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역사인물

김일성의 죽음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3. 12. 09:59
03-07 오후 11:03:00 / 본부 권성호(청대포7) / 399 / (첨부없음)

김일성은 왜 7월 7일 죽어야만 했는가
하기와라 료 ‘김정일의 숨겨진 전쟁’ (上)


김정일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모든 것은 차우세스크의 처형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평양에 주재하고 있던 포라 코프스키 소련 특파원에 의하면 김정일은 1989년 12월 루마니아 사태가 일어나자 “2주일 정도 완전히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고 구름 속으로 사라졌다.”

김정일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차우체스크가 처형된 직후인 1990년 초 외무성, 국가보위부, 인민무력부, 당 중앙, 인민보안성 등 기관의 간부들을 모으고 차우세스크가 체포되고 처형되기까지의 비디오를 일주일 동안 반복해서 관람시켰다.

김정일은 “보라 차우세스크도 그렇게 되었다. 이 체제가 붕괴되면 너희들 간부부터 백성들에 의해 교수형을 당할 것이다”라며 운명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였다.

차우세스크 부부가 처형되던 1989년 12월 25일 북한의 노동신문은 1면과 2면에 걸쳐 김일성이 1955년 행한 연설을 게재했다. 제목은 ‘당원들에게 계급교육을 강화하는 데 대하여’였다. 김일성은 당시 6·25전쟁 직후 최초의 정권위기에 직면하자 ‘계급투쟁’을 구실로 만들어 정적들을 제거했는데 이제 와서 다시 “전 인민적 반 스파이 투쟁의 선두에 서지 않도록 교육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함으로써 루마니아와 같은 민중봉기를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다. 생사를 건 새로운 ‘계급투쟁’이 시작됐다.

또한 소련이 북한을 버렸다. 북한 국가예산의 5배에 달하는 규모의 물품을 지원해 오던 소련이 1988년 무기원조를 중단했으며 1990년 9월에는 한국과 국교를 체결했다. 이어 중국도 1992년 한국과 수교했다.

1990년 가을부터는 북한에서 에너지난과 식량난이 심각해지고 아사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27일에는 신의주에서 4,000여 명이 식량배급에 불만을 품고 시내에 뛰어 나와 시위를 벌인 사실이 일본언론에 보도되기도 했다.


민중반란 막으려 핵위기 조성


민중반란에 대처할 수 있는 힘은 군사력뿐이었다. 김일성은 1990년 4년에 한 번 열리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6개월 이상 일찍 실시하도록 지시하고 대의원회의에서 국방위원회를 신설했다. 1992년에는 20년 만에 헌법을 개정하고 국방위원회를 최고권력기관으로 만들어 정치체제를 군사체제로 변경하고 김정일이 위원장으로 올라 앉았다.

또 다른 묘책은 핵위기 조성이었다. 은밀히 진행해오던 핵무기 개발 사실을 일부러 유포시켜 미국을 상대로 한판 승부를 연출하는 것이었다. 핵비확산조약(NPT)을 위반하여 미국을 화나게 하고 개입시켜 자칫하면 제2의 한반도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상황을 만들어 내어 주민의 불만을 반미운동으로 뒤바꿔놓게 하는 교활한 기책이었다.

”미국이 지금이라도 쳐들어오는 판에 배곯는 것이 문제인가. 미 제국주의 놈들에게 목숨도 빼앗길 수 있다.” 이 말은 식량부족으로 인한 주민의 불만을 일시에 눌러버렸다. 6.25전쟁의 비참한 경험으로 미국이 공격하여 온다면 북한의 주민은 무조건 단결하기 때문이다.

핵위기 조성은 또 식량폭동을 반미운동으로 바꿔치기하는 술책이었을 뿐 아니라 군부에서 김정일의 주가를 올리는 역할을 했다.


김정일 질책, 김영주·강성산 복권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대립은 1990년 가을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은 1973년 김정일을 내부적으로 후계자로 지명했으며 1980년 10월 이를 공식화했고 1980년대 말에는 얼마간의 외교분야를 제외하고는 모든 내정업무를 김정일에게 일임했다.

김일성은 1990년까지 자신의 ‘주체농업’이 만년풍작을 만들어 내고 있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는 1991년 초 김정일이 세계식량계획(WFP)의 원조를 요청한 사실을 알게 됐을 때 노발대발했다.

김일성이 정신을 차리게 된 것은 1991년 말 김정일에 의해 총리자리에서 쫓겨나 함경북도 책임비서(도지사)로 좌천돼 있던 강성산이 참담한 식량사정을 김일성에게 직소하면서부터였다.

김일성은 1992년 12월 조선조동당중앙위원회 총회에서 김정일의 측근 연형묵 총리를 해임하고 강성산을 후임으로 앉혔다. 간접적으로 김정일을 문책한 것이다.

김일성은 강성산과 결속하여 1993년 1년간 경제 재건을 위해 맹렬하게 일을 시작했다. 그는 1994년 1월 신년사에서 국민을 쉬게하는 ‘조정기간’을 3년으로 한다고 발표하고 농업 제일주의, 경공업 제일주의, 무역 제일주의를 천명했다.

김일성은 이어 1970년 초기 김정일과 치열하게 후계자를 다투다 실각한 자신의 동생 김영주를 18년 만에 부활시켜 국가 부주석으로 앉히고 김정일이 가장 미워하는 부인 김성애를 재등장시켰으며 핀란드 대사로 가 있던 아들 김평일을 불러들였다.

반면 김정일은 유례없는 위기의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우세스크 처형과 같은 사태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국내 적대계층을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선군정치라는 완전한 군사독재정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김정일의 방침은 김일성의 노선과 충돌하게 되고 권력투쟁으로 변모하게 된다. 군사우선이냐 민생우선이냐, 양자의 생각은 점점 멀어져 갔다.


김父子 권력투쟁 노골화

이때 김정일에게 청천병력으로 다가온 사건은 김일성이 김영삼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수락한 것이었다. 정상회담이라면 돈이 많은 한국이 달러나 대량의 식량지원을 제의할 것이 틀림없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한국의 원조를 받아 대담한 경제개혁을 추진하려고 하는 것에 경악했다.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정상회담을 중지하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완강했다. 몇 번이나 중지하십시오, 안 된다, 중지하십시오, 안 된다는 문답이 반복됐다. 김일성은 조선노동당 총서기의 권한을 행사해서라도 회담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마지막 경고를 했다. 이것은 북한이 출판한 장편소설 ‘영생’에 나와 있는 장면이다.

남북협의는 착착 진행되어 남북정상회담은 7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평양에서 개최되기로 합의됐다. 김일성은 정상회담을 위해 원기 왕성하게 떠들고 있었다.

김일성은 7월 6일 경제협의회를 주재하고 건설을 위해 시간이 걸리는 경수로 원자력발전소보다 중유를 이용한 화력발전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지시했다. 전력문제를 당장 해결함으로써 화학비료 생산을 정상화하고 이듬해부터는 매년 85만톤의 비료를 농촌에 보내야 한다고 했다.

이 협의회에 참석하지 않았던 김정일은 회의가 끝난 7월 6일 저녁 회의에 관한 녹음테이프를 가져다 전 회의내용을 들었다. 이미 사태는 주체할 수 없는 데까지 온 것이다. 김일성은 적인 남한의 대통령으로부터 원조를 받아들이겠다는 의표를 찌른 수법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김정일은 기아카드를 이용해 원조물자를 받아들이고 군사력을 강화한다는 기사회생의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김 부자의 행동은 더 이상 타협의 여지가 없는 노선대립이 되었다. 그들의 생각차이는 생존을 건 노선투쟁, 권력투쟁의 양상으로 발전하여 갔다. 그리고 협의회가 끝난 다음날 1994년 7월 7일 저녁 김일성은 급사했다.


김일성, 火力발전소 건설 지시

김일성의 사망은 왜 7월 7일이어야 했는가.


김정일은 경수로를 고집했다. 끝까지 군사우선이었다. 핵개발에 필요한 경수로를 수중에 넣어 핵무장을 해야 하는데 건설까지 10년 걸린다는 것은 오히려 행운이었다. 그간에 보유하고 있던 흑연로를 동결한다고 속이면서 플루토늄을 축출하여 핵폭탄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아사는 관심 밖이었으며 오히려 적대계층을 제거하는 수단이 됐다.

미북고위급회담 제3라운드는 1994년 7월 8일 제네바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북측대표단장 강석주 제1외무차관은 7일 현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전날인 6일 김일성이 경제협의회에서 결정한 새로운 훈령이 제네바에 도달하게 되면 경수로를 철회하고 화력발전소로 변경되는 상황이었다. ‘위대한 수령님’의 지시는 절대적이었다.

지금까지 비밀로 추진해 온 김정일의 계획은 좌절될 수밖에 없었다. 하루의 여유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것은 7월 7일이 아니면 안 되게 되어 있었다.

김일성의 사망소식은 7월 9일 정오 평양의 TV를 통해 발표되었다. 사인을 전하는 ‘의학적결론서’도 곧 공표되었다. “거듭된 정신적인 과로로 심한 심근경색이 발행하여 심장쇼크를 일으켰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김일성의 사망을 둘러싼 관련자들의 공통된 증언은 김일성의 급사하던 자리에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일성 건강문제의 최대 책임자는 김정일이다. 의사의 배치나 수배를 할 수 있는 것도 김정일 뿐이다.

정리/김범수 기자 bumsoo@

관련일지</b>
-1989년 12월 : 루마니아 차우세스크 처형
-1990년 9월 : 한국 소련과 과 수교
-1990년 가을 : 아사자 발생
-1991년 8월 : 신의주 주민 4,000여 명, 식량배급 불만 시위
-1991년 가을 : 김일성 내정복귀, 김부자 노선대립 본격화
-1992년 1월 : 1차 핵위기
-1994년 6월 : 김일성-카터회담, 남북정상회담 수락
-1994년 7월 6일 : 김일성, 경수로 대신 화력발전소 결정
-1994년 7월 7일 : 김일성 급사
-1994년 7월 8일 : 제네바 美北 고위급회담 재개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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