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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반도에 있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3. 15. 14:49

[펌]고인돌이야기,줄기암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반도에 있다

 

"나는 원래 비교역사학의 대가가 아닌가.

처음 내가 이 신비한 민족과 맞닥뜨린 것은 고인돌을 통해서였어.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더군. 이상하지 않나?

이 넓은 지구상에 그 좁은 한반도라는 지역에 세계 고인돌의 70%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야.

고인돌에 미쳐 있던 나는 한국어를 아주 열심히 공부했어. 그러고는 무작정 한국에 갔어. 뭐라도 얻어보려고 말이야."

 

"호,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는 줄은 저도 몰랐는데요." 사나이는 약간 뒤틀린 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막상 한국에 가니 아무도 모르는거야.

학자든 뭐든 아무도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자기 나라에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어.

그래서 나는 그 나라 역사를 샅샅이 뒤졌어. 그러면서 나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어."

 

"왜요?"

 

 "흐흐,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자기나라에 있으면,그 역사란 건 무서울 정도로 오래됐다는 얘기가 아냐?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자기네 역사를 줄이지 못해 안달이더군. 고인돌이란 강력한 부족국가의 상징인 것은 자네도 잘 알테지.

 

 그런데 이 사람들은 중국에서 누군가 내려오기 전의 한반도란 그저 미개인들이 흩어져 살았던 것으로 생각하더군.

모든 역사책도 그렇게 만들고... 그러면 그 많은 고인돌들은 세계 각지에서 수입해 갖다두었단 말인가?

이렇게 온 나라 전체가 잘못된 역사를 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나라는 처음이었어."

 

"그게 신비하단 말씀인가요?"

 

"아니, 더 신비한 일이 있었어."  사나이는 위스키를 한잔 더 따랐다.

폐허에서 위스키와 거위간을 즐기는 이 사나이에게서는 알 수 없는 풍자와 허무가 묻어 나왔다.

 

 "자네도 알다시피 나는 비교역사 연구가이면서 성서 전문가야. 그런데 어느날 나는 두 눈동자가 튀어나올뻔 한 발견을 했어. 바로 그 한국에서 가장 신비하다는 인물의 저서를 읽을 때였지.

나는 그 책에서 성서의 요한계시록과 똑같이 씌어진 구절을 찾아낸 거야."

 

 "네? 언젯적 책인데요?"

 

"한국에 성서가 처음 소개되기도 전의 책이야. 그 책에는 놀랍게도 성서의 요한계시록과 같은 숫자가 문장 하나 틀리지 않고 나왔어.

 

"글렌은 아직 확실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한 눈길로 자신의 상전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문화의 뿌리가 같다는 얘기지. 한국인들이 중국문화를 받아들이기 전, 본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문화는 수메르족하고 뿌리를 같이하는 거란 얘기지. 이스라엘이 수메르족의 후예이듯 말이야."

 

"수메르란 동쪽에서 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물론.그들은 바이칼호부근에 살다가,일부는 시베리아를 동진해서 한반도로 들어가고,또 일부는 서쪽으로 자그로스산맥을 넘어 중근동으로 들어갔어.

 

 일부는 그냥 바이칼호부근에 남아있었고.이들은 자꾸 이질화되어 갔지만,아직도 어느 부분에서는 동질의 문화를 갖고 있어. 요한계시록과 그 예언서에 나오는 숫자가 같다는 점은 그런 것을 말하고 있는 거지."

 

"오오, 그거야말로 인류사상 가장 중요한 연구과제군요."

 

"과제? 그렇지,과제지.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실망하고 말았네.

나는 한국에 가서 이 문제에 대해 어느정도 연구가 되어있는지 알아보았지만 실망스럽게도 전혀 없었어."

 

 "그럴리가요?"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라네."

 

 "오오."

 

 "처음 나는 한국을 좋아했어.그러나 차츰 한국이 너무도 싫어지기 시작했네."

 

"왜요?"

 

"그들은 인류의 유산을 죽여버린 게 아닌가. 그들 자신이 활발하게 연구해 세계에 내놓아야할 고대의 신비한 유산을 모조리 묻어버리지 않았나? 그들은 범죄자야. 인류의 유산을 탕진한 범죄자라구."

 

 "이상하군요. 그 나라에도 학자와 연구자들이 있을 텐데요."

 

 "그 나라에서는 이런 문제를 제기하면 미치광이 취급을 받아.

내가 이런 문제를 제기하자 갑자기 한국학자들이 모두 나를 미워하기 시작했어."

 

"네? 미워하다니요? 고맙게 생각했으면 했지."

 

 "그게 한국이라는 나라야. 모두가 패거리로 나뉘어 있어.

연구는 하나도 안하는 놈들이 패거리끼리 뭉쳐가지고 나를 공격하는데 나중엔 인신공격까지 하더군."

 

"......."

 

"자기네 나라에 고인돌이 그렇게 많으니 굉장히 강성한 고대국가가 있었을 거라고 했더니,

그런 나라는 중국에나 있었지,자기네 나라는 고구려니 뭐니 하는 나라가 최초의 고대국가였다고 떼를 지어 달려드는데,나는 그만 두손을 들고 말았네.

 

 알고 봤더니,그건 일본인들이 식민지배 때 조작해 가르친 역사였어."

 

"한국은 아직 일본의 식민지인가요?"

 

"그럴지도 모르지. 한가지 분명한 것은 그 나라는 먹고사는 것밖에는 모르는 나라야.

모두가 돈에만 관심있고 역사니 문화니 하는 것은 껍질밖에 없는 나라야.

 

김진명 작 _ 바이 코리아(BUY KOREA) 中

 

 

이것은 소설이 아닌 실화야. 세계 고인돌의 반 이상이 한국에 있다면 고대에 엄청난 국가가 있었다는 뜻이 아닐까? 대체 우리나라 학자들은 무엇하고 있는 거지?

 

한글은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문자서열로 1위라고 해.

문자는 그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나타내는 척도라고 하는데,그건 뛰어난 정신문명을 간직하고 있다는 뜻이잖아.

 

우리나라의 이런 위대한 역사들은 가르쳐주지도 않고,국사시간에 맨날 연도나 외우게 하고 찬란한 역사는 감추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야.

 

실제로 세계사 속에서 한국고대사는 사라졌어. 한반도의 북부는 한사군을 통해 중국의 식민지배를 받았고,남쪽은 임나일본부를 통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다고 되어 있지, 우리의 시원역사는 왜 이토록 왜곡된 채 방치되어 있을까?

 

그것은 역사교과서 편찬자,역사학자로부터 한국정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일제의 식민사관에 물든 채 너무도 안일무도하여 제나라 역사가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됐는지,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야.

 

자신의 역사를 알지도 못하는 민족이 중국과 일본의 역사 도적질을 나무랄 수 있을까!?

어떤 의미에서는 역사를 훔친 민족보다 지키지 못한 민족이 더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해.

 

국토는 그 민족의 육체고,역사는 그 민족의 영혼이야. 우리민족이 혼빠진 민족이 되지 않으려면,이제 우리 스스로가 나서야 해. 우리들 스스로가 역사에 대해서 몰랐기 때문에 중국이나 일본이 얕보고 역사를 뺏아가는 거라구!  이젠 우리가 역사 왜곡의 진실을 밝혀나가자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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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한민족참역사

고인돌에 대한 학계의 정설

 

세계 최대의 고인돌이 있는곳, 돌과 한민족은 특별한 관계가 있습니다.

최초의 쇠,청동을 무기(신무기)로 만들어 세계를 정복했던 고조선.정복민족 한민족, 먼저,고인돌에 대해 살펴봅니다.

 

북유럽,서유럽,지중해 연안,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나, 한국의 고인돌과 직접적인 문화적관계는 없는 듯하다. 중국 랴오닝성과 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에도 분포하나,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고인돌은 크게 나누어,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 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고인돌의 연구에서는 지하의 묘실 구조와 축조방법을 중시하는데,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지만,대체로 이렇게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고인돌에는 한 구역 안에 2,3기의 고인돌을 나란히 세우고 상석 높이까지 돌을 덮어 묘역을 구성한 형식의 고인돌과,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두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각각 침촌리형과 오덕형 고인돌로 부르며 전자가 시기적으로 보다 이르다고 본다.

 

고인돌 각 형식 간의 시간적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북방식이 앞선다는 설과 남방식이 앞선다는 설이 있으나, 시간적 관계 판단에 필요한 유물이 워낙 미미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단언하기 힘들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점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기원전 8,7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거나, 아무리 이르게 보아도 기원전 5세기를 넘을 수 없다는 주장 등을 하여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고인돌이 만들어진 문화적 연원에 대해서도 역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지하에 설치된 돌널무덤이 지상화되어 고인돌로 발전하였다는 자생설,만주지방에 분포한 대석붕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는 설,거석문화의 유입으로 발생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황해도,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곳에 수백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한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전북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하며, 경상도와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개석식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일본 규슈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죠몽시대 말기에서 야요이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어,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고인돌에서는 유물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고인돌이 세골장(洗骨葬) 혹은 이차장(二次葬)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고인돌 축조에 필요한 거대한 돌의 운반에는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이것이 족장(族長) 등 지배계급들의 묘(墓)라는 주장도 있다.

 

       

강원도 고인돌     산풍리 고인돌         광령리 고인돌            용담동 고인돌         

 

 

천전리 고인돌군          승주읍 고인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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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간중앙 http://kimzzz.com.ne.kr/htry/b4.htm

고인돌

 

인류 최대의 선사시대 거석물

 

한반도 전역에 수만기가 산재해 있는 고인돌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왜 한반도에서만 그토록 많은 고인돌이 만들어졌을까.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하게 天孫을 자임하는 우리 민족의 뿌리는 어디일까. 인류 최대의 선사시대 거석물에 숨겨진 5천년 역사의 비밀이 베일을 벗게 될 날은….

 

▲고창군 고수면 황산리 고인돌. 고인돌과 뒤에 보이는 교회 사이에 고수천이 흘러내리는데 그 강의 흐름과 고인돌의 방향축이 일치한다. 여기에서 멀지 않은 상류쪽에도 고인돌군이 있다.

고인돌(支石墓·Dolmen)은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그 보존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 향토학자들에 따르면 구한말과 일제시기 고인돌은 마을 앞의 신작로를 내거나 저수지를 만드는 데까지 마구 동원됐다고 한다.

국토개발 시기에도 각종 토목공사로 그 훼손의 정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도시와 공단건설, 농지정리, 도로공사, 댐 건설현장에서 고인돌들은 중장비에 의해 쪼개지고 물 속에 잠기는 수모를 당했다. 그렇게 유실된 고인돌도 수만기에 달할 것이란 지적이다.

그러나 역설적이지만 국내에서 고인돌 연구가 본격화된 것 또한 국토개발 덕분(?)이었다. 70년대 들어 전국적으로 대형 댐(소양·팔당·안동·장성·대청·영산강·남강·충주·임하·주암·합천댐 등)이 건설되면서 수몰지역별로 긴급 구제발굴이 잇따라 이뤄진 때문이다.

그러한 연구를 통해 한반도의 청동기문화를 ‘금석병용기’(金石竝用期)로 보거나 한(漢)나라의 일부로 보던 일제의 식민사관을 극복하고 우리의 신석기∼청동기시대는 복원됐고, 그것이 오히려 일본 야요이(彌生)문화를 촉발시켰다는 가설도 입증됐다.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거석물로 꼽히는 고인돌은 북유럽에서 출발해 서유럽·중유럽과 영국·이베리아반도·북아프리카·중동으로까지 퍼져나갔고, 아시아에서는 인도와 인도네시아·중국·한국·일본에까지 광범위하게 분포한다. 그 가운데 한반도의 고인돌은 그 규모와 형태면에서 단연 첫번째로 손꼽힐 만하다.

전세계 고인돌 절반이 한반도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7만여기의 고인돌 중 절반에 가까운 4만여기의 고인돌이 한반도에 집중해 있다. 남한에 3만여기, 북한에 1만여기가 분포하는 것으로 확인되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 수를 7만∼8만기까지 늘려 잡기도 한다.

고인돌 덮개돌 아래서 대표  적으로 발굴되는 마제석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듯 최근에도 새로운 고인돌군(群)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지난 3월 대표적인 고인돌의 고장으로 꼽히는 전북 고창과 강화도 고려산에서 고인돌 무덤떼가 새로 발견돼 고증작업이 진행중이고, 지난해 8월에는 서울대박물관팀(관장 崔夢龍)에 의해 울릉도 고인돌도 처음으로 보고됐다. 울릉도 고인돌은 특히 “삼국사기”에 기록된 우산국(于山國)의 기원 연대를 청동기 이전까지 끌어올릴 수 있는 성과물로 주목받고 있다.

우리 고인돌은 미술사적 가치도 평가받을 만하다. 유홍준(兪弘濬·영남대) 교수는 한 글에서 ‘세계 미술사의 지평에서 한국 미술을 평가할 때 당당히 내세울 수 있는 첫번째 유물은 단연 고인돌’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반도 곳곳에 선사시대 고유 거석기념물들이 떼를 이뤄 장관을 이루는 것과 우리 고인돌 특유의 멋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국내 고고학자들은 “한반도의 고인돌 문화는 동아시아 거석문화권의 중심권”이라는 사실에 누구나 동의한다. 중국에서는 황해에 인접한 랴오닝(遼寧)·산둥(山東)·저장(折江) 일대에서 3백50여기, 일본에서는 한반도와 인접한 규슈(九州)지역에 5백50여기의 고인돌이 발견됐지만 그 형태의 다양성이나 분포도에서 한반도에 크게 못미친다. 인도·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의 고인돌도 수백기에 불과하다.

이처럼 한반도에 고인돌이 집중돼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기원은 어디로 보아야 할까. 한반도 기원설은 또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 것인가.

한반도의 고인돌은 함경북도 일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서 발견되지만 그 가운데 대동강 유역의 평양 일대와 영산강 유역을 포함한 전남지역에서 특히 많은 고인돌군이 발견된다. 북한 학자들에 따르면 평양 일대에만 모두 1만기의 고인돌이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 일대에서 발견된 고인돌은 2만기에 달해 전국적으로 가장 높은 밀집도를 보인다.

최몽룡 교수는 지난해 12월 전북 고창에서 열린 ‘고인돌 관련 국제학술회의’에서 “고인돌사회=단군조선=청동기시대=노예순장제사회=최초의 국가 형성이란 등식을 규명하는 귀중한 유물”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들 고인돌은 주로 해안과 하천 유역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국내 고인돌은 많은 군집지 가운데 전북 고창·전남 화순·경기 강화의 고인돌이 특히 잘 알려져 있다.

▲전남 고흥군 동강면 고인돌. 덮개돌 높이가 1.5m 가량으로 밭 가운데 있다. 바로 옆에도 3m 높이의 사각기둥 상석이 올려진 아름다운 고인돌이 있다.

전북 고창군 죽림리 일대 고인돌 무리(사적 제391호)는 동양 최대로 꼽힌다. 이곳은 지난해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올랐다. 무려 1천4백여기의 고인돌 무덤떼가 몰려 있기 때문이다.

고창지역은 특히 남방식과 북방식 고인돌이 섞여 있다. 고인돌의 형식변천 과정을 한눈에 조명할 수 있고 바둑판식 거석화가 이곳에서 이뤄진 것으로, 다방면에서 보존가치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창 죽림리 고인돌 무덤떼 동양 최대


화순지역 고인돌 무덤떼(사적 410호)는 불과 3년 전에 발견됐다. 96년 목포대 이영문(李榮文) 교수팀의 화순 능주 일대 유물·유적 지표조사 과정에서 발견돼 학계에 보고됐다. 화순 고인돌 계곡에는 남방식·북방식 고인돌 수백기가 산재해 있는데, 특히 이곳에서는 고인돌 채석장과 함께 머릿돌 무게가 무려 2백t에 달하는 고인돌이 발견돼 주목받았다.

한편 강화도 일대에는 80여기의 고인돌이 보존돼 있는데 특히 강화 부근리의 ‘키다리 고인돌’(사적 137호)은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그 외향도 수려할 뿐만 아니라 덮개돌 무게가 무려 50t에 달해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대표적인 북방식 고인돌로 꼽힌다.

한반도 고인돌의 형식과 관련한 구분은 일반적으로 북방식·남방식·개석식(蓋石式) 고인돌 등 세가지로 대별된다. 작고한 임병태(林炳泰) 전 숭실대 교수는 이를 외형에 따라 탁자식(卓子式)·기반식(碁盤式)·무지석식(無支石式)으로 구분하고 지하 매장 형태에 따라 다시 세분화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인돌과 관련한 용어들은 학자에 따라 아직 통일이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북방식 고인돌은 보통 잘 다듬어진 덮개돌(머릿돌·상석)을 위에 올리고 3, 4개의 비교적 평평한 굄돌로 짜맞춘 상자 모양의 석실이 땅 위로 노출돼 있다. 책상을 닮아 탁자식 고인돌로 부르고 대동강 유역과 중국 랴오둥(遼東) 일대 구릉이나 산 중턱에 거대한 북방식 고인돌이 남아 있다.

남방식 고인돌은 판석을 세우거나 깬 돌로 쌓은 무덤방(墓室)을 땅 밑에 만들고 그 부위에 4∼8개의 받침돌을 놓은 뒤 큰 돌로 덮은 것으로, 바둑판 모양을 하고 있어 기반식으로도 불린다. 덮개돌이 큰 것은 주로 호남과 영남지방에서 많이 보이고, 일본이나 동남아 고인돌은 소형의 덮개돌에 받침돌을 괸 형태다.

이에 비해 개석식 고인돌은 지하에 만든 묘실 위에 바로 덮개돌을 놓은 형식으로 랴오둥반도와 한반도, 일본 규슈지방에 주로 분포한다. 이는 지석이 없는 남방식 고인돌로, 무지석식 고인돌로 불리기도 한다.

 

▲전남 순천시 송광면 고인돌 공원. 주암댐 건설 때 수몰지역 고인돌을 모아 만든 공원이다. 사진 아래는 덮개돌 밑에 있는 석곽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힘 얻는 고인돌문화 한반도 자생설

한반도 고인돌의 기원(起源)과 관련, 확실한 정설은 없지만 전파설과 기원설로 나뉜다. 전파설은 또 남방설과 북방설로 갈려 있다. 남방설은 한반도의 벼농사(稻作) 전파와 연관돼 있다. 한양대 김병모(金秉摸) 교수는 “고인돌 사회는 정착농업경제에 기초한 씨족부락단위 사회로 원시신앙이 존재했다”면서 난생(卵生)신앙과 관련된 남방설을 주장했다.

그는 고인돌은 당시의 또다른 거석물인 입석(立石·선돌)과 함께 거석숭배 신앙을 가진 남방문화집단에 의해 해류를 따라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또 석관묘가 ‘천손강하(天孫降下)신앙’을 가진 북방 시베리아 계통인 반면 지석묘는 북위 45도 이남의 남방계 문화로 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북방기원설은 한반도 청동기 고인돌이 북방의 청동기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북방식 고인돌이 중국 랴오닝지역의 석관묘(돌널무덤)로부터 발전했다는 것이다.

석관묘는 구조상으로 러시아 미누신스크 지방의 안드로노스(Andronovo)기에서 시작된 것이 동진, 몽고·열하(熱河)를 거쳐 동북아까지 전파됐고 ‘비파형 동검문화’의 유입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고인돌의 부장품 유형과 관련된 것으로, 그동안 한반도 고인돌에서는 사람의 뼈와 돌칼(마제 석검)·돌화살촉(석촉)·붉은토기(紅陶)와 비파형 동검과 청동도끼·청동촉·무문토기 등이 함께 출토되었다.

땅 속은 이전처럼 석관묘형태를 띠고 있지만 땅위에 거대한 머릿돌을 올려놓은 것은 저승에 대한 관념 변화와 새로운 권위의식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엄청난 인력의 동원이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은 유목사회보다 오히려 농경사회에서 가능했던 일이기도 했다.

전파설에 맞서 제기된 한반도 자생설도 만만치 않다. 이영문 교수는 “아시아지역 고인돌의 중심 분포지가 우리나라이고, 형식도 북쪽에 북방식고인돌이 많고 남쪽에 남방식이 많으며, 돌널무덤과 비슷한 개석식 고인돌이 중국 랴오닝을 포함한 한반도전역에서 발견되는 점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남·북방의 문화가 융합한 독자적인 고인돌문화가 형성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일부에서는 발해 연안의 랴오둥·산둥반도와 한반도고인돌이 서로 같은 계통임을 밝히고 고조선시대의 문화영역이기도 한 이 일대의 고인돌문화가 자력발생한 것으로 보는 연구결과도 나와있다.

고인돌의 신비, 風水와도 관련


고인돌의 형식과 관련한 상호관계에서도 학자들간에 이견이 적지 않다. 일본학자들은 우리나라의 고인돌이 개석식에서 출발해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발달한 것으로 주장했지만 국내 학자들은 대체로 북방식에서 개석식→남방식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작고한 김원룡(金元龍) 전 서울대교수는 “북방식 고인돌의 무너진 형태가 남방식 지석묘의 등장을 불러왔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이와함께 한반도 벼농사의 전래와 관련해 북로설과 남로설의 가설을 처음 제시하기도 했다.

고인돌의 기능과 관련해서는 연구초기, 제단·주거·무덤으로 구분됐지만 차츰 무덤과 제단으로 대별돼 왔다.
최몽룡교수는 당시 고인돌사회를 ‘족장사회’였고 혈연을 바탕으로 어린아이까지 묻을 수 있는 세습신분제를 띤 계급사회라고 보았다. 결국 고인돌군은 지배가족의 공동묘지에 해당한다는 주장이다.

이영문교수는 전남지역의 고인돌을 조사한 뒤 대부분의 고인돌 밀집지역을 17개 마한소국과 지역적으로 비정했다. 이 지역 고인돌이 적게는 2백∼3백기, 많게는 6백∼8백기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 고인돌사회가 마한소국으로 계승·발전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지건길(地健吉) 주(駐)프랑스 한국문화원장은 한 지역이나 묘군(墓群)에서 나타나는 고인돌 크기를 피장자의 신분차이와 관련해 설명했다. 그는 또 지금까지 고인돌이 소수 지배계급의 무덤이라는 견해를 반박하고, 무리를 짓고 있는 고인돌군이 강의 흐름이나 산맥의 방향과 관련이 있고, 산세(山勢)나 수세(水勢)에 따른 것으로 볼 때 이는 자연숭배사상과 관련있다는 견해를 보였다.

고인돌의 무덤 방향이 물의 흐름과 일치한다는 주장은 또 고인돌 사회가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해안지역에 위치한 고인돌의 방향은 주로 같은 지역에 위치한 반도(半島)를 향하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학자들에 따라 무덤 고인돌과 의식용(儀式用) 제단 고인돌의 의미를 구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결국 많은 학자들은 고인돌의 근원형태를 돌널무덤에서 찾고 있다. 발굴유물로 볼 때 고인돌사회는 돌넘무덤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러나 지역에 지하의 매장법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고인돌은 지상에 거대한 표지물을 추가함으로써 당시 사회의 변화된 모습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보이고 있다.

고인돌사회는 큰 돌을 다루고 운반하는 데 상당한 인력과 시간·경비를 동원할 수 있는 체제였고, 그 돌을 쪼개고 운반할 수 있을 정도의 기술수준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학자들간에는 고인돌사회의 문화적·의례적(儀禮的)인 의미와 관련된 주장도 적지 않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회진토성 안 밭 가운데 있는 고인돌. 덮개돌이 마치 흙으로 빚은 것처럼 매끄럽다.

세계문화유산 지정 앞둔 한국고인돌

첫째로 앞서 설명한 고인돌 덮개돌(상석)의 축이 강·산맥·반도의 방향과 일치한다는 것은 당시 사람들의 자연숭배 내지 죽음·재생의식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상석 아래에서 붉은 흙과 붉은 간토기가 발견되는 것도 영생을 기원하는 내세관을 뒷받침하며, 피장자(被葬者)의 재생을 기원하기 위한 지킴돌들이 고인돌 주변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둘째로 고인돌의 덮개돌 위에서 흔히 인공적인 흔적들을 볼 수 있는데, 우선 여러개의 구멍(성혈)들은 친족집단의 수를 나타낸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또 덮개돌이 거북모양을 띠고 있는 것은 다산(多産)과 장수(長壽)를 기원하는 의식때문이라고 해석됐다. 고인돌이라는 지상표지물은 결국 권위의 상징물인 동시에 조상숭배관념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결국 한반도 고인돌은 세계 거석문화의 발생, 분포 및 전파 과정을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고인돌은 특히 밀집분포도나 규모, 다양한 형식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다.
국내학자들을 중심으로 세계 20여개국이 참가한 세계거석문화협회(회장 柳寅鶴·한양대 교수)가 결성되고 2000년에는 한국에서 세계 거석문화페스티벌이 열릴 예정이다.

국내 고인돌문화와 유럽을 비롯한 해외 거석문화의 비교연구도 활성화되고 있다. 이와 더불어 학계와 정부·지자체가 공동으로 고창·화순 고인돌지역에 대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도 추진돼왔다.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오는 7월에 최종 결정될 예정이다. 한반도 고인돌문화의 올바른 복원을 위한 남북한 고고학계의 공동연구는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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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시원 한민족,한반도, 그 증명

 

고인돌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르는데,기원전 7세기경 신석시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전세계로 전파된 한민족 문화유산이다.

 

동일한 유적의 분포지역은 역사학적으로 동일한 민족이 이동하면서 만들어진 문화로 본다. 즉 고인돌을 통해 인류의 흐름을 보자면 기원전 7세기시대부터 기원전 2세기시대까지의 세계적 유적으로써 한반도에서 인류가 시작되어 중국 랴오닝성과 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九州], 북유럽·서유럽·지중해 연안·북아프리카·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는 바,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나,한국의 고인돌과 유사한 형태로써 그 형태적의미를 볼때 한민족과 직접적인 문화적 관계가 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고인돌의 형태를 구체적으로 나누어보면

북방식과 남방식,개석식등으로 분류하는데,모두 한반도에 있다.

 

고인돌은 자세히 보자면,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고인돌과 남방식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고인돌 연구에서는 지하 묘실구조와 축조방법을 중시하는데, 연구자에 따라 약간 견해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북방식·남방식·개석식 등 3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북한학계는 고인돌에는 한 구역 안에 2~3기의 고인돌을 나란히 세우고 상석 높이까지 돌을 덮어 묘역을 구성한 형식의 고인돌과,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두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각각 침촌리형과 오덕형 고인돌로 부르며 전자가 시기적으로 더 이르다고 본다.

 

고인돌 형식 간에는 북방식이 앞선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볼때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 보이며 이후에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가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土壙墓]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요즘 학계의 일반적 판단이다.

 

한편, 고인돌이 만들어진 문화적 연원에 대해서는 한반도의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하는 놀라운 경우도 있다. 북방식고인돌은 한강 이남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라북도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고인돌은 전라도지방에 밀집분포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가히 한반도가 인류문명의 발생지라고 할수있는 충분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죠몽[繩文]시대 말기에서 야요이[邇生]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는바, 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증명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어 역시 모두 한민족의 유품이다.

 

고인돌의 축조에는 거대한 돌의 운반과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족장(族長)이나 지배자들의 묘(墓)라는 주장에 이견은 없다.

 

 

 

 

 

[펌]한민족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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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인돌 / 세계 문화유산


인천 강화군 내가면 오상리 산125 의 " 내가 지석묘"

 

 

강화 지석묘/ 인천시 강화군 하점면 부근리 (사적 제137호,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높이 2.6m, 덮개 6.5m, 너비 5.2m,북방식 지석묘 중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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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최대의 고인돌은 광개토칸비

 

광개토칸비는 세계 최고,최대의 비석입니다. 한민족 특징이죠.

광개토호태왕(칸)의 무덤과 아들인 장수칸의 무덤은 모두 전통적인 무덤인 피라미드입니다.

이전이나 이후도 모두 피라미드무덤들인데,이조시대들면서 어려운공법의 피라미드보다는 중국식의 편리한 현재의 동그란 무덤형태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인류최대의 고인돌....그것은 바로 광개토 호태왕의 비석입니다. 

 

광개토 호태왕비                         북중국 시안(장안)지역에 있는 (고)조선시대의 피라미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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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한가운데 행복한 고인돌(부안 구암마을)

 

▲ 구암마을은 고인돌을 가운데 두고 2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산다. ⓒ심홍섭

 

부안에 가면 나는 자주 길을 잃는다. 시골길이라 얼마나 복잡하겠는가마는 제법 넓게 형성된 부안 벌판에 놓인 길을 가다보면 꼭 길을 잃고 만다. 내가 길을 잃은 이유는 정작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내 청색시대의 부안은 곧 격포 바다였다. 애인과 가면 십중팔구 헤어진다는 아름다운 그곳. 바닷가 봉화산 정상의 팔각정에서 울리던 팝송과 노을진 바닷가의 단상이 한꺼번에 오버랩 된다. 내가 왜 이토록 부안의 오래된 이미지에 갇혀 있는가 했다. 그래서 애써 부안으로 가는 길을 멀리하거나, 한번 들었다 하면 길을 잃고 만다.

 

바구 아홉개가 있어서 구암?

 

나도 모르게 격포 쪽으로 가면서도 작은 길로만 접어들었다. 그러다 길을 멈춘 것은 ‘바위 암(巖)’자 때문이었다. 성암이니 구암이니 하는 ‘巖’ 자. 이런 곳에는 틀림없이 고인돌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고인돌이 있는 마을이 구암(龜巖)마을이다.

1963년에 사적지로 지정된 고인돌은 20여 호 되는 마을 한가운데에 마치 터주대감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전형적인 남방식 고인돌인데 이렇듯 마을 한가운데에서 대접을 받으며 마을 사람들과 함께 살아온 고인돌은 행복한 고인돌이다. 농사짓기 불편하다고, 길 넓히는데 걸림돌 된다고, 포크레인으로 깨서 없어지고, 땅속에 파묻히는 등 수난을 받는 고인돌과는 다르지 않는가. 또한 고인돌 10여 기가 모여 있는 일대를 예쁘장한 담장으로 울타리를 쳤으니 이보다 더 좋은 대접이 어디 있겠는가.

 

▲ 성암이니 구암이니 하는 암(巖:바위) 자.이런 곳에는 틀림없이 고인돌이 있다.ⓒ 심홍섭

 

왜 구암마을이라고 부르냐 하니 마을사람들은 “바구가 아홉개가 있어서 구암이여!”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문화재로 지정된 고인돌은 모두 10기이고 안내판에는 13기라고 기록되어 있는데도 마을사람은 여전히 아홉개라 한다.
20여 년 전에 완전히 마을을 떠난 수원 백씨들이 세를 부리며 살았는데,그때 백씨 집안에 있던 고인돌이 현재의 문화재로 지정된 고인돌이다. “아마 세를 부리고 살라고 고인돌 사이에다 터를 잡았겄제.”


마을에 배꼽자리(탯자리)를 둔 김종철(80) 할아버지는 어릴적 마을 현황을 훤히 알고 있다. 해금 금씨(김해 김씨)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김 할아버지는 수원 백씨들의 세가 인동에서는 짱짱하여 보통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말도 말어, 동네 입구에서부텀 길 양쪽으로 사꾸라를 일본에서 갖고와서 심었는디, 얼마전까지만 해도 봄되믄 굉장혔제. 인동에 있는 학교에서는 죄다 이리 소풍 왔어. 근디,희한혀. 그 집안사람들이 마을 뜨고 난께 나무가 다 죽어불데?”

혹시 사진 찍은 거라도 있느냐고 물으니, 별 쓰잘데기 없는 것을 묻는다고 한다. 하긴 그시절, 먹고살기 힘들던 시절에 사진기가 어디 있으며,사진 찍을 여유가 어디 있었겠는가.
지금은 바싹 마른 사꾸라의 밑둥치만 남아 그들의 영화를 힘겹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던 집안이 ‘쫄딱’ 망해서 동네를 뜬 건 아마도 고인돌 때문이라고 한다. 집안에서 부리던 머슴이 땅속에 박혀 있던 고인돌을 깨 없애버렸다는 것이다.


“넘 무덤을 함부러 건들면 쓰간디.”

 

대문마다 핵폐기물 반대 노란 깃발들 여전

 

직접 고인돌이 있는 곳으로 가서 설명을 해주는 김 할아버지는 신명이 났다. 고인돌은 잘 몰라도 마을의 역사는 훤히 꿴다는데 간혹 고인돌을 보러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직접 설명도 하는 할아버지의 고인돌과 마을 사랑은 각별한 것 같다. 그러던 할아버지가 문화재 안내판 앞에서는 열을 올린다.

“이 안내판 좀 봐요. 글씨도 제대로 못 쓴단 말이요. 한자로는 ‘거북 龜’자로 써 놓고는 한글로는 ‘구’라고 안 써 놨소. 나가 면장한테 가서 ‘귀’자로 바꿔달라고 해도 도루묵이요. ‘구’자에다가 작대기만 하나 대믄 될 것을. ‘거북 귀’자를 ‘구’자라고도 한다고 하는데 나가 옛적에 서당에서 배울 적에는 ‘귀’자로 배웠지, ‘구’자로는 안 배왔어!”

전북 부안군 하서면(下西面) 구암마을은 ‘구암리 지석묘군(支石墓群)’ 문화재만큼의 명성에 맞지 않게 작은 마을이다. 마을 뒤 기상봉 자락 정심골(井心谷)에서 흘러내린 물줄기가 하서면의 제법 넓은 벌판을 적시는데 그 물줄기를 끼고 마을은 조용히 들어앉아 있다. 40여명도 되지 않은 작은 마을이어서인지 마을 골목을 돌아다녀도 사람 그림자를 찾을 수 없다. 남자는 일곱 명밖에 되지 않는다는데 그래서인지 작고 예쁘장한 마을회관에는 남자들은 없고 아낙들만 모여 있다. 대부분의 동네를 가면 화투놀이를 하는데 구암마을 회관은 아낙들의 살아가는 얘기 속에 웃음만 가득하다. 회관 유리문에 붙은 ‘핵 없는 세상’ 스티커가 빛바랜 채 아직도 선명하다.

“그때 핵 폐기장 반대 데모할 때 동네 분들은 모두 참여했어요?”
“그 말 흐기 전에 한번 물어봅시다. 핵 폐기장을 찬성흐요. 반대흐요?”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고장에 핵이 있으면 되겠어요?’라는 말에 누워 있던 아주머니도 벌떡 일어나 앉는다. 동네 사람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나서서 데모했다는데 각 대문마다 걸려 있는 노란 핵폐기장 반대 깃발이 여전하다.

 

해마다 고인돌 앞에서 신명나는 풍년기원제

 

바다가 가까이에 있지만 ‘거기하고는 상관이 없고 담배 묵고 살었어’ 하는 동네사람들 말처럼 구암마을 사람들은 기상봉 자락 야트막한 산자락에 형성된 밭에서 담배농사를 주업으로 하며 살았다. 지금은 밭을 논으로 쳐서 논농사가 대부분이지만 마을사람들은 아직도 담배농사와 함께 하는 모양인지 쌀보다는 담배 얘기가 많이 나온다.

“지금은 군에서 고인돌 있는 디를 백씨들한테서 매입을 해서 그렇지, 백씨들 땅일 때는 들어가 보덜 못했소. 긍께 동네에 고인돌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산 사람이 흐다흐요(많소). 백씨들도 집안에 있는 고인돌이 걸거쳤을(걸치적거렸을) 테지만 요렇게 잘 생긴 고인돌을 맘대로 못했제. 그 덕에 세도 부리고 살았제.”

백씨 집안 머슴의 실수가 아니었다 해도 그런 세도도 영원한 건 없는가 보다. 이렇게 터가 센 곳인지라 마을 동제가 있는가하여 물어보았다.
“예전에는 있었제. 당산제가 있어서 정월대보름이 되믄 걸립(풍물놀이)을 하고 돌아다녔제. 지금은 사람도 없고 해서 안흔 지가 상

당해. 대신 하서농민회에서 제를 모시제.”

 

하서농민회에서 주관하여 춘분 무렵 좋은 날은 선택해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농경의 시작을 알리는 선사문화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고인돌 앞에서 풍년기원제를 8년 전부터 지낸다고 한다.
“그때는 참말로 신명지제. 그렇게 한바탕 놀아야 농사를 짓제. 암.”                             반핵깃발은 아직도 집집마다 걸려있다.

 

상서초등학교의 전신인 부서국민학교에서 소화(昭和) 2년에 졸업을 했다고 일본 연호를 정확히 기억하는 김 할아버지는 내가 연표를 꺼내어 연도를 확인하자 메모지에 따라 적는다. “나가 언제 입학했는지 알아 둘라고.” 그래서 졸업연도까지 확인해주니 상기된 표정으로 받아 적는다. 일제시대에 일본 놈들 밑에서는 절대 공부 못시킨다는 아버지 고집 때문에 서당에서 잠깐 동안 배운 한자 공부를 지금껏 밑천으로 삼는다고 한다. 서울에서 재단사 한다는 막내 아들네한테 쌀을 보내야 한다면서 쌀 포대를 묶는다. “이렇게 자식놈들한테 쌀 부쳐주고 사는 재미로 살제. 나가 직접 지었응께."

김 할아버지의 정성을 뒤로하고 마을 옆 초등학교로 갔다. 혹 마을로 소풍 왔다가 찍은 단체사진이라도 있을까 싶어 갔는데 학교는 문을 꽁꽁 닫았다. 차라리 내 상상 속에서의 화려한 봄날의 구암마을 풍경만 갖고 가는 게 좋겠구나 싶다.

자주 길을 잃었어도 부안은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아름다운 곳이다. 돌아가는 길에 새만금 간척지에 들어갈지도 모를 매향비를 본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시간만큼 세월이 지나서 다시 부안에 들러도 아름다웠노라고 기억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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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의 낙원이었다

 

글/양승영 경북대 교수·고생물학·사진/권태균


▲고성 덕명리 해안의 공룡 발자국화석은 82년 1월 경북대 양승영 교수가 학생들과 함께 남해안 일대의 지질조사를 하던 중 발견했다. 사진 속의 거대한 족흔은 4족보행 공룡(龍脚類) 발자국으로 길이가 35cm에 달한다. 만조 때는 완전히 바닷물이 차오른다.

지난 10여년 동안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화석 수는 실로 엄청나다.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50여개 지역에서 6천5백여개의 발자국이 발견됐다.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다. 이곳에 공룡 발자국이 밀집된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완전한 골격화석은 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공룡 화석에 담긴 1억년 전 한반도의 비밀은….

미국의 고생물학자인 콜로라도대 럭클리 교수는 지난 90년 한국을 방문해 공룡 발자국화석이 집중적으로 발견된 경남 고성군 하이면 덕명리 일대의 지층을 조사한 뒤 기자들의 질문에 “한국은 유라시아 대륙에서 공룡의 수도”라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미국 콜로라도 일대가 뉴 월드(남·북미 대륙)에서 공룡의 수도라고 한다면, 한반도는 올드 월드(유라시아 대륙)에서 공룡의 수도라고 할 만큼 공룡의 발자국이 다량으로 다양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지역은 그 어느 곳보다 공룡 연구에 중요한 곳입니다.”

그는 지난 7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으로 공룡 발자국에 대한 정보들을 수집해온 전문가로서 84년 뉴멕시코에서 개최된 공룡 발자국에 관한 제1회 국제 심포지엄을 직접 주관하기도 했다. 최근까지 이 부분에서 발표한 연구논문으로 보았을 때 그는 공룡 발자국화석 연구의 1인자로 꼽을 만하다.

이토록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공룡학자를 놀라게 했던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는 지난 82년 처음 고성 덕명리 해안에서 공룡 발자국화석이 발견됐다는 정보를 듣고 이 지역에서 화석을 처음 발견한 필자에게 국제 공동연구를 제의해 오기도 했다. 그와 88∼91년까지 4년여에 걸친 야외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덕명리 해안 일대에는 1백50여m 두께의 지층이 분포하고, 그 가운데 약 3백여 층준(層準)에서 화석들이 나타나 평균 0.5m마다 화석이 발견되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했다.

이 지역에서는 또 관입암상(貫入岩床)이라는 화성암 표면에서도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기도 했다. 화성암에서 화석이 발견된 것은 세계적으로도 처음 있는 일로 이 사실은 이미 국제학술지에 발표되었다.

▲덕명리 해안에서 발견된 2족보행 공룡 발자국.

6천5백여 공룡 발자국 영남 일대에 집중

82년 이후 한반도 특히 영남지역에서는 매년 새로운 공룡발자국 산지가 보고되고 있다. 이제는 발자국 산지의 발견은 더이상 뉴스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 돼버렸다. 특히 고성 덕명리에서는 공룡의 종류가 적어도 사족보행(四足步行)의 용각류(龍脚類)가 3종, 이족보행(二足步行)의 조각류(鳥脚類)가 10여종, 이족보행의 수각류(獸脚類)가 2종이나 확인됐다.

경북 의성군 일대에서도 광범하게 공룡화석들이 발견됐다. 86년에는 금성면 청로리 야산에서 공룡의 골격 부분화석이 발견된 이래 90년에는 금성면 제오리에서 공룡 발자국(천연기념물 지정)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봉양면 구미리에서 공룡 어깨뼈와 대퇴뼈가 발견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영남지역 이외에서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황리 일대에서 공룡 발자국화석이 다수 발견됐다. 이곳 9개 층준에서는 2백여개의 공룡발자국이 발견됐는데 특히 익룡 발자국화석과 물갈퀴발 새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돼 주목을 끌었다.
이밖에도 국내에서 발자국화석이 1백개 이상 집단발견된 곳은 20여곳에 달할 정도다. 지역별로는 경상도 지역이 50여군데, 전남지역이 1군데, 북한 황해도 평산군 용궁리가 1군데 등 발자국화석은 6천개를 넘을 정도다.

그러면 한반도에서 이토록 많은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럭클리 교수의 말처럼 과연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들의 천국이었는가. 사실 발견된 발자국화석만을 고려한다면 한반도가 공룡의 천국이라는 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화석은 찾는 이의 눈에만 띄는 것이다. 이 말은 매우 당연한 것 같지만 상당히 중요하다. 머리 속에 찾고자 하는 화석의 영상이 들어 있어야 눈에 띄고, 찾으려는 마음이 없으면 망막에 비쳐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82년 남해안에서 공룡발자국이 발견된 2년뒤 일본열도에서도 곳곳에서 공룡발자국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다. 일본 혼슈의 군마현 나카사토라는 작은 마을의 세바야시 지층, 그리고 테토리층군과 규슈의 미후네층군에서도 공룡발자국이 잇따라 발견됐다.
그들은 당초 한국에서 공룡발자국이 다수 발견된 사실에 주목했다. 한국에서 발자국화석이 발견됐다면 일본의 동시대 지층에서도 화석이 나올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발굴작업을 벌이게 된 것이다.

 

골격화석과 발자국화석의 보존조건은 상호 배타적

▲덕명리 해안에서는 4족공룡 말고도 2족 공룡(獸脚類·鳥脚類)이 15종 이상 무리를 지어 발견된다. 이곳은 세계 3대 공룡 발자국화석 산지로 상족유원지에서 실바위까지 6km에 걸쳐 화석들이 퍼져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서는 곳곳에서 발자국화석이 발견되고 있지만 이에 관한 보고는 상당히 미미한 편이다. 공룡의 완전한 골격화석이 워낙 많이 발견된 중국이기 때문에 발자국화석에 대한 관심은 의외로 적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공룡의 존재가 확인된지 2백년이 지났지만 세계적으로 발자국화석에 관한 중요성이 부각되고, 고생물학자들이 관심을 갖게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불과 20여년 정도다.

그렇다면 한반도 내에서 발자국 이외의 완전한 골격화석이 발견될 가능성은 어느 정도일까. 국내에서도 가끔 골격화석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매우 단편적인 것일 뿐 완전한 것이 아직까지 나오지는 않았다. 우선 그 이유부터 짚어보아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한반도의 환경조건을 들 수 있다. 일반적으로 공룡발자국이 잘 보존되는 환경조건에서는 골격이 쉽게 분해돼 버리고, 반대로 골격이 잘 보존되는 조건에서는 발자국이 보존되기 어렵다. 홍수나 산사태, 지진 등 지각변동이 클 경우에는 골격화석이 나올 가능성이 크지만 한반도에 많이 분포하는 이른바 ‘경상층군’은 매우 안정된 지형을 형성해왔기 때문에 가능성이 작다는 것이다.

결국 공룡발자국과 골격의 보존조건은 상충적이고 배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골격과 발자국이 함께 발견되는 예는 거의 찾기 힘들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공룡 골격화석을 찾기 위한 본격적인 발굴조사도 이뤄지지 않은 상태다. 정밀 발굴은 커녕 지금까지 발견된 발자국화석들도 제대로 연구·보존이 버거운 실정이다. 공룡화석에 관심을 갖고 정밀하게 조사한 기간이 아직 길지 않고 조사자의 수도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을 감안한다면 국내에서도 조사 여하에 따라 머잖아 골격화석이 발견될 개연성은 아직 충분하다고 볼 수 있다.

국내 공룡 화석산지는 대부분 영남지역에서 발견된다.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이것을 지질학적으로 설명하자면 매우 간단하다. 공룡이 살던 시대의 지층이 이 지역에 가장 넓게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룡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중생대 쥐라기 후기에서 백악기가 전성기였다.

화석은 반드시 그 생물이 살던 시대의 지층에서만 발견되는데 영남지역에는 공룡시대의 지층인 경상층군이 넓게 분포해 있다. 영남 일대에는 2억5천만년 전부터 6천5백만년 전에 걸쳐 퇴적된 중생대 지층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지층의 지질학적 특징 또한 공룡 발자국화석의 분포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공룡화석의 보존 여부는 그들이 살던 지질시대뿐만 아니라 지층이 퇴적된 환경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다.

공룡은 육상 동물이기 때문에 해성층(海成層)보다 주로 육성층(陸成層)에서 발견된다. 발자국화석은 앞서 밝힌대로 골격화석과는 공존하지 않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발자국은 특히 하천 주변의 범람원(汎濫原)이나 호수(湖水)가에 고운 입자의 퇴적물이 쌓이는 곳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 한반도 경상층군에서 공룡발자국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환경조건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러한 견해와 관련해 일부 학자들은 “공룡시대 한반도에는 경북 안동에서 남해안 일대까지가 거대한 호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하고 있다.

중생대 백악기 ‘경상층군’의 비밀


공룡이 살던 중생대 쥐라기·백악기, 동부아시아 지역의 해륙분포 상황에 대한 의문도 이와 맞닿아 있다. 현재까지 중국을 비롯한 동부아시아 지역의 공룡에 관한 연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 까닭에 자세한 상황이 밝혀지지는 않았다. 발견된 화석이 지역에 따라 매우 다양한 데 비해 나라마다 철저한 비교연구가 체계적으로 이뤄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구체적인 종(種)과 속(屬)의 수준에서 비교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육상동물인 공룡화석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대륙·일본열도의 같은 시대 지층에서 발견되는 것은 이 일대가 공룡시대에는 현재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란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 중국의 산둥(山東)반도를 비롯하여 만주일대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에서 발견되는 각종 공룡화석은 적어도 당시 황해(黃海)가 존재하지 않았고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동해(東海)도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공룡이 살던 당시의 자연조건도 아직 연구과제다.
현재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공룡시대가 지금보다는 대체로 따뜻한 기후조건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거대한 체구의 공룡이 현재 한반도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기후에서는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룡에게 추운 겨울철은 체온을 유지하기 어려운 조건이었고, 체구가 큰 공룡들은 동면(冬眠)조차 힘들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지질학적 자료에 따르면 백악기 지구의 평균기온은 현재보다 적어도 10℃ 정도는 높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경남 마산시 진동면 고현리 해안의 공룡 발자국화석. 이곳에서는 날카로운 2족보행 육식공룡과 넓적한 4족보행 초식공룡의 발자국이 다수 섞여 있어 상당히 역동적인 모양이다.

당시 지구상에는 공룡 외에도 공생관계에 있는 생물들이 다양하게 나타난다. 소철류나 소나무와 같은 겉씨식물이 주로 자라고 있었고, 물 속에는 연체동물이나 어류 그리고 다양한 곤충들이 함께 살았을 것이다.

70년대 초 우리나라에서 공룡화석이 처음 발견된 이래 발자국화석과 공룡의 알·골격·발자국·이빨·배설물·발톱 등의 화석들이 계속 발견됐다.

여기서 우리가 특히 주목할 것은 국내에서 공룡화석의 발견 주체다. 다른 화석과 달리 공룡화석은 해방 후 국내 학자가 처음 발견한 화석이라는데 큰 의의를 둘 수 있다. 반세기에 걸쳐 일본인 고생물학자가 한반도 곳곳을 샅샅이 조사해 고생대 삼엽충을 비롯한 대부분 종류의 화석들을 연구, 보고하였으나 유독 공룡만큼은 국내 학자가 이에 앞선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공룡에 관한 기사가 처음 보도된 것은 1976년 3월23일. 기사내용은 필자가 발견한 공룡알과 소형 파충류의 이빨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제 이 공룡화석이 발견한 것은 3년 전인 73년 초. 필자는 당시 일본유학을 준비하면서 조사차 남해안 일대를 조사하다 경남 하동군 금남면 수문동 해안에서 압착된 상태로 보존된 공룡알 껍데기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화석을 발견했을 당시 문제의 알이 공룡알이라고는 감히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정작 공룡화석을 확인한 것은 이것을 일본 연구기관들이 조사한 결과가 나온 뒤였다.
그뒤 이러한 사실이 언론에 공표되고 학계에 보고된 것은 발견 3년후의 일이었다. 국내 공룡화석의 최초보고는 결국 76년 3월31일 대한지질학회 고생물분과에서 이루어졌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룡연구는 비교적 활기를 띠게 됐다.

국내 공룡연구의 열악한 조건


나중에 독일 본대학의 에르벤교수(1984)와 박혜숙(1986)의 연구에 따라 문제의 공룡알 껍데기는 조반류 공룡의 알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또 이 화석이 보고된 공룡알 화석 가운데 최고(最古)의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했다.
한편 공룡의 부분 골격화석은 그뒤로 경북 의성군 탑리를 비롯하여 경남 합천군 율곡면 노양리, 중앙고속도로 의성 IC 부근, 경북 군위군 우보면 나호리 도로변, 경남 진주시 유수리 하상 등지에서 잇따라 발견된 바 있다.

그러나 그 골격화석들은 단편적인 것이어서 그 정체를 밝히기 어려웠다. 발굴조사 조건도 극히 열악해 상지대 이광춘박사가 의성 IC 부근에서 발견한 골격화석의 경우는 아예 발굴조차 이뤄지지 못한 채 노천에 방치돼 있는 실정이다. 국내에서 발견된 부분 골격화석 중에는 진주시 유수리 하상에서 발견된 이빨화석만이 유일하게 그 주인공이 일부 알려졌을 따름이다. 이 화석은 카마라사우루스(Camarasauridae)과와 알로사우루스(Allosauridae)과에 속한다는 정도의 윤곽이 알려졌다.

이런 와중에 일부에서는 뼈의 파편이나 발자국을 근거로 일반인이 공룡의 이름을 새로 제안하는 해프닝까지 발생했다. 동물의 이름을 새로 부여하는 일은 매우 전문적인 작업이며 국제적으로 정한 명명규약을 엄격히 적용해야 하는데 이를 간과한 것이다. 명명규약은 학명의 안정성(安定性)과 보편성(普遍性)을 조장한다는 의미에서 세계적으로 아예 법조문 형식으로 정해 놓고 국제명명위원회가 조직돼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는 그뒤로 학계에서조차 화석이 아닌 것을 화석이라고 공표하는 웃지 못할 일까지 종종 벌어져 공룡연구에 오히려 장애물이 되고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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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바른사회
글쓴이 : 알마자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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