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전략을 세워라 - 선택과 배치 2004-02-01
화초는 물을 주면 저절로 자라난다. 어떤 사람은 소설 쓰기를 화초 기르기처럼 생각한다.
이를테면 단순한 이미지, 모호한 관념에 의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는 사람은, 지금은 희미하지만 쓰다 보면 어떻게 될 거라는 식의 (물을 주면 화초들이 저절로 자라나듯)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하기야 물을 주는 것도 정성이라면 정성이다. 그렇게 해서 한 편의 소설이 써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그렇게 해서 써지기만 한다면 그보다 더 좋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언젠가 밑그림 그리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말한 것처럼,그런 시도를 하는 사람은 중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결국 포기해야 하는 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소설 쓰기는 ‘기르기’ 보다 ‘만들기’ 쪽이다.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하는’ 것이다. 자연이 아니라 인공이다. 소설이 저절로 자라나는 식물이 아니라 인위적인 조작을 통해 형상을 부여받는 조형물이라는 인식은, 소설 창작의 모든 단계에서 거듭거듭 상기되어야 한다.
조형물을 만들 때 고려할 원칙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시간이다. 우선 선택이 중요하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무엇을 배제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겹쳐 있다. 선택은 취하기와 버리기의 작업이다. 우리 앞에는 재료들이 많이 있다. 때로는 너무 많이 있다. 소설을 쓰려고 할 때 이것도 생각나고 저것도 떠오르고, 또 다른 것도 그럴 듯해 보여 혼란스러워지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다 유효한 것은 아니다.
인터넷 검색창에 아무 단어든 쳐 보라. 수천 개의 웹 문서가 순식간에 뜬다. 가령 ‘사생활’이라는 단어를 입력하고 클릭하면, 그 단어가 들어 있는 온갖 문서들이 한꺼번에 모니터의 창을 가득 채운다. 인터넷의 바다 위를 떠돌던 잡다한 문서들이다. 심지어는 ‘사생 활동’ 같은 단어들, ‘교사 생활’, ‘의사 생활’ 같은 단어들까지 끼어 있다. 조그만 관련이라도 있다 싶으면 그 인연을 앞세워 얼굴을 내미는 형국이다. 우리는 그 많은 관련 문서들 가운데서 꼭 필요한 몇 개를 선택하고 다른 것들은 버린다.
소설 쓰기의 과정에서도 이런 일이 종종 생겨난다. 어떤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앉으면 우리의 머리와 몸과 기억과 감각의 바다를 떠돌던 이런저런 관련 소재들이 불쑥불쑥 얼굴을 내민다. 가령 ‘사생 활동’이나 ‘교사 생활’ 같은 것까지 치고 올라온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사생 활동’이나 ‘교사 생활’이 ‘사생활’과 관련 있다는 건 명백한 오류이다. 자모음의 조합에 속고 있는 것뿐이다. ‘사생활’과 ‘사생 활동’, ‘교사 생활’ 사이에는 의미상 아무런 연관이 없다. 인터넷 검색 엔진이 자모음 조합의 유사성에 속아 엉뚱한 문서들을 토해내는 것과 같은 실수가 소설을 쓰는 과정에서도 번번이 일어난다.
언뜻 보기에 그럴 듯한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울리지 않는, 또는 자세히 보지 않아도 어울리지 않는 에피소드나 사건이나 상징이나 진술이 들어 있는 소설들은, 대개 선택의 과정을 소홀히 한 탓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작품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든지 소설이 갈팡질팡한다는 독후감을 불러내게 된다.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알겠지만, 취하기보다 버리기가 더 어렵다.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일수록 그렇다. 내가 경험했으니까 이것은 참이다, 라는 생각이 강박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을 쓰는 것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게임이 아니다. 굳이 말한다면 참거짓 가려내기가 아니라 그럴 듯하게 꾸미기(조형)이다. 그럴 듯하지 않은 참이 아니라 그럴 듯한 거짓이어야 한다. 그럴 듯하지 않은 참은 소설의 흐름에 어울리지 않거나 소설의 흐름을 방해한다. 그래서 요긴한 것을 고르는 안목과 요긴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과감함이 요청되는 것이다.
선택한 것들을 배치하는 일은 그 다음의 과제이고, 더 중요한 작업이다. 재료들을 놓는 자리와 순서에 따라 조형물은 달라진다. 가벼운 것을 아래 놓으면 안정감이 없고, 옆에 놓아야 할 것을 앞에 놓으면 모양이 사나워진다. 크기와 부피, 모양과 색깔을 고려하고 드러낼 것과 감출 것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하나의 조형물을 탄생시킨다. 아무리 아무렇게나 그냥 만들어진 것 같아도 아무렇게나 그냥 되어진 것은 없다.
소설도 마찬가지여서, 앞에 쓸 것과 뒤에 쓸 것에 대한 고려를 신중히 하여야 한다. 많이 드러낼 것과 조금 드러낼 것에 대한 숙고도 필요하다. 어느 시점에서 얼마만큼 드러낼 것인가도 중요하다. 같은 재료를 주고 소설을 쓰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같은 소설을 쓸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들뢰즈의 성찰에 의하면, 사물들은 본래적인 성격을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과 배치되느냐에 따라 그 의미와 뜻이 정의된다. 가령 ‘입’은 강의실, 마이크와 배치될 때 ‘말하는 기계’가 되고, 식당, 음식과 배치될 때 ‘먹는 기계’가 되며,침실, 연인과 배치될 때 ‘섹스하는 기계’가 된다. 우리가 선택한 재료를 무엇과 연결하고 어디에 배치하느냐에 따라 내용이 사뭇 달라진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바둑을 두는 사람은 판을 읽는다는 말을 한다. 한 수씩 두지만, 한 점을 착수할 때마다 전체 판을 머리 속에 그린다는 것이다. 이 수 다음에 상대가 어떤 수를 둘지, 그 수에 대해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그리고 그 다음 수는 무엇이 될지 수많은 경우의 수를 다 헤아린다는 것이다. 한 수가 중요한 것은, 그 한 수가 전체 바둑의 모양, 또는 승부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둑 기사는 한 수 한 수를 둘 때 전체 바둑과의 통일성을 생각하고 다른 수와의 연결성을 생각한다.
전략 없이 바둑을 두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전략 없이 소설을 써서도 안 된다. 소설을 쓰는 사람은 바둑 기사처럼 치밀하고 정교해야 한다. 바둑을 두는 사람에게 바둑판이 하나의 세계인 것처럼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소설이 하나의 세계이다. 바둑 기사가 바둑 한 판을 경영하듯 소설가는 소설판을 경영하는 것이다.
하나의 재료(사건, 인물, 일화, 이미지, 상징, 진술 등)를 배치할 때 그것이 전체 소설을 이루는 데 적절하게 기여하는지(통일감),다른 재료들(사건, 인물, 일화, 이미지, 상징, 진술 등)
과 잘 어울리는지(연결성) 살펴야 한다.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설이 달라진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소설가는 전략가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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