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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종교의 시원, 한민족의 신교문화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3. 15.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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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역사 속에서 살펴보는 하나님 문화
2. 최초의 종교: 한민족 신교의 상제문화[BC7000]
3. 우리 문화에서 살펴보는 상제문화

 

 

1.역사 속에서 살펴보는 하나님 문화

 

역사 속에서 살펴보는 하나님

 

사전적 의미로는 종교에서 믿음(신앙)의 대상으로 삼는 절대자. 사람으로서는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을 지닌 존재로서 우주의 모든 것을 창조하여 다스리며, 인류의 선악을 가려 재앙이나 복을 내린다고 믿어 숭배하는 대상을 말한다.

 프로테스탄트에서는 우주의 창조자이며 전지 전능한 신으로서 하나님이라 부르고, 카톨릭교에서는 하느님 또는 천주라고도 한다. 그리고 천도교에서는 한울님이라 하고, 민속신앙에서는 상제上帝 또는 천제天帝라고 한다.

 

 

  최남선선생은 한민족의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밝은 문화는 우주의 최고 원리요, 인류의 최고 이상이라 했다.
  그리고 한민족의 하나님 문화는 아득한 옛날부터 일관되게 전승되어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문화계통이 분명하며, 그 분포의 구역이 아시아의 북방전체를 뒤덮으니 세계최대의 문화권이라고 밝혔다.

 

천산의 전경

한민족이라는 말자체가 하나님을 중심으로한 민족공동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이다.
(HanKhan:하늘을 의미→ 몽고어:Tengri,터어키어:Tangri,우리말:당골,한문:檀君)

 우리민족이 최초로 세운 국가가 중앙아시아의 천산天山아래에서 한인桓因께서 세운 한국桓國이며, 이 천산을 지금도 현지인들은 Han-Tengri산이라고 부르며, 지금도 지도에는 그렇게 명시되어 있다.

Han은 大이며,Tengri는 단군이다. 따라서 Han-Tengri는 대단군大檀君이며, 그 분이 곧 한인桓因 할아버지이며, 우리의 출발점이 곧 시베리아의 바이칼호수와 천산일대이다.

  이 사실을 신라때 최치원선생이 삼국사기 진흥왕전 난랑비서에서 이른바 현묘지도,풍류도라는 이름으로 다음과 같이 알렸다.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이를 풍류라 한다.
교敎를 만든 근원은 신사神史에 자세히 실려있거니와 핵심은 삼교(유불선)를 포함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집에 들어가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노사구(공자)의 지旨이요, 무위로 일을 함에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는 것은 주주사(노자)의 종宗이며, 모든 악한 일을 만들지 않고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축건태자(석가)의 화化이다.』

 

  이 내용은 고구려때 을밀선인이 지은 다물 흥방가의 내용을 단순 복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다물흥방가는 천부경,삼일신고,366사(참전계경),단군팔조교등 십수권의 경전의 내용을 알기 쉽게 압축한 내용이다.

  신라이후 한국인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던 난랑비서에서 말하는 현묘지도는 곧 한국,배달국,단군조선과 부여,삼한,고구려등으로 단절없이 이어지는 한민족 고유의 하나님사상에 털끝만큼도 다름이 아니다.

 

이와같은 한민족의 하나님 사상은 단절없이 전해졌고 그 형태로는 다음과 같다.

 

신라 화랑의 모습

  부여 대천교(代天敎), 삼한 천신교(天神敎), 고구려 경천교(敬天敎), 신라 숭천교(崇天敎), 발해 진종교(眞宗敎), 만주 주신교(主神敎), 요와 금는 배천교(拜天敎), 고려 왕검교(王儉敎), 

 

  이와같이 이름은 다르나 동사류고에서는 이 모든 것은 하나의 가르침인 단군 설교(檀君設敎)라고 했다.

 

  이 단군Tangun의 가르침을 실천으로 행하던 사람들을 부여에서는 천왕랑天王郞, 고구려에서는 조의, 백제에서는 수사, 신라에서는 화랑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이래 백제의 수사도는 일본으로 건너가 수험도가 되고, 싸움애비는 사무라이가 되었다.

 

 

 

  그러나 소위 삼국을 통일했다는 신라의 화랑들조차 통일이후 대대적으로 몰락하여 급기야 화랭이라는 이름으로 무당 남편이 되고마는 형편이 되었다.

  또 유라시아 전체에 그 이름을 남긴 Tengri 즉,단군을 따르는 사람들인 당골네들은 마을의 천민들로 전락했으며,이같은 와중에 개화기를 맞아 서양의 문물이 들어오면서 그나마 남아있던 우리의 하나님 사상은 결정적으로 사라져갔던 것이다.

 

 

 단군Tangun은 곧 절대신 하나님의 인격적 존재(이 개념은 유대 기독교문명에서는 여호와가 하나님이 되는 이치와 같음)로서 한인,한웅,단군할아버지를 칭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세계적인 용어이다.


  이 개념은 우리민족과 함께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함께 출발한 식구로서 같은 우랄알타이어족이면서 세계사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몽고족,터어키족,항가리족(마쟈르족),만주족 등에 의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수메르 문명의 점토문자
가림토문자와 동일하다.

  근래에 유대 기독교문명의 바탕 중 상당부분이 고대 슈메르문명의 복사판이었음이 밝혀지고 있으며,그 슈메르문명을 세운 슈메르인이 알타이어의 가장 큰 특징인 교착어를 사용했고 검은 머리카락의 민족임이 밝혀졌다.

 

  슈메르라는 용어 자체가 몽고어로 우주산宇宙山을 뜻하며, 이는 우리민족이 천산, 태백산, 백두산을 우주산으로 삼아온 내용과 정확히 부합한다. 그들이 산과 같은 지규랏을 세운 것은 메소포타미아지역은 평지라서 인공적으로 천산,태백산,백두산과 같은 우주산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이 수메르문명은 메소포타미아문명으로 서양 기독교사상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하나님 사상은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에서 같이 출발한 우랄알타이어족의 여러 식구들에 의하여 아득한 고대에서부터 최근까지 전세계를 돌아다녔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중심이 되는 풍습과 경전을 고스란히 간직해 온 정통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관련자료: 한민족사>수메르 문명]

 

 

성경에 번역된 God는 상제

  기독교에서 바이블을 한글로 처음 번역한 것은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에 의해서인데,1882년과 1883년 그는 누가복음전서를 처음으로 한글로 번역했다.


그중 1882년본에는 "....두사람이하느님의압페셔올운쟈라...."와 같이 하느님을 사용했다. 1883년본에는 "....두사람이 하나님의 압페셔 올은쟈라...."와 같이 하나님을 사용했다.

 

  다음으로 바이블을 번역한 사람은 이수정으로,이수정은 박영효와 함께 일본에 수신사로 건너가 일본인 목사 야스가와에게 세례를 받았고 1885년 신약마가복음서언해를 일본에서 출간했다.


신 자예슈크리슈도스 복음(神의 子耶蘇基督의 福音이니)
그 책은 위와 같이 하나님 대신 신(神)으로 번역하고 한글 토를 달았다.

 

그 다음 1887년 서울에 있던 5명의 선교사인 언더우드,아펜젤러, 알렌,스크랜튼,헤론이 한국어 바이블 번역위원회를 발족했다.
여기서 언더우드는 1893년 찬양가를 펴내면서 하나님이나 샹뎨(上帝),텬주(天主)를 사용하는 대신 참신,여호와를 채택하여 사용하였으나 그 반응은 극히 미미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1894년 번역자회는 신의 명칭에 대하여 표결에 부쳤고 투표결과 천주:하나님=4:1 로 나타났다. 그러나 절대다수의 선교사들은 선교활동에 다른 용어와 비교할 수 없이 효과적인 하나님 명칭을 사용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게 된다. 여기서 표결결과는 유명무실해지고 천주와 하나님의 명칭은 한동안 공존하게 된다.

 

 기독교의 신에 대한 한글번역에 있어서 이 복잡하고 치열한 논쟁에서 1906년부터 더 이상 천주는 사용되지 않고 하나님이 채택되었다.


 

  이제 정리해보면,세계에 전해진 우리의 하나님 사상이 신라 이후에 유불선이라는 옷을 입고 우리에게 다시 들어왔고,근대화 이후에는 기독교의 옷을 입고 다시 우리에게 들어온 것임도 알 수 있다.
결국 우리 한민족의 고유한 가르침은 유불선과 기독교를 모두 근원적으로 포함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외래사상들은 알고보면 외래사상이 아니니 미워할 이유도 없고 또 새삼스러울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자료제공 : 블루7 http://www.blue7.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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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최초의 종교: 한민족 신교의 상제문화[BC7000]

 

한민족 신교의 상제문화[BC7000]


  여러분들은 유불선이라는 얘기는 많이 들어보았어도, 신교를 들어본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놀랍게도 신교는 우리민족 7천년동안의 국교였습니다. 외래종교가 이땅에 들어오기 전 우리역사를 이루었던 정신입니다.

지금의 사람들은 근본정신인 이 신교에 대한 가르침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한민족사 부분참조). 왜 신교라는 말을 썼는가 하면,이신설교(以神說敎) 때문에 신교라고 얘기합니다. 신을 대상으로 가르침을 베풀었다는 뜻입니다.

 

  온난한 기후와 적당한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중앙아시아에 문명이 크게 번성하기 시작했고, 인류 최초의 국가가 생겨났다. 북방에서 다시 북방문명이 시작된 것이다. 이때 처음 생긴 나라가 환국(桓國, B.C7,199~3,898)이었다 한다. 지금의 천산(天山)산맥과 파미르고원의 동쪽으로 알려져 있는데, 지금의 중국 북서부지역이다. 이것이 북방문명의 출발인 것이다.

 

  B.C 3,000년경의 황하문명,인더스문명,수메르(메소포타미아)문명,이집트문명들이 모두 B.C 7,199~3,898년에 실제했던 중앙아시아의 환국(桓國)의 신교(神敎)문명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고,환국(桓國)의 문명이 남쪽으로 뻗어내려 세계 4대문명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환국의 자취>

 

1. 중국 신강성 위구르자치구 우루무치(烏魯木齊) 동쪽에 소재한 천산천지 일대에서 신석기시대의 성터(北庭古城遺址)가 발굴됨 → 환국의 중심지로 추정됨.

2. 바이칼호 부근에서 신석기 유적: 배달국 홍산유적 출토물과 유사함.

3, 문헌기록: 진서(晉書) 4이전(四夷傳) - 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일군국
                  중국사고지도집(상해출판사)
                  당서(唐書) 북적전(北狄傳) - 우루국
                  삼국사기 - 구다국(句茶國), 매구곡(賣溝谷)

 

 

 <세계 최고(高)의 피라미드 발견>

 

  2000년 07월 03일 중국 톈진일보에 의하면,러시아 고고학 발굴단이 티베트 서쪽의 강런보치봉 주변지역에서 세계 최고(最高)의 피라미드와 100개가 넘는 세계 최대의 피라미드군(群)을 발견했다고 한다.
환국(桓國)이 초창기에 도읍을 정한 위치와 일치한다.

 

 고고학계의 탄소 연대측정법에 의해,그 거대한 피라미드는 진시황의 무덤보다도 수천년 앞서는 것으로 드러났다.
현재, 이들 유적들은 중국 공안당국에 의해 철저하게 숨겨지고 있다. 학술적인 조사나 연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들 피라미드는 만주와 한반도에 널려있는 고구려의 무덤과 너무나 똑같은 모양과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학계에서는 이들 피라미드는 중국과 일본에는 찾아볼 수 없으며,고구려의 건축양식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상고(上古)시대의 유적지로서 중요한 의미를 던져주는 것이다.

 


  우리민족은 독특해서 그냥 상제라고 하지 않고 접두사를 붙여서 삼신상제(三神上帝)라고 합니다. 이 천제가 과연 막연한 하늘에 대한 제사였는가 하면,그것은 아니였습니다. 인간과 모든 만물을 지배하는 상제께 천제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신교에 등장하는 삼신상제>

 

태시에 위 아래 사방은 일찍이 아직 암흑으로 덮여 보이지않더니,옛것은 가고 지금은 오니 오직 한빛이 있어 밝더라. 상계로부터 또 삼신이 계셨으니,곧 한분의 상제시라.

 

주체는 곧 일신이니 각각 신이 따로 있음이 아니나,쓰임은 곧 삼신이시라. 삼신은 만물을 끌어내시고 전세계를 통치하실 가늠할 수 없는 크나큰 지능을 가지셨더라. 그 형체를 나타내지 않으시고 최상의 꼭대기의 하늘에 앉아 계시니 계신 곳은 천만억토요 항상 크게 광명을 발하시고 크게 신묘함을 나타내시며 크게 길한 상서를 내리시더라.

숨을 불어 만물을 만드시고 열을 뿜어 만물의 종자를 키우시며 신묘하게 행하여 세상일을 다스리시니라. [태백일사: 삼신오제본기]

 

통틀어 말하자면 삼신산이라 하는 산이니 삼신은 곧 상제인 것이다....인간의 생사는 반드시 삼신이 주관하는 것이라고 한다...... 저 삼신은 곧 우주를 창조하고 만물을 만드신 천일신(천주天主)이시다. [신시본기]

 

  

 

  옛부터 우리민족은 무생물에도 신이 내재해 있다고 믿었습니다. 우리나라만큼 신을 섬기는 나라가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문화 속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기를 잡으러 나가기 전에 용왕(龍王) 또는 용신(龍神),수신(水神)에게 풍어제를 지내거나,산에 나무를 하러 들어가면 산신제를 지내고,묘자리 하나를 파도 산신제를 지내는 것이 우리가 보통 말하는 애니미즘입니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민족에게 있어 우주의 절대자에 대한 신앙이 바로 신교입니다. 그러니까 7500년동안 우리민족의 국교로서 자리잡아왔던 근본적인 가르침이 신교입니다.

 

  초대 환인천제께서 천산(天山)에 내려와 장생불사하면서 삼신상제께 천제를 지냈습니다. 그 때는 제정일치(祭政一治)시대로서 환인 자신이 정치적인 군장이면서 성직자의 역할을 동시에 했습니다. 그는 전 백성들을 하나의 구심점으로 모아 통치를 했는데,그 구심점이 바로 삼신상제(三神上帝)님께 드리는 천제(天祭)였습니다. 천제는 3월16일과 10월3일 두번에 걸쳐서 지냈습니다.

 

 

 

  그러면 이 신교의 맥이 언제부터 끊어졌는가, 대진국이 망하면서 끊어졌습니다. 고려의 복원관과 조선의 소격서에서 태을제(太乙祭)를 지내왔으나,조선왕조로 넘어오면서 초기에는 그 전통이 조금 살아있다가 유교사회가 본궤도로 진입하면서 그 위상이 격하되다가 기어코 사대주의 사상에 영혼을 팔아버린 유생들과 그 선봉인 조광조에 의해 삼신상제님과 천지신명에게 제사 올리던 제기(祭器)와 신위(神位)까지 모조리 파묻혀 버리고 소격서가 폐지되는 비운을 겪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환인 환웅 단군의 삼성조시대 이래 수천년동안 지속되어온 신교신앙의 자취는 여전히 민중의 삶 속에 뿌리깊이 남아있었습니다. 불과 수십년 전만 하여도 어촌에서는 풍어제(豊漁祭)를 지냈으며 마을에서는 성황당(城隍堂)이 곳곳에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세계화의 거센 바람속에 농경사회가 몰락하고,도시화가 급진전되며,서양 과학 물질문명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제 신교신앙의 자취는 거의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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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우리 문화에서 살펴보는 상제문화

 

실례로 우리의 역사 곳곳에는 상제문화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있다. 불과 100년 전만 하더라도 고종황제는 상제님께 천제를 지낸 기록이 있다. 이러한 상제문화가 역사속에서 사라진 것은 불과 최근의 일인 것이다.

 

 

 

강화도 마니산 첨성단

가.고조선: 첨성단은 하늘에 계신 상제님께 제사를 올리던 제단으로 우리민족의 고유한 신교 제천의식이었다.

 

나.고구려: 광개토대왕이 부여임천을 지나고 대전 보문산을 지나 속리산에 가서 삼신상제께 천제를 지냈다는 기록.

 

다.대진국(발해): 학교를 세워,천부경,삼일신고,참전계경을 가르치고 삼신상제님께 천제를 지냈다.

 

라.고려: 1355년 공민왕이 행촌이암을 강화도 마리산에 보내어 삼신상제님께 직접 천제를 올리게 하며, 고려말에 권근이 강화도 마리산에 가서 천제를 올린다.

 

마.조선초: 제천의례는 천자가 아닌 제후국으로서는 행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는 명분론과, 이와 달리 농업국가로서 전통적 기우제(祈雨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의견이 갈려 설치와 폐지를 거듭하게 됐다.

 

고려의 원구제는 5방의 방위천신(方位天神)과 전체 위에 군림한다는 황천상제(皇天上帝)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천자국인 중국과 다름없는 제도로 시행되었다.

하지만 고려말 우왕(禑王) 11년(1385) 고려의 국가적인 의례는 제후의 의례에 따라야 한다는 주장에 의해,당시 친명정책(親明政策)을 펴나가던 중이어서 부득이 제천의례는 폐지되었다.

※ 본래 하늘 최고신인 황천상제께 제사를 지내는 나라는 천자국에서만 행해진다.

 

 

원구단: 황천상제위(皇天上帝位)는 단의 제1층 북쪽 동편에서 남쪽을 향하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태조3년(1394)에 제후국의 예에 준하여 조선의 동방 신인 청제(靑帝)에 제를 올리기 위한 원단이 설치되었으며,

세종원년(1419)에 실시된 원구제도 오랫동안 계속되던 가뭄을 극복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시행하였다.

 

조선 초부터 억제된 제천의례는 세조2년(1456년)일시적으로 제도화되어,제를 드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원구제도 세조10년(1464)에 실시된 것을 마지막으로 중단 되었다.

 

원구단이 다시 설치되는 것은 고종34년(1897) 조선이 대한제국 이라는 황제국으로 이름을 바꾸고, 고종이 황제로 즉위하여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 부터이다.

이해에 의정 심순택이 천신(天神)에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상소에 의해,규모와 체제는역대의 예전(禮典)을 기초로 하여 단(壇)을 건립하였다.

 

 

 

<심청전 판소리 듣기>

 

<판소리 심청전의 한장면>

이때에 옥황상제께 옵서 남해용왕께 하교하시되, "금일 오시 초에 출천 대효심 낭자 인당수 들것이니,팔선녀로 옹위허여 수정궁에 모셨다가 인간으로 환송허되, 시각을 조끔 어기거나,물한 점을 묻히거나,모시기를 잘못허면 남해용왕은 천벌을 주고,수국제신은 죄를 면치 못하리라!" 분부가 지엄허니,

 

용왕이 황겁허여 수국충신 별주부와 백만인갑제장이며, 각궁시녀로 용궁교자를 등대허고 그시를 기대릴제,

과연 오시에 백옥같은 한 소저가 물에 풍덩 빠져들거늘,시녀 등이 고히 맞어 교자 우에 모시는구나.

 

심청이 정신차려, "나는 진세천인으로 어찌 감히 용궁 교자를 타오리까?" 시녀등여짜오되,

"상제의 분부오니,만일 아니 타시오면 우리 수궁은 죄를 면치 못허나이다. "사양타 못하여 교자우에 올라 앉으니,시녀 등이 모시고수정궁으로 들어갈제,

 

옥황상제의 영이어든 거행이 오직허리. 사해용왕이 각각 시녀 등을 보내어 조석으로 문안허며 조심이 각별헐제,그 때여 심청이 수정궁에 머무른지 어언간 삼년이라,천상에 계시는 옥진부인과도 상봉을 하였것다.

하루는 옥황상제께옵서 남해용왕께 들러 하교허시되, "심청의 방년이 가까오니 인당수로 환송하여 어진때를 잃지 말게 하라!" 남해용왕 명을 받고 심청을 치송헐제,

 

 

 

상제(上帝)난 우리 황상을 도우소서

성수무강하샤 해옥주를 산갓치 사으소서
위권을 환영(천하란 뜻)에 떨치샤
어천만세에 복록이 무궁케 하쇼셔


상제(上帝)난 우리 황제를 도으소셔

 

<[한국문화대백과사전]제 14권 '애국가'>

 

요즈음 <애국가>에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상제>가 <하느님>으로 바뀌어 있죠.

 

[자료제공 : 블루7 http://www.blue7.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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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중동.서양문화의 출발지: 수메르 문화 [BC4000]
5. 도대체 수메르인들은 어디서 왔는가?

 

 

4. 중동.서양문화의 출발지: 수메르 문화[BC4000]


  지난 한 세기동안 전세계적으로 수메르인에 대한 연구는 비상한 관심을 모아왔다. 그 주된 이유는 수메르인들이 이처럼 인류사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이 나날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는 점에 있다.

 특히 수메르인들의 종교문학과 의식이 오늘날 서양문명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에 상당한 영향을 남겼다는 사실이 밝혀짐으로써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의 관심도 더욱 높아지고 있다.

 

 

 

수메르의 위치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한 무리의 인간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거기에 정착하기 시작한다.

 

  이 한 무리의 인간들을 '수메르인 Sumerian' 이라고 하며 그 뜻은 '검은 머리' (Black Headed People)라는 뜻이다.  크래머 같은 학자들은 주위에 원래 없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타나 살았다고 하여 '인종의 섬'이라하는 표현을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양강지역에 올 때 문자와 학교제도와 법제도 등 고급문화를 이미 가지고 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있다가 메소포타미아지역으로 이주해 왔느냐이다.

  

지금까지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로 남겨져있는 이 수메르인들의 유래 문제를 소위 '수메르 문제거리 Sumer Problem'라 할 정도이다.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문명도 수메르보다 무려 1000년 이후의 것이며,인도의 인더스강 유역 문명도 그와 비슷한 후기문명이다.

 

  수메르인들이 가지고 온 문명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급문명으로,그 당시 지금의 히브리인들은 말 그대로 'Habiru'로 그 말의 의미는 '떠돌이' 혹은 '산적'의 의미 등을 갖는다.

 

<환단고기에 등장하는 수밀이국>
 

우리 한(桓)의 건국은 가장 오랜 옛날에 있었다.... 어느날 동남동녀(童男童女) 800명이 흑수와 백산의 땅에 내려왔다. ... 이를 한국(桓國)이라 하고 그를 천제한인(天帝桓因)이라 했으며 안파견이라고도 불렀다. 7세를 전하였는데 그 역년은 3,301년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 5만리 동서 2만여리에 이른다. 이를 모두 합하여 한국이라 하며 나누어 말하면 비리국,양운국,구막한국,일군국...선비이국,수밀이국으로 보두 12국이다.  -한단고기 삼성기(三聖記)-

 

비리국은 숙신의 서북쪽에 있는데 말을 타고 200일을 가야 한다. 양운국은 비리국에서 말을 타고 또 50일을 가야 한다. 구막한국은 양운국에서 또 100일을 가야 하며 일군국은 구막한국에서 또 150일을 가야 하는데 이를 계산해 보면 숙신에서 5만여리를 가야한다. -당나라 때 편찬된 진서(晋書)-

 

 

<수밀이국의 대이동>
 

그러면 천산(파미르고원)과 바이칼호 근처에 있던 <수밀이국>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이주하게 되었을까? 이것은 환국말기인 약 6천년전에 인구가 증가하고 기상이변으로 시베리아지역이 점점 추워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12환국의 한 갈래가 성지 태백산(백두산)으로 이동하여 환국의 정통을 지켜내려온 것(환웅의 배달국)이 바로 오늘날의 한민족이다. 이제 그 환국의 대이동 경로를 따라 갈라져나가 오늘날 여러 민족의 뿌리가 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수메르인들의 유물 발굴

  수메르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문명화된 땅이라고 불렀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로선 (그 주위에서) 수메르가 최고 발달된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수메르의 도시는 상하수도 시설도 갖추고 있었고 심지어 수세식 화장실도 이용했다. 이집트문명도 수메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더 나아가 바빌론과 그리스문명도 수메르의 영향을 받았으니...

 

 수메르인들이 설형문자라는 것을 사용할 당시 히브리인들은 문자도 없었으며 옷이란 동물가죽을 벗겨 입고 다닐 정도였다. 그리고 수메르인들은 직조기술을 발견하여 이미 옷을 물들여 입고 다녔다. 건축술도 발달하여 2층가옥을 지을 정도였다.

 

 

 

지구라트

  수메르인들이 발전시킨 농경기술은 점차 유목과 수렵생활을 대체해 나가면서 원시상태에 있던 인류의 생활을 풍족하게 해주었다. 최초로 도시를 건설한 수메르인들의 건축기술은 후대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수메르 신전 지구라트(Ziggurat)는 지금도 그 웅대한 자태를 보존하고 있는데,이것은 그후 중동 각지에 세워진 신전양식의 전형이 되었으며,성서에 나오는 바벨탑의 모델이 된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수메르인들이 만든 사회제도관료제도,법률 등도 후대의 제국들에 그대로 차용되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기록된 인류 최초의 법률 역시 수메르인들이 만든 것이다.

  이밖에 수메르인들의 종교적 관념과 의식 등도 주위 민족들에게 큰 영향을 남겼다. 마치 로마가 그리스의 신들을 수입해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듯이 바빌론과 아시리아제국의 신들은 수메르신들이 그대로 들어와 이름만 바꾼 것들이 많았다.

 

 

 

홍수설화 등 기독교의 원형을 수메르 토판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30년대 처음으로 이라크에서 수메르문자가 발견되면서 가장 충격을 받은 곳은 기독교였다.

 

  왜냐하면 가장 최초의 사건이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생겼을 것이라 여겨져 왔고 에덴동산도 그 지역 어딜 것이라 믿어오던 터에 창세기의 창조설화와 홍수설화 등이 수메르의 토판 속에 그대로 그 원형이 기록돼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메르인들과 유태인들은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기록에 따르면 유태인들의 조상은 수메르지역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떠돌던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뒤에서 수메르의 역사를 소개할 때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수메르인들이 도시를 만들고 문명생활을 누리고 있을 때 그 주위에는 유목생활을 하는 다수의 야만적인 민족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셈족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이 셈족이 바로 오늘날의 유태인과 아랍인들의 원형인 것이다.

 

정리하면 수메르문화가 고대 중동세계에서 보편문화의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이들 주위에서 떠돌던 유목민족의 일파였던 유태인들이 수메르문화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고,이에 따라 유태인들이 만든 성서에서 수메르적 요소가 발견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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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도대체 수메르인들은 어디서 왔는가?


 

  그러면 수메르인들은 과연 어디서 왔는가? 이것이 수메르 문제의 화두이다. 그들의 유래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남긴 문자이다. 어느 두 언어가 같은 계통이라면 먼저 언어의 특징이 같아야 하고, 문법 구조가 같아야 하고, 유사한 언어 특히 수사가 같아야 한다.

 

우리가 인도와 유럽의 언어가 같다고 하는 것은 영어,독어,프랑스어,인도 샨스크리트어가 모두 이 세가지 점에서 같기 때문이다. 물론 수메르어와의 비교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생각키로는 이 세가지 점에서 거의 완벽하게 같은 언어는 우리 한국어가 아닌가 한다.

 

먼저 언어의 특징이란 수메르어가 교착언어인데,교착언어란 우리말의 주어나 목적어 다음에 '은, 는, 이, 가' 등이 붙는 언어를 의미한다. 이는 우랄알타이언어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런데 중국어와 인도어는 일단 교착언어가 아니다. 그래서 수메르어와는 그 특징에 있어서 같지 않다.

 

다음으로 문법구조에 있어서 수메르어는 '주어+목적어+동사'이다. 이는 영어 혹은 중국어와는 다르고 우리말과 같은 구조이다.

 

수메르어와 한국어 발음과 뜻 비교
슈메르어 발음과 과 뜻
한국어 발음과 뜻

아누(Annu) 최고신

하느님 上帝

안(An) 하늘, 天

하늘, 天

기르(Gir) 

길 (Gil) 路

라 (Ra) ...에서   

로 (Ro) 조사 (助辭)

아비 (Abi) 아버지

아비, 父, 지아비 (夫)

움마 (Uhma) 엄마

엄마 (Uhma) 母

니므 (Nim) 님, 任

님 (Nim) 사람

바드 (Bad) 밭 田 

밭 (Bat)밭, 田

나 (Na) 나, 일인칭

나 (我) 일인칭

그 (Ge) 3인칭

그 (Ge) 3인칭

이. 1일칭 

이. 지시대명사

 

 

 

  영국학자 '크래머'등의 발굴에 의하여 '머리가 검은 (Black Headed People) 동아시아인들'이 문명을 다 가지고 들어와 수메르문명 세웠다는 것이 밝혀졌다.

BC 2500년 전
수메르의 씨름모양의 향로

고구려 각저총(角抵塚) 벽화

 

 

언어 이외에 수메르 유래의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 '지구라트'이다. 수메르의 문화 속에는 Ziggurat 이라는 인조산을 만들어 신에게 제사를 올리고,임금과 스승과 아버지를 동일하게 받드는 군사부 일체 제도가 있었는데 동방 한민족의 문화와 거의 유사하다.

초가잠빌의 지구라트,에람,
[BC.3000년경]

 

만주에 있는 배달문명 피라미드들의 일부 [독일인 고고학자인 하우스돌프가 찍은 것. 사진 보낸 직후 중국당국에 쫒겨남]

 

지구라트는 벽돌로 쌓은 인조탑이다. 물론 피라밋의 유래이며,구약성서의 바벨탑의 전신이 다름 아닌 지구라트이다. 다행히 고고학자들은 지금 터키 그리고 몽고지역까지 수메르의 유적을 찾아내고 있는 실정이다.

 

 

-정교일치: 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신권 정치가 실시되었다.

-제천의식: 지구라트라는 큰 탑을 가진 신전이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천문학: 인간의 운명이 천체운행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태음력: 1년을 12달로 하는 태음력을 만들고,다시 하루를 24시간으로 만들었다.

-60진법: 한 시간을 60분,1분을 60초로 하는 60진법을 만들었다.

 

 

  그밖에 수메르와 한국은 묘장제도,순장제도,최고지도자의 상징을 봉황으로 삼고 있는 점 등에 있어서 앞으로 두고두고 그 유사성이 연구의 대상으로 남겨져 있다.

마지막으로 역사스페셜에서 보도한 우리역사와 수메르문명의 관계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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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메르 출신 아브라함은 이슬람교,기독교문화의 원류
7. 기독교의 여호와.예수.하느님은 같은 대상인가?



 

아브라함의 성지 - 우르(ur)

 

 아브라함우르(Ur:이라크 남부 유프라테스강 가까운 곳에 있던 수메르의 도시국가)라는 곳에서 태어났으며,이후 그는 빈손으로 온 것이 아니라 당대 최고도로 발달한 도시문명의 법과 도덕, 천지창조와 홍수에 관한 전승을 지니고 가나안 땅에 들어와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에게 전해줬다는 것이다.

 

 성경의 연대로 보면 아브라함이 태어난 해는 BC 2166년이므로 당시 메소포타미아지역을 휩쓸었던 수메르왕 우르남무의 시대에 우르에 살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지역 사람들은 이미 많은 신을 섬겨서 무려 3600여의 신들이 있었다고 한다.

 

 외경의 전승에 의하면 데라도 우상을 제조하는 것으로 생업을 삼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곳에서 아브라함의 위대한 각성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요세푸스의 ‘유대고대사’는 아브라함이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과학자며 기술자였다고 적고 있다. 수많은 신들 때문에 생기는 폐단과 혼란을 목격하고 있던 아브라함은 어느날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천체가 인간의 유익에 기여하는 것은 그들을 주관하시는 창조주의 명령에 순종하기 때문이다” (유대고대사 1-7)

 

  이로서 아브라함은 중심없이 혼란스러운 다신을 강하게 부정하고,한 분의 주재신을 강조하는 유일신 개념을 설파하게 된다.

 

 

 

자식을 가진 아브라함의 기쁨

  아브라함에게 사라라는 본처가 있었으나 자식을 가지지 못하였고, 이에 그의 여종인 하갈과 동침하여 이스마엘을 출산하게 된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100살이 되었을 때,아브라함은 사라(본처)에게서 이삭을 생산해 낸다.

 

그런데.여종 하갈과 그의 아들인 이스마엘이 이삭(본처 아들)을 괴롭히고 희롱하니까.. 사라가 화가 나서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쫒으라고 한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근심을 하게 되는데,이에 하나님은

 

네 아이나 네 여종을 위하여 근심치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칭할 것임이니라. 그러나 여종의 아들도 네 씨니,내가 그로 한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창12~13)

 

라고 하며 물 한부대를 줘서 광야로 내보낸다.


 

그리고 이때 쫓겨난 하갈과 이스마엘은 아랍민족의 시조가 되며, 그의 후손이 이슬람교까지 만들게 된다. 물론 이삭은 이스라엘민족으로 유대교가 후에 성립된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의 근본은 거의 같다.

이들의 공통점유일신 개념으로 특히 창조신이 현재의 지배신이라고 보며,나중에는 예수를 신격으로 보기보다는 한 인간으로 신의 말씀을 전하는 사도라고 본다.

 

하지만 차이점을 보자면 이슬람교에서는 유일신을 알라라고 부르고,유대교에서는 여호와(야훼)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지만 유일신이 "나는 누구다."라고 한 적은 없으며,그들의 언어인 유대어 혹은 아랍어로 적당한 호칭을 찾은 것일 뿐이다.

 

그리고 유대교에서 유일신은 모든 것을 총괄하지만 특별히 유대민족에게 애정을 가진 존재이다.(유대인의 선민의식) 그에 반해 이슬람교에서 유일신은 특정민족에게만 특별대우를 하지는 않는다.

 

이런 점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가 유사하고,유대교는 상이하다고 보여진다. 다만, 이슬람교는 기독교에 비해서 신이 더 보편적인 개념인데,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배타성(예수님을 통해서만 신의 세계로 갈 수 있다)에 비해 이슬람교에서는 타종교를 인정하는 경향이 있다.

 

 이슬람교와 기독교의 원류인 유대교는 동일하지만,이후 지역적인 해석에 의해 조금씩 이견이 생기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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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조상의 씨족신 여호와   
 

 

아브라함의 4대손인 야곱은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등 열두 아들을 낳았고,그후 자손이 크게 불어났다.


이후 모세가 탄생하여 70만 이스라엘족을 에굽왕 베로의 탄압에서 구출하고,천막국가의 건설,기강과 율법의 제정 등도 훌륭했지만,무엇보다 훌륭한 위업은 여호와 신의 창설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사상의 큰별인 모세는 기독교 성서 창세기 오경(五經)을 쓰고,여호와 신의섭리를 다시 종교적으로 높이 승화시켜 서구인들을 감동시키고,여호와신이 세계의 기독교신으로 추앙받게 만든 것이다.

 

 

 

 

 

 

 

 

 

 

 죤 부라이트씨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한 율법과 계약을 그들이 받은 곳은 바로 시나이산이다..."고 했다.

 

이스라엘에 정착하기 전에는 파레스티나와 그밖의 어느 곳에서도 야훼(Yahweh)신앙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모든 사건들 위에 모세라는 인물이 탑처럼 우뚝 솟아있다. 즉 그가 이스라엘 신앙의 창시자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한민족사에 등장하는 여와
 

우리나라 배달국에 있어서 여와(女媧)는 소호김천씨의 할머니이며, 중국의 3황에 해당하는 태호복희씨와는 남매지간으로 결혼하여 부부가 되었다. 또한 태호복희씨는 환웅 5세 태우의의 12자녀 중 막내아들이다.


중국의 인류창조신 여와

중국의 인류창조신 여와

 

중국신화에서 인류의 창조는 여와라는 여신에 의해 이루어진다. 후한(後漢)시대에 응소(應邵)가 지은 ‘풍속통의’(風俗通義)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하늘과 땅이 처음 생겼을 때 아직 사람은 없었다.  이때 여신 여와가 황토를 뭉쳐 사람을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 하나 만들다보니 나중에는 힘이 들어 많이 만들어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노끈을 진흙탕 속에 담갔다가 꺼내 사방으로 흩뿌렸다. 그랬더니 흩어진 진흙이 모두 사람으로 변하였다."

 

  원용국씨는 그의 저서 <구약사>에서 모세 연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렁이가 팀나의 성전에서 발굴되었다고 했는데, 이것은 인두사신이 교미(옆 그림)하는 복희와 여와씨의 그림과 대조적이다.

 

<야훼>라는 명칭이 모세 조상들의 씨족신 적용되던 예배상의 명칭이었는데, 모세가 그것을 이스라엘 하느님의 공식명칭으로 채택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참고자료: 응소: [풍속통의] , 정연규: [수메르. 이스라엘민족을 탄생시킨 한민족 -한국문화사-]

 

 

    예수는 이전의 기독교가 지닌 민족종교로서의 성격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가 원한 것은 진정한 하나님(우주 주재자)의 진리를 전하는 것이었지,일개 민족신의 가르침을 전하고자 함이 아니었다.

 

    성경의 어디를 뒤져보아도 예수가 절대자를 ‘하나님’ 또는 ‘아버지’라고 불렀지,한번도 ‘야훼(여호와)’라고 부르지 않았다는 점이 이를 입증하는 좋은 예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요한 5:43>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오,나를 내려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한 6:38∼39>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 7:21>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한 8:28>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리라. <요한 12:44>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노라. 그러므로 나의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르노라. <요한 12:49,50>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함이로다. <요한 14:31>

*내가 아버지께로 나와서 세상에 왔고,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 <요한 16:28>

 

이처럼 성경의 많은 구절들에서 예수는 하나님과 자신의 주종관계를 분명하게 구분지어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현대 기독교의 교리에서는 하나님을 성부,성자(예수),성신의 3위일체로 존재하시는 분으로 규정하고 있고,이중 성자가 인간으로 화육하여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의 길을 걷다가 다시 하늘로 되돌아가 하나님의 지위로 원상회복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이러한 교리는 첫째 우주 창조원리의 바탕을 모르는 서구의 신학으로 잘못 해석된 것이며,역사적으로는 AD 381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린 2차종교회의에서 콘스탄티누스황제만일 “예수가 하나님이 아니다.”라고 한다면,기독교 교리가 허물어지고 믿음에 혼돈이 생겨 교회의 권위가 파괴되어 분열을 일으킬 것이며,결국 로마제국까지 흔들리게 될 것이라는 판단하에 결정된 작의적인 성경해석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에서 예배하던 그 민족의 지방신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에서는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다.

즉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고 하느님의 소식을 알리는 선지자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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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불교의 최고신 비로자나불. 구원의 신 미륵불

 

 흔히 불교는 무신론적 종교이고,스스로 깨달아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는 자력종교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불교의 가르침이 스스로 마음을 닦고 수양해 진리를 깨달아 자신을 완성하라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중생은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라고 본다. 때문에 여러 초인적인 신불의 힘에 의지하여 이 험난한 사바세계의 괴로운 삶을 헤쳐나가고자 한다.

 

 

 "과연 불교의 교리에는 하나님이 존재하는가?" 대답은 "그렇다!" 이다. 분명히 하나님이라는 상징적 존재가 있다. 기독교에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중재자인 예수가 하나님보다 더 강조된 면이 있듯이,불교 역시 마찬가지로 부처라는 존재가 너무 전면에 드러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라는 개념이 없는 듯이 되어버린 것이다.

 

 때문에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불교계의 일각에서는 부처가 하나님보다 더 높다느니,또는 부처만이 최고라느니 하는 치졸한 소리를 하는 실정이다.

 

마하비로자나불

 불교에서 하나님으로 볼 수 있는 개념은 밀교에서 일컫는 '대비로자나불' 혹은 '대일여래'라는 존재이다. 여기서 '마하(Maha)'는 '크다'는 뜻이고, '비로자나(Vairocana)는 '고루 비치는 태양'이라는 뜻이다.

 

 이는 역사상 실재했던 불타인 석가모니불과는 달리 우주적 통일원리의 인격화를 불타로 보는 것이며,따라서 대일여래의 기본적인 성격은 절대적인 원리의 인격화이다.

 

이 존재는 우주의 중심이면서 스스로 태양과 같은 존재를 의미한다.

  "태양이 무한한 빛을 방출하듯이,이 대비로자나불은 자신의 몸에 있는 모공 하나하나에서,백억이든,천억이든 무수한 부처들(분신불)을 방출한다."

 

이 부처는 전 우주 어디에나 빛을 비치는 참된 부처이며 석가여래는 지구상에 생을 받아 태어난 그분의 分身(분신)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석가모니와 같은 화신불(化身佛)을 통해 우주의 모든 생명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원리는 기독교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러 하나님의 대리자로 인간세상에 온 예수가 존재하는 것과 똑같은 이치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영원한 본체인 부처이고,그의 지혜의 광명은 주야의 구별이 있는 해보다도 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 때에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리니 이름을 '미륵’이라 하리라." -長阿含轉輪聖王經-


 

<미륵 상생·하생경>을 보면,미륵부처님의 천상에서의 위격과 권능에 대한 석가부처의 설법이 나와 있다.

 

"이곳의 이름은 도솔타천이다. 이 하늘의 주님은 ‘미륵이라 부르니 네가 마땅히 귀의할지니라." -미륵 상생·하생경-

 

 미륵부처님의 위격과 권능에 대해서는,미륵의 어원을 추적해 보아도 알 수 있다. 본래 미륵(彌勒)’의 어원은 범어로 마이트레야(Maitreya,‘자비로운 어머니’)이며,고대 인도어인 팔리어로는 메테야(Metteyya,미래의 구원불)이다.

 그리고 미륵의 어원인 ‘마이트레야(Maitreya)’라는 말은 본래 ‘미트라(Mitra)’라는 신의 이름으로부터 유래되었는데, 미트라는 인도·페르시아 등지에서 섬기던 고대의 태양신이다.

   

그런데 대단히 흥미롭고 충격적인 사실은,기독교에서 구세주의 뜻으로 쓰이고 있는 ‘메시아(Messiah)’라는 말도 바로 이 미트라(Mitra)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이다.

 

 

 

 

 

 

 [화엄경:입법계품]을 보면 선재가 덕생동자와 유덕동자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큰 스승을 두루 찾아 구도의 길을 걷던 선재는,이들로부터 미륵의 도법경계에 대한 한소식을 전해받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들이 말하기를,

 

"저 남쪽에 해안(海岸)이라는 나라가 있고 거기에 대장엄(大莊嚴) 동산이 있으며,그 안에 광대한 누각이 있으니 이름은 비로자나장엄장이라. 보살의 착한 뿌리의 과보로 좇아 생겼으며,..... 미륵이 그 가운데에 계시니,

본래 태어났던 부모와 권속과 백성들을 거두어주어 성숙케 하는 연고며,...또한 그대에게 보살의 해탈문을 보이려는 연고며,보살이 모든 곳에서 자재하게 태어남을 보이려는 연고며..." <화엄경:입법계품>


"석가세존이 심어둔 공덕의 나무가 미륵불이 나오실 ‘용화세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된다." <미륵성전:173쪽>

 

즉, 석가부처가 설하고 염원한 진리의 불국토를,새 차원의 도법을 여는 미륵부처님께서 현실세계에 이루어주신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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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중국 고대문화의 시작 (고대 중국 임금들은 우리 동이족)
10. 중국의 도교와 상제문화
11. 중국의 유교와 상제문화


 

중국인들은 고대 중국의 임금이라 하여 <삼황,오제>를 받들고 있다.  삼황오제는 삼황태호 복희씨,염제 신농씨,황제헌원씨오제소호금천씨,전욱고양,제곡고신,요임금,순임금 을 말한다.

이들은 중국문화,종교의 창시자들로,이들이 동이족이라면 중국의 종교와 문화는 다름아닌 우리민족의 신교문화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배달국의 5대 환웅 태우의(BC 3512)는 12명의 아들을 두었는데,장자다의발은 대통을 이어 6대 환웅이 되고,그중 막내인 태호복희는 중원으로 진출,현 하남성의 진(陳)에 도읍하여 문명을 개척하였다.

복희씨는 삼신산에 올라가 제사하고,천하에서 괘도를 얻어 천부경을 바탕으로 한 팔괘,즉 한역을 만들었으니,이는 곧 동양철학의 근본을 마련한 것이다. 한역은 훗일 중국 주역의 모체가 된다.

 

<태호복희씨 관련 문헌기록>
 

태호복희씨

역법은 사실 동이가 창시자이며,소호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 중국: 서량지 교수-

 

"환웅천황에서 5대를 전하여 태우의 환웅이 있었다. 아들을 12명 두었는데,장자는 다의발 환웅(6대 환웅)이라 하고 막내는 태호라 하니 복희라고도 한다." -태백일사-

 

[밀기密記]에 이르기를, 복희는 신시에서 태어나 우사의 직을 세습하고 뒤에 청구와 낙랑을 거쳐 진으로 옮겨갔다. 그의 후예들이 풍산에서 나누어 살았으므로 풍씨로 성을 삼았다. 지금 산서성의 제수에 희족의 옛 거처가 남아있다.”

 

“대변경에 이르기를,복희는 신시로부터 나와 우사가 되었다. 신룡의 변화를 보고 괘도를 만들고,신시의 계해로 시작되는 역법을 갑자로 시작되는 것으로 고쳤다. 복희의 무덤은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태백일사-

 

 

 

 한편 복희의 부인 혹은 누이동생이라고 하는 여와는 황토를 반죽하여 인간을 만들었다고 전하는데, 이러한 복희와 여와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농경과 의약의 시조로 불리고 있는 염제신농이 등장하게 된다.

 

 염제신농배달국 8대환웅 안부련(BC 3240)의 신하인 소전의 아들로서 중원의 남방으로 진출하여 농사짓는 법을 가르치게 된다. 또한 팔괘(八卦)를 겹쳐 육십사효(六十四爻)의 점(占)을 보는 점술을 고안해냈고,저자(시장)를 세워 백성들에게 교역을 가르쳤다고 한다.

 

 즉 그는 중국의 농업,의약,음악,점서(占筮),경제의 조신(祖神)이며,중국문화의 원천으로 알려져 있다.

 

<염제신농씨 관련 문헌기록>

 

염제신농씨

“웅씨에서 갈라져나간 사람 중에 소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안부련 환웅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들어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신농은 여러가지 풀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그는 뒤에 열산으로 옮겨갔다.”  - 태백일사-

 

“신농은 열산에서 일어났는데,열산은 열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며 소호와 함께 고씨의 방계지류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황제 헌원치우천왕과의 싸움에서 패한 뒤,그는 치우천왕에게 귀의하여 청구국 고유의 천부인 3개에서 유래한 신선도의 길을 걷게 된다. 이 신선도는 후대의 노자와 장자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는데,도교를 일명 신선도교라고 하는 것도 바로 그 뿌리가 청구국(배달국)의 신선도에 있기 때문이다.

 

 
<황제의 반란과 치우천왕의 평정 (탁록대전)>
 

치우천황 목각상

 

  서기전 2707년(갑인년) 우리민족 불세출의 대영웅 자오지천황이 배달나라 제14세 한웅 신시전통을 이었다. 이 자오지천황이 바로 치우천황(단군 14대)인 것이다.

 

  그런데 당시 중국대륙은 셋으로 나뉘어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탁의 북쪽에 대효(大曉)가,동쪽에는 창힐이,그리고 서쪽에는 황제헌원(黃帝軒轅)이 있었다.

 

이때 황제헌원은 각각의 나라들과 동맹을 맺어 서로를 치려했으나,치우천황의 제후국들이어서 이마저 성공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이때 기주(冀州)의 염제신농의 나라가 유망(楡罔)대에 이르러 정사가 과격해지더니 제후들이 서로 다투고 민심마저 흩어지며 세상이 어렵게 변해버렸다. 그러자 유망을 도와 섭정을 하던 헌원이 반란을 일으켜 판천(板泉:上谷)벌판에서 유망을 시해하였다.

 

 

 

탁록대전

  이에 치우천황은 헌원을 응징하여 유망의 원수를 갚기로 결심하여, 그 유명한 탁록전이 시작된다.

 

이들과 치후천황은 70여 회의 전쟁을 했다. 그러나 치우(후)천황에게 번번이 짐으로 항복하게 되었다.

 

 치후천황은 헌원을 쥬신의 수석 제후국왕인 황제로 임명. 살아남을 수 있는 영지를 주었다. 하지만 헌원이 황제로 임명됨으로써 중국의 영토가 중국인들의 손으로 되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

 

 

  치우천황 대에 자부선생(紫府先生)이란 위대한 학자가 있었다. 그는 자부선인(紫府仙人)이라고도 하는데,하루는 장기간 연구한 경서인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을 치우천황에게 전해주었다.

 

  이것은 배달국 초기에 신지씨가 발명한 녹서(鹿書)로 씌어진 연구저서로서 세편으로 나뉘어졌었는데 후세사람들이 여기에 주를 달고 구분하여 신선음부경(神仙陰符經)이라 하였다. 선교와 도교의 기초가 된 저서이다.

 

<황제헌원에게 선도를 전파한 자부선생>

 

옛날에 황제黃帝가 동쪽으로 청구靑邱에 이르러 풍산風山을 지나 자부紫府선생을 만나뵙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았으며 이로써 만신萬神과 어울렸다. - 포박자 抱朴子 -

 

자부紫府선생이 칠회제신七回祭神의 책력을 만들고 삼황내문三皇內文을 궁궐에 진상하니 천왕께서 칭찬하시고 삼청궁三淸宮을 세워 그곳에 기거하게 하시니,공공共工,헌원軒轅,창힐倉詰,대요大撓의 무리가 모두 와 배웠다.- 태백일사-


<황제헌원에 관하여>

 

염제신농의 아버지인 소전의 후손 지파중에 공손公孫이라고 있었는데,공손의 후손중에 황제헌원(BC 2692~2592)이 나왔다.

 

[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 (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

"황제(黃帝)는 백민(白民)에서 태어나고...그는 동이東夷족에 속한 사람이다." -중국: 초사-

 

 

삼황三皇이후의 오제五帝는 그 근원이 모두 삼황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다음과 같다.

 

요임금
순임금
우임금

 

소호금천 (BC 2598 ~ BC 2514)
전욱고양 (BC 2513 ~ BC 2436) ; 황제헌원의 손자
제곡고신 (BC 2435 ~ BC 2365) ; 황제훤원의 증손자
제요도당 (BC 2357 ~ BC 2258) ; 요임금이라고도 함. (요임금 25년에 단군왕검조선 건국.)
제순유우 (BC 2255 ~ BC 2208) ; 순임금이라고도 함.

 

"창의(昌意)는 황제헌원씨의 아들로,창의(昌意)로부터 7세가 순(舜)이다."  -사마천 사기-
즉 황제 헌원씨의 8대손이 순임금이라는 것이다.

 

배달국의 고시씨高矢氏소전少典(염제신농의 아버지) → 공손씨公孫氏(소전의 후손)  → 황제헌원(공손씨의 후손) → 전욱고양(五帝중 한사람. 황제헌원의 손자) → 제곡고신(오제五帝 중 한사람.황제헌원의 증손자) → (제곡 고신의 아들;은나라를 건국한 성탕의 선조)

 

위에서 보듯이,황제헌원순임금이 동이東夷인이고,소호금천씨,전욱고양,제곡고신,요임금 등도 모두 황제헌원씨의 자손이니,중국인들이 자신들의 고대 임금이라 받드는 삼황오제 는 모두 동이인이라하는 것을 알수 있다.

 

그리고 그밖에 우리민족이 중국에 영향을 주었던 기록들도 존재한다.

 

<9년 홍수때 단군께서 우임금에게 도움을 준 기록>
 

 갑술 67년(서기전 2267)에 단군께서 태자 부루(扶婁)를 파견하여 도산(塗山)에서 우사공(虞司空: 후에 우임금)과 만나게 하였다. 태자는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방법을 전하여 주었고 경계도 따져 정했다  -단군세기-

 

 당시 요순시대의 중국천지가 9년간 계속된 대홍수로 인해 전전긍긍하고 있을 무렵,동방 고조선의 천자 단군성조는 105세 되시던 갑술(서기전 2267)년에 태자 부루를 중국 양자강 남방에 위치한 도산(塗山)에 보내 도산회의를 주재하도록 하고,고조선의 제후였던 순이 특파한 우(禹)에게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비법”을 전수케 하셨다. 『吳越春秋』,『歷代神仙通鑑』

 

 

 

 중국이 동이로부터 독립한 날 쌍십절. 쌍십절10월10일을 말하는 것이다. 이날 중국인들은 폭죽을 터트리며 이 날을 기린다. 그러나 이 날이 바로 중국이 쥬신으로부터 독립한 날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관포지교(관중과 포숙)라는 한자성어를 들어보왔을 것이다. 아주 절친한 친구사이를 이렇게 말하곤 한다. 훗일 관중은 재상자리에 앉게 된다. 이 관중으로 인해 중국은 동이로부터 독립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중국은 비로서 쥬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게 된다. 이날이 바로 쌍십절인 것이다. 관중은 훗일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재상으로 기록된다.

 

 

 

 이처럼 중국인들이 자기네 조상이라고 떠받드는 반고라는 자가 이미 거발한 한웅천황이 배달국을 세울 초창기에 서쪽으로 갈라져나간 사실이라든가,태우의 한웅천황이 선도수련법을 체계화한 일이라든가,

치우천황나라의 영역을 중원의 핵심지대로 확장했다든가 하는 업적은 우리의 기록뿐만 아니라 지나의 기록에도 뚜렷이 나와 있으므로 움직일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지나의 삼황오제 즉,태호복희,신농씨,황제헌원(이상 삼황), 소호,전욱,제곡,요, 순(이상 다섯 제왕인 오제)이 모조리 배달족이었다는 사실은 지나의 상고사 자체가 우리민족의 상고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역력히 입증해주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추세는 그후 하,은,주,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나라 대에까지 일관성있게 지속되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문화를 대표하는 유교도교의 근원이 황제헌원이 배달국의 자부선생에게서 전수받은 삼황내문경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는 것은,그당시 배달국의 문화가 얼마나 찬란했으며,거의 일방통행식으로 동양문화를 이끌어왔다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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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교의 근원은 치우천황 대에 자부선생(紫府先生)으로부터 황제헌원에게 전해지면서 중국에 퍼지게 된다.

도교에서 모시는 옥황상제는 도의 최고 관념 지고신(至高神)으로 모시며,유일 최고신의 지배하에 몇 단계를 이루고있는 다신이 신앙된다. 이는 우리민족의 신교문화와 거의 일치하는 바이다.

 

 

 

  도교(道敎)는 천계(天界) 최고의 신을 옥황대제라고 한다. 옥황대제는 인간세상의 황제처럼 위로 36천(天),아래로 72지(地)를 장악하며 모든 신(神),불(佛),선(仙),성(聖)과 인간세상,저승(地府)의 일을 관리한다.

 
<옥황경에 기록된 옥황상제의 출생>
 

아주 먼 옛날 광엄묘락국에 정덕왕과 보월광왕후의 자식으로 태어난 옥황은 영특하였고 자라면서 더욱 인자 온화하였다.

 

그는 자라국왕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지만 뒷날 보명향암산에 들어가 수도하여 많은 중생들의 병을 고쳐주기도 하였는데다 이후 삼천이백 겁을 수행하여 금선이 되어 청정자연 각왕여래라 불리었으며 그뒤 다시 일 억겁을 지나 옥황상제가 되었다.

 

옥황상제는 서왕모의 남편이며 모든 신의 왕이고 천신과 지기와 인귀들을 총괄하는 무한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많은 중국인들은 삼청이나 사어는 몰라도 옥황상제는 알고 있고 옥황상제가 최고의 신으로 추앙받는다.

 

또 한번 재난이 129600년인 1555겁에 달하는 재난을 겪어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이루고 천(天),지(地),인(人) 삼계(三界)의 최고 주재자가 되였으며,불교,도교로부터 가장 추앙받는 신으로 되였다. 하여 천공(天公),천공조(天公祖),옥제(玉帝),옥천대제(玉天大帝),옥황(玉皇),옥황상제(玉皇上帝)로도 불리운다.

 

 옥황대제에 대한 숭배역시 민간신앙중 가장 보편적인 속신(俗神)신앙이다. 민간에서는 옥황대제만신(萬神)의 주인으로 지고무상한 상제로 떠받든다. 민간에서는 옥황대제를 옥황(玉皇),오제(五帝)라고 약칭,도교의 전칭은 "오천금궐무상지존자연묘유미라지진옥황상제"(吳天金闕無上至尊自然妙有彌羅至眞玉皇上帝" 또는 "현궁고상옥황대제"(玄穹高上玉皇大帝)이다.

 

<도교경전에 등장하는 옥황상제>
 

"옥제(玉帝)는 삼계(三界),시방(十方),사생(四生),육도(六道)를 총괄적으로 주재한다" -도장경(道藏經)-

"옥황은 諸天之主요 萬天之尊으로 우주의 일체를 주재하고 권위가 끝이 없다" -옥황본행집경(玉皇本行集經)-

 

 

 

 

도교 지상신(至上神)은 원시천존(原始天尊), 하지만 민간신앙에서 옥황대제의 지위가 원시천존을 훨씬 초월해 천하의 모든 신들을 통일관리하는 지상신으로 되었다. 하여 원유의 도교 최고 천신도 점차 옥황대제 수하로 되었다.

 

옥황대제가 거처하는 곳은 33개 천궁,72개 중보전(重寶殿)으로 구성,수하의 10대 염라왕(冥王)은 인간세상의 생사를 관리하고 사해 용왕(四海龍王)은 기상변화를 관리하며 구요성(九曜星),오방장(五方將), 28수(28宿),사대천왕(四大天王) 등은 용맹하고 태백금성(太白金星),이랑진군(二郞眞君),오방오로(五方五路) 등 여러 신선들은 모두가 불법의 힘이 무궁하며 서천(西天)의 여래불(如來佛)이 이들을 보호해준다.

 

옥제는 대자대비하며 보통 중생을 구제하는 구명신이다.

 

태산의 옥황전

  민간 각지에 수많은 옥황묘,옥황관 등을 건립하여 옥황상제를 받들었다. 그리고 각 도관(道觀)마다 옥황상제를 모시는 별도의 건물을 건축하였다.

 

중국에서 천하제일산으로 받드는 태산의 최고봉의 명칭이 옥황정(玉皇頂)인데,이곳에 옥황상제에게 제사를 올리는 옥제관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명칭이 생기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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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중국의 상제문화에서는 우리민족의 신교문화의 개념을 그대로 이어받아 살아계신 하늘의 최고신 하느님 개념을 갖고 하늘에 제사드리는 국가 제례사가 정립된다.

 그리고 중국의 당송대로 내려오면서,옥황과 상제가 통합되어,옥황상제는 천상 신명계 뿐만 아니라 우주의 최상위에 있는 유일한 지존의 존재를 일컫는 말로 굳어진다.

 

<유교경전에서 찾아본 상제>

1. 시경(詩經)

시경은 상나라시대의 이야기를 노래한 것이다. 당시에는 상제에 대한 믿음과 인식이 보편적이였으며 上帝, 帝, 天 등의 글이 함께 혼용되고 있음을 살펴볼 수가 있다.

盛于豆하니 于豆于登이로다. 其香始升하니 上帝居歆이로다(大雅, 生民)
제기에 제물을 담는데 접시며 대접이 있네 그향기 올라가니 상제님이 즐겨드시네.
商之孫子 其麗不億이나 上帝旣命이라 侯于周伏이로다.(大雅, 文王)
상나라 자손들은 그 수가 많지만 상제님이 명을 내리시어 주나라에 복종케 되었네.
維此文王이 小心翼翼하사 昭事上帝하사 聿懷多福하시니라.(大雅, 大明)
문왕께서 삼가고 조심하여 상제님을 밝게 섬기고 많은 복을 누리시네.
皇矣上帝 臨下有赫하사 監觀 四方하사 救民之莫 하시니라(大雅.皇矣)
위대하신 상제님께서 위엄있게 땅위에 임하시어 세상을 살펴보시고 백성들의 아픔을 알아 보시네.

 

서경의 요전(堯典)에 '순이 왕위에 오른뒤 제일 먼저 상제께 제사를 지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서경의 상제와 관련된 내용은 너무도 많기 때문에 몇가지만 추려서 살펴보기로 하자.

 

禹曰安汝止하사 惟幾惟康하며 其弼直하면 惟動에 丕應계志하리니 以昭受上帝어든 天其申命用休하시리이다.(益稷)
우가 이르기를 당신(舜)이 머문 곳을 편안히 여기시어 일의 기미를 잘 살피시며 나라를 편안하게 할 것을 살피시며 돕는 사람이 곧으면 그 동함이 크게 응하여 임금님의 뜻을 기다리니 상제님께서 밝게 받아들여지거든 하늘이 거듭 명하사 축복할 것입니다.

 

惟聞汝衆言이나 夏氏有罪어늘 畏上帝라 不敢不正이니라(서경, 湯書)
나는 여러분의 말을 듣고있으나 하나라의 임금이 죄가 있거늘 나는 상제를 두려워하는지라. 감히 바로잡지 아니치 못하노라.

이상에서의 상제는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써 최고의 권위를 가진 주재자이다. 모든 백성들을 살피시는 존재요,덕있는 사람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백성을 다스리게 하는 天命이 나오는 근원처이다.

3. 예기(禮記)

예기에서 언급되는 상제에 관한 내용은 책의 특성상 주로 제사와 관계되어 있다.

天子將出할새 類于上帝하며 宣乎社라.(王制)
천자가 장차 순수의 길을 떠나려할 때 상제에게 제사를 지내고 땅에게 제사를 지낸다.
是月也에 天子乃以元日로 祈穀于上帝라.(月今)
이달에 천자는 원일에 상제께 오곡의 풍양을 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때 유교에서 상제에 대한 확고한 믿음과 공경이 있었으며 특히 상제에 대한 제사는 천자만이 지낼 수 있는 제사로 면면히 계승되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의 상제는 의지를 가진 인격적 존재로써 최고의 권위를 가진 주재자의 모습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예기에서 언급되는 상제에 관한 내용은 책의 특성상 주로 제사와 관계되어 있다.

 

 

 

 하은주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신정정치','천명사상'이라고 해서 상제님께서 왕에게 직접 명령을 내린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전한시대 '동중서'라는 학자가 상제라는 인격성을 천이라는 개념으로 바꿔버리며,이후로 이러한 개념은 중국 유교에서 지속된다.

 

<상제라는 인격성이 천이라는 개념으로 바뀜>
 

"도지대원(道之大原)이 출어천(出於天)이다."  

도의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다.

 

그런데 이말은 환단고기에 나오는 대목에서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상제의 인격성을 인위적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환단고기에 나오는 동일한 대목>
 

"도지대원(道之大原)이 출어삼신야(出於三神也)"

도의 큰 근원이 무형의 하늘이 아닌 하늘의 주재자 상제님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후에 주자는 다시금 하늘의 상제에 대한 인격성을 이야기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주자가 말하는 상제>
 

"주재로써 제(帝)를 말하는데 누가 주재를 하시냐는 물음에 스스로 맡아 다스리는 분이 계시니…능히 언어로 다 말할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주자어류 권68]

 

"지금 사람들은 다만 주재라는 말로써 천제(天帝)를 설명하려 하면서,하느님은 형상이 없는 존재라고 말하고 있으나,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늘의 주재자(天帝)가 세간에서 이르는 옥황대제(玉皇大帝)와 같다. 배우는 자 모두 능히 답할 수 없다." [주자어류: 권79]

 

 

 

  그리고 한국 유학을 전개한 다산 정약용은 하느님(상제)을 天과 동일한 존재의 다른 존칭으로 보고 있다. 그는 천과 상제를 일치시키는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일 말하는 상제>
 

"하늘의 주재자가 하느님(상제)이다." 하느님(상제)을 하늘(천)이라고 하는 점은 마치 나랏님(왕)을 나라(國)라고 호칭하는 경우와 같다.

 

나라의 나랏님이 계시듯이 하늘의 하느님이 계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중세에 "짐(군주)은 곧 국가이다"라는 말에서 보듯이,하늘(천)이라는 말이 하느님(상제)과 같이 쓸 수 있는 이름이라고 말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늘(천)의 주재자가 하느님(상제)이다"라는 그의 말에 더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에게서 이는 본원유학과 서학에서 온 말이기 때문이다.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하고 서양에는 동양의 유교,도교를 전하여 천주가 곧 상제라고 말한 마테오 리치는 <천주실의> 서문에서 "나라에도 主가 있는데 천지에 홀로 계신 主가 없겠습니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하느님(상제)은 세계를 지배하고 명령하는 지위에 있고,그 역할을 하고 있는 존재라는 말이다.

 

<황제가 상제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
중국인들은 하늘에는 샹띠(上帝),
땅에는 황띠(皇帝)라 하였다.

<중국성경 창세기 부분의 한 대목>
이마두신부는 성경번역시
서양의 God를 上帝라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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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바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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