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인터넷참고자료

[스크랩] 소설창작 방법론13 / 이승우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3. 1. 10:31


13. 긴장을 배치하라 (2004-03-01)

 

 


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소설이 달라진다는 말을 지난 호에 했다. 선택된 소재들은 적절히 배치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배치의 방법이라고 할까, 구성의 원리라는 것이 있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다.


의식하지 못하지만 일상 대화에서도 우리는 소박하고 단순하긴 해도 나름의 전략을 구사한다. 가령 부모에게서 용돈을 타내려고 할 때 대뜸 돈 주세요, 해서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가 기분 좋아할 만한 말을 하고, 부모가 거절할 수 없는 이유를 댄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이런 경우를 상정해 보자. 어떤 여자가 자기 애에게 충고를 하려고 한다. 주제는 공부를 해야 한다, 이다. 그녀가 선택한 말의 소재는 이런 것들이다.

 


1)옆집의 철수.
그 아이는 지난 학기말 시험에서 1등을 했다. 들어 보니 책상에 앉으면 다섯 시간이고 열 시간이고 일어나지를 앉는다고 한다.


2)대학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거기 다니는 학생들은 얼마나 많은가.


3)불우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고시에 패스한 친척 어른의 예.


4)공부가 가장 쉽다는 말의 의미.


5)10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20대의 삶이 결정된다. 20대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30대의 삶이 결정된다.


6)공부의 효과. 존재의 값이 높아진다. 친구들, 선생님들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7)아들의 습관. 쉽게 만족한다. 친구들을 너무 좋아한다. 결심은 하는데 끈기가 약하다…….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한다. 대개는 소재 때문이 아니다. 이런 정도의 소재는 누구나 찾아낼 수 있다. 문제는 이것들 가운데 어떤 걸 선택하고, 어떻게 순서를 만들어 연결지을 것인가에 있다. 요컨대 플롯이다. 플롯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긴장감이다. 긴장감은 끝까지 관심을 가지고 듣도록(읽도록) 하는 힘이다. 긴장이 없으면 듣지(읽지) 않는다. 들어도 건성으로 듣는다. 끝까지 관심을 갖고 듣거나 읽게 하는 것은 재미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맞는 말이다. 재미가 없으면 누가 듣겠는가. 누가 읽겠는가.


그런데 재미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무엇이 재미있는 것일까? 웃기는 것일까, 울리는 것일까. 무서운 것일까, 싸우는 것일까. 누구는 사랑하고 헤어지는 멜로드라마가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007 영화가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야구 경기가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바둑이 재미있다고 하고, 누구는 개그 콘서트가 재미있다고 한다. 재미있다고 말하는 대상이 있기는 하다. 그런데 사람마다 재미를 느끼는 대상이 각각 다르다.

재미의 실체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잘 생각해 보면 재미는 긴장감의 다른 말이다. 긴장할 때 우리는 재미를 느낀다. 긴장하게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재미있다고 말한다. 놀이 기구를 탈 때 우리 신체에 나타나는 현상,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것과 유사한 현상이 ‘재미있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볼 때 가슴이나 머리에서 일어난다. 그럴 때 우리는 재미있다고 느낀다.
그럴 때 우리는 긴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긴장이 없으면 재미가 없고 재미가 없으면 읽거나 보지 않는다.


긴장은 추리를 요구한다. 알고 있는 사실을 바탕으로 알지 못하는 것을 미루어 생각하는 것이 추리이다. 긴장은 알고 있는 것과 알아야 할, 그러나 아직 알지 못하는 것 사이에서 나온다.
다 알려 주면 추리가 필요 없으니 재미없고, 너무 알려 주지 않으면 추리가 안 되니 재미가 없다. 감추기와 드러내기의 교묘한 게임이 소설쓰기이다.


발생할 사건은 그 앞에서 어떤 기미를 보여 주어야 한다(복선). 사건의 진전이나 해결을 위해 실마리를 마련해 주는 것도 필요하다(힌트). 복선과 힌트를 적절히 활용하여 우리는 한 편의 소설을 구성한다. 사실은 동원되는 모든 이야기는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에 대한 복선이고 힌트여야 한다. 드러내되 감추면서 드러내는 전술을 써야 한다는 뜻이다.


요체는 궁금증을 사라지지 않게 하는 것. 하나의 궁금증이 해결되는 순간 다른 궁금증이 생기도록 하는 것. 궁금증의 지속적인 생산이 중요하다. 소설쓰기는 이처럼 정교한 작업이다. 사정이 이러한데, 사전에 복선이나 힌트를 주지도 않았으면서 난데없는 우연적 사건으로 소설을 끌고 가거나 어이없는 사건을 갑자기 등장시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면 황당하지 않을 수 없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x ex machina). 기계 장치를 타고 나타난 신에게 모든 문제를 해결하도록 맡기는 일이야말로 무책임한 일이다. 소설은 플롯과 추리의 무대여야 한다. 어이없는 사건의 전개나 안이한 해결보다는 차라리 의미있는 (긴장감이 있는) 갈등을 그대로 유지하는 편이 낫다.
**내 소설에서 마지막에 불을 지르는 것보다....그 갈등을 유지하는 것이 나을까?


긴장은 구체의 영역이다. 그래서 플롯의 또 다른 원리는 구체성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적인 것들은 긴장으로부터 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기도 어렵다.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은 돈 주세요, 하지 않고 책값 주세요, 한다. 아니, 그것도 추상적이다. 조금 더 구체적이려면 참고서와 시집을 사야 하는데 돈이 필요해요, 라고 말해야 한다.
그것도 충분하지 않다. 설득력이 있으려면, W사에서 나온 수학 참고서 7천 5백 원, N사에서 나온 과학 참고서 7천 원, 문학 시간에 선생님이 권한 서정주의 시집 한 권이 5천 원, 하는 식으로 목록을 제시해야 한다. 구체가 진실을 대변한다. 용돈 주세요, 책값 주세요, 하는 것보다 책의 목록을 대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전쟁과 평화, 죄와 고통……. 이런 단어들로부터 감흥을 느끼는 사람은 없다. 당신의 독자가 긴장하기를 바란다면 현장을 보여 주는 편을 택해야 한다. 전쟁 때문에 부모를 잃고 자기 팔도 하나 잃은, 살가죽밖에 남지 않은 검은 얼굴의 소년이 진흙탕 속에서 빵을 건져 먹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긴장은 속도와 관련 있는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극적 긴장을 보여 주어야 하는 순간에 오히려 슬로우 비디오 기법을 사용하는 영화를 생각해 보라. 빠른 전개가 아니라 정교하고 유니크한 전개여야 한다. 구체는 속도감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 않다. 구체는 시간을 늦추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단위를 바꾸는 것이다. 날짜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시간 단위로, 시간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분 단위로, 분 단위로 흐르던 시간을 초 단위로 바꾸는 것이다. 단위가 바뀔 뿐, 속도는 느려지지 않는다. 그렇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그 소설이 구체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감추기와 보여 주기의 전술을 제대로 구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처 : 시를 사랑하는 서정마당
글쓴이 : 같은세대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