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강을 건너는 이야기를 써라 (2003-12-01)
흔히 소설은 유기체에 비유된다. 소설이 유기체라는 것은, 여러 요소들이 긴밀하게 연결된 하나의 조직이라는 뜻이다. 조직은 모임이고, 모임이되 질서 정연한 모임이다. 소설 창작에서 가공과 조작이 필연적인 것은 그런 이유이다. 아무리 자연스러운 소설도 인공이다. 아름다운 산천 앞에 서서 사람들은 더러 ‘예술이다!’라고 감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자연은 예술이 아니다. 자연이 예술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가공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을 누가 작품이라고 말하겠는가. 신의 작품이라면 혹시 몰라도 사람의 작품은 아니다. 사람은 자연을 재료로 하여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인공이다. 따라서 이야기들은 일관성을 유지해야 하고, 삽화들은 인과 관계에 따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육체가 그런 것처럼,
소설의 육체 또한 그래야 한다. 아니, 소설이 하나의 육체이다. 그 과정에서 현장감이라고 할 만한 효과가 생겨난다.
소설을 쓰는 것은 길찾기와 같다. 소설을 창작하는 과정은 약도(밑그림)를 가지고 목적지를 찾아가는 모험에 다름 아니다. 당신이 숲을 떠나 성에 간다고 가정해 보자. 숲은 이쪽이고 성은 저쪽이다. 숲은 당신이 지금 있는 곳(현실)이기 때문에 중요하고, 성은 당신이 가야할 곳(목적)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런데 숲과 성 사이에 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강은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강은 지금 당신이 있는 곳도 아니고, 당신이 가야 할 곳도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곳과 저곳이다. 그러나 당신은 강을 무시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이곳과 저곳 사이에 강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성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다. 강을 건너지 않고 성에 이를 수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은, 비록 강이 당신의 중요한 관심 사항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강을 향해 걸음을 내딛도록 유도한다.
소설을 쓸 때 조급한 사람들은 자기가 정해 놓은 목적지만을 향해 한 눈 팔지 않고 내달리려고 한다. 과정은 과감하게 생략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지금 자기가 하려고 하는 중요한 이야기에 비해 시시하고 하찮은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강을 거치지 않고 숲에서 곧장 성 안으로 들어가는 격이 아닌가. 그런데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다. 강을 지나지 않고 성에 다다를 수 없는 것처럼 과정을 무시하고 결말에 이를 수도 없다. 숲과 성만 써서는 안 된다. 강을 건너는 이야기도 써야 한다.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어떤 찻집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소설로 쓴다고 하자. 당신의 관심은 그 특별한 사건을 기술하는 것이다. 그 특별한 사건은 당신의 소설에서 아주 중요하다. 당신은 그 사건을 통해서 중요한 진실, 혹은 심오한 사상을 드러내고 싶어한다. 그럴 때 당신이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당신의 소설 속의 인물이 그 찻집에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현장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는 먼저 그곳에 가야 한다. 그러니까 그가 그곳에 어떻게 왜 갔는가를 먼저 써야 한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 갔을 수도 있고 차를 마시기 위해 갔을 수도 있고,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갔을 수도 있다. 그가 만나려고 했던 사람은 변심한 애인일 수도 있고, 20년 만에 만나는 스승일 수도 있고,
빚쟁이일 수도 있다. 그가 그곳에 차를 마시러 간 것은 그 집의 차 맛이 유난히 좋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찻집에서만 내는 특별한 차가 있어서일 수도 있다. 그가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 그 찻집에 들어갔다면, 그 이유는 자기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서일 수 있고, 꼭 봐야 할 프로그램이 바로 그 시간에 방송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혼자 갔을 수도 있고, 여러 사람이 어울려 갔을 수도 있다. 가자마자 사건을 목격했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거나 텔레비전을 보거나 차를 마시다가 그랬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건 당신이 하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당신은 훨씬 중요하고 훌륭한 그 특별한 사건을 이야기해야 하고, 그것에 비교할 때 그런 것 따위 뭘 하러 갔느냐, 누구랑 갔느냐, 가서 뭘 하고 있었느냐는 시시하고 하찮은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시시하고 하찮더라도, 그것이 바로 강이다. 당신이 그 특별한 사건(성)에 이르기 위해 건너야 할 강이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야 하고, 그렇게 되면 몸을 적시게 된다는 사실도 함께 유념해야 한다. 몸에 물을 묻히지 않고 강을 건널 수는 없다. 몸에 묻은 물이야말로 강을 건넜다는 증거이다. 당신은 몸에 물을 묻힘으로써만 강을 건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다른 길은 없다. 혹시 당신은 몸에 물을 묻히지 않고 강을 건너갈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가령 비행기나 배를 타고 갈 수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틀린 생각이다. 그 경우에 강을 건넌 것은 비행기나 배지 당신이 아니다. 당신은 다만 비행기나 배에 타고 있었을 뿐이다. 몸으로 건너야 한다. 발이 젖고 머리가 젖고 입 속으로 물이 들어갈 때 비로소 강을 건넜다고 할 수 있다.
구체가 소설의 핵심이다. 소설은 육체여야 한다. 그러니까 소설 쓰기는 고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삶이 고상하지 않기 때문에 소설 또한 고상하지 않다. 삶이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한 것처럼 소설 쓰기 또한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 손에 흙을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손에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근다. 배추를 밥상에 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흙을 손에 묻혀가며 배추를 뽑고 고춧가루를 묻혀가며 김치를 담가야 한다. 소설은 김치를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배추 뽑는 손, 고춧가루 범벅이 된 손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압축과 비약에 대한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은 압축되지 않고, 될 수 없고, 비약할 수도 없다. 강물 속으로 몸을 밀어 넣어야 한다. 그 길밖에 없다. 그리하여 물이 당신의 몸 속으로 스미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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