참석을 해주십사

하고 찾아뵈었습니다. 고향 동네 여러 어른들의 뜻도 있고 해서

그런 일이 아니라 해도 지금쯤은 가족들을 만나 보심이.....

이때 아버지가 손을 내밀어 흔들어 말을 가로 막으며

“됐다! 이미 출가한 중이 무슨 미련이 남아 있겠으며 그리고

부모처자 다 버리고 돌보지 아니 하다가 이제 와서 무슨 얼굴로

찾아보겠느냐?  서로가 온갖 번뇌를 끌어내는 일이니

그냥 돌아가고 다시는 나를 찾아오지도 마라” 하고는 벌떡 일어나 안으로 들어간 아버지는 다시 만날 수가 없었다. 병기는 22년 만에 만난 아버지와의 해후가 불과 10분으로 끝난 것.  울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별도리가 없어 그길로 돌아오고 말았다. 

돌아와서 어머니에게는 사실대로 말씀드리지 못하고 지금 바쁘니 다음에 시간을 내주신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는 절친한 친구 사이였고 지금은 서울에 살고계신 민 기식 어른이

전화를 하셨다. 다음날 퇴근 후 만나서 저녁을 같이 하면서

사실대로 말씀 드리니 

“그럴끼다.  네가 간다칼 때 부텀 나는 예상을 한 일이 데이.

  네 맴이 얼매나 허전 하것노?”

“사실 할아버지 돌아 가신일 부터 누님이 가난 때문에 자살한 일이며 어머니의 저 뼈 맺힌 고생들이 모두가 누구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까?  그런 일들에 대한 책임 추궁을 받자는 것도 아니고 사과를 받자는 것도 아니지만 최소한 물어는 보는 것이 인간의 기본

도리가 아닐까요? 병기는 다시 흥분이 되어 씩씩 거리다 애 궂은 소주잔만 연거푸 두어 잔 비운다. 

“얘야 진정 하거라, 네가 꼭 그렇다몬 내가 한번 만내보고

 가급적 이번 결혼식에는 참여 하도록 할끼라. 기대리 보거래이”

“말씀은 고맙지만 이도 안 들어 갈 겁니다.”

“부자간이라 카능기 어러븐기라 친구간이라 카는거는 또 다른

면모가 있는 법이지.  네 녀석 보다야 느그 아배에 대해서는

친구인 내가 더 잘 알지 한번 기댈 걸어 보그래이 사실 내도 친구 한번 만나보고 싶은 맴이 우째 간절하지 않것노?  겸사 겸사지”

민 기식어른이 참으로 고맙다

떠돌이 객승이라는 말을 들으시고 언제 떠날지 모른다며 그날 저녁으로 아버지를 만나러 떠나셨다. 

그로부터 3일 후에 민 기식어른께서 전화가 왔다.

“내가 뭐라카드노 ?! 됐다 됐어 느그 아배 온다 캤다 아무 걱정 말고 결혼식 준비나 하거래이”

무슨 말을 어떻게 하셨는지 알 길이 없다 매우 흥분된 어조로 하시는 말씀 분위기로 봐서 매우 잘된 것 같다.


1975년 9월 17일 서울 청량리예식장 낮12시 아버님을 만나 보려고 고향 친지들도 여러분 오셨고 어머니는 전날부터 가슴이 벅차시는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아 내신다.  병기는 한 시간 전부터 예식장 입구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결국 결혼식이 시작되는 10여분 전에 나타나셨다 승복을 그대로 입은 채였는데 고향 친지들과 선채로 꾸벅꾸벅 인사를 나누고 바로 신부 대기실로 가셨는데 그곳에서 딸과 아내를 만나는데 아버지는 전혀 말이 없었고 어머니와 점옥이가 붙들고 눈물을 흘리는데 예식을 관리하는 사람들이 달려와 신부화장 지워진다.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분위기가 진정되고 곧바로 新婦 入場! 이라는 사회자 명령에 점옥이는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참으로 흔치않은 광경이 연출되었고 이 광경을 보던 하객들은 더욱 큰 박수로서 축하를 해주었다. 

병기는 정말 예상 밖이었다.  아버님이 오신다 해도 딸의 손을

잡고 함께 입장하는 것은 상상조차 못한 광경이었다. 

드디어 새 사위의 손에 딸의 손을 잡혀 주고는 신부 부모가 앉는 좌석으로 안내 되었다.  물론 어머니와 나란히 앉게 되어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자리를 거부하고 그대로 돌아서 걸어 들어온 길을 따라 예식장을 나가셨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결혼식은 식순에 의해 계속 됐고 아버지가 그길로 다시

산으로 돌아간 것을 안 것은 가족사진을 찍을 때 모두 알았다. 

가장 섭섭한 것은 어머니였다.  사실 어머니는 그날 이후 자리에 눕고 말았다. 아버지는 또 한 번 우리를 실망 시켰고 어머니는

그길로 병을 얻어 시름시름 앓다가 1978년 가을 한 많은 세상을

하직 하셨다.어머니가 아버지보다 2살 아래 1923년 癸巳生  56세 요새 세상에 한창 나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5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병기는 이 또한 아버지의 탓으로 돌리고 자기 부인이

죽어도 모르고 어디 어디로 떠다니는지 병기는 참으로 기가 막혀 한없이 울었다.

“강형! 내가 중이 된 아버지 때문에 이렇게 한이 맺힌 사람인데

  고승열전이니 하는 이야기를 즐겁게 들릴 리가 있겠어요.”

“미안 합니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래 지금도 부친의 소식은 모르고 지내나요?“

“아니 혈육의 정이라는 것이 묘한 것이 그렇게 깊은 원한이 세월 가면서 없어지거나 잊혀 지지 않고 오히려 사모 치는데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아버님을 만나보고 싶은 내 마음을 참으로  나 자신도

이해 할 수 없어요.

“그래서 이따금씩 행방을 찾아 나서곤 했는데 1980년도에 강원도

무슨 이름 없는 조그만 절에 주지가 되어 정착을 해 있더라구요.

그래서 일 년에 한번 정도 찾아뵙는데 어머니 천도식도 그 절에서

했지요. 작년에도 해외에 나오면서 인사차 들렸는데 옛날 보다는 많이 부드러워진 느낌인데 여전히 집안문제는 묻지를 않고 있어서

뿌리 깊은 원의 문제는 아직 남아있지요.”

“그래 이번에 휴가 받아 귀국하면 언제 치러도 치러야할 대접전을

 치룰 작정입니다.”

“어떻게 하실 작정 입니까?  내가 고승열전을 읽어보니 많이

  닦으신 스님들 法力이 보통이 아니고 서로 한마디씩 던지는 話頭가 상대의 입을 다물게 한답니다. 외람된 말로 들릴지 모르지만

어지간하면 아버님을 용서하시고 그 행자의 길을 잘 가실 수

있도록 해드리는 것도...” 병기는 말을 가로채며 

“내가 용서 한다고 용서 되는 일이 아니에요 독자로서 아들이 가업을 이어 가기만을 바라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용서 못하시고

그 잘난 아버지 한분만을 사랑하시어 젊었을 때에 생이별하고

일구월심 그 잘난 아버지만을 기다리며 그 모진고생 다하시고 겨우

딸 예식장에서 수십 년 만에 만난 꿈에도 그리던 남편이 그렇게도

허망하고 매몰차게 돌아서버린 그 허탈감 때문에 병을 얻어 세상을

하직 하신 우리 어머니가 용서를 못할 것이고,

따뜻한 쌀밥 한 그릇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우리 누나 정말

너무도 배가고파 차라리 물속에 뛰어들어 餓死神(아사신)이 된

누나가 용서 못할 것입니다.

이번 휴가 때에는 반드시 수 십 년 벼르던 말들을 쏟아내고 와야

하겠습니다. 이 병기의 불끈 쥐고 있는 두 주먹에서 더 이상 말 릴 수 없는 결의가 엿보였다. 

그것은 너무도 오랫동안 준비된 것이기 때문...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바다 수면위로 10여m 돌출된 파이프 끝으로 해저 깊은 곳의 석유가스가 뿜어져 나와 불타고 있다.

그 불빛이 병기의 얼굴에 비쳐 이글거리는 것이 그의 얼굴을 더욱

분노 스럽게 보여서 공포 스럽기 까지 하였다.


강 신재와 이 병기는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 잡은 것은 고기가 아니라 이 병기는 맺힌 응어리를 쏟아 냄으로써 다소간의 후련함을 느꼈고 강 선재는 들으며 이 세상의 출가승들 뒤에 그 가족들이 겪는 어려움에 다시 한 번 몸서리 쳐야했고 고승대덕들이 한 소식을 들어 중생을 제도하는 그 행위 자체가 무궁무진한 댓 가를 치루고 나온 것임을 새삼 뼈저리게 느꼈다.

이 병기가 휴가 갔다 와서 다시 선재와 만난 것은

그로부터 3개월 후였다.  2부끝------3부로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