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민 李世民 598?∼649 - 당태종(太宗).
중국 당나라 제 2 대 황제. 서량의 군주 이호의 자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가계가 분명하지 않다.
중국 당(唐)나라 제 2 대 황제(626∼649). 서량(西凉;五胡十六國의 하나)의 군주 이호(李暠)의 자손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고 가계가 분명하지 않다.
북방민족의 피도 섞인 듯하며 북위(北魏) 때에는 무천진(武川鎭;내몽골)에 근무한 장군의 집안이었으나, 서위(西魏) 때에는 이세민의 증조부 이호(李虎)가 당시에 창건된 부병(府兵)의 최고사령관이 된 뒤에 무인귀족(武人貴族)으로서 대대로 북주(北周)와 북위를 섬겼다.
아버지는 이연(李淵;당나라 초대황제 高祖), 어머니는 두씨(竇氏)이다.
총명하고 사려가 깊었으며, 무술과 병법에 능했고 동시에 결단력과 포용력까지 갖추었다.
따라서 소년시절부터 신망을 얻고 있었다.
수(隋)나라 양제(煬帝)의 폭정으로 각처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국가붕괴의 기색이 짙어지자 수나라를 타도하기로 마음먹고 타이위안[太原(태원)] 방면의 군사령관이었던 아버지를 설득, 군사를 일으켜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당왕조를 수립했다.
당나라가 각처에 있는 군웅들을 평정하고 국내의 통일을 실현시킨 것은 그가 20세 때의 일이었다.
이것을 시기한 황태자 건성(建成), 동생 원길(元吉)과 다투었으며, 마침내는 두 사람을 죽이고 626년 아버지의 양위(讓位)를 받아 즉위한 뒤 장손무기(長孫無忌:鮮卑族)의 누이동생을 황후로 삼았다.
강적 돌궐을 비롯하여 주위의 이민족을 제압하고 부족의 추장들로부터 천가한(天可汗)이라는 존칭을 받았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번한(蕃漢) 두 사회를 거느리고 일종의 세계제국이 되었다.
태종은 양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충신 위징(魏徵) 등의 의견에 귀를 기울였고 사심을 누르고 백성이 바라는 공정한 정치를 폈다.
당시의 명재상이라는 방현령(房玄齡)·두여회(杜如晦), 명장으로 유명한 이정(李靖)·이적(李勣) 등이 잘 보좌했기 때문에 그의 치세는 《정관(貞觀)의 치》라는 칭송을 받았고, 후세 제왕들의 모범이 되었다.
그와 신하들의 정치문답은 후에 《정관정요(貞觀政要)》라는 책으로 만들어졌다.
그는 학문과 문화를 사랑했고 전대(前代)의 왕조사(王朝史)와 <오경정의(五經正義)>의 편찬을 명했는데, 왕조사 가운데 《진서(晉書)》의 일부는 직접 집필하였다.
또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좋아했고, 특히 명품 《난정서(蘭亭序)》는 사후에 무덤에 넣어주도록 유언했을 정도이며 자신도 유려한 필적을 남겼다.
그러나 유능한 후계자가 없었을 뿐더러 말년의 고구려 친정(親征)의 실패로 인하여 사망한 뒤에는 정권이 흔들려 측천무후(則天武后)의 혁명을 초래했다. 소릉(昭陵;陝西省)에 묻혔다. 묘호는 태종(太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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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唐:618~907)나라의 실질적인 창건자이자 제2대 황제(626~649 재위).
묘호는 태종(太宗). 아버지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도와 당의 창건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반란(618)을 주도했다. 재위기간중 돌궐족을 몰아냈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세민은 한족과 선비족(鮮卑族)의 혼혈인 귀족가문의 자손으로, 수(隋)나라 태원유수(太原留守)인 이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20세도 되기 전인 618년 아버지에게 무너져가는 수나라에 대해 반기를 들 것을 권유했으며, 새로 세운 당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다른 11명의 경쟁자들을 무찔러 천하를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626년 고조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고, 649년 죽을 때까지 제위에 있었다.
당시 중국은 선비족의 북조(北朝)와 한족의 남조(南朝)로 272년 동안 갈라져 싸우다가 590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러나 수는 오래 지탱하지 못하고 제2대 황제인 양제(煬帝) 때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 혼란을 틈타 이세민은 일련의 전투에서 승리한 뒤 당을 창건하고 중국의 통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수나라가 붕괴되자 각 지방의 유력한 무장(武將)들이 저마다 독립하여 천하를 장악하려고 서로 싸웠다.
남부지방은 이전의 남조를 계승한다는 취지하에 자립했다.
만리장성 밖의 유목민족 중 가장 강성했던 돌궐족은 중국으로 쳐들어와 변경에 괴뢰왕조를 세워놓고 본격적인 대규모 침공을 노리고 있었다.
6년간(618~624) 이세민은 돌궐족을 만리장성 밖으로 몰아내고 남부 지방을 정복했으며 다른 모든 경쟁세력을 물리쳤다.
당나라에 대항하여 싸웠던 많은 반란 지도자들은 패배하여 처형되었으나, 그중 일부는 싸우지 않고 항복하여 당나라의 작위를 받았다.
나라가 통일되어야만 평화가 오기 때문에 당의 중국 통일은 일반 백성들에게 크게 환영받았다.
그러나 이세민은 궁중 내에서의 권모술수에는 능하지 못했다.
태자로 책봉된 세민의 형인 건성(建成)은 동생보다 무능했으며, 태자의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 세민을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암살 음모를 꾸몄다.
이세민은 그를 지지하는 휘하의 장군들과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이 음모를 사전에 봉쇄하고, 궁궐문인 현무문(玄武門)에 매복해 있다가 형 건성과 그 일행을 모두 화살로 쏘아 죽였다.
이 사건을 '현무문의 변'이라고 한다.
이 사건이 일어나자 고조는 그 사변이 건성의 정권욕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과 함께 세민(태종)에게 양위했다.
이 사건에서 태종은 정치적 갈등을 무력으로 해결한 좋지 못한 선례를 남겼는데, 나중에 이같은 일이 다시 생겨 왕권의 안정을 크게 해치게 되었다.
태종은 후계자 선택에서도 실패했다.
이는 이전의 관례와 정치적 압력 때문에 정비(正妃) 소생의 아들 중에서만 태자를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정비인 장손황후(長孫皇后)와의 사이에 승건(承乾)·태(泰)·치(治)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자인 승건을 태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승건이 어리석어 모반에 연루됨으로써 643년(貞觀 17)에 폐위되었다.
셋째 아들 치가 그다음 태자로 책봉되어 태종이 죽은 후 제위를 이어받아 고종(高宗)이 되었으나, 그는 병약했을 뿐 아니라 성격이 우유부단하고 무능하여, 그의 왕비가 된 야심많고 총명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실권을 잡았다.
태종은 통치자로서는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옛 제도를 되살리고 개량했으며, 그의 권위에 누구도 감히 도전하지 못했다.
관리의 선발방법으로 과거제도를 정착시킨 것은 가장 중요한 개혁조치 중의 하나였다.
이 제도의 시행으로 과거 소수의 귀족계급이 장악하고 있던 조정의 권력은 훨씬 폭넓은 지식인 계급에서 선발된 관료들에게로 점차 옮겨졌다.
중국이 272년 동안이나 남과 북으로 나뉘어 혼란한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은 귀족문벌들의 끊임없는 권력투쟁이 주된 원인이었기 때문에, 태종은 이같은 권력구조의 변화를 의도했던 것이었다.
군대도 귀족가문에서 기르는 사병(私兵)을 점차 줄이고, 직업 군인을 징집하여 주로 변방에 주둔시켜 국방에 전념하게 했으며, 평범한 가문 출신의 지휘관이 군대를 통솔하게 했다.
따라서 당나라 초기의 군제는 정권의 안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게 되었고, 후대 제도의 모범이 되었다.
태종은 국자감(國子監)을 세워 교육을 진작시키고 관리가 될 인재들을 교육시켰다.
또한 지방행정조직·재정·조세·토지사용 등 거의 모든 방면의 제도를 재정비하게 했다. 당나라의 조정은 그당시로는 세계에서 가장 발달하고 치밀하게 조직된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이같이 훌륭한 태종의 치세를 가리켜 ' 정관(貞觀)의 치(治)'라고 부른다.
공산주의 사가(史家)를 제외한 모든 후대 사람들은 태종을 중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라고 칭송해왔다.
그의 치세는 그후 중국의 역사·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학문을 애호했던 태종은 직접 남북조사(南北朝史)를 편찬했고, 서예에도 뛰어나 비석에 새겨진 그의 글씨(溫湯碑, 晉祀碑)는 1,000년 이상이나 각급 학교에서 본받을 만한 서체 중의 하나로 여겨져왔다.
8세기의 중당(中唐)시대는 중국사상 가장 찬연한 문화를 꽃피운 시기 중의 하나였는데, 이는 태종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제도를 개혁하여 사회적·경제적 발전을 이룩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내용출처 : [도서] 브리태니커 세계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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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정요 貞觀政要
중국 당나라 태종의 가언선행을 기록한 책.
태종과 위징·방현령 등 군신들의 정치적 토론을 군도·정체·임현·구간 등으로 분류, 편집한 책으로 오긍이 편찬하였다.
태종은 국내의 안정과 경제력 회복에 힘을 기울여 <정관의 치>라는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전횡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중국 당(唐)나라 태종(太宗)의 가언선행을 기록한 책. 태종과 위징(魏徵)·방현령(房玄齡) 등 군신(群臣)들의 정치적 토론을 군도(君道)·정체(政體)·임현(任賢)·구간(求諫) 등으로 분류, 편집한 책으로 오긍(吳兢)이 편찬하였다.
태종은 국내의 안정과 경제력 회복에 힘을 기울여 <정관(貞觀)의 치(治)>라는 태평성세를 이루었으며, 간언(諫言)에 귀를 기울여 전횡(專橫)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이 책은 무위(武韋)의 화(禍) 등 혼란을 경험한 중종(中宗)·현종(玄宗)시대에 태종의 치적을 거울로 삼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일설에는 처음에 중종에게 초진본(初進本)을 진상하였고, 713∼741년에 개편하여 현종에게 진상하였으며, 그 뒤 재진본(再進本)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위정자의 교과서로서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 널리 읽혔다. 통행본(通行本)은 원(元)나라 말기에 과직(戈直)이 교정하여 주(註)를 달고, 송(宋)나라 지식인들의 평론을 모은 집론본(集論本)인데, 오탈(誤脫)이 많고 편장(編章)도 원본의 순서와는 다르다고 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1116년(예종 11) 이 책을 주해한 《정관정요주해(貞觀政要註解)》가 편찬되어 정치적 교훈서로 필독되었다. 10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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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만춘 장군
▶ 전략적 요충지인 '안시성'의 성주
그는 보장왕 때의 안시성(安市城) 성주이다. 그의 이름은 역사서에는 보이지 않고 ‘안시성 성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송준길(宋浚吉)의 《동춘당선생별집 同春堂先生別集》과 박지원(朴趾源)의 《열하일기 熱河日記》에 의하면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으로 밝히고 있다.
어떻든 그는 지금의 만주 봉천성(奉天省) 해성(海城)의 동남방에 위치한 영성자산성(英城子山城)으로 추정되는 안시성의 성주였다. 안시성은 지리적으로 험한 곳에 소재한 전략적 요충지일 뿐 아니라 군사들 또한 정예한 것으로 정평이 난 바 있다.그는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정변에 의한 정권장악에도 불구하고, 집권자인 연개소문에게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연개소문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안시성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그에 따라 연개소문은 결국 안시성 성주의 직책을 그대로 맡겼다.
이는 그가 용기와 소신있는 인물이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 당나라 태종과의 공방과 일화
645년(보장왕 4) 당나라 태종은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당나라군대의 주력부대의 침공을 받은 요동지역에 있던 개모성(蓋牟城:撫順부근)과 비사성(卑沙城: 大連灣 北岸)이 함락되었다.
이어 당나라 태종의 독전(督戰)으로 요동성(遼東城: 遼陽)과 백암성(白巖城:遼陽 동남)도 당나라군대에 함락되었다.
당나라군대는 다음 공격목표를 놓고 수뇌부 사이에 이견이 있었으나, 이세적(李世勣)의 건의가 채택되어 안시성 공격을 시도하였다.
이때 고구려는 당나라군대에 포위된 안시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15만 병력이 출동하였으나 안시성 근처 8리 지점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그렇게 되자 고립무원의 상황에 처한 안시성은 그를 비롯한 병사와 주민들이 하나로 뭉쳐 완강히 저항하였다.
안시성 공격이 여의치 않자 당나라군대는 공격목표를 그보다 훨씬 동남쪽에 있는 오골성(烏骨城:만주 鳳凰 남쪽의 高麗山城)으로 변경할 것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을 계속 공격하기로 의견이 모아져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다.
당나라군대는 연인원 50만명이 동원되어 60여일 걸려서 높은 흙산을 쌓아, 이를 발판으로 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당나라군대는 하루에도 6·7회의 공격을 가하고 마지막 3일 동안은 전력을 다하여 총공세로 나왔으나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마침 9월에 접어들어 요동의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하였고, 군량 또한 다하였으므로 당나라 태종은 포위를 풀고 철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그는 성루에 올라 송별의 예(禮)를 하니, 당나라 태종은 그의 용전을 높이 평가하여 비단 100필을 주면서 왕에 대한 충성을 격려하였다.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 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 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한 것으로 적고 있다.
고구려 멸망 뒤 당나라에 반대하여 끝까지 저항한 11성(城) 가운데 안시성이 포함된 것을 생각할 때, 그의 생존여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백과 용기가 고구려 부흥운동으로 계승되었음을 알려 준다.
내용출처 : [인터넷] http://www.koreandb.net/General/person/p121_07019.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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