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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문학으로본 역사의 증거-6-한제국전쟁사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07. 4. 7. 15:34
 

한제국의 전쟁사

6. 한제국의 전쟁사

출처: blog.chosun.com/stormmer


1) 광개토경대훈적비는
중국 대륙 정복을 기념해 세운 전승비

倭의 위치

삼국지 위서 한전은 한과 倭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왜와 접해 있으며(南與倭接) 면적은 사방 4 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마한(馬韓)·진한(辰韓)·변진(弁辰)이며 진한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다. 지금 진한 사람 모두 편두(偏頭)고, 왜와 가까운 지역(近倭)이므로 역시 문신을 하기도 한다. (변진의) 독로국(瀆盧國)은 왜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 …今辰韓人皆偏頭男女近倭亦文身…其瀆盧國與倭接界 三國志 魏書 東夷傳).

위 기사에서 주목할 점은 倭의 위치가 韓半島 밖이 아니라 韓半島 안쪽, 즉 三韓의 남쪽인 韓半島 남부에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껏 “倭는 日本列島에 있다”는 고정관념 속에서 이 기사를 보아 왔으므로 이 기사가 말해 주는 위치 비정을 무시해 왔는데 이런 고정관념을 해체하고, “(한의)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南與倭接)”는 기사를 해석하면 倭는 도저히 日本列島 내에 있을 수 없게 된다. ‘접(接)’은 육지로 서로 경계할 때 쓰는 낱말이지, 바다 건너 이웃한 지역을 말할 때 쓰는 단어는 아니다.

만약 바다 건너 倭가 있었다면 ‘바다(海)’로 동쪽과 서쪽의 경계를 표시한 이 기록이 유독 남쪽 경계를 표시할 때만 바다를 생략할 이유가 없다.

또한 辰韓條의 ‘근처에 倭가 있다(近倭)’는 구절과 弁辰 12 개국 가운데 하나인 독로국(瀆盧國)이 ‘倭와 경계가 접해 있다(與倭接界)’는 구절도 倭가 日本列島가 아니라 辰韓과 瀆盧國 근처의 韓半島라는 사실을 말해 준다.1)

저것이 바로 倭奴가 任那日本府를 착안하게 된 대목이다. 중국 대륙에 倭가 있었기에 우리나라를 韓半島에 집어넣자, 倭도 종이 위에서 韓半島로 이동한 것이다.

“25 史의 권위를 이길 수 있는 학자나 학설은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어째서 모르는가?” 이 땅의 사학자들이 모두 저런 생각을 갖고 있길래, 우리는 지금껏 “三韓은 韓半島에 있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三國과 朝鮮의 일식기록에 반하는 모든 학설이나 역사책은 거짓이다. 三國志는 우리나라 역사책을 분해해서 만든 책의 하나로 三韓을 韓半島에 우겨넣기 위해 明이 대대적으로 날조했다.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중국의 역사책은 다 진실이고, 우리나라 역사책은 다 틀렸다는 그 헛된 믿음부터 바꾸어야 한다. 대체 自國史는 모조리 거짓이고, 他國史는 모조리 진실이라 믿는 것부터가 잘못이고, 남부끄러운 일 아닌가. 우리나라는 역사를 과장한 적이 없다. 과장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위대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百濟가 山東省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가끔 나오는데, 이런 사람들도 중국 역사책이 왜곡 되었다는 말은 절대 하지 않는다. 하지만 後漢의 일식기록이 渤海灣이다. 燕나라가 渤海灣에 長城을 쌓았다고 우긴다. 그러나 중국 역사책의 虛構를 지적하지 않고도, 地名을 밀어낸 사실을 지적하지 않고도 우리나라를 중국 대륙에 위치시킬 방법이 있단 말인가.

三國은 중국 대륙의 중심지에 있었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倭와 접해 있으며 면적은 사방 4 천리쯤 된다(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는 韓半島를 염두에 두고 고친 것이다.

대만의 北濱南雅奇石

왜(倭)는 韓半島에 없었다. 三國의 남쪽에 있던 왜(倭)는 韓半島가 아니라, 중국 대륙에 있었다.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海陸諸倭 太白逸史)"이라 했다. 倭는 섬과 섬에 가까운 중국 대륙 해안가에 살았던 것이다. 百濟城을 白帝城으로 바꾼 中奴이다. 일단 수법을 개발하면 무진장으로 써먹었다. 臺灣(대만) 역시 對馬島에서 바꾼 것이다.

임나(任那)는 본래 대마도(對馬島)의 서북 경계였다. 북은 바다로 막히고 …. 뒤에 대마의 두 섬은 마침내 임나가 통제하는바 되었기 때문에 이로부터 임나는 비로소 대마도를 다 뜻하는 말이 되었다. 옛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는 곧 삼한이 나누어 다스렸던 땅으로 본래 왜인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任那自本在對馬島西北界北阻海….後對馬二島遂爲任那所制故自是任那乃對島全稱也 自古仇州對島乃三韓分治之地也 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

對馬島 즉 臺灣의 서북 경계는 臺灣海峽과 닿은 해안이다. 對馬의 두 섬은 對馬島가 두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말이 아니고, 對馬島(臺灣)를 二分한 것을 말한다. 옛날에는 강을 바다라 불렀다고 했다. 강이 바다니까, 강으로 나누어진 두 지역은 각각의 섬이었던 것이다. 對馬島에도 강은 꽤 있다. 그 중에서도 臺灣山脈의 중간쯤을 가르는 동서의 두 강을 연결해 바다라 하고, 아래 위를 섬이라 불렀던 것이다.

仇州는 섬이 아니다. 섬에는 모두 島가 붙기 마련이다. 中國倭가 對馬島에 거주 했으니까, 對馬島 맞은편, 즉 臺灣海峽과 접한 땅이 仇州였던 것이다.

협보(陝父)는 장차 개혁될 것을 알고 무리를 유혹하여 양곡을 도둑질하여 배에 싣고 패수(浿水)를 따라 내려와 해포(海浦)를 거쳐 몰래 항해하여 곧바로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니 곧 가라해(加羅海)의 북안(北岸)이다. 여기서 수개월 동안 살다가 아소산(阿蘇山)으로 옮겨가서 기거했다. 이를 다파라국(多婆羅國)의 시조라 한다. (광개토경호태황이) 뒤에 임나(任那)를 병합하여 연정(聯政)을 세워 이를 통치하였는데, 3국은 바다에 있고 7국은 뭍에 있었다(陝父乃知將革誘衆裏糧舟從浿水而下由海浦而潛航直到狗邪韓國乃加羅海北岸也 居數月轉徙于阿蘇山而居之是爲多婆羅國之始祖也 後倂于任那聯政以治三國在海七國在陸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伽倻도 揚子江 하류에 있었는데, 新羅 동쪽에 있었다. 지금의 東支那海가 그 당시는 伽倻海(加羅海)였다. 우리나라를 韓半島로 축소하다 보니까, 新羅 아래쪽에 그려 넣을 수밖에 없었지만, 伽倻는 중국 동해안에 위치했다.

南支那海는 뭐라 불렀을까. 百濟海다. 黃海는? 夫餘海다. 三國統一 후에는 중국 대륙과 접한 바다를 新羅海로 통일했을 것이다. 高麗時代에는 南支那海, 東支那海를 합해서 高麗海, 西海는 黃海로 불렀다. 西海로 부르지 않은 것은 따로 西海가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日本海라 불렀는가

우리나라가 韓半島 東海를 東海라 부른 것은 神市氏가 배달을 개천할 당시부터이다. 언제부터 日本海라 불렀는가. 일본이라는 국명이 669년에 생겼다. 그러나 日本海라 부른 것은 역사날조학이 발흥한 18 세기 이후이다.

日本의 東海는 어디였을까. 태평양? 아니다. 우리나라 東海를 東海라 불렀다. 列島는 百濟 식민지로 출발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列島로 건너간 百濟人들도 韓半島 東海를 東海라 불렀던 것이다. 百濟는 黃海와 東海를 內海로 삼은 대제국 이었다. 아니, 南中國海에서 東海(최소한 스타노보이 산맥 이남까지는 百濟 영토였다)까지, 伽倻와 倭가 있던 해안을 제외한 동아시아 해안 대부분을 영토로 가진 大帝國 이었다(新羅는 6 세기 중반까지 해안으로 진출하지 못했다. 韓半島를 침공할 당시는 揚子江의 물길을 따라 바다로 나왔다).

옛날에는 日本에 東海島, 南海島, 西海島라는 지명이 있었다. 오늘날 日本은 南海島가 시코쿠(四國), 西海島가 큐슈(九州), 東海島가 도쿄(東京)에서 오사카(大阪) 일대라고 우긴다. 도쿄에서 오사카 일대는 섬의 일부이지, 섬이 아니다. 그래서 東海道라고 우긴다.

도쿄에서 오사카 일대가 東海道라면, 나머지 혼슈(本州) 지방은 北海道인가. 그러나 홋카이도(北海道)라는 말 자체가 北海道 라는 뜻이다. 이름 없는 섬은 없다. 누가 섬에다 이름조차 붙이지 않고, 섬을 구획한 이름만 붙인단 말인가. 그것도 큐슈(九州)는 서해도, 시코쿠(四國)는 남해도라고 하면서 유독 혼슈(本州)만 이름 없는 섬으로 방치할 수는 없다. 동해道 이전에 동해島 부터 명명했다.

日本 땅은 메이지(明治)가 홋가이도(北海道)를 정복할 때 까지 시코쿠(四國), 큐슈(九州), 혼슈(本州) 세 개였다. 원래 南海島, 西海島, 東海島였던 것이다. 北海道는 아이누族의 땅으로 이전에는 에미시(蝦夷)라고 불렀다. 西海島를 九州라 부른 것은 中國倭가 日本(西海島)으로 이주한 다음부터다. 中國倭가 살던 중국 대륙의 지명을 그대로 갖다 붙인 것이다.

日本의 新羅侵攻計劃

南海島가 시코쿠섬, 西海島가 큐슈섬이 되려면 어디가 東海島 여야 하는가. 당연히 혼슈섬 전체이다. 이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이른바 日本의 新羅侵攻計劃이다.

신라를 침공하기 직전인 761년 11월, 일본은 실제로 각 지역에 절도사를 임명하여 전쟁에 동원할 선박과 선원, 군사의 수를 모두 점검했다. 최종적으로 보고된 수는 백촌강 전투에 동원된 군사력의 2 배 수준 이었다. 동해도, 남해도, 서해도에서 각각 마련된 배는 모두 394 척, 군사는 총 4 만 명이었다.(역사스페셜 6권)

주목할 것은 西海島(규슈), 南海島(시코쿠) 외에 東海島에도 배와 군사를 집결 시켰다는 대목이다. 韓半島를 침공하기 위해 韓半島 남해의 반대편인 ‘도쿄에서 오사카 일대’에 배를 집결 하는가.

이를 부인하는 결정적인 증거가 일본함대 집결지의 하나가 韓半島 南海와 접한 후쿠오카(福岡)였다는 사실이다.

후쿠오카와 이웃 도시인 마에바라에 걸쳐 있는 오래된 성터다. 성문 터에 세워진 비석은 이 성이 756년부터 쌓기 시작한 이토성 이라고 전한다.

이토성 북쪽에 슈센지(修善寺)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슈센지는 군함을 집결 시키는 관청으로, 이런 관청을 설치한 것은 전쟁을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56년, 후쿠오카의 작은 반도에 세운 이토성은 새로운 전쟁을 위해 만든 병참기지였던 것이다.

모토오카쿠와라 유적 발굴 현장은 큐슈에서 최초로 발견된 제철 유적이다. 현장에서 발견된 불순물을 조사한 결과, 이토성의 축성시기와 동일한 것으로 확인 되었다. 발굴 현장에는 화살촉이나 철검 같은 무기류도 발견되어, 제철공장 옆에는 무기 공장도 함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에서 제련한 철로 무기를 만들어 이토성에 공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은 분명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역사스페셜 6권)

“군함을 집결시키는 관청”은 西海島(규슈) 북단에 있고, 배 집결지는 정반대편인 태평양과 면한 해안이다? 통신수단 이라고는 봉화가 전부인 그 옛날에 관청과 집결지가 떨어져 있을 수는 없다. “군함을 집결시키는 관청”은 집결지 내에 있었다. 2차 대전 당시 메영연합군이 노르망디 해안에 제 2전선을 개설할 당시에도 잉글리쉬 해협과 도버해협 사이의 최단거리로 진공했다. 일본은 한반도와 면한 해안에 전함을 집결 시켰던 것이다.

759년에 전국에 500척의 배를 만들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다. 7개도 가운데 북육도에 89척, 산음도에 145척, 산양도에 161척, 남해도에 105척, 4 개도에 나누어 한가한 달마다 꾸준히 만들라고 했다. 또 배의 완성시기는 3년 안이라고 못박고 있다.(역사스페셜 6권)

작은 섬은 단일행정구역 이었다. 南海島(시코쿠)는 南海道, 西海島(규슈)는 西海道이다. 北陸道(호쿠리쿠), 山陰道, 山陽道 (그리고 東海道)는 혼슈섬에 있었다. 배 건조는 되도록 비밀로 하기 위해 韓半島와 면한 해안의 반대편에서 했다. 南海道 남단에서 배를 만든 것이다. 北陸道, 山陰道, 山陽道 역시 혼슈섬의 태평양에 면한 지역 이었다. 태평양에 면한 해안에서 배를 건조한 다음, 진공에 즈음하여 韓半島에 면한 해안에 함대를 집결 시켰던 것이다. 韓半島 남해 및 동해와 면한 해안이 일본군의 출발지점 이었던 것이다. 東海道는 韓半島와 면한 츄우코쿠(中國) 산지 일대2)고, 東海島는 혼슈섬이다.

혼슈가 東海島라는 사실은 옛날에는 우리나라(韓半島)의 東海가 日本의 東海였다는 명백한 증거다. 우리나라의 東海가 日本의 東海였기 때문에 東海島가 도쿄에서 오사카 일대라고 날조 해야만 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은 日本의 배 건조 능력이다. 394 척에 군사가 4 만 명이면 말, 무기, 보급물자를 빼고 척당 백 명의 군사가 탔다는 것인데, 14 세기의 遣明船이 13~14 명이 탈 수 있었다고 했다. 매번 난파하고 침몰하기 일쑤라 스가와라노 미치사네(管原道眞 : 845~903)조차 9 세기 말에도 東中國海를 건너길 거부한 일본이 8 세기 중반에 백 명이 승선 가능한 큰 배를 만들 수 있었단 말인가. 백 명이 탈 수 있는 큰 배는 14 세기에도 “한여름 밤의 잠꼬대”에 불과한 얘기였다. 백 명이 승선할 수 있는 큰 배를 건조할 능력이 있었다면서 구차하게 大震國에게 연합 하자고, 몇년씩 애걸 했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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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成桂가 昌王(1380~1389)을 내세워 韓半島로 천도한 1388년 까지 明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1368년 高麗가 蒙汗을 내쫓자 朱元璋 및 장사성(張士誠 1321~ 1367) 이하 中奴가 雨後竹筍으로 일어나 中土를 분할하기 위해 정신없이 싸우느라 대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런 미개 소국에 뭔가를 배우겠다고 遣明船을 보냈단 말인가. “흙 침상에서 자며 토굴을 파서 아궁이를 만들어 그 위에 눕고,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던” 華夏에게 무엇을 배우겠다고? “남녀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것이나 배울까, 그 외에는 華夏에게서 배울 것이 전무했다. 또한 14 세기에는 華夏族 출신의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한 지도 어언 6 백년이 지나서 “男女가 들에서 함부로 野合”하는 것이라면 日本도 일가견이 있었다.

朱元璋은 日本과의 접촉을 금지해 海禁措置까지 취했다. 朱元璋이 죽자마자 1399년에 遣明船을 보냈던가. 그걸 두고 14 세기에 遣明船을 보냈다고?

무엇보다 李氏朝鮮 전기에만 무려 4,800 여 건의 日本國王使, 去酋使, 규슈(九州)탐제사와 대마도주특송사(對馬島主特送使), 제추사 등 온갖 명칭의 倭奴使節을 시도 때도 없이 보내 明과의 통교를 주선해 달라고 애걸복걸한 日本이다.

-日本 도쿠가와시대(德川時代)의 朝鮮觀, (참고서적 : 三宅英利 著, 河宇鳳 옮김 ‘歷史的으로 본 日本人의 韓國觀’, 풀빛, 1990, 三宅英利 著, 趙學允 譯‘近世日本과 朝鮮通信使’, 景仁文化社, 1994, 國史編纂委員會‘韓國史9’, 大韓民國文敎部國史編纂委員會, 1984, 박경희 엮음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日本史’,일빛, 1999)

어쨌거나 형편없는 항해술과 조선술 이나마 9 세기에 中國倭가 전수해 주었으니까, 8 세기에 日本이 척당 백 명씩 타는 큰 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다.

東支那海, 南支那海라 이름 붙인 것은 朱元璋 때다. 朱元璋이 중국 대륙 전체로 지명을 옮긴 후 秦이 黃河 이남을 통일한 것으로 날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秦은 中土(티벳고원 북부)를 통일하지 못했다. 中土 서쪽은 기원전 19 세기 이래로 유목민의 땅이었다.

東支那海가 伽倻海니까 加羅海의 北岸은 揚子江口에서 杭州灣이다. 협보(俠父)는 浿水를 따라 내려와 海浦로 부터 항해해 加羅海의 북안에 이르렀다. 浿水는 丹江 이니까, 海浦는 金城(武漢) 내에 있었다. 金城의 항구 海浦에서 揚子江을 따라 揚子江口로 나와 杭州灣으로 갔던 것이다. 杭州灣 남쪽에 구야한국(狗邪韓國)이 있었다(陝父…浿水而下由海浦而潛航直到狗邪韓國乃加羅海北岸也).

廣開土境好太皇 당시, 倭는 10 개국으로 그 가운데 3 국은 臺灣에 있고, 7 국은 뭍에 있었으니까, 육지의 倭가 차지한 면적이 더 컸다. 揚子江口와 그 주변에는 伽倻가 있었으니까, 육지의 倭가 차지한 땅은 선하령(仙霞嶺) 산맥과 무이산맥(武夷山脈) 일대에서 구룡강(九龍江)이나 한강(韓江)까지 이르렀을 것이다. 아소산(阿蘇山)은 仙霞嶺山脈이나 武夷山脈에 있었을 것이다. 九龍은 九州에서 바꾼 이름이 분명하다. 오늘날은 江 이름만 남았지만, 그 옛날에는 倭가 사는 뭍 전체를 九州라고 했다.

“辰韓은 倭와 가까운 지역이다(辰韓…南與近倭…南與倭接).” 三國志의 저 구절은 이름이 같은 것을 기화로 해서 朝鮮의 管境 三韓을 3 차 三韓에다 포개어 놓은 것이다. “辰韓은 옛 辰國이다(辰韓者古之辰國也)”라며 최초의 三韓, 즉 朝鮮의 管境 三韓을 슬쩍 집어넣었다. 三韓은 “帶方의 남쪽”이 아니라, 서쪽에 있었다.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다(韓在帶方之南).”는 날조 漢四郡에 따른 기술이다.

帶方은 朝鮮, 漢 전쟁 이후 高豆莫汗이 협(?)장군에게 봉토로 준 岷江 以西의 일부이다. 조그만 지역이라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韓在帶方之南)”다는 식의 기준으로 삼을 만한 지명도 못된다. 더구나 高句麗가 樂浪을 멸망시킨 大武神烈帝 이전에 帶方은 멸망했다.

新羅가 건국한 辰韓은 54 제후국을 거느린, 朝鮮의 통치자 檀君이 직접 다스리는 辰韓(辰國,眞國))이 아니다. 新羅는 현 武漢에서 건국했고, 辰國은 薩水가 남해안 이었다. 12 제후국을 거느린 辰韓은 없다. 3 차 三韓은 朝鮮의 三韓이 사라진 후에 생긴 지명이다. “진한 6부(辰韓六部)”라고 했다(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新羅의 辰韓은 단일국가이지,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지 않았다. 赫居世가 왕이 되자, 辰韓이 斯盧로 개명했다. “도읍을 서라벌(徐羅伐)에 세우고 나라를 辰韓으로 하고, 또한 사로(斯盧) 라고도 하였다(立都徐羅伐稱國辰韓亦曰斯盧 太白逸史)." 전쟁없이 도읍을 정하고 나라를 세울 수 있었던 것은 “辰韓 6部”가 행정구역이지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朴赫居世가 나라를 세울 때는 이미 高鄒牟가 제위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군사적 재능으로 檀君의 사위가 되고, 大統까지 이어받은 高鄒牟가 정벌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까. 新羅의 시조 朴赫居世가 “부여제실(夫餘帝室)의 딸 파소(婆蘇)”의 아들이기 때문이다(斯盧始王仙桃山聖母之子也 昔有夫餘帝室之女婆蘇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朴赫居世는 13 세에 왕이 되었는데, 이때가 기원전 57년이다.

婆蘇는 기원전 70년 내지 69년에 朴赫居世를 임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원전 70년 내지 69년 당시의 檀君은 高豆莫으로 기원전 108년부터 檀君으로 있었다. 그 당시는 일찍 혼인 했음에도 혼전임신이니, 婆蘇는 15 세쯤에 朴赫居世를 임신 했다고 가정하면, 일단 高豆莫의 딸일 가능성은 없다. 高鄒牟와 혼인한 於瑕羅는 北夫餘 6 世 檀君 高無胥의 둘째 공주이다. 婆蘇는 高無胥의 첫째 공주였던 것이다. 高豆莫은 49년간 제위에 있었다. 高豆漠의 아들 無胥는 제위에 오르기 위해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고, 그 때문에 제위에 고작 2년 있었다.

高鄒牟는 北夫餘 1 世 檀君 解慕漱의 후손이고, 朴赫居世세는 北夫餘 6 世 檀君의 외손자다. 혈통으로 따진다면, 朴赫居世가 제위 적격자 였으나 나이가 어렸다. 이미 제국은 해체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제후국들은 저마다 독립을 획책했다.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고 성덕이 있(年十三 ?夙成有聖德 高句麗國本紀)”었다고 해도 12 세의 어린아이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高鄒牟는 제국의 영광을 재현할 역량을 이미 확인 시켜준 22 세의 성인 이었다. 高鄒牟가 제위를 계승해도 결국은 자신의 혈통으로 이어진다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이미 혼인 했다는 사실을 高鄒牟가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高無胥가 高鄒牟에게 帝位를 물려 주었으나, 朴赫居世가 있었기에 모두가 순순히 따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高鄒牟는 해결책으로 高無胥의 외손자에게 나라 한 쪽을 떼어 주었을 것이다3).

“高矢氏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진변(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 이다(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皆其孫也 揆園史話 太始紀)"에서 三韓은 3 차 三韓이다. 高矢氏를 비롯, 蚩尤氏, 神誌氏에게 봉토를 하사한 神人王儉은 1 차 辰韓을 다스렸다.

1 차 辰韓의 남해안(薩水 ; 현 丹江)에서 倭 까지의 거리는 위도 5° 가량 차이난다. 500km 정도 떨어진 거리다. “개마국(蓋馬國)은 일명 웅심국(熊心國)이라 하니 개마대령(蓋馬大嶺)의 북쪽에 있으며 구다국(勾茶國) 으로부터 거리가 200 리다. 勾茶國은 옛날에는 독로국(瀆盧國)이라 칭했고 북개마대령(北蓋馬大嶺)의 서쪽에 있는 나라다.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00 리에 있다(蓋馬國一云熊心國在蓋馬大嶺之北距勾茶國理百里勾茶國舊稱瀆盧國在北蓋馬大嶺之西月漬國在其北五百里 太白逸史 桓國本紀)"고 했다. 蓋馬大嶺은 오늘날의 秦嶺山脈 이니까, 北蓋馬大嶺이 될 수 있는 것은 陰山山脈 뿐이다. 陰山山脈 북쪽에 주인씨(朱因氏)의 후손을 봉한 蓋馬國이 있었다. 勾茶國(瀆盧國)은 陰山山脈 서쪽에 있었으니까, 倭로 부터 천 수백 km나 떨어져 있었다. 그러니까 “瀆盧國은 倭와 경계가 접해 있다(其瀆盧國與倭接界).”는 三國志의 기사도 사실이 아니다.

월지국(月漬國)은 그 북쪽 500 리에 있었으니까 蒙古高原 남단이다. 箕準이 衛滿의 꾐에 속아 난창강(瀾滄江)을 따라 들어가자 “제가(諸加)의 무리들이 上將 卓大를 받들어 모두 함께 길을 떠나월지(月支)에 이르러 세운(諸加之衆奉上將卓大擧登程直到月支立國 北夫餘紀)" 나라가 後三韓이다 (蓋馬大嶺이 오늘날의 秦嶺山脈 이고, 北蓋馬大嶺이 陰山山脈 이므로, 대파산맥(大巴山脈)은 南蓋馬大嶺으로 부른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3 차 三韓과는 거리가 더욱 벌어진다.

倭는 3 차 三韓의 辰韓 (및 弁韓) 옆에 있었다. 그래서 新羅가 倭의 침입을 자주 받았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열전(東夷列傳) 한조(韓條)에서 왜의 위치를 추측해 보자.

“마한(馬韓)은 (삼한 중에) 서쪽에 있는데,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다. 변진(弁辰)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 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http://www.chess-cat.com/what_09.htm,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에 있었다) (馬韓在西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

이 역시 韓半島를 염두에 두고 날조한 대목이다. 朝鮮의 管境 중 서쪽에 있었던 것은 番朝鮮이다. 3 차 三韓의 馬韓은 중국 대륙 동부에 있었다. 1 차, 2 차, 3 차 그 어떤 馬韓도 남으로 倭와 접한 적이 없다. 弁辰 12 國 따위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12 國을 거느린 것은 1 차 番韓과 馬韓 이었다. 3 차 辰韓은 3 차 弁韓 서쪽에 있었다.

邪馬台(일본이 야마다이國이라고 주장하는 촌락)가 列島에 있었다면, 중국은 물론이고 高句麗, 百濟, 新羅, 伽倻도 그 존재를 알 수 없었다. 高句麗, 百濟, 新羅, 伽倻가 해상무역 국가였다면, 列島 역시 무역 상대국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일정한 수준의 문명을 이식 받아야 했다. 그러나 列島는 5 세기 까지도 벌거벗고 산 미개 땅이었다. 先住民 외에 韓半島人들이 개별적으로 이주했을 뿐, 百濟가 식민지를 건설한 4 세기 말까지 列島는 그 어떤 나라도 관심을 보인 적이 없는 未知의 땅이었다.

송서(宋書) 왜국전(倭國傳)은 “왜국은 고려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중국 남북조 송나라(420∼479) 때에는 왜가 한반도를 벗어나 일본열도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이후에 발간된 중국측 문헌들은 모두 왜가 일본열도에 자리잡고 있다고 기록했다. (http://www.chess-cat.com/what_09.htm, 왜는 일본열도가 아닌, 한반도에 있었다)

이름이 같은데 착안해서 中國倭를 列島倭에다 포개버린 대목이다. 원래 中國倭는 바다와 중국 대륙에 흩어져 있었다. 점차 구축되어 마지막 순간에는 中國倭가 해상에 있었고, 다음 순간 海上마저 정복 되었다. 이때가 8 세기였다.

高麗와 高句麗는 朱元璋이 역사날조 하면서 고의적으로 섞어 썼다. 朱元璋과 李成桂 등이 高麗 영토를 권모술수로 나눠가진 탓에 高麗가 대제국이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宋은 420년에서 479년까지 있던 中土의 날조 南朝의 하나다. 中奴는 역사를 바꾸면서 연대를 일치 시키지 않았다. 그러니까 宋 때 倭가 海上으로 밀려 났다고 믿을 필요는 없다. 倭는 廣開土境好太皇에게 정복된 이후 5 세기 초부터 말까지 조공을 한 끝에 모든 倭를 아우르는 倭王의 칭호를 받았는데, 海上으로 밀려난 후에도 倭王의 칭호에 집착했다는 것은 우습다. 高麗의 동남쪽 큰 바다는 東支那海와 南支那海이다. 高句麗는 百濟를 중국 대륙 남부에서 완전히 구축한 504년 이후 중국 남해안 및 동해안 일부를 차지했다. 그러므로 倭國이 高麗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는 것은 504년 이후 倭가 뭍에서 해상으로 밀려났다는 뜻이다.

倭를 海上으로 몰아낸 것은 新羅이다. 文咨好太烈帝 이후 黃山江 이남으로 수도까지 이전 당하자, 新羅가 성장할 수 있는 길은 오직 倭를 정복하는 것 뿐이었다. 倭가 뭍에서 쫓겨나자, 臺灣이 유일한 倭의 근거지가 되었다. 新羅는 375년에 韓半島까지 침공한 나라이다. 그런 新羅에게 대만 정복쯤은 간단했다. 그러므로 三國遺史의 皇龍寺9層塔도 날조됐다. 우선 皇龍寺塔을 세웠다는 643년에는 중국 대륙에 4 國(高句麗, 百濟, 新羅, 唐)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皇龍寺塔을 643년에 세웠다고 날조한 것은 당시 新羅를 여왕이 다스리고 있었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영락(永樂) 10년 삼가라(三加羅)가 모두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바다와 육지의 여러 왜인들은 모두 임나(任那)에 통일 되었으니, 열 나라로 나누어 통치하면서 연정(聯政) 이라고 했다. 그러나 고구려에 속하여 열제(烈帝)의 명하는 것이 아니면 스스로 마음대로 하지는 못했다(永樂十年三加羅盡歸我自是海陸諸倭悉統於任那分治十國號爲聯政然直轄於高句麗非烈帝所命不得自專也 太白逸史 高句麗國本紀)

倭人은 百濟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倭人百濟之介也 太白逸史) 中國倭는 원래 지리상 百濟에 접한 관계로 百濟의 지배를 받다가 廣開土境好太皇의 중국 대륙 정복으로 高句麗의 지배를 받았다.

倭는 燕에 속하지 않았다. 燕이 倭 옆에 없었기 때문이다. 北燕, 後燕, 西燕, 前燕, 南燕 모두 옛 長江(怒江) 너머(中土 西部)에 있었고, 春秋戰國 時代의 燕 하나만 옛 長江 남안 즉 淮垈 이남에 있었다.

倭는 燕에 속한다. 이 말은 中奴가 현 揚子江 이남으로 기어나온 明 때 고친 날조기사이다. 이 당시에는 春秋戰國時代의 燕이 중국 남부에 있다고 날조했다. 淮垈 너머에 燕이 있었기 때문이다. 黃河 이남으로 中土가 확대되자, 淮垈는 揚子江 하류와 黃河 하류 사이가 되었다. 종이 위에서 燕이 倭와 접하자, 倭는 燕에 속한다(倭屬燕 山海經)고 날조한 것이다.

정상두개골과 편두

그러나 한편으로는 倭는 中國에 속했다.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倭人은 어디서 왔을까. 列島에서 오지는 않았다. 列島 최초의 나라가 성립한 것은 395년. 日本은 9 세기 까지도 중국을 안전하게 오고갈 항해술이 없었다고, 일본 역사책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그럼 동남아에서 왔던가. 아니다. 倭人이 남방계 아시아인이면, 이질적인 생김새라고 명시해 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三國志에서 고작 “편두(?頭)하고 文身한다”고 했을 뿐이다. ?頭는 인위적으로 만든다. 요컨대 倭人은 남방계 아시아인이 아니라 북방계 아시아인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다. “옛부터 구주(仇州)와 대마도(對島)는 곧 三韓이 나누었던 땅으로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自古仇州對島乃三韓分治之地也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고 했다.

三韓의 복식에 대한 연구(경남대 최혜경 교수에서 발췌)

倭人은 中土에서 왔던 것이다. ?頭는 華夏族의 풍습이다. 전술 했다시피 ?頭는 노예식별 표시이기 때문에 中土에서 벗어난 倭人들은 더 이상 ?頭를 할 필요가 없는데, 오랜 관습이라 한 것일까. 물론 이주 당대에는 倭人도 ?頭였다.

"진한(秦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고 하였다(秦韓耆老自言 秦之亡人來避苦役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後漢書)? 하필이면 인구 밀집지역인 韓半島 남부의 동쪽 땅이 적당할 것 같았다고? 馬韓 동쪽에는 辰韓 말고 弁韓까지 우겨 넣었다. 馬韓 땅이 원래 ?자처럼 생겼다는 날조다. 동쪽 끄트머리만 弁韓 땅이었다는 날조다. 秦나라 유민이 동쪽으로 도망치다 곧장 黑龍江으로 가지 않고, 방향을 바꾸어 韓半島로 빠졌다고? 그 땅에 살던 사람들이 순순히 제 땅을 내줬다고?

저 날조기사에 나오는 秦韓은 1 차 辰韓이다. 秦나라가 망한 해는 기원전 207년이다. 北夫餘 1 世 檀帝 解慕漱 때이다. 馬韓의 동쪽에 있는 辰韓 역시 1 차 辰韓이다. 解慕漱가 직접 통치하는 眞朝鮮이다. 그 어떤 馬韓도 倭와 접한 적 없다고 했다. 倭는 伽倻 남쪽에 있었다. 3 차 馬韓과는 弁韓과 東夫餘에 의해 뚝 떨어져 있었다. 3 차 辰韓 동쪽에 있었다.

중국왜의 이주경로

新羅가 일어난 3 차 辰韓은 平壤을 공격하기 딱 좋은 지역이다. 비록 北夫餘의 皇城은 아니지만, “戊申 2년(B.C.193) 檀帝께서 上將 연타발(延?勃)을 파견하여 平壤에 성책을 설치하고 도적 떼와 衛滿의 무리에 대비케 했(戊申二年帝遣上將延?勃設城柵於平壤以備賊滿 北夫餘紀)“을 정도로 요충지다. 우리나라는 慈烏支 한웅 이후 高麗 末까지 대부분의 기간 동안 그곳에 도읍했다. 그러니까 위험천만한 中奴들을 우리나라 깊숙이 그것도 핵심지역 가까이에 살게 할 리가 없다.

壬辰 31년(B.C. 209) 진승(陳勝)이 군대를 일으키자,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사람들이 番朝鮮으로 도망쳐온(壬辰三十一年陳勝起兵秦人大亂燕齊趙民亡歸番朝鮮者數萬口 北夫餘紀) 적도 있다. 중국에서 귀순하는 자들을 番朝鮮에 살게 한 것은 檀帝가 다스리는 辰(眞)朝鮮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기원전 209년 番朝鮮의 上下 운장(雲障)에 나눠 살게 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사람(秦이 中土를 통일 했으므로 이미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등은 망했다. 秦의 中土 통일 후에도 燕나라인, 齊나라인, 趙나라인들은 자신들을 秦나라인으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는 中土의 행정구역이나 마찬가지였다)들도 衛滿과 결탁해 番朝鮮을 빼앗았다.

이 당시 莫朝鮮은 멸망하고 없었다. 설령 莫朝鮮이 존속 한다고 해도 莫朝鮮은 中土人을 받아줄 수 없었다. 莫朝鮮이 무너지면 辰朝鮮이 위험에 노출되기 때문이다.

이미 秦나라인(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출신자) 수 만명이나 와서 番朝鮮에서 살고 있었다. 이들을 감독하기 위해 장수까지 파견했다. 番朝鮮으로 도망친 燕나라, 齊나라, 趙나라 출신자도 수 만명인 것으로 봐서 中土를 통일했다는 秦나라가 망한 후 도망친 秦나라인들은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 이상 받아주면, 감독 자체가 곤란하니까, 秦나라 유민까지 받아줄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秦나라 遺民들은 어디로 갔을까. 대륙 끝까지 갔다. 그래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避苦役)”고 했던 것이다. 바로 중국 대륙의 南東海岸 으로 後代에 이들을 일러 倭라고 불렀다. 倭의 실체는 바로 중국이다. 바로 萬里長城을 쌓았다는 秦始王의 백성이다. 중국이 倭라고 하면, 중국의 실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니까, “秦나라가 秦韓”이라 날조한 것이다. “지금 辰韓 사람 모두 편두(?頭)이고, 倭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역시 文身을 하기도 한다(今辰韓人皆?頭南與近倭亦文身 三國志 魏書).”며 중국과는 무관한 듯이 날조기술 했지만, 中國倭의 실체는 華夏였던 것이다.

“秦韓의 노인들 스스로 말하기를 秦나라가 망해서 도망해온 사람으로 피난가는 것이 고역이다. 韓國의 馬韓 땅이 적당할 것 같아 馬韓의 동쪽을 나누어 같이 살았으며 말은 秦나라와 비슷하여 그런 이유로 나라 이름을 秦韓이라고 하였다?(秦韓耆老自言 秦之亡人來避苦役適韓國 而馬韓割東界地以與之 相呼爲徒 有似秦語 故或名之爲秦韓 後漢書)" 秦나라 사람들이 중국 남부로 가서 倭의 무리로 살았던 것을 이용해 辰韓이 檀帝의 직접 통치 지역임을 부정했던 것이다. “新羅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금천(小昊金天)氏의 후손이어서 姓을 金氏로 하였다?(新羅人自以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氏)” 三國史記 新羅本紀 赫居世 편도 아닌, 百濟本紀 義慈王 편에 써 있는 날조기사 이다. 秦나라 사람들이 중국 남부로 가서 倭의 무리로 살았던 것을 이용해 3 차 辰韓에서 건국한 新羅마저 중국인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다. 이상한 문장이다.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으면 倭人들이 어디서 왔는지도 기술해야 할 것이 아닌가. 원래 한단(桓檀) 역사서에는 倭가 秦나라 출신자라 적시되어 있었다.(신찬성씨록 참조)

진나라 유민들이 이주해 왜인이 되었다.

하지만 李氏朝鮮 에서는 呂政이 皇帝로 격상되어 있어 李陌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본래 倭人들이 살던 땅이 아니었다(本非倭人世居地 太白逸史)”는 애매한 문장으로 바꾼 것이다.

明은 山海經을 뜯어고쳐 倭가 燕에 속한다고 했다. 그러나 倭의 실체는 秦나라 遺民이다. 中土의 戰國 時代에는 倭가 없었다.

舊唐書에는 “倭國은 옛날의 왜노국(倭奴國)이다(倭國者古倭奴國也)”고 했다. 秦나라 출신의 倭는 倭奴國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러나 舊唐書는 明 때 쓴 책이므로 日本을 가리켜 쓴 글이다. “일본국은 동해의 동쪽에 있는 나라로서 예전에는 왜노국(倭奴國)이라 불렀다(日本國在東海之東古稱倭奴國或云惡其舊名故改名日本以其國近日所出也).”는 蒙汗史(元史) 역시 明 때 날조했다. 列島倭는 예전에 倭奴國이라 불리지 않았다. 百濟는 자국이 세운 나라라를 노예국이라 했을 리 없고, 高句麗 역시 같은 한민족인 百濟人이 세운 나라니까, 노예국이라 부르지 않았다. 新羅 역시 列島에 식민지까지 세웠다. 舊唐書와 元史의 이 구절만 봐도 明 때 날조한 책이 명백하다.

廣隆寺

 

日本은 舊唐書와 元史의 저 구절을 보고 우리나라의 노예국이 아니라, 중국의 노예국 이라며 감격스러워 하고 있다. 그래서 서둘러 한위노국왕(漢委奴國王)이라 금인(金印)을 새겨 국보로 지정했다. 그러나 왜노국(倭奴國)은 정식 국명도 아니고, 왜(倭)를 더욱 비천하게 부르기 위한 별칭 이었다. 왜노국(倭奴國)이 지극히 “아름답지 못한 이름”이라는 건 대체 언제쯤 알아차리려나?

日本은 왜노국(倭奴國)이다. 倭奴 中國倭가 列島로 대거 이주해 오늘날 日本人 유전자의 25.8 %를 제공하고 있다. 일본이 무지 좋아할 것으로 보인다. 진하승(秦何勝 : 일본명은 하타노 가와카쓰)이 秦始王의 후손 이라고 우기던데, 이제는 日本 전체가 秦나라의 후손이라 우길 수 있으니까.4)

기모노(着物)의 시초는 3 세기경 까지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중국 역사책에 3 세기경,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다5)"고 적혀 있는 왜(倭)는 中國倭이다6).

그러면 열도에서는 뭘 입었나.

벗고 살았다.

오우진(應神) 천황 시대에 봉녀(縫女) 두 명을 보내 주어서, 비로소 임금과 신하들이 한복(韓服)을 입게 되었다. 그렇지만 서민들은 옷을 입지 않은 벌거숭이 모양 이었다고 한다.

토우테이칸(藤貞幹)이 일본결척(日本決尺)을 인용해 쇼오꼬오하쯔(衝口發)에서 한 말이다. 藤貞幹은 18 세기 일본인이다. 그러므로 韓服은 李氏朝鮮의 복식을 가리켰다. 李氏朝鮮은 高句麗가 아니라, 百濟 복식을 이어받았다.

기원전 4 세기(朝鮮時代)에 썼다는 山海經은 우리나라를 두고 “군자국은 북쪽에 있으니, 사람들은 의관을 했다”고 했다. “君子國은 북쪽에 있으니, 사람들은 의관을 했으며, 칼을 차고, 짐승을 잡아먹으며 사냥하기를 좋아하여 다투지 않았다(君子國在其北衣冠帶劍食獸使二大虎在旁其人好讓不爭 山海經 海外東經)." 옛날에는 사냥이 군사훈련의 일종이었다. 군사훈련을 하고 나면, 사냥물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잡아 나눠 먹었다. 사냥은 운치라도 있지, 中土는 4300년 전까지 짐승이 主食이었다. 后稷이 농사법을 가르쳐준 4300년 전까지 쌀도 구경하지 못해서 우리나라 보고 모래를 먹는다고 한 미개인들이다.

慈烏支 한웅의 中土 정복 이후 우리나라 사람으로 “淮垈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漢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織牧 資以爲業 揆園史話 檀君紀).” 우리나라는 배달시대부터 비단으로 옷을 해 입었던 것이다.

“高矢氏는 청구국(靑丘國)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高矢氏就靑丘國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 五穀豊肥民皆衣輕煖而食肥?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文武亦得以幷興 揆園史話 檀君紀)." 朝鮮 개국 당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고 의관하기를 즐겨 했던 것이다.

後漢書, 三國志에는 “馬韓 사람들은 잠상을 알며 솜과 베를 만든다(馬韓人知田蠶作撓布 後漢書)”고 했다. 다시 말해 중국은 기원후에 들어서자, 비단과 솜, 베를 만드는 법을 잊어 버렸던 것이다. 그것은 中土에 들어간 후로 기술발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잠상(蠶桑)과 길쌈의 기술이 거듭 발전하는데, 中土는 그대로 이니까,(퇴보했을 수도 있다), 우수한 상품에 밀려 中土는 더 이상 비단을 만들지 않게 된 것이다.

中國倭의 3 세기 복식이 그로부터 華夏의 2 천년전 복식과 동일 하다는 점에 주목하자.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다”는 中國倭의 옷이나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는 華夏의 옷이나 표현만 다를 뿐, 똑같은 디자인이다.

날조 中國史에서도 華夏는 殷나라 때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었다.”7)

華夏가 기원전 천 수백 년 때 이미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는 것에서 벗어났다면, 華夏 출신의 中國倭가 3 세기에 “身子의 두 배의 옷감을 반으로 접어 중간에 구멍을 뚫어 머리를 넣고 앞과 뒤를 매어서 입(作衣如單被穿其中央貫頭衣之 三國志)”을 수는 없다. 누가 2 천년전의 미개 복식으로 회귀할 것인가. 中土에서 중국 대륙 끝으로 이주할 당시에도 華夏의 복식이었던 것이다. 그 후에도 오래도록 변함없는 華夏의 복식이었다. “큰 천에 구멍을 뚫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고 있었”던 倭奴의 복식은 朱元璋이 揚子江 이남을 차지할 때까지 中奴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秦나라, 漢나라의 남자들은 포(袍), 곤의(곤衣), 고(袴), 관(冠), 건(巾), 책(책)을 입지 못했다. 漢나라에서는 수구(袖口)를 축소시킨 것을 만들어 입지도 못했다. 漢나라 벼슬아치들은 평상시에 곤의(곤衣)를 입지도 못했고, 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신을 신지도 못했다. 北夫餘의 복식이다.

日本書紀에 541년과 544년 新羅의 伽倻 진출을 저지하기 위해 百濟 聖王이 주재한 대책회의에 참석하는 기사가 있어? 大伽倻가 新羅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百濟와 더불어 倭와 연합해? 날조 중국사를 보고 창작한 기사다.

280년에 이르러 斯盧國王이 辰韓 세력을 대표하여 미개 진(晋)에 조공 했다고? 新羅는 溫祚 당대에 百濟에 조공했다. 高句麗에는 廣開土境好太皇에 이르러 조공했다. 高句麗와 斯盧國 사이에 百濟가 끼어 있어 斯盧國은 高句麗와 직접 맞닿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조공할 필요가 없었다. 高句麗가 조공하지 않는 新羅를 정벌하려고 해도 百濟부터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

中土는 高句麗 영토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나 타림분지(塔里木盆地)와 접해 있다. 조공을 안하면 당장 정벌을 받는다. 265년에 선 진(晋)이 280년 부터 高句麗에 조공하기 시작했던 것은 280년에야 晉이 高句麗 영토와 맞닿았기 때문이다. 晉은 百濟와는 遼西로 접해 있기 때문에 高句麗, 百濟에 다 조공해야 했다.

479년 加羅國王 하지(荷知)가 齊나라에 사신을 보내고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이란 작호를 받았다(加羅國三韓種也建元元年國王荷知使來獻詔曰量廣始登遠夷洽化加羅王荷知款關海外奉贄東遐可授輔國將軍本國王)는 南齊書의 기사는 高句麗 역사서를 보고 베낀 날조기사이다. 5 세기는 廣開土境好太皇이 중국 대륙, 아니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를 정복한 때다. 伽倻가 자국을 정복한 高句麗에 사신을 보내지 않고, 고작 中土 한 구석을 차지한 중국, 그것도 南朝에 사신을 보내 작호를 받았다?

중국이 高句麗에 정복당한 伽倻에 어떤 도움이 되는가. 중국은 高句麗 건국 당시부터 속국 이었다. 배달 개천 초기부터 우리나라 식민지였다. 대대로 우리나라 사람이 파견되어 제후로서 통치한 땅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이 동아시아를 정복할 때에도 그 땅이나마 잃지 않으려고 숨조차 죽이고 있던 나라였다. 고작 漢나라 중기에 반짝 하고 침략을 일삼았을 뿐, 蒙古干涉期(?)를 제외하면 高麗 末까지 내내 우리나라의 속국이었던 것이다.

“倭는 5 세기 초부터 몇 차례 사신을 보낸 끝에 5 세기 말 宋나라 황제에게 도독(都督) 倭, 新羅, 任那, 秦韓, 慕韓 6 국 제군사(諸軍事) 안동대장군(安東大將軍) 왜국왕(倭國王)의 칭호를 밝혔다(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自稱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六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宋書)"고? 정복은 高句麗에 의해 되고, 장군과 왕이라는 호칭은 宋나라에 주장하나?

倭人이 秦나라인이기 때문에 宋나라인도 똑같은 미개 족속이었다. 그런데 倭가 宋에게 장군과 왕이라는 호칭을 구걸 했다고? 高句麗 皇帝로부터 安東大將軍 倭國王 칭호를 받았던 것이다. 물론 新羅, 伽倻를 통솔하는 대장군이 되었다는 것은 거짓이다. 나머지 9 개 倭國을 통솔하는 大將軍의 호칭을 받았던 것이다.

應神이 列島에 도착했을 당시, 列島는 옷조차 없어서 벌거벗고 있었다(衝口發 : 藤貞幹) 벼이삭은 5 세기 말까지도 손으로 쥐어뜯어 수확했다(고대국가와 천황 : 田村圓澄). 집? 그런 것도 없었다. 6 세기 까지도 그냥 흙구덩이에서 풀로 지붕이나 가리고 살았다(田村圓澄).

그런데도 日本은 3 세기에 큐슈(九州)에 ‘야마다이국(邪馬台國)’이라는 번듯한 나라가 있었다고 날조했다. 邪馬台는 중국 대륙에 있던 倭의 하나다. 그 뿐이 아니다. 九州에다 높이 12 m의 망루대와 촌락을 만들어놓고 ‘요시노가리(吉野ヶ里) 유적’이라 부르며 전세계에서 관광객을 끌어 들이고 있다. 요시노가리 유적은 韓半島人이 사는 곳에다 395년에 세운 百濟 植民地 倭의 군사기지다.

倭가 문맹자 집단 이라서 大韓海峽도 못 건넜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바이킹은 문화민족이라서 잉글랜드를 정복 했던가. 日本列島의 倭人(아이누族은 제외)들은 일본인들이 그렇게도 염원하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난 민족”이 아니라, 항해 끝에 그 땅에 정착한 종족이다. 韓半島에서 기원전 3 세기 부터 건너간 사람들, 4 세기 말 이후로 列島를 식민개척한 百濟人, 新羅人에 이어 8 세기 전후로 新羅에 정복당한 후 필사적으로 도망친 中國倭가 日本人들의 조상이다.

應神이 열도에 도착할 때까지는, 列島는 선주민 아이누族과 韓半島人들이 사는, 이름도 없는 섬에 불과했다. 列島는 귤화위지(橘化爲枳)의 미개 땅이었다. 그 땅으로 간 모든 것이 퇴보했다. 배우는 것조차 거부했다. 천문학만 해도 몇 번이나 가르쳐 주었던가. 曆博士 왕보손(王保孫), 관륵(觀勒), 高麗 천문관, 李氏朝鮮 천문관해서 네 차례나 가르쳐 주었건만 일식관측 조차 못하다가 서양인에게 배웠다.

植民母國 百濟 멸망 후에 日本은 적국 新羅 선박에 얹혀서 대륙을 오갔다.

백제배, 신라배 신세만 졌던 일본이 직접 외항선을 큰 바다에 띄우게 된 것은 9 세기 들어서였다. 그러나 아직도 조선술 및 항해술이 미약했기 때문에 일본의 견당사선들이 조난 당했다는 침통한 기사가 상세하게 일본역사에 전하고 있다. 9 세기 말에 스가와라노 미치사네는 조정으로 부터 견당사로 임명 받았다. 그러나 그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는 것을 중지해 달라고 우다(宇多) 천황에게 주청했다. 스가와라노 미치사네는 당시 문장박사이며 장관직에 있었던 최고로 존중받는 학자였다.

천황은 그의 주청을 받아 들였고 이후 견당사 제도 자체마저 폐지 시키는 등 당나라와의 교류를 중단시켰다.(일본문화사, 홍윤기)

隋書에는 遣隋使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가 韓半島의 百濟를 거쳐서(백제 멸망 이전) 隋나라를 오갔고(上遣文林?裴?使於倭國度百濟), 日本書紀에는 3 차 遣唐使 타카무쿠노 쿠로마로(押使 高向玄理) 일행이 新羅를 거쳐 唐나라에 갔다고 나와 있다.

遣隋使, 遣唐使. 이런 것은 없었다. 종족명 까지 우리나라 피지배계층 이라는 뜻의 鮮卑族인 隋와 唐은 보고 배울 문물이 전혀 없는 미개국 이었다. 鮮卑族 자체가 문명과는 거리가 먼 유목민이다.

中土의 유목민들은 주로 高句麗로 견한사(遣漢使)를 보냈다. 隋, 唐은 上國 新羅로 遣漢使를 보냈다. 그러나 隋, 唐에 이르면, 中土는 문명의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倭는 百濟로, 日本으로 바뀌고 나서는 大震國으로 遣漢使를 보냈다. 그러니까 오노노 이모코(小野妹子)는 百濟 땅 한반도를 거쳐서 중국 대륙의 百濟로, 타카무쿠노 쿠로마로(高向玄理) 일행은 新羅 땅 한반도를 거쳐 大震國으로 遣漢使로서 갔던 것이다.

일본천황의 치세 때에 조서를 내려서 묻기를 ‘이웃나라’와 ‘달갑지 않은 나라’는 어찌 구별하는가. 답하기를 ‘이웃나라는 큰 당나라이며, 달갑지 않은 나라는 신라이로다.”[영집해(令集解 859~876) 제3권]

큰 唐나라? 일본문헌에는 大唐國이라 적혀 있을 걸~ 18 세기 이후 역사날조 하면서 大震國에서 글자 한 자 바꾸었던 것이다.

遣漢使라는 말은 三國史記를 편찬할 당시부터 있었다. 中土의 나라들이 高句麗, 百濟, 新羅로 遣漢使를 파견한 것을 明이 遣唐使로 고쳤다. 三國史記에는 朝貢國 新羅, 百濟가 高句麗에 사신을 보낸 기록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太白逸史만 해도 “百濟 新羅 가락(駕洛)의 여러 나라가 모두 조공을 끊임없이 바쳤다(百濟新羅駕洛皆入貢不絶)”고 했다. 遣隋使, 遣唐使라고 바꾸었으니까, 안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列島倭는 사정이 다르다. 百濟 식민지가

광개토경대훈적비문중 일부

植民母國의 적국으로 문물을 배우러 갈 수는 없다. 列島倭는 高句麗가 아닌, 百濟로 견한사(遣漢使)를 보냈던 것이다.

우리나라의 장구한 大陸史를 부정하는 이 땅의 사학자들은 고작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文의 사라진 일부 자구해석에만 처절하리만치 매달리고 있다. 그러나 廣開土境大勳跡碑를 세운 長壽弘濟好太烈帝가 과연 비문의 문자해석에나 매달리기를 바랄까. 長壽弘濟好太烈帝가 알아주길 바랐던 것은 高句麗가 정복했던 광대한 땅이다. 高句麗가 朝鮮을 계승했다는 사실이다. 숙적 百濟를 정복한 위업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이 정복한 땅은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다. 그렇다면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어디에 있었나. 중국 대륙이다. 韓半島와 滿州는 高句麗軍이 밟을 필요도 없는 땅이다. 중국 대륙의 百濟軍이 패해 百濟 皇帝가 항복하면서 百濟의 전영토가 정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동북아에다 비를 세울 이유는 없다.

廣開土境大勳跡碑는 전승기념비다. 廣開土境好太皇은 百濟와 新羅, 伽倻, 東夫餘가 있고 倭가 있는 중국 대륙과 토번(吐蕃)이 있는 중앙아시아8)를 정복한 것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은 중국을 정복할 필요가 없었다. 중국은 高句麗와 百濟의 상대가 되지 않아, 끝없이 눈치를 보고 있던 소국 이었다. 중국은 朱蒙聖帝 때 정복된 이후 우리나라의 충실한 속국이었다.

廣開土境大勳跡碑 조작

역사를 날조한 李成桂는 碑도 그대로 둘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碑는 축소 韓國史를 증명하는 거짓 증거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축소 역사에 맞춰 비문 내용까지 바꿔 가짜 비를 제작했다.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비롯해서 中原高句麗碑나 울진봉평비(蔚珍鳳坪碑) 등 모든 비가 날조 역사에 맞춰 새로 새긴 가짜 碑다.

원래 廣開土境大勳跡碑는 高句麗 영토에 세웠다. 百濟 영토에 세우면, 당장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百濟 영토를 바라다 볼 수 있는 국경지대에 세웠을 것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가 세워진 구체적인 장소는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던 百濟 영토에 가까운 西鴨綠江(嘉陵江) 혹은 黃山江(揚子江), 漢水(黃河), 浿水(漢水) 유역으로 압축된다. 漢水 유역에 세웠다면, 訥縣(현 洛陽)과 百濟의 초기 도성이 있던 현 開封 사이의 국경지대이다. 百濟의 제 2 皇城(長沙)이 高句麗 땅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어, 黃山江(揚子江) 유역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진짜 廣開土境大勳跡碑를 어디에 세웠던 간에 가짜 비는 東鴨綠江 유역에 세웠다. 李成桂와 朱元璋이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을 西鴨綠江에서 東鴨綠江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복종하며 쥐새끼처럼 살았던 華夏는 그 사실을 지우고자, 우리나라 문화재들을 방치하고 있다. 훼손되고 붕괴 되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 가짜 廣開土境大勳跡碑文을 깎아낸 것도 모자라, 관리를 내세우며 파괴해 한 면을 제외하고는 모두 깨어져 나갔다. 碑의 파손을 막는다는 구실로 5년에 한 번씩 합성 수지액을 주사하는데, 그 부분이 변색되고 표면까지 심하게 마모됐다. 중국이 늘상 하는 짓이지만, 말은 보호한다 면서도 실제로는 훼손하고 있다.

19 세기 말부터 中奴와 倭奴가 비문변조를 합리화하기 위해 비면에 석회칠을 하기 시작했다. 한 번 석회칠을 할 때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글자를 마구 집어넣고 불리한 글자는 뺐기 때문에 탁본을 만들 때마다 글자가 다르다.

어째서 일본은 廣開土境大勳跡碑에다 석회칠을 하고, 비문을 깎아 내야만 했는가. 日本이 우리민족의 지배를 받던 하잘 것 없는 “벌거숭이” 왜(倭)라는 사실을 감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日本軍 참모본부 편찬과에서 5년 동안 쌍구가묵본9)을 연구했고, 淸日戰爭을 전후하여 일본군 참모본부의 장교들이 수차에 걸쳐 현지에 가서 비문을 조사했다. 露日戰爭이 끝난 1905년에는 비를 일본으로 운반할 계획까지 세웠다. 日本軍 주도하에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날조하여 이른바 ‘任那日本府’라 하여 倭의 韓半島 진출설의 가장 중요한 근거로 삼고, 나아가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는 征韓論으로 발전했다.

倭奴의 논리에 따르면, 韓國이 고대 일본을 지배한 사실이 밝혀진 이상, 征倭論 및 미래 한국의 일본침략을 정당화하는 근거인 셈이다! 倭奴의 논리에 의하면, 노예들 스스로 列島를 우리나라에 바쳐야 하는 것이다!

廣開土境大勳跡碑에 “百濟와의 전과를 최대의 업적으로 현시한 것”은 그 당시 百濟가 동아시아 제1의 대국이었기 때문이다. 유독 百濟만을 百殘이라 하고 百濟 皇帝를 殘主라 한 것은 百濟에 대한 원한이 너무도 깊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百濟를 굴복시킨 것이 廣開土境好太皇의 최대업적 이었다.

2) 504년 사상 최대의 문명대전이 있었다


우리나라는 주변의 미개국들과 변변찮은 전쟁을 가끔가다 했을 뿐이다. 慈烏支 한웅도 티벳고원 북부나 정복했고, 高麗도 거란(契丹)을 상대로 싸웠을 뿐이다. 그나마 격렬한 전쟁을 수행한 시기는 三國時代와 韓國戰爭이 전부다. 그 외 李氏朝鮮 때의 壬辰倭亂이 있을 뿐이다. 丙子胡亂, 丁卯胡亂은 전쟁을 가장한 연극에 불과했다. 高句麗, 百濟, 新羅 사이의 전쟁은 강물을 핏빛으로 물들이고, 수백만이 격돌할 정도로 치열했다. 그러나 이들 나라는 우리민족의 국가였다.

百濟는 얼마나 강대했는가. 高句麗는 百濟軍에 대항하기 위해 거란(契丹), 靺鞨을 속민으로 삼아 이들을 百濟와의 전투에 투입(濊貊族에 대한 기록은 대부분 날조사라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해야 했을 정도이다. 百濟가 인구 밀집지역을 다 차지하자, 高句麗에게는 嘉陵江에서 浿水(漢水)까지를 제외하면, 蒙古高原, 중가리아분지, 大興安嶺山脈 이북, 시베리아, 타클라마칸사막(塔克拉阿汗沙漠)에 오르도스(鄂爾多斯),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 등만 남았다. 지켜야 할 땅은 크고 병력은 적었다. 百濟가 백만 대군을 보유하고 있을 당시, 高句麗는 병력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의 지명

그런 高句麗가 동북아를 계속 보유할 수 있었을까. 高句麗의 동북아 영토라고 해봐야 大興安嶺山脈 이북이다. 인구저밀 지역이다. 그 땅의 주민으로는 수비병력이 충족되지 않는다. 병력수요를 줄이기 위해서도 高句麗는 동북아를 포기해야 한다. 동북아 전체가 百濟의 영토였음은 黑龍江에서 관측한 新羅 일식기록 으로도 알 수 있다. 新羅는 大震國과 남북으로 百濟 영토(그런데 新羅는 大興安嶺山脈 이북을 빼앗지 않았다. 新羅는 高句麗, 百濟 멸망 후 내부적으로 혼란의 연속이었다. 또한 新羅와 大震國은 위계서열이 명확했다)를 나눠가졌다.

高句麗가 동북아에서 관측한 일식기록이 3 세기까지이다. 남아 있는 일식기록이 얼마 되지 않으나, 4 세기 이전에 동북아를 포기 했다고 추정된다. 이 결단이 주효해서 廣開土境好太皇에 이르러 百濟를 굴복시킨 것이다.

遼西와 黃山江 중, 상류를 상실했을 당시도 百濟의 전력은 막강했다. 중국 동부 해안과 동북아가 百濟 영토였다. 高句麗가 百濟, 新羅의 공격을 받았다면, 百濟 역시 高句麗, 新羅의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도 高句麗는 百濟의 침공을 견디다 못해 오르도스 남방한계선에다 長城을 쌓았다.

대만(臺灣)은 대마도(大馬島)에서 바꾼 지명이다.

中土의 지명을 중국대륙에 이어 동아시아로 밀어냈을 때, 中土의 지명만으로는 지명을 다 채울 수 없어서, 그 중 한 가지 수법으로 동음의 한자로 바꾸었다.

揚子江 북안, 三峽(싼샤) 서쪽의 白帝城도 百濟城을 바꾼 지명이다. 白帝城은 揚子江 이남에서 밀린 지명이다.

中國倭가 日本으로 이주하면서 九州, 對馬島라는 지명도 함께 가져갔다.

3 세기 중반에 이르면 타림분지(塔里木盆地)에 있던 鮮卑까지 中土로 침입해 합세하고 4 세기에는 中土가 여러 이민족의 각축장으로 변한다. 이른바 5 胡 16 國 시대에 匈奴, 갈(羯), 鮮卑, 저(氐), 강(羌)의 5胡가 잇달아 나라를 세우기 바쁘다. 이때 靺鞨이 세력 다툼에서 졌던 것이다.

中土에서 밀려나 사막 지대를 거쳐 이동하던 靺鞨 일부를 高句麗가 받아들여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에 이주시키고 百濟와의 전투에 동원했다. 나머지는 黑水로 가서 黑水靺鞨이 되었다.

靺鞨이 新羅를 공격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날조사 에서는 新羅와 百濟를 韓半島 남부에 동서로 집어 넣었으니까, 靺鞨을 북부에 갖다 놓으면, 양국을 다 공격할 수 있다지만, 중국 대륙은 넓다. 중국 남부에 新羅와 百濟가 동서로 위치 했지만,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의 靺鞨이 黃山江(揚子江) 하류의 新羅를 공격할 수 있는가. 靺鞨兵 따위를 高句麗의 핵심 요충지인 浿西 지방에 주둔시킬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皇龍寺 9 층탑에 관한 三國遺史도 날조됐다. 皇龍寺九層塔에는 층마다 이렇게 적혀 있다고 했다. 1층은 왜(倭), 2층은 중화(中華), 3층은 오월(吳越), 4층은 탁라(托羅), 5층은 응유(鷹遊), 6층은 靺鞨, 7층은 단국(丹國), 8층은 여적(女狄), 9층은 예맥(穢貊)(新羅第二十七代 女王爲主 雖有道無威 九韓侵勞 若龍宮南皇龍寺建九層塔 則隣國之災可鎭 第一層日本 第二層中華 第三層吳越 第四層托羅 第五層鷹遊 第六層靺鞨 第七層丹國 第八層女狄 第九層穢貊 三國遺史)

皇龍寺塔은 643년에 세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643년에는 중국 대륙에 나라가 넷 뿐이었고, 新羅는 확실한 강국이었다. 그래서 漢水(黃河)유역도 차지한 것이고, 25년 후엔 三國도 통일했다.

皇龍寺九層塔은 新羅가 힘이 없어 자주 침략하는 적을 부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서 세운 것이 아니라, 新羅가 중국 대륙을 통일 하고자 하는 야심에서 세운 건축물이다. 皇龍寺九層塔을 세운 시기는 新羅가 黃山江 이남으로 밀려나기 전인 504년 이전이다. 그래도 伽倻와 東夫餘가 추가될 뿐이다. 中土와 中土 밖의 거란, 穢貊을 포함해도 여덟이다. 隋, 唐 이전에는 中土가 분할되어 있었지만, 中土가 가치 있는 땅과는 한참 멀다. 일일이 中土의 小國들을 새겨 정복의지를 다질 가치가 없다. 中土를 세분할 가치는 없으나, 2 분했을 가능성은 높다. 이른바 中土의 南北朝 때, 中土를 토착민의 나라와 이민족의 나라로 구분 했다면 정복대상이 아홉 나라가 된다.

643년에는 倭가 대륙에서 밀려나 海上에 있었다. 日本이 날조한 628년부터 709년까지의 일식기록이 新羅日蝕이다. 이 당시 중국 남부도 新羅 영토였던 것이다. 倭 영토 아래이다. 高句麗 영토를 획득했을 정도니까, 倭쯤이야 그 전에 정복했다.

탁라(托羅)는 탐라(耽羅) 이전의 이름일 것이다. 1 층에 왜(倭)가 있는데, 다시 4 층에 托羅라 새겼으니까 托羅는 날조 하면서 끼워 넣은 것이다. 5 세기에 세운 塔을 643년에 세웠다고 했으니까 나라가 부족했던 것이다. 2 층 中華는 朱元璋이 붙인 이름이고, 그 당시에는 中奴 혹은 華夏라고 불렀다. 어쨌거나 中奴는 唐이다. 唐은 新羅의 속국 이니까 643년은 절대 아니다. 3층 吳越이라 함은 나라이름이 아니고, 이른바 中土 동부에 있던 華夏의 나라이다. 그렇다면 2 층은 中土의 서부에 있던 만맥(蠻貊)을 새겼다.

5 세기 당시 靺鞨은 채달목분지(柴達木盆地)에 있었다. 高句麗만 정복하면 자연히 新羅의 속민이 되는 종족이다. 新羅는 靺鞨이 高句麗의 속민인 것이 그리도 부러웠단 말인가. 두 번씩이나 써놓게? 9 층 穢貊은 靺鞨이 아니라고 날조하기 위해 집어넣은 것이다. 7 층은 단국(丹國)을 거란이라 하는데, 이 당시 거란은 高句麗의 속민이었다.

5 층 응유(鷹遊)가 百濟의 별칭이라는 주장이 있다. “먼저 夫餘와 沸流를 들었고 다음으로는 尸羅, 高禮, 南北沃沮, 濊, 貊, 응(鷹)이 있었다. 이들 여러 임금이 누구의 후손인가를 묻는다면, 世系는 역시 檀君 에서부터 이어져 있으니......”(제왕운기)에서 응(鷹)이 百濟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應은 朝鮮의 제후국이다. 百濟는 朝鮮의 계승국이다. 百濟는 기원전 18년에 건국했고, 朝鮮은 기원전 425년에 大夫餘로 국호를 바꿨다. 大夫餘를 朝鮮에 포함 시켜도 기원전 239년에는 北夫餘가 건국했다. 濊貊을 집어 넣으면서 百濟를 지웠다. 皇龍寺九層塔의 9 층에는 百殘이라고 적혀 있었다.

8 층의 여적(女狄)은 고구려(高句麗)다. 女는 麗에서 음을 빌려온 것이다. 우리나라 책을 베낀 孟子에 어진 것을 해치는 것을 적(賊)이라 했다. 狄 역시 賊에서 음을 빌려온 것이다. 高句麗를 정복케 해달라고 빌고 있다는 사실이 高句麗에 알려지면 당장 정벌을 받게 된다. 이 당시 高句麗는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다. 그래서 음만 빌려 적은 것이다.

女狄이라 맨 처음 부른 나라는 百濟다. 물론 百濟는 麗賊이라 했다. 高句麗도 百濟를 비칭으로 불렀다. 백잔(百殘)이라고. 의로움을 해치는 것을 殘이라 했다. 廣開土境大勳跡碑를 보면, 百濟皇帝를 잔주(殘主)라고 불렀다. 百濟는 당연히 高句麗 皇帝를 적주(賊主)라고 불렀다. 후발주자 新羅는 애써 비칭을 만드느라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高句麗 武烈帝(高宮)를 두고 “태어나면서 부터 눈을 뜨고 보았다. ...... 장성하자 과연 흉학하여 자주 노략질을 했다(其曾祖名宮生能開目視......及長大果凶虐數寇鈔 三國志 魏書).”고 한 것은 百濟다. 中奴는 그런 말을 할 주제도 못되었다. 그러니까 증오의 감정이지, 공포심 하고는 전혀 상관없다. 물론 高句麗도 百濟 皇帝에 대해 악담을 퍼부었다. 그러나 百濟를 韓半島의 소국으로 축소하다 보니까, 악담도 지워야 했다. 百濟 황제에 대한 악담도 버리지는 않고 高句麗 황제에 배당했을 것이다.

4 세기의 삼국 배치도

遼西가 高句麗에게 돌아 왔지만, 병력수요가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百濟는 漢水 하류와 중류 방향에서 수시로 공격해왔고, 이제는 국력이 신장된 新羅마저 高句麗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隋, 唐은 新羅편에 붙었다.

大震國 때도 濊貊族은 高句麗人과 섞여 살지 못하고 柴達木盆地로 내쫓겼다. 大震國 멸망을 기화로 西鴨綠江 이동으로 내려 왔다가, 高麗 太祖 王建에 의해 遼西로, 光宗에 의해 柴達木盆地로 내쫓겼다. 金汗을 세우게 되는 熟女眞은 거란이 아니라, 高麗의 지배를 받았다. 아무리 오지라 해도 자국 영토에서 나라를 세우는 것을 대제국 高麗가 용납할 리 없다. 熟女眞은 中土로 이동하여 金汗을 세웠던 것이다.

不毛의 고산지대가 隋, 唐의 영토다. 그 옛날, 그곳에는 313 만 3800 명을 전쟁에 동원할 인구가 절대 살 수 없었다. 양광(楊廣)이 隋를 지배할 때, 4600 만 명이 살았다고?

高句麗의 인구가 멸망 당시 고작 69 만호 였다고? 戶當 인구를 5 명으로 계산하면 345 만명 밖에 안된다. 高句麗의 강역과 비교하면, 완전히 텅텅 빈 셈이다. 물론 고원지대나 사막 지대가 꽤 있었지만, 중국 남부 절반이 새로운 高句麗 강역이다. “丁酉 24년(B.C. 24) 柳花夫人이 돌아가셨다. 高句麗는 호위병 수만으로 卒本으로 모셔와 皇太后의 예로 장사지냈다(丁酉二十四年柳花夫人薨高句麗以衛兵數萬葬于卒本命以皇太后禮 迦葉原夫餘紀)”고 했다. 高句麗 인구가 69 만명(高鄒牟는 기원전 사람 이지만, 아직 百濟가 분리되지 않았으니까, 7 세기와 인구가 비슷할 것이다)이면, 高句麗의 병력을 전부 동원해 柳花夫人의 시신을 옮겼다는 소리다. 高句麗에는 전투병력은 없고 호위병만 있다는 소리다. 高句麗를 방어하는 병력이 하나도 없는데, 後漢이 그 호기를 이용하지 않고 속국으로 살기를 원했다는 것이다.

檀君世紀 및 檀奇古史에는 기원전 1666년 인구가 1 억 8 천만 명 이었다고 나온다. 기원전 1666년에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동아시아에 1 억 8 천만 명이 살고 있었다고 보기엔 이후의 병력동원 규모(5 천에서 많아야 수만 명)나 한 지역의 인구가 너무 적다. 檀君世紀 및 檀奇古史 이전의 책을 필사 하면서 잘못 쓴 것으로 보인다. 1 천 8 백만 명쯤이 아닐까. 朝鮮時代에는 전쟁도 별로 없었던 평화로운 시대라 2 천 여년 후에 동아시아의 인구가 10 배쯤 늘었다고 해도 별 무리가 없다.

504년, 백제는 요서와 양자강 이남을 상실, 고구려 땅이 된다. 375년 신라는 현 양자강에서 현 대마도를 거쳐 한반도 현 김해에 상륙작전을 펼쳤다.

三國 말기 新羅는 高句麗에 버금가는 국력 이었다. 무엇보다 중국이 우리나라 역사를 모조리 베꼈다는 점에서 4600 만명은 三國 중 한 나라의 인구다. 高句麗의 인구라 날조한 69 만호나 百濟 인구라 날조한 76 만호가 隋의 인구다. 사람들은 高句麗가 百濟보다 컸다고 알고 있지만, 마지막 250년 동안만 그랬다. 5 백여년간 百濟가 高句麗 보다 더 큰 나라였다. 그래서 明은 高句麗 69 만호에, 百濟 76 만호로 날조했다. 그러나 날조 역사를 써놓고 보니까, 百濟는 내내 소국 이었다. 그래서 李氏朝鮮이 날조비를 새길 때는 百濟의 인구를 36 만호라 날조한 것이다.

隋가 高隋戰爭에 동원했다는 313 만 3800 명은 隋의 총인구에 육박한다. 그러나 이것은 통상적인 계산이고, 中土가 모계사회라는 점을 계산해 넣어야 한다. 다수의 여자와 다수의 남자가 혼인하는 형태였기 때문에 우리나라 가구당 가족수를 5 명씩 계산하면, 中奴는 15 명 이상 이었다는 결론이다. 따라서 中奴의 가구수는 69 만호에 불과하지만, 실제 인구수는 1 천만 명을 넘었을 것이다.

隋의 인구가 4600 만인데 반해 高句麗의 인구가 345 만명 밖에 안됐다면, 高句麗를 멸망시키지 못한 隋와 唐은 무능해도 이만저만 무능한 것이 아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얘기다.

313 만 3800 명은 어디서 나온 숫자일까. 3 백만도 아니고, 313 만 3800 명이다. 순수창작은 없다고 했다. 隋에 배당된 내용을 보면, 전투병력은 113 만 3800 명이고, 나머지는 오늘날의 보급부대에 해당한다.

新羅가 高句麗와의 전쟁에 동원한 숫자일까. 新羅는 水軍으로 浿水를 거슬러 가서 공격했다. 물론 唐을 능가하는 육군도 동원 했겠지만, 한단고기에 百濟와 高句麗는 백만 병력을 보유 했다고 나오지만 新羅는 아니다. 물론 唐의 속국으로 둔갑 시켰으니, 백만 대군을 동원 했다고 해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新羅는 三國統一 후 29년 만에 신생 大震國에게 高句麗 古土와 百濟 고토 절반을 빼앗긴다. 新羅 땅에서 평로치청(平盧淄靑)까지 건국한다. 명백히 新羅가 무력의 뒷받침으로 三國을 통일한 것은 아니었다.

百濟가 313 만 3800 명을 동원 하고도 高句麗를 정복하지 못했을까. 百濟는 영토가 넓은 이상으로 高句麗, 新羅와 국경을 접하는 곳이 많아서 수비해야 할 곳이 많았다. 전투병을 백만이나 동원 했다면, 百濟 영토를 수비하는 병력까지 합쳐서 최소한 백 수십만 명 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百濟가 백만 대군을 거느린 것은 전성기였다. 313 만 3800 명을 동원한 것은 高句麗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이 동아시아를 정복할 당시 高句麗는 黃山江(揚子江) 이북에서 시베리아까지, 嘉陵江에서 浿水까지의 땅을 가진 절대 크지 않은 나라였다. 그런 나라가 313 만 3800 명을 동원할 수는 없다. 百濟가 드넓은 땅을 수비하다 보니까, 高句麗는 한 곳에 병력을 집중할 수 있어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313 만 3800 명을 전투에 동원한 것은 文咨好太烈帝다. 이 당시 高句麗가 백만 강병을 유지한 이유가 뭘까. 文咨好太烈帝 12년(504), “百濟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보내 공격하여 遼西와 晉平郡 등을 취하고 百濟郡을 폐하였다(百濟不貢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百濟郡廢 高句麗國本紀).”는 간단한 기사가 간단한 전쟁으로 끝나지는 않았던 것이다.

“文咨好太烈帝 12년에 新羅의 백성을 천주(泉州)로 옮겼다(十二年移新羅民於泉州 太白逸史)." 이 말은 百濟가 遼西도, 黃山江 이남도, 浿水 유역도 다 상실했다는 뜻이다. 이전 까지는 新羅 영토가 高句麗 영토와 직접 접하지 않았기 때문에 高句麗는 新羅의 백성을 옮길 수가 없었다.

“江南에는월주(越州)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山陰) 산월(山越) 좌월(左越)이 있었다. 문자제(文咨帝) 明治 11년 11월에 이르러 越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관공서의 郡縣을 고쳐 松江 회계(會稽) 吳越 左越 山越 泉州라 했다 12년 新羅의 백성을 泉州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江南有越州其屬縣一曰山陰二曰山越三曰左越至文咨帝明治十一年十一月攻取越州改署郡縣曰松江會稽吳越左越山越泉州十二年移新羅民於泉州以實之是歲以百濟不貢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百濟郡廢 高句麗國本紀).”

新羅의 金城 武漢을 방치하고 揚子江 이남의 新羅 땅을 공격할 리가 없다. 高句麗가 越州를 취했다면서 그 땅의 일부를 新羅 수도로 삼았다고? 新羅人이 옮겨간 泉州는 원래 新羅 땅이었고, 高句麗가 차지하지도 않았다. 越州에 山越 左越이 있는데, 또 다시 署郡縣에 山越, 左越을 만들었다는 것도 이상하다. 越州의 속현에는 山越 左越이 없었던 것이다.

越州는 百濟 땅이다. 高句麗는 揚子江 이남의 百濟 땅을 침공했던 것이다. 마지막까지 버티던 越州가 高句麗軍에 함락된 것이 明治 11년 11월 이었다. 越州의 함락으로 百濟는 黃山江 이남을 완전히 상실했다.

新羅는 黃山江 이남으로 수도를 옮겼다면서 新羅보다 고위도에 있는 東夫餘와 揚子江 하류에 있던 伽倻를 내버려둘 리가 없다. 文咨好太烈帝는 東夫餘와 伽倻를 병합했다. 이들 나라는 소국이라 옮겨갈 땅이 없었다. 文咨好太烈帝는 百濟와의 전쟁에 승리해, 遼西와 黃山江 중, 상류 이남, 浿水 유역을 차지했기 때문에 新羅의 수도를 江南으로 옮기고, 東夫餘, 伽倻를 멸망시킬 수 있었다.

"文咨好太烈帝는 明治라고 개원하였다. 11년 齊 魯 吳 越의 땅은 고구려에 속했다. 이에 이르러 나라의 강토는 더욱 커졌다(文咨好太烈帝改元明治十一年齊魯吳越之地屬我至是國疆漸大 高句麗國本紀).” 中土의 齊 魯 吳 越 땅은 百濟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高句麗가 遼西와 黃山江 이남을 차지하자, 百濟 영토는 漢水 이북으로 줄어들고, 百濟의 지배를 받던 中土도 高句麗의 지배를 받아야 했던 것이다.

太白逸史는 李氏朝鮮 중기에 찬한 책이다. 李陌은 날조사와 실사가 모순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떤 것이 實史 인지는 알지 못했다. 어떻게든 實史를 남겨놓기 위해 날조사와 실사를 섞어 편집했던 것이다.

百濟와 결전을 벌이기 위해 文咨好太烈帝는 백만 강병이 필요했다. 이때 百濟는 영토 절반을 상실했고, 두 번 다시는 강대국의 위용을 되찾을 수 없었다.

浿帶 진출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百濟와 新羅가 밀려난 浿帶는 高句麗가 독차지했다. 浿水 유역은 平壤城 공격의 출발지점이자, 百濟의 江南 땅 회복을 위한 선결조건이라 高句麗의 방어력이 집중된 곳이었다. 江南에서 新羅는 전방위로 진출할 수 있었는데 반해, 百濟는 공격대상이 浿水 유역으로 한정되어 있었다. 新羅에게 倭는 손쉬운 공격대상 이었다. 같은 高句麗 땅이라도 新羅는 江南에서 비교적 수월하게 영토를 확장할 수 있지만, 百濟는 浿水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전개해야 했다.

雪上加霜으로 新羅가 武漢을 도로 회복하고 浿水 하류를 차지하자, 百濟의 浿帶 진출은 더욱 어려워졌다. 浿帶를 확보한다고 해도, 일정한 넓이가 되어야 유지가 가능한데, 浿水 하류는 新羅 땅이고, 浿水 중, 상류는 高句麗 땅이었다. 한쪽을 공략 하자니, 수도에서 가까워 전력이 집중되어 있고, 중간지점을 공략하면, 양쪽으로 부터 반격을 받게 된다.

浿帶는 언제나 三國이 최우선적으로 차지해야 하는 땅이었다. 高句麗와 新羅에 있어서 西鴨綠江과 漢水는 영토 확장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확보할 땅이었고, 浿水는 국가안보를 위해 확보해야 하는 땅이었다. 百濟에게 있어서도 都城이 있는 漢水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浿帶 확보가 전제조건이다. 浿帶는 三國時代(列國時代)를 통털어 최대의 격전장 이었던 것이다.

百濟는 浿帶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浿帶 진출에 노력한 결과 중국 동해안은 확보했다. 그래서 百濟는 漢水 하류를 3 분의 2를 상실한 말기에도 중국 동해안은 확보하고 있었다.

隋 때 즉 7 세기 초에 4600 만명이 있었다고 날조 했지만, 4600 만명에 이른 것은 文咨好太烈帝 12년, 즉 6 세기 초였다. 4600 만명은 百濟에게서 嘉陵江 이서와 揚子江 중, 상류 이남을 획득한 직후의 高句麗 인구일까. 전쟁 전에 高句麗는 嘉陵江에서 漢水 사이, 중가리아 분지 및 타림분지, 그리고 몽고고원과 시베리아를 차지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지역이 인구밀도가 극히 낮다. 이 당시 4600 만명이고, 嘉陵江 이서와 揚子江 중, 상류 이남을 획득한 덕에 인구가 증가 했다면, 隋나라의 인구가 1 억 이라고 날조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쟁 전에는 高句麗의 인구가 2 천만 명을 약간 상회할 것이다. 廣開土境好太皇의 정복의 대가로 땅을 가져가지 않는 대신 百濟는 엄청난 인구를 빼앗겼다.

百萬强兵은 高句麗 인구의 5% 에 해당하고, 313 만 3800 명은 15.7% 에 해당한다. 엄청나게 높은 수치이다. 그러나 文咨好太烈帝 때 高句麗는 분명히 백만강병을 유지했다. 313 만 3800 명을 전쟁에 동원한 것도 高句麗다. 단 인구의 5% 를 병력으로 투입하고, 15.7% 를 전쟁에 동원한 것은 극히 단기간 이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高句麗는 인구가 배로 늘었기 때문이다. 504년 百濟와의 전쟁에서 패했다면, 高句麗는 멸망에 직면했다.

三國 末期 百濟의 인구 76 만호는 高句麗 69 만호에 맞추어 날조한 수치이다. 韓半島의 平壤城(?)을 두고 42년간 연인원 400 만명이 쌓은 것이라고 한다(역사스페셜 4권). 高句麗의 인구가 69 만호에 불과 하다면서 城 하나 쌓는데, 연인원 400 만명을 동원할 수 있는가. 高句麗에 성이 하나 뿐인가. 더구나 韓半島의 平壤城(?)은 高句麗의 皇城이 아니라 百濟 王城 이었다. 연인원 수백만 명을 동원한 나라는 百濟의 諸侯國이었던 것이다.

百濟는 4 세기 까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 이었다. 百濟 때문에 高句麗는 揚子江 이남으로 진출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揚子江 중, 상류 이남과 嘉陵江 이서에 黃河 하류와 동북아를 가진 6 세기 초 百濟의 인구는 얼마여야 하는가. 4600 만명이다. 504년 이전에 高句麗가 2 천만 명이나 인구를 보유했다(2 천만 명을 보유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百濟에 맞설 수가 없다)는 것은 그 당시 로서는 嘉陵江과 浿水 사이의 인구 밀도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높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百濟가 이 전쟁에서 병력을 얼마나 투입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백만 명을 투입했다고 해도 인구 대비 2.17% 이다. 高句麗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수치이다. 그러나 百濟는 高句麗에 의해 병력 규모를 제한 당하고 있었다. “新羅 매금(寐錦) 百濟 어하라(於瑕羅)와 남쪽 平壤에서 만나 납공과 수비 군사의 수를 정했다(與新羅寐錦百濟於瑕羅會于南平壤約定納貢戌兵之數).” 는 太白逸史의 기사는 長壽弘濟好太烈帝 때 얘기다. 長壽弘濟好太烈帝에 의해 蓋鹵帝가 살해 당했으니 百濟가 더 이상 高句麗의 간섭을 따르지 않았겠지만, 504년의 전쟁에 백만 명의 병력을 동원 했다면 百濟의 병력이 백 수십만 명이었다고 기록했을 것이다. 高句麗가 인구의 15.7% 에 해당하는 313 만 3800 명을 百濟와의 전쟁에 투입한 것은 허세를 부린 것이 아니라, 그 정도는 되어야 百濟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4년의 麗濟戰爭에서 500 만 이상이 격돌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隋가 新羅편에 붙었다는 것은 百濟가 黃山江 이남을 상실해 제3의 국가로 떨어졌다는 뜻이다. 百濟가 黃山江 이남을 가지고 있었을 때는 동아시아 제1의 대국 이었고, 新羅는 제3의 나라밖에 안됐다. 隋와, 唐은 高句麗의 영토를 통과해서 新羅에 조공하러 갔다. 唐은 高句麗가 黃山江 물길을 막아 新羅에 조공을 바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하소연한 것이다. 조공 받겠다고 국운을 걸고 싸울 수는 없으니, 新羅는 唐에 高句麗와 화친하라 지시한 것이다.

“이 해에 양견(楊堅)은 또 양량(楊諒) 왕세적(王世績) 등 30 만을 파견하여 싸우도록 했으나 겨우(纔) 定州를 출발하여 아직 요택(遼澤)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때 물난리를 만나서 식량은 떨어져 배고픔은 심하고 전염병마저 크게 돌았다. 주라구(周羅緱)는 병력을 모아 등주(登州)에 웅거하여 전함 수백 척을 징집시켜 동래(東萊)로 부터 배를 띄워 平壤으로 향하다가 高句麗에 발각되어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항하며 나아가다가, 홀연히 큰 바람을 만나서 (隋의) 전군이 물에 떠다니는 판에 百濟가 隋나라에 청하여 군의 향도가 되려 하다가 高句麗의 밀서(密諭)를 받고 실행에 옮기지 않았다(是歲遣又堅楊諒王世績等三十萬來與戰纔定州未至遼澤値水亂而饋轉杜絶癘疫幷熾周羅緱以兵據登州徵集戰艦數百自東萊泛船趣平壤爲我所覺殿而拒之以進忽遭大風而全軍漂沒時百濟請隋爲軍導受我密諭而未果).”는 太白逸史의 기사는 주라구(周羅緱) 이후는 날조다. 周羅緱는 周羅侯의 오자가 아닐까.

신라왕경도(?)

598년 (여름) 6월 (丙寅) (隋나라 煬帝가) 조서를 내려 [高句麗]왕의 관작을 낮추었다. 漢王 량(諒)의 군사가 림유관에 나가자, 장마비를 만나, 식량의 수송이 계속되지 못하여 군중에는 양식이 떨어졌고, 또 유행병을 만났다. 주라후(周羅侯)는 동래에서 배를 타고 평양성으로 달려오는데, 역시 폭풍을 만나 배가 많이 표류하고 가라앉기도 하였다. 가을 9월 [己丑]에 군사들이 돌아가는데 죽은 자가 열에 아홉이나 되었다. [高句麗]왕도 또한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고, 표를 올리어 '遼東 똥덩어리(자신을 비하하는 말)의 신하 아무개'라고 일컬으니, (隋나라 煬帝)[임금]는 이에 군사를 철회하고 처음과 같이 대우하였다.

그리고 『三國史記』에서는 "주라후"라는 글이 갑자기 나와서 어떤 인물인지 알 수가 없지만, 『資治通鑑』에는 그 앞의 날에 왜 그런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해두고 있다.

즉, "(598년 2월) 乙巳日 漢王 량(諒)과 왕세적(王世績)으로 원수를 삼아 수군, 육군 30 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高句麗를 토벌케 했다. 상서(尙書) 좌복야(左僕射) 고경(高檠)을 한왕장사(漢王長史)로 삼고, 주라후(周羅緱)를 수군총관으로 삼았다(乙巳, 以漢王諒, 王世績幷爲行軍元帥, 將水陸三十萬伐高麗, 以尙書左僕射高檠爲漢王長史, 周羅緱爲水軍摠管)."는 말이 있다.

이로 보면 분명히 『三國史記』는 『資治通鑑』의 내용을 보고 썼다는 비판을 받게 된다.

더구나 『三國史記』의 이 문장은 高句麗의 역사를 서술한 것이 아니라 隋나라의 군사들의 활동을 기술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이것은 고구려 로서는 그런 내용이 상관이 없으며, 알 수도 없는 것이기에 隋나라의 역사이다.

그리고 "귀환(歸還)"이라는 글 앞에는 『자치통감』에서는 추가할 글이 없어도 되지만, 『삼국사기』에서는 분명 그 주어가 '수나라 군사'이므로 "隋軍"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야 옳다. 이런 실수는 분명 『자치통감』의 글을 베껴 쓴 데서 빚어진 것이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되는 문장은 "동래에서 평양성으로 갔다"는 말에서 대륙의 산동성에서 한반도 평양성으로 배를 타고 건넜을 것이라고도 생각 될 수 있지만, 그 방향이 일단 적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거기서 서쪽으로 黃河를 타고 갈 수도 없지 않기도 하다. 최두환밍은 후자의 입장에 서있다.

이런 글을 볼 때마다, 『삼국사기』는 어느 시기엔가 일괄적으로 하나의 대본을 가지고 각각으로 나눈 역사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만약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그 정도로 밖에 쓰지 않았다면, 그동안 매우 유식하고 훌륭한 문장가였다는 인물평에 대하여, 참으로 형편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밖에 없다.(최두환)

百濟는 504년에 遼西와 黃山江 이남을 상실했다. 隋의 군대가 平壤으로 가려 해도 百濟가 인도해줄 수가 없었다. 平壤으로 진격하던 隋軍은 隋나라 군이 아니라, 新羅軍이다. 百濟는 이미 浿水 유역도, 漢水 유역(동해안은 보유하고 있었다)도 상실 했음으로 新羅軍 조차 인도해줄 수 없었다. 百濟는 新羅와도 사이가 나빠, 서로 침공하기 일쑤였다. 공동의 적 高句麗를 침공하는 일이라 해도, 연합하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新羅가 못 미더운 隋와 唐을 끌어들여야 했던 것이다.

금휴개 복원 사진

4 천만명을 상회(7 세기 초에는 또 증가했다)하는 인구를 가진 대제국 高句麗가 어째서 隋, 唐을 멸망시키지 못했던가. 唐은 소국이라 高句麗 혼자서 충분히 정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唐을 치러 군대를 보낸 사이, 新羅가 高句麗를 공격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국력이 엇비슷하고 新羅도 동아시아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갖고 있었으므로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결론적으로 高句麗가 隋, 唐을 정복하지 못한 것은 新羅 때문이지, 隋, 唐의 국력이 강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1차 高新戰爭은 645년에 있었다. 太白逸史에는 李世民이 참패한 후 “산서(山西), 하북(河北), 산동(山東), 강좌(江左)가 모조리 高句麗에 속하게 되었다(山西河北山東江左悉屬於我)”고 했다. “이에 高句麗는 百濟와 더불어  경쟁하는 사이가 되어 함께 遼西의 땅에 있게 되었으니, 百濟가 영유하던 곳은 遼西의 晉平(是高句麗與百濟外競俱存遼西地有百濟所領曰遼西晉平)"이라 했다. 그런데 이 글 아래에는 文咨好太烈帝 12년에 “百濟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보내 공격하여 遼西와 晉平郡 등을 취하고 百濟郡을 폐하였다(百濟不貢遣兵攻取遼西晉平等郡百濟郡廢)”는 기사가 있다. 文咨好太烈帝 12년은 504년이다. 文咨好太烈帝가 百濟郡을 폐하고도 百濟가 여전히 遼西 일부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날조 1 차 高唐戰爭에 근거해 쓴 글이다.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은 현대지명이다.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이라 열거한 데서도 알 수 있다. 티벳고원 북부에서는 河北, 山西, 山東 순으로 있었다. 河北은 金沙江 너머를 가리키던 지명이다. 北平이 山西와 河北 일대를 가리키는 이름 이라는 날조사에서 알 수 있는 것은 山西도 金沙江 끄트머리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의 중국 행정구역처럼 河北이 山西와 山東 사이에 끼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예전에는 河北 지방이 山西지방 왼쪽에 있었다.

高句麗가 취한 땅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는데,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을 얻음으로써 遼西에 있게 되었다고 했다. 山西省 河北省 山東省이 遼西라는 것이다. 桑乾河가 遼水였을 당시의 날조사를 보고 쓴 것임을 알려준다.

太白逸史의 기사는 날조 역사와 실사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李陌 자신도 뭐가 진실인지 몰라서 두 가지 다 쓰기로 했던 것이다. 모순된 내용을 연달아 쓰고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다.

현 사학계 에서는 高隋戰爭, 高唐戰爭을 文明大戰이라 부르지만, 절대 아니다. 隋와 唐이 미개국이었기 때문이다. 隋와 唐이 문명국이면, 濊貊族과 匈奴도 문명대국이다. 文明大戰을 벌인 것은 三國이다. 高隋, 高唐戰爭의 실체는 新羅, 高句麗의 전쟁이다.


李世民이 高句麗를 침략할 때, 百濟에서 바친 금휴개(金髹鎧 : 검게 옻칠을 한 황금 갑옷)를 입고 있었다고? 文明大國의 황제가 남부끄럽게 남의 나라 갑옷이나 입고 전쟁터로 나갔다고? 李世民이 皇帝가 아니니까, 唐이 문명대국이 아니니까, 남의 나라 갑옷을 걸치고 전투를 해야 했다.

李世民은 新羅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천하고 작은 생선 唐은 변변한 갑옷조차 만들 능력이 없었다. 자신의 말을 잘 듣는 李世民이 죽으면 안되니까, 唐이 망하면 高句麗 편에 붙는 나라가 들어설지 모르니까, 新羅 皇帝가 갑옷을 하사한 것이다. 金髹鎧는 꿈 같은 소리이고, 新羅將軍이 입는 갑옷을 하사했다.

新羅는 李世民을 어느 정도로 대우해 주었을까. 명백히 金庾信보다 두, 세 단계 아래다. 金庾信은 新羅 皇帝에 맞먹는 지위를 누렸다. 金庾信이 죽었을 때, 新羅 황제가 내린 고취악대는 백 명이 아니라 천 명 이었다. 李世民은 新羅 황제에게 여자도 진상(新羅 황제가 안받았다)하고, 제 아들을 新羅 황제의 근위병으로 보내고, 唐의 복식도 新羅의 것을 그대로 모방한 인물이다.

大帝國 高句麗의 안시성(安市城) 성주가 고구려에 패해서 도주하는 타칭 皇帝(唐王은 존속 당시 皇帝를 참칭하지 못했다. 明이 역사날조 하면서 붙여준 것이다) 오랑캐에게 절을 했다고? 李世民도 아닌, 朱元璋의 희망사항이었다. 패주하는 李世民이 잘 싸웠노라고 安市城 성주에게 비단을 하사 했다고? 그런 쪼그라진 나라라서 전쟁에 패할 것을 염려해 언제나 비단을 갖고 다녔던가? 李世民은 安市城 城主 양만춘(楊萬春)이 쏜 화살에 왼쪽 눈을 맞자, 병사들 틈에 끼어 쥐새끼 마냥 정신없이 도망쳤다. 그걸 두고 비단을 하사 했다고 왜곡할 정도면, 나머지 역사 기술이야 얼마나 왜곡 했을지 뻔하지 않은가.

水經注에 보면, 遼水가 桑乾河라고 되어 있다. 이때 벌써 遼水가 桑乾河 라면, 隋, 唐은 중국 대륙 전체를 빙 둘러서 桑乾河로 갔다가 되돌아오면서 長安城으로 쳐들어갔다는 소리다. 百濟 영토 桑乾河를 경유해서 高句麗로 침입 했다는 소리다.

水經注가 北魏가 만든 河川志라고? 北魏는 386년에서 534년까지 존속한 나라이다. 高句麗가 존속할 때, 세워지고 망한 나라다. 北魏가 어떤 나라인가? 한 마디로 비참 그 자체인 나라였다. 高句麗 여인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王妃로 삼고 高句麗 皇帝가 붕어할 때마다 高句麗 영토 근처까지 나가 高句麗를 바라보며 애도의식을 올리던 티벳고원 북부의 한 줌을 차지한 미개 소국이다.

水經注란 水經에다 주(注)를 붙인 책이다.

水經은 3 세기경에 쓴 작자불명의 책이고, 水經注는 水經을 바탕으로 쓴 책이다. 3 세기에 썼다는 水經은 百濟人이, 北魏 사람이 썼다고 날조당한 水經注는 高句麗人이 쓴 것으로 추정된다. 3 세기는 百濟가, 5 세기에는 高句麗가 동아시아 제1의 강대국이었기 때문이다.

10 세기경부터 水經注 일부가 분실 되었다? 18 세기 이래 淸이 보정 작업을 한다면서 왜곡역사에 맞춰 또 다시 뜯어고치기 위해 한 변명에 불과하다.

중국의 역사왜곡은 明과 淸, 中華民國, 中華人民共和國에서 대대적으로 벌인 국책사업이다. 지금도 3 조원을 들여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明 때부터 한 역사날조가 21 세기에 들어와서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한제국의 모든 것을 모방하고 자기의 것으로 만들며 이제는 우리 조상의 문명과 역사마저 훔치고 있는 저들 중노의 속성은 과연 무엇인가?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것을 모방하는 짝퉁공화국의 부끄러운 이름이 이제와서 만들어 졌다고 보는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모방과 왜곡의 역사는 중노들의 삶인 것이다.

3) 대진국은 가릉강 以西에서 건국했다

三國統一 당시 영주(營州)는 唐이 북동방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운영한 전략도시가 아니라, 新羅가 高句麗人들을 제어하기 위해 운영한 전략도시였다. 遼西로 高句麗人들을 이주시킨 것도 唐이 아니라 新羅다. 高句麗도 新羅人들을 이주시킨 선례가 있다. 보복 차원 이라는 의미도 있고, 옛 高句麗의 중심지에 高句麗人들을 남겨놓아 통치의 어려움을 자초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현 사학계는 營州를 오늘날의 조양(朝陽)이라 하는데, 현 遼水가 遼水가 된 것은 겨우 1824 년이다. 원래 朝陽은 티벳고원에 있었다. “상곡(上谷)의 싸움 이후 燕나라가 해마다 침범해 오더니 이 때(B.C. 343)에 이르러 사신을 보내 화해를 청하므로 이를 허락하고, 또 조양(造陽)의 서쪽으로 경계를 삼았다(戊寅五十四年自上谷役後燕連年來侵至是遣使請和許之復以造陽以西爲界 檀君世紀)." 燕이 怒江 이서에 있었으므로 그 주변이다.

696년 5월 거란인 이진충(李盡忠)과 손만영(孫萬榮)이 영주도독(營州都督) 조문홰(趙文翽)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킨 틈을 타서 대조영(大祚榮)은 高句麗遺民·靺鞨人과 함께 營州를 빠져나와 동쪽으로 이동한 것이 아니고, 遼西에서 大震國을 세웠다.

이국(남북국)시대

이에 대한 증거가 바로 “선왕(宣王 : 大仁秀)은 黑水靺鞨을 비롯한 대부분의 靺鞨 세력을 복속시키고, 또 遼東지방에 대한 唐의 지배가 약해진 틈을 타서 遼水 유역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목저주(木底州)·현토주(玄菟州)를 설치하였다. 이후 遼東 진출을 본격화 하였다(두산 한국사사전)”라는 날조기사다.

滿州에서 건국했다는 大震國이 遼水까지 진출하여 그곳에 木底州·玄菟州를 설치한 후 遼東 진출이 본격화 됐다는 것은 모순이다. 遼河까지 차지했으면서 어떻게 거꾸로 遼東 진출을 본격화한단 말인가. 大祚榮이 티벳고원 남부에 있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遼西에 있다가 반란을 틈타 平壤城까지 이동한 후, 도로 遼東으로 진출할 수는 없다. 또 나라를 세우는 사람이 거주하던 곳에다 세우지, 다른 곳으로 옮겨 세운단 말인가?

나라를 잃은 遺民이 무슨 힘이 있어 遼西에서 遼東 너머, 平壤城까지 갔을까.

고선지(高仙芝 , ?~755 )가 天山山脈 이서를 정벌한 것이 7 백년경(747년이 아니고)이다. 長安城에서 한참 떨어진 天山山脈 以西도 7 백년 대에 정복했는데, 長安城의 지척에 있는 遼東을 820년대 까지 방치할 수는 없다. 遼東, 遼西를 확보하지 않고는 나라의 안전도 확보할 수 없다. 옛날에는 皇帝가 거주하는 皇城을 함락 시키면, 그 나라를 정복할 수 있었다. 遼東, 遼西가 新羅 땅이면, 大震國은 新羅와 新羅의 속국 唐의 협격 위험에 노출된다. 遼東, 遼西는 최소한 長安城(忽汗城)을 차지한 직후, 최우선적으로 확보해야 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大仲象과 祚榮은 遼西에 있었다.

大仲象은 遼西에서 나라를 세운 것이다. 亂을 일으킨 것도 大仲象 이하 高句麗人이다. 李盡忠과 孫萬榮은 거란인이 아니라 高句麗人이다. 大仲象을 거란인으로 만들기 위해 姓까지 고쳐 걸걸중상(乞乞仲象) 이라더니, 李盡忠과 孫萬榮이 거란인? 거란인의 이름은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야율배(耶律倍) 등이다.

어째서 大仲象을 乞乞仲象이라 했는가. 大震國史를 모두 唐史로 둔갑 시켰기 때문이다. 大仲象을 거란인이라 하고, 大震國人의 절대다수가 靺鞨族이라 날조해서 李氏朝鮮 내내 大震國을 우리나라가 아니라고 치부한 것이 아닌가.10)

高句麗, 大震國도, 高麗도 濊貊族을 柴達木盆地에 몰아넣었다. 新羅라고 遼西를 거란과 靺鞨에게 내주지 않는다.

遼西에서 건국한 大震國이 遼水로 진출해 木底州·玄菟州를 설치하자, 新羅는 자연히 遼西지역 지배가 어려워졌다. 이후 遼東 진출을 본격화한 大震國은 平壤城까지 확보했던 것이다. 따라서 遼水를 확보한 시기는 건국 당대인 大仲象 때다. 동모산(東牟山)은 嘉陵江 이서에 있었던 것이다.

新唐書도 大仲象이 동쪽으로 도망하여 遼水를 건너 太白山의 동북을 확보했다고 했다(新唐書… 乞乞仲象者… 東走渡遼水保太白山東北 太白逸史). 太白山의 동북은 長安城이다. 振國烈皇帝(大仲象)가 붕어하고 나서 太子 祚榮이 遼水를 건너 平壤을 확보한 것이다.

後漢 왕부(王符·85~162)의 잠부론(潛夫論)에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 한후(韓侯)가 있었는데, 연(燕)나라 근처에 있었다. 그 후 韓의 서쪽 에서도 성(姓)을 한(韓)이라 하더니 위만(衛滿)에게 망하여 海中으로 옮겨갔다(…其後韓西亦姓韓 爲衛滿所伐 還居海中).” 周나라 제후국 韓의 서쪽이 아니라, 동쪽에 番韓이 있었다고 전술했다. 한 번도 아니고, 계속 방위에 심각한 문제가 있으면, 단순한 실수로 치부할 수가 없다.

서쪽에 있는 大震國을 동쪽으로 옮겨 놓고도 방위를 바꾸지 않아 遼水까지 진출 했다가 도로 遼東을 개척하게 되었던 것이다. 潛夫論의 경우에는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고도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치환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허겁지겁 날조했던 것이다.

新羅의 三國統一

이듬 해(720) 수장(守將) 연충린(淵忠麟)이 말갈(靺竭)과 함께 요서의 대산(帶山) 남쪽에서 唐나라 군사를 대파 하였다. 唐나라는 비밀리에 新羅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을 급습하여 천정군(泉井郡)에 이르렀다. 황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 하였다.… 仁安 16년 … 이듬해(735) 송막(松漠) 1성을 쌓고 또 요서 6성을 쌓았다(明年守將淵忠麟與靺竭大破唐奴於遼西帶山之陽唐密與新羅約急襲東南諸郡至泉井郡帝詔遣步騎二萬擊破之…仁安十六年…明年築松漠十二城又築遼西六城 太白逸史)

大震國은 遼西에서 건국했다. 735년 에는 城을 쌓아 遼西 수비를 강화한 것이다. 遼西의 帶山의 남쪽에서 격파당한 군대는 新羅軍이다.

新羅 지배층이 생존을 위협했던 百濟와 高句麗를 멸망시킨 것으로 만족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新羅는 高句麗와 百濟를 멸망시키고 동아시아의 天子國이 되려 했고, 高句麗, 百濟 부흥운동을 막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날조사 에서는 약소국 新羅가 浿水 이남만 차지했고, 大震國은 唐나라 땅에서 건국했기 때문에 新羅와 大震國의 전쟁이 봉쇄되어 있었다. 그러나 실제 역사에서는 新羅가 三國統一을 주도했고 唐은 新羅의 속국 이었다. 三國을 통일한 新羅는 우리나라 땅 전부를 가졌으므로 高句麗, 百濟 復興運動도 新羅 영토에서 일어났다.

新羅의 삼국통일을 날조사대로 해석한다면 金春秋는 만고의 역적으로 바뀌어 질 수도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이 천자국으로의 발돋음으로 해석할 때 그러한 오해의 여지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高句麗 멸망 이후 遼東, 遼西地域을 차지한 것은 唐이 아니라, 新羅다. 三國 統一에서 唐은 땅 한 줌 얻지 못했다. 太白逸史가 나온 李氏朝鮮 중기는 이미 우리나라 역사축소가 끝난 시점이다. 그래서 李陌은 唐이 高句麗와 百濟를 멸망시켰다고, 新羅가 唐의 지원군이라 믿었다.

新羅는 大震國과 百濟 땅을 나눠가졌다(三國史記). 현 半島史에서 百濟 땅을 나눠보라. 이 땅의 사학자들은 百濟가 멸망 당시 호남지방만 간신히 차지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新羅는 浿水 이남이 아니라, 고작 전라남도만 차지했다는 결론이다. 해결책으로 이 땅의 사학자들은 新羅가 大震國과 百濟 땅을 나눠가졌다는 기사를 무시했다. 이 땅의 사학자들의 문제점은 그나마 몇 줄 남겨놓은 진실은 모조리 거짓으로 치부하고, 날조 역사만 사실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三國史記에는 新羅가 浿水 이남을 차지했다고 나온다. 新羅가 浿水 이남을 차지하면서 百濟 땅을 大震國과 나누는 것은 중국 대륙에서는 가능하지만, 韓半島에서는 불가능하다. 현 半島史 에서는 浿水가 百濟 땅보다 고위도에 있지만, 중국 대륙의 실제 浿水는 사비하(泗沘河) 보다 저위도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新羅는 浿水 이남, 정확하게는 浿水 이서를 전부 차지하지는 못했다. 浿水 유역에는 大震國의 南京도 있었다.

三國史記에 “김의충(金義忠, ?~739)을 唐에 보내 신년을 축하했다. 義忠이 돌아올 때 황제는 조칙으로 浿江 이남의 땅을 주었다(遣金義忠入唐賀正 二月 副使金榮在唐身死 贈光祿少卿 義忠廻勑賜浿江以南地)”고 되어 있다. 浿江은 浿水다. 이때가 735년이다. 大震國은 遼西에서 건국하고 大祚榮이 제위에 오른 직후인 699년 長安에 忽汗城을 쌓았다.

날조사니까, 거꾸로 썼을까. 新羅가 과연 唐이 삼국 통일 전쟁을 지원해주면, 浿西地方을 준다고 했을까. 浿西지방은 高句麗의 중심지다. 무엇보다 동아시아 天子國이 될 것을 꿈꾸면서 長安城 바로 지척까지 다른 나라에, 그것도 속국에 준다고 약속할 수는 없다. 浿西를 주면, 黃山江 이남도 줘야 하고 결국 唐을 中奴가 꿈조차 꿀 수 없었던 大國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소리다. 新羅는 대가 지불을 약속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李世民이 탄식했다.

唐은 東支那海를 절대 건널 수 없었다

838년부터 9년간 중국 해안과 내륙을 여행한 일본의 엔닌(圓仁)이 쓴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 등장하는 인물 반 이상이 新羅人들 이라고? 입당(入唐)이 아니라, 입진(入振,入震)이다. 高句麗처럼 漢을 내세우며 입한(入漢)이라 했을 가능성도 있다. 한국사를 말살하려고 혈안이 돼 1919년도 아니고, 1900년부터 설치던 일본이 韓國史 관련 문헌을 그대로 놔두었으리라 생각하는가. 다 뜯어고쳤다.

“高麗의 옛터를 회복하고 夫餘의 유속을 지니고 있다”는 大震國의 國書까지 조작했다. 大震國이 건국 됐다고 알리는 저 국서는 701년에 보냈다. 日本은 701년부터 唐과 사신을 주고받았다고 우긴다. 唐이 아니라, 大震國이다.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 唐이 무슨 수로 일본을 갈 수 있는가. 中國倭의 기술로 만든 일본선박은 9 세기에도 난파되고 침몰되기 일쑤였다. 일본은 新羅 선박에 동승해 중국 대륙을 오갔다. 唐은 東支那海를 절대 건널 수 없었다11).

일본의 주장대로 저 국서가 720년대에 보낸 것이라면, 大震國 건국 후 52년이나 지나 일본에 국서를 보내 高句麗가 재건되었다고 알렸다는 소리다. 있을 수 없는 얘기다. 최소한 平壤(長安)을 되찾고 난 다음에는 일본에 조공하라고 통보했다.

일본은 얼마나 우리나라 역사왜곡에 혈안이 되어 왔는지는 柴達木盆地를 大震國 영토의 전부라 조작한 데서도 알 수 있다. 唐이 아니라 大震國에 간 永忠 등이 보낸 편지 내용까지 뜯어고친 것이다.

(대진국은) 2000 리다. 주(州), 현(縣), 관(館), 역(驛)들이 없고 곳곳에 村里(마을)들이 있는데 다 말갈인(靺鞨人)들의 부락이다. 그 백성은 말갈인이 많고 土人(고구려인)은 적다. 다 토인들로써 村長을 삼는데 큰 촌의 촌장은 도독(都督)이라고 하고 다음 가는 촌의 촌장은 자사(刺史)라고 하며, 그 이하는 다 백성들이 수령이라고 부른다. 토지는 지극히 추워 논농사(水田)에는 마땅하지 않다(延 兩千里 無州縣館驛 處處有村里 皆靺鞨部落 其百姓者 靺鞨多 土人少 皆以土人爲村長 大村曰都督 次曰刺史 其下百姓皆曰首領 土地極寒 不宜水田 類聚國史)

헤이죠코(平城京)유적지(?)

柴達木盆地가 靺鞨人의 부락이라면서 高句麗人도 섞여 사는가?

날조하기는 마찬가지인 新唐書는 또 틀리다.

땅은 사방 5 천리이며 호구는 십여 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부여(扶餘), 옥저(沃沮), 변한(弁韓), 조선(朝鮮)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하였다 (渤海本粟末靺鞨附高麗者…自號震國王…地方五千里戶十餘萬勝兵數萬頗知書契盡得扶餘沃沮弁韓朝鮮海北諸國 新唐書)

3세기에 썼다는 三國志에도 東夫餘가 8 만호라고 날조했다. 저 기사 역시 우리나라 역사책에 나오는 것을 그대로 바꾸었고, 秦나라에 대한 기술이라고 전술했다. 바다(金沙江)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은 戰國時代에 존속했던 소국들을 가리킨다고 했다.

어쨌거나 夫餘, 沃沮, 弁韓, 朝鮮 등 바다(黃山江)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는 다 우리나라니까, 高句麗人은 없고 靺鞨人이 대다수라는 말은 성립할 여지가 없다. 高句麗는 고작 嘉陵江 이동에서 浿水 이서 사이의 백성으로 嘉陵江 이서와 揚子江 중, 상류 이남, 黃河 하류, 동북아를 가진 百濟에 5백년 넘게 대항했을 정도다. 6세기 高句麗의 인구도 4 천만 명이 넘었다. 천 만 가구이다. 高句麗의 강역에 百濟 강역 절반을 차지한 大震國은 高句麗 보다 더 인구가 많았다.

大震國은 동아시아의 天子國

大震國은 동아시아의 天子國이었다. 大震國은 건국 후 67년 만에 5 京 60 州 1 郡 38 縣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11 대 宣皇帝가 아니라, 3 대 武皇帝 16년에, 5 京 16 府 60 州를 보유했다.

大震國은 중국 대륙과 시베리아를 지배한 高句麗 영토에다 百濟 영토 일부, 그리고 여러 靺鞨에 중앙아시아까지 정복한 거대한 나라다. 新羅와 唐을 제외한 동아시아의 모든 지역을 차지했다.

大震國의 長安城을 모방해 지은 헤이죠코(平城京 : 나라시대)는 발굴도 하기 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 되었다. 그 백성은 靺鞨人이 많고 土人(高句麗人)은 적어? 토지는 지극히 추워 논농사에는 마땅하지 않아? 柴達木盆地가 大震國의 전부라고? 일본이 얼마나 우리나라 역사 말살에 혈안 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안(仁安) 16년 구다(句茶) 개마(蓋馬) 흑수(黑水)의 여러 나라들이 항복해 오니, 이들을 성읍으로 삼았다. 이듬해 송막(松漠) 12성을 쌓고 또 요서(遼西) 6성을 쌓았다. 마침내 5 京 60 州 1 郡 38 縣을 소유하니 그 둘레의 너비가 9,000 리나 되었으니 가히 성대하다 하겠다. 이 해(735)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海東盛國) 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사람 셋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大震六德)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를 찬미했다(仁安十六年句茶蓋馬黑水諸國以其國來降取爲城邑 明年築松漠十二城又築遼西六城遂有五京六十州一郡三十八縣圓逼九千餘里可云盛矣 是歲唐倭及新羅並遣使入貢天下稱爲海東盛國至有渤海三人當一虎之語時君民和樂論史樂義五穀豐登四海晏然有大震六德之歌以美之 太白逸史)

러시아 연해주 대진국시대 토광묘 군(群) 발굴현장 연해주는 아이훈 조약(愛琿條約 1858) 이전까지 고려와 이씨조선의 영토였다(함께하는 한국사 보설 참조)

735년에 新羅가 大震國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朝貢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唐과 倭는 이전부터 하고 있었다. 新羅는 중국 대륙 남부 및 동부, 大興安嶺山脈 이남, 韓半島, 黑龍江 까지를, 大震國은 시베리아에서 大興安嶺山脈 이북까지, 그리고 揚子江 남안까지를 가졌다.12) 그러므로 둘레너비 9000 리는 사실이 아니다. 9000 리는 忽汗城(西安)을 기준으로 가로폭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한다.

당나라, 왜, 신라, 거란을 막론하고 모두 두려워하며 복종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천하만방(天下萬邦)은 이로써 성인흥취(聖人興治)의 해동성국(海東盛國) 이라고 흠송(欽頌) 하였다(唐倭新羅及契丹莫不畏服天下萬邦皆以聖人興治之海東盛國欽頌 太白逸史)

고작 섬나라 일본이 東아시아의 天子國에게 新羅를 공격해 달라, 말라 할 수 있는가. 일본이 新羅를 공격하기 위해 배만 수백 척을 만들었다는 것이 사실인지, 역사날조인지 모르겠다. 8 세기에 日本은 黃海를 건널 능력이 없었다. 大震國을 끌어 들이려 했다면, 大震國은 중국 대륙에서, 日本은 韓半島를 공격 하겠다는 전략을 구상했다는 소리인데, 실현되지 않았다.

太白逸史에는 어제훈요(御製訓要)에서 “생각하기로는 우리 동방이 예부터 당풍(唐風)을 사모하여 文物 禮樂을 빠짐없이 唐나라의 제도를 따랐다(御製訓要......惟我東方舊慕唐風文物禮樂悉遵其制)”고 했지만, 唐이 아니라, 高句麗다. 太白逸史에는 이와 똑같은 내용이 나온다. “우리 천수(天授) 太祖께서 창업의 바탕으로 高句麗의 多勿이 나라를 세운 풍도(風道)를 계승 하였다(我天授太祖以創業之資承高句麗多勿立國之餘風).”

唐風이 아니라 高句麗風 이었던 것이다. 高句麗風을 사모했기에 國號까지 高麗라 했다. 唐을 사모했다면 後後唐(後唐은 5大 10 國의 하나)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御製訓要를 조작한 것도 李氏朝鮮이다.

百濟가 高句麗 보다 더 큰 나라였다. 그러나 요점은 “우리 天授 太祖께서 創業의 바탕으로 高句麗의 多勿이 나라를 세우신 風道를 계승”했다는 사실이다. 多勿을 연호로 사용한 것은 朱蒙聖帝다. 琉璃明帝 때 百濟가 갈라져 나왔으니까, 高麗는 百濟가 갈라져 나오기 이전의 동아시아를 제패한 朱蒙聖帝를 계승했다는 것이다. 즉 高句麗와 百濟 둘 다 계승했다는 말이다.

고구려의 長安城

唐의 문화는 高句麗 멸망 이후에 급성장했다. 新羅를 피해 온 高句麗人이 唐의 문화를 주도 하면서 성장했다. 大震國의 上京이 唐 수도 長安城의 축소판이라 할 정도로 모방하여 정비한 도시였다? 長安城이 大震國의 수도다. 唐은 조공마저 西鴨綠江의 西京(重慶)에다 했다. 長安城을 모방해서 大震國이 또 하나 만들지는 않았다. 大震國의 上京이 長安城이고, 그 長安城을 모방해 만든 것은 唐이었던 것이다. 揆園史話에도 上京 忽汗城(長安城. 忽汗이 卒本이다)이라 했다. 唐의 수도는 어디에 있었나. 물론 티벳고원 북부 안이다. 지금의 라싸(拉薩)이다.

우리나라 長安城을 모방 했다면 唐의 長安城도 상당히 웅장한 건물일 것이다. 日本이 長安城을 모방해 지은 헤이죠코(平城京)는 발굴도 하기 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그런데 지금 티벳고원 북부에는 長安城을 닮은 유적이 없다.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티벳은 티벳고원에 없었다. 포탈라궁(布達拉宮)이 있는 자리에는 7 세기 토번(吐蕃)의 창시자가 지은 궁이 없었다. 8 세기에도 吐蕃은 중앙아시아에 있었기 때문이다. 高仙芝가 토벌했던 747년에도 나머지 72 동맹국과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吐蕃이 6 세기에 있지도 않았던 티벳고원 전체를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할 수는 없다. 이러한 거짓말들은 포탈라궁(布達拉宮)이 長安城을 모방한 唐의 수도 위에 건설했을 가능성을 강력히 시사한다.

中奴가 빠져나간 티벳고원 북부는 무인지대가 되었다. 티벳이 이 사실을 알자 이주해온 것이다. 티벳은 중앙아시아에서 티벳고원 북부만한 땅도 차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布達拉宮을 세웠다는 17 세기 중반에 明은 아직 존속했다. 揆園史話를 쓸 당시(1675) 淸은 揚子江 이북에, 明은 揚子江 이남에 있었다. 明이 강해 淸과 연합하는 것도 모자라, 북쪽의 生女眞에다 倭까지 끌어 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李氏朝鮮은 明과 전쟁을 한 적이 없고, 明은 中土에 섰던 무수한 나라들처럼 실로 허약하기 짝이 없는 나라였다.

어쨌거나 우리나라 영토와 역사를 완벽하게 빼앗자면, 티벳고원이 中土였다는 흔적을 지워야 했다. 티벳은 중앙아시아의 영토를 상실 했으므로 티벳고원에서 원래부터 살았다고 역사 날조하는 것에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오늘날의 서안(장안) 중국 섬서성(陝西省)의 省都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 도시 중 하나이다. 인구는 약 650 만~ 700 만명이며, 관중 분지의 중앙부에 위치해 있다. 또한 과거 동양과 서양의 문화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실크로드의 기점이며, 우리에게는 西安보다는 오히려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한 고도(古都)이다.
오늘날 서안은 중국의 신흥 내륙 공업 지역 가운데 하나이며, 20 여 개의 대학과 연구소들을 갖춘 교육 도시이기도 하다. 지금은 중국의 군수 공장, 우주연구센터 등 핵심적인 산업체가 있다. 길 끝 부분에 대안탑(大雁塔)이 보인다.

高句麗 長安城을 모방한 唐의 長安城은 明의 朱元璋이 우리나라 長安城에 들어와 살면서 파괴했을 것이다. 파괴해도 지하시설은 남을 테니까 훗날을 위해서라도 중국이 티벳고원에 있었다는 증거를 남기지는 않기 위해 布達拉宮을 세우도록 유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자기 上國의 영토와 역사까지 갈취했을 정도면, 티벳으로 하여금 파괴된 唐의 長安城 자리에 궁을 짓도록 함은 당연하지 않은가.

날조 新唐書에 唐의 수도에서 百濟 영토 까지가 6 천리(2500 km)라고 했다. 唐은 618년에 선 나라니까, 이미 百濟는 黃山江 이남의 땅도 상실하고 浿水 유역은 물론이고 漢水까지 일부 상실했다. 중국 동해안은 차지하고 있었다.

百濟 영토에서 6 천리는 라사(拉薩)이다. 어차피 라사(拉薩)는 中寇가 있던 티벳고원 북부의 최남단이다. 탁록(涿鹿)도 라사였다. 배달 이래로 우리나라 도읍이 長安 이었으니, 중국도 한 곳에 수도를 정하지 말란 법이 없다. 게다가 拉薩 일대는 中土에서 가장 강수량이 많은 곳이다. 건조기후대인 中土에서 건조기후가 아닌, 유일한 곳이 怒江 이남이다. 涿鹿부터 拉薩에 있었다는 사실은 고대 중국인이 拉薩를 얼마나 선호했는지를 보여준다.

布達拉宮이 서 있는 자리는 7 세기, 吐蕃의 창시자가 지은 궁이 있었던 곳이 아니라, 高句麗의 皇城 長安城을 모방한 唐의 王城이 있었다. 원래 拉薩는 涿鹿 이래로 언제나 중국의 수도였다. 무슨 말인가 하면, 中土에 나라가 하나(?)였을 때는 拉薩에 도읍했고, 나라가 둘 이상 있었을 때도 그 중 하나가 拉薩에 도읍했던 것이다. 宋마저 拉薩에 도읍했다. 拉薩가 開封(카이펑)이다.

지금은 開封은 따로 있었다면서 長安에서 한 500 km 떨어진 곳을 開封이라 부른다. 百濟의 河南慰禮城이 있던 현 開封을 중국 7 대 고도(古都)의 하나로 날조하고 있다.

“시안(西安)은 周나라 武王이 세운 鎬京에서 비롯되며, 그 뒤 漢나라 에서 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천 여년 동안 단속적 이었으나 국도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로 그 동안 長安 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다”고? 長安은 朝鮮 이래로 藏唐京, 卒本, 平壤城, 長安城, 忽汗城, 開京으로 불린 우리나라 5 천년사의 제1도읍이다.

明이 高句麗의 長安城을 밀어내지 않은 것은 역대 중국 왕조의 수도를 長安城 까지 밀어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高句麗의 長安城은 사라지고 대신 唐의 수도가 등장한 것이다. 이것도 지명 포개기의 수법이다.

우리나라가 長安이라 하자, 長安이라 따라 부르고, 우리나라가 開京이라 하자, 開封이라 부른 中土에 정말 문명이 있었다고 보는가. 唐의 수도명이 長安이든 뭐든 내 알 바 아니고, 문제는 高句麗의 長安城을 두고 唐의 長安이라 선전하며 세계에서 관광객을 끌어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다. 주말이면 唐 때 長安城에 들어오는 수많은 외국의 사신과 방문객을 맞이하던 入城式이라는 것을 재현하고 있다. 과연 高山地帶에 우뚝 선, 新羅의 식민지 唐에 그런 것이 있었을까?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역사왜곡의 대국이다. 무역대국은 高句麗고, 大震國이고, 高麗였다. 작금의 중국은 우리나라의 入城式을 모방하고 있다.

洛陽은  어디인가

라사(拉薩)가 長安이라면 洛陽은 어디인가. 그에 대한 단서가 기원전 771년, 견융(畎戎)의 공격을 받아 長安에서 洛陽으로 천도 했다는 대목이다. 畎戎은 우리나라를 부정하기 위해 날조한 것이고, 실은 朝鮮이다. 우리나라의 공격을 받아서 拉薩이 함락됐다는 것이다. 이 당시 우리나라(番韓과 馬韓)는 海上(海垈+江淮)을 차지하고 있었다. 中土 남부를 공격받아 수도까지 함락 됐으니까, 더욱 깊숙이 천도 해야지, 우리나라 쪽으로 다가올 수는 없다. 오늘날의 지명처럼 洛陽이 長安의 동쪽이 아니라, 서쪽에 있었던 것이다. 西周에서 東周가 아니고, 東周에서 西周로 이행한 것이다.

大震國이 “黑水靺鞨을 비롯한 대부분의 靺鞨세력을 복속시켰다” 함은 三國統一 전쟁을 틈타 우리나라의 지배를 벗어난 濊貊族을 정복했다는 것이다. 삼국 통일 전쟁 당시 柴達木盆地에서 빠져나와 제 살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濊貊族을 정복한 시기는 시베리아에서 일식관측하기 전인 710년 이전 이라고 했다. 宣皇帝 때도 아니고, 武皇帝 때도 아닌, 高皇帝 때라고?

태자 무예(武藝)가 즉위하다. 개원하여 인안(仁安)이라 하고 서쪽으로 거란(契丹)과 경계를 정하니 오주목(烏珠牧)의 동쪽 10 리는 황수(潢水)에 임하였다(太子武藝立改元曰仁安西與契丹定界烏珠牧東十里臨潢水 太白逸史)

遼西는 건국 당시부터 大震國 영토다. 거란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따라서 大震國이 거란과 경계를 정한 땅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었다. 烏珠牧의 동쪽 10 리 및 潢水 역시 거기에 있다.

“潢水를 굽어본다”고 한 것은 潢水가 작은 강이 아니기 때문이다. 中土의 큰 강이라고 해봤자, 雅魯藏布江(珠江), 怒江(長江), 瀾滄江(淮水), 金沙江(黃河), 岷江(遼水)이다.

太白逸史에는 黃水를 潢水라고 표기했는데, 역사날조가 끝난 李氏朝鮮 중기에 쓴 책이다. 백제성은 百濟城에서 白帝城으로 글자를 다 바꾸었고, 남령南嶺 산맥, 영남(嶺南) 지방처럼 글자 위치를 뒤바꾼 것도 있다. 遼水도 遼河라고 부른다. 潢水는 黃水 즉 黃河였던 것이다. 大震國은 거란과 예전 黃河 즉 金沙江 상류를 경계로 정한 것이다.

고구려의 축조물로 날조된 오녀산성

4) 평로치청은 신라에서, 제나라는 당에서 건국했다

천문기록으로 살펴본 高句麗의 드넓은 강역만 해도 高句麗가 원래부터 대국에서 출발한 나라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高句麗의 수도라는 오녀산성(五女山城)이나 환인시(桓因市)는 대체 무엇인가? 고작 五女山城, 桓因市가 高句麗의 영토라면 高句麗가 朝鮮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있는가. 一粟이 滄海를 계승 했다고 우길 수 있는가 하는 말이다. 高句麗가 桓因市, 五女山城에서 출발한 나라라면, “옛 땅을 회복하자(復舊土, 多勿)”는 國是조차 내세울 수 없다. 桓因市, 五女山城 이전에는 無이기 때문에 멸망하자, 자멸하자는 소리 밖에는 안된다. 축소돼도 너무나 축소된 역사다.

平盧淄靑과 齊나라

高句麗를 대신해 천하의 중심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新羅는 隋, 唐이라는 티벳고원 북부의 오랑캐까지 끌어들였지만, 高句麗는 더 강했다. 멸망한 해에 大震國(건국 당시는 後高句麗), 93년만에 平盧淄靑, 96년만에 齊나라(唐나라 내에서 건국했다)라는 이름으로 재건된 불굴의 정신력을 가진 사람들의 나라였다. 그들이야 말로 자신의 역사를 잘 인식하고 있던 한민족이다.

平盧淄靑과 齊나라는 각기 다른 나라다. 平盧淄靑은 761년 부터 817년 까지 존속한 나라이고, 齊나라는 765년에서 819년 까지 존속한 나라이다. 唐은 티벳고원 북부의 나라다. 그러므로 山東省 전체와 河北省, 河南省, 安徽省(현대의 행정구역)을 다스렸다는 平盧淄靑은 新羅의 영토에서 건국한 나라다. 817년 唐 玄王이 新羅의 선무군(宣武軍), 위박군(魏博軍), 무령군(武寧軍 : 張保皐의 군대)까지 동원하여 淄靑을 공격 했다는 대목도 실은 新羅와 平盧淄靑의 전투에 新羅의 속국 唐의 군대까지 동원 됐음을 말해준다. 新羅가 군사 3 만(?)을 동원하여 토벌했다는 기록은 명백히 平盧淄靑이 新羅 영토 내에서 건국된 나라임을 알려준다.

大興(光聖文皇帝) 45년(782), 淄靑의 節度使 이정기(李正己)가 군사를 일으켜 唐에 항거하니 文皇帝가 장수를 보내어 전투를 지원 했다(大興四十五年淄靑節度使李正己擧兵拒唐軍帝遣將助)고? 太白逸史는 李氏朝鮮 중기에 쓰여진 책이다. 李氏朝鮮은 李成桂가 우리나라 영토 중국 대륙을 明 등에게 주었던 탓에 우리나라가 중국 대륙을 지배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濊貊族의 나라다. 李氏朝鮮 건국과 동시에 역사말살도 함께 이루어졌다.

李正己는 唐의 節度使가 아니었다. 唐이 아니라 新羅에 항거했다. 平盧淄靑이 있던 山東省, 河北, 河南, 安徽省은 下代 新羅의 영토였다. 大震國에서 平盧淄靑을 군사 지원했던 것은 李正己가 高句麗 출신13)이고, 新羅와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날조역사에 의하면, 平盧淄靑과 齊나라는 존속 연대와 영토가 대부분 겹친다. 齊나라 영토 山東地域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던 山東 이었다. 齊나라 체제하에서 언어와 풍습이 달라졌다는 기록은 齊나라가 唐의 영토에 세워진 나라임을 지적하고 있다. 齊나라 영토가 18 km² 밖에 안되는 것도 티벳고원 북부에 불과한 唐에서 일어난 나라이기 때문이다. 高句麗系 군인 1200 명을 집단학살 했다는 기록도 齊나라가 新羅 영토가 아니라, 唐의 영토 내에 건국된 나라임을 알려준다.

唐으로 간 高句麗人이 몇 명 안되는 것은 “齊나라 체제하에서 언어와 풍습이 달라졌다”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齊나라는 高句麗人이 지배층을 형성하고 華夏族 등을 피지배계층으로 해서 건국한 나라였던 것이다.

“洛陽의 물자 보관소 하음(河陰)을 공습, 무려 150 만개에 달하는 창고를 불지른 뒤, 사저를 짓고 군부대를 상주시킨(師道使賊燒河陰倉斷建陵橋初師道置留邸於河南府 舊唐書)” 나라는 齊나라가 아니라 平盧淄靑이었다. 하음(河陰)은 高句麗 영토에 있었다. 다시 말해 新羅 영토에 있었던 것이다.

하음(河陰), 진강(鎭江), 해령(海寧)의 전답에서 수확물을 제왕(諸王), 재추(宰樞) 이하 차별 있게 나누어 주었다(河陰鎭江海寧之田分給諸王宰樞以下有差 高麗史節要)

티벳고원 북부에 150 만개의 창고가 들어 가는가. 齊나라가 5 회 이상 공격해 唐王이 도망갈 수밖에 없었다는 洛陽은 티벳고원 북부에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당시 新羅의 수도 金城은 武漢이다. 山東省 전체와 河北省, 河南省, 安徽省까지 확보한 平盧淄靑 때문에 湖北省에 있던 新羅 황제 역시 피난을 갈 수 밖에 없었다. 新羅皇帝가 피난가자, 唐王도 덩달아 피난 갔던가? 中奴는 平盧淄靑과 齊나라의 역사조차 마구 뒤섞어 놓았다.

淄靑의 존재를 알린 靑州 博物館 館長이 해임된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역사스페샬에 방영된 이유로). 高句麗人들이 中土 일부를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다면 절대 해임되지 않았다. 원래 중국은 수많은 이민족이 국가를, 심지어 통일국가까지 줄줄이 세운 나라다. 高句麗人들이 중국 내에 나라를 세웠다는 사실이 보태진다 해도 중국에게는 아무런 수치도 되지 않는다. 平盧淄靑이 唐의 영토가 아니라, 新羅 영토에 건국한 나라이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날조한 역사를 사실로 믿고 있다면, 淄靑 운운 한다고 해서 겁내지 않는다. 아니 겁낼 수가 없다. 역사왜곡한 사실을 모르는데 어떻게 겁낼 수 있을 것인가.

중국은 아직도 李成桂와 朱元璋의 거래로 역사를 바꾸고 우리나라 영토인 중국 대륙을 차지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韓國學者가 중국에서 유적을 탐사하면 경찰이 따라 붙는다. 廣開土境大勳跡碑, 舞踊塚……. 三國의 유적은 보존을 구실로 화학처리 한다면서 다 훼손한다. 중국이 왜 이 땅의 사학자들의 연구성과를 시시때때로 수집해 가겠는가. 제 땅도, 제 문명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혹시라도 自國史를 알아내게 되면 대처 방법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歷史 역시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기에 常識 위에서 성립한다. 동북아 일부만 차지한 高句麗가 동아시아를 호령할 수는 없다. 北魏가 高句麗人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王妃로 맞이하고, 高句麗 황제가 붕어할 때마다 애도의식을 거행한 것은 高句麗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대제국이었기 때문이다. 唐의 武則天이 孝昭帝의 붕어를 애도하느라 이틀씩 조회를 중단한 것도 新羅가 唐의 上國 이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한단고기가 후대에 가필되고 윤색됐다고 하면서 그 이유의 하나가 1923년에 泉男生(淵男生) 묘지가 발견된 후에야 알려진 연개소문(淵蓋蘇文) 조부의 이름 자유(子游)가 太白逸史에 실려 있기 때문 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淵蓋蘇文 조부는 이름도 없는 종놈 이었단 말인가. 淵蓋蘇文의 집안은 대대로 최고 귀족 막리지(莫離支) 집안 이었다. 자신이 알지 못한다고 僞書라니. 우리나라 역사책은 우리나라 피지배 종족들에 의해 엄청나게 분서됐다. 한단고기는 한단 역사책이 하나도 멸실되지 않은 新羅, 高麗 때 쓴 책과 李氏朝鮮이 감춘 궁중 내 한단 역사책을 보고 쓴 책의 합본이라고 분명히 밝혔는데도 헛소리나 하고. 李氏朝鮮 말에도 한단 역사책은 51 종이나 궁궐 깊숙이 감춰져 있었다. 그걸 倭奴가 일본으로 빼돌렸고.

또 太白逸史 등이 후대의 언어로 쓰여졌다고 위서라고 하는데, 편찬 당시의 언어로 쓰지, 까마득한 옛날 언어로는 쓸 수도 없다. 언어는 변천한다. 옛날 언어를 편찬 당대의 사람들이 읽어낼 수나 있는가. 太白逸史 跋에 보면, “庚辰14)에 내가 撰修官으로 뽑혔기 때문에 열심히 내각(內閣)의 비밀 서적들을 얻을 수 있어 이를 읽고 이를 앞의 원고에 곁들여 편찬하고, 이름 지어 太白逸史라 하였다(後一十六年庚辰余以撰修官頗得內閣秘書而讀之乃按前稿而編次之名曰太白逸史)” 했지만, 계연수(桂延壽) 선생이 한단고기를 편찬한 해는 1911년이었다. 세련된 언어로 고풍스런 옛 글을 고치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문자를 여러 번 발명했기 때문에 鹿圖文에서 加臨土로, 漢字로, 한글로 계속 역사책을 재편찬해야 했다. 필연적으로 편찬 당시의 용어로 쓸 수 밖에 없다. 과연 朝鮮이 朝鮮인가. 原國名은 쥬신이다. 한국도 환국(桓國)에서 나왔다. 그런데 桓國조차 원국명은 아니다. 神誌 赫德이 만든 鹿圖文이 우리나라 문자의 시초이기 때문이다. 편자 역시 이 글을 쓰면서 오늘날의 언어로 쓰고 있다.

日本史에는 604년에 벌써 憲法까지 등장한다. 쇼오토쿠타이시(聖德太子)가 제정 했다는 17 조 헌법인데, 역사왜곡학 발흥 후에 가필한 것이다. 日本의 制憲憲法은 1889년에야 나온다. 무려 1285년이나 연대를 올린 것이다. 실제로 聖德太子가 법률을 제정 했는지는 전혀 알 길이 없다. 律令時代는 세련(?)되게 法治時代라 바꿔 부른다. 그래도 日本이나 메국의 日本史 전공자들은 실증사학 이라며 다 인정한다. 하긴 나라 이름(倭)이 같다고 中國倭를 列島 倭史에 슬쩍 포개 韓半島에 倭가 있었다고 우길 정도니! 이런 온갖 오류에 다 눈감고 무조건 다 맞다고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지만, 오직 하나 오류라고 찾아내어 책 전체가 다 허구라고 매도하는 것은 그 이상으로 심각한 문제다. 하물며 그 誤流라고 지적한 것도 오류가 아닌 다음에야.

가필되고 윤색 되었다며 사소한 것 하나를 문제 삼아 민족의 역사 전체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것은 바로 日本이 그토록 집요하게 추구해 왔던 韓國史 抹殺의 목적이다. 우리나라의 피지배 종족들이 지난 6 백여년간 자행해온 한국사 말살의 목적이다.

기독교는 기원 전후에 발생한 종교다. 서기, 기원이라는 연호가 그들이 믿는 예수라는 인물의 태어난 날(추정으로 실제로는 기원전에 태어났다고 함)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그에 반해 우리나라는 기원전 7197년에 성립한 나라다. 배달만 해도 기원전 3898년에 개천한 나라다. 똑같은 내용이 나온다면, 후대에 성립한 기독교가 우리 것을 교리로 삼았다는 증거지, 그 반대가 될 수 없다. 本末까지 바꾸면서 주장하는 것은 한단고기를 절대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전제하에 하는 억지주장 밖에 안 된다.

他國史를 왜곡하기에 혈안이 된 나라들이 곧잘 사용하는 수법 하나가 역사의 원인과 결말을 바꾼다는 것이다. 역사의 원인과 결말을 바꾸면 존재하지 않았던 허구의 역사로 변한다. 그래서 역사 왜곡하는 자들은 늘 악의로 역사의 본말을 바꿔왔다.

日本이 우리나라에 朝鮮은 없었다며 근거랍시고 끄집어내는 말이 있다. 한웅을 부르는 호칭인 天王은 불교용어이기 때문에 배달도 없고 朝鮮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제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하고 가자. 이 나라의 그런대로 배웠다고 하는 먹물들이 李氏朝鮮을 비호하려는 의도에서 인지는 몰라도 李氏朝鮮 이라고 말하면 일제하의 식민사관에 물들은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떻게 李氏朝鮮이 朝鮮이 된다는 말인가? 이는 우리 시원의 역사를 죽이려고 하는 倭奴들의 간교한 술책에 물들음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배달은 기원전 3898년에 개천했고, 佛敎는 기원후에 전래됐다. 석가조차 기원전 5, 6 세기의 사람이다. 우리나라만 기념하는 부처님 오신 날은 부처가 태어난 날이 아니고, 北夫餘의 시조 解慕漱가 개천한 날이며, 한웅이 탄생한 날이다. ☞ 부처님 오신날 참조

佛敎의 大雄殿은 大人 한웅을 모신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각이다. 佛敎는 우리나라 문화와 쉽게 융화되기 위해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것은 서양의 카톨릭교도 마찬가지다. 원래 카톨릭교는 우상숭배를 금지 했으나, 유럽의 기존 종교와 융합되어 동상 만드는 것이 카톨릭의 중요 문화로 변질됐다.

배달 한웅과 관련도 없다면서 우두천왕(牛頭天王)이니 하고 日本의 우두머리를 天皇이라 하는 것은 일본에 우리나라 문화가 그대로 전해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것만 봐도 日本이 우리나라 식민지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식민지에 역사책을 하사 했으니까, 日本이 628년 이후의 일식기록을 모조리 베꼈다.

天皇은 배달, 朝鮮의 통치자에 대한 호칭이다. 日本은 호칭까지 우리나라 것을 모방한 것이다. 일본에서 天皇이 보편적인 호칭으로 정착한 것은 겨우 100 여 년 전이다. 메이지(明治) 유신(維新) 이전에는 미카도(御門), 다이리(內裏), 긴리사마(禁裡樣), 덴시사마(天子樣)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사무라이들은 내내 교쿠(玉)라고 불렀다. 겨우 1889년에 이르러서야 憲法의 공포에 의해 天皇으로 확정된 것이다.

헌법 초안 논의 당시 ‘고테이’(皇帝) ‘고쿠테이’(國帝) 등의 온갖 제안이 난무하고 헌법 공포 이후에도 1936년 까지 외교문서에다 고테이와 Emperor라고 썼다15).

메국과 日本이 그토록 좋아하는 實證史學에 의한다면, 그 옛날부터 天皇이라 불렀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日本書紀와 古事記도 조작하고 七支刀, 廣開土境大勳跡碑도 조작하는데, 그깟 동판이나 목간(木簡), 法典쯤 조작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가 아닌가.

천 수백년을 우리나라 속국으로 산 日本이 우두머리를 天皇이라 부를 수는 없다. 軒轅도 태양의 아들 운운하다가 慈烏支 한웅의 정벌을 받았고, 中國倭도 日出國이라 하다가 高句麗 황제에게 내쫓겼다. 高麗도 거란에게 자국의 연호를 사용 하라고 강요했다. 天皇 호칭을 사용했다는 天武 때는 新羅의 충실한 속국 이었다. 上國은 皇帝가 다스리고, 屬國은 天皇이 다스린단 말인가. 天皇 이라는 것은 19 세기 역사날조 하면서 종이 위에서만 존재하던 호칭이다.

日本은 우리나라 역사를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강점했을 당시, 우리나라 역사말살에 그토록 광분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상상을 초월하는 막대한 문헌을 불태워 버린 現代版 焚書가 바로 이 땅에서 倭奴(李氏朝鮮과 明은 더했다)에 의해 저질러졌다. 그 중 일부는 日本에 가져가 숨겨놓고 있다. 倭奴 宮內廳 도서관에다 숨긴 한단사서만도 실로 엄청난 양이라고 한다. 지금쯤은 비밀장소에 숨겼을 것이다.

부여정림사지오층석탑(扶餘定林寺址五層石塔) 부여 정림사(定林寺)터에 세워져 있는 석탑으로, 좁고 낮은 1 단의 기단(基壇)위에 5 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신라와의 연합군으로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제를 정벌한 기념탑’이라는 뜻의 글귀를 이 탑에 남겨놓아, 한때는 ‘평제탑’이라고 잘못 불리어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日本이 ‘이제는 한민족이 자신들의 上古史를 알지 못하겠지’하며 안심하고 있던 차에 中國이 不法 占有하고 있는 遼西地域에서 최근 유적, 유물이 발굴되어 朝鮮史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日蝕記錄에서 三國의 강역이 중국 대륙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倭奴가 빼앗아간 우리나라 유물은 파괴되지 않고 日本에 비밀리에 보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日本 또한 百濟人, 新羅人이 건너가 세운 식민지이기 때문이다.

倭奴(그리고 中奴)의 순수창작은 없다. 남연서(南淵書)라는 僞書를 만들어 “太古 이래로 동아시아 제국을 예속 했으며 당연히 예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太古 이래로 東아시아 제국을 예속한 나라는 배달, 朝鮮, 高句麗다. 겨우 배달, 朝鮮, 高句麗를 日本으로 치환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日本의 神이나 天皇이 朝鮮을 지배 했으며, 때로는 日本의 神이 朝鮮의 神이 되거나 王이 되었고, 朝鮮의 王이나 貴族이 日本에 복속했다”는 우리나라가 日本을 지배 했으며, 우리나라 사람이 日本王이 되고, 우리나라의 神이 日本神이 되고, 日本王과 貴族이 우리나라에 복속한 사실을 뒤바꿔 놓은 것에 불과하다. “韓國의 문화재 약탈로 日本이 노린 것은 日本과 韓國의 뿌리가 같으며, 日本과 떨어지면서 못살게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은 韓日史를 그대로 바꿔놓은 것이다.

倭奴民族은 절대 우리나라 역사서를 없앨 수 없다. 왜?

반쪽 이나마 그들(日本은 混血種族이다. 中國倭가 25.8 %나 차지하는 漢委奴이다) 조상의 역사이기도 하니까. 그거라도 없으면 倭奴民族이 무슨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가. 지금쯤은 우리나라 上古史 문헌들을 마이크로필름에다 담아서 비밀장소에 보관해 두었을 것이다.

日本民族은 列島로 간 뒤 단 한 번도 문명다운 문명을 누리지 못한 인간들이다. 숟가락, 옷가지, 주춧돌, 기와에서 사찰에 이르기까지 모두 우리나라가 만들어 주었다. 정창원(正倉院) 보물이라는 것만 봐도, 식기에서 문방사우, 악기 등 줄줄이 新羅 것이고 百濟 것이다. 호류지(法隆寺), 고류지(廣隆寺), 그 안에 있는 벽화, 불상에 이르기까지 모두 百濟 것이고 新羅 것이다. 다까마쓰(高松塚) 고분은 또 어떤가. 高句麗 고분이라 우기지만, 百濟 고분이다. 列島에 日本人이 산다고 해서 日本人이 만든 것은 하나도 없다.

아, 하나 있다. 法隆寺 금당벽화(金堂壁畵). 담징(曇徵)의 사불정토도(社彿淨土圖)가 불타서 그걸 日本人들이 다시 그렸다고 한다. 그런데 얼마 전에 컴퓨터로 曇徵의 壁畵를 재생해냈다. 壁畵는 高句麗人이 아니고, 百濟人이다.

부여 정림사지5층석탑(定林寺址五層石塔)에 써 있다는 대당평백제국(大唐平百濟國 : 大唐이 百濟를 평정함)碑銘은 최근에 발견됐다. 과연 소정방(蘇定方)이 쓴 낙서라면 천 수백 년간이나 발견되지 않고 우리가 모를 수 있는가. 사비성(泗泌城)이 있었다고 믿는 자리에 蘇定方이 내지성(奈祗城)을 정복 했다고 적혀 있다. 蘇定方은 자신이 어디를 공격하는 줄도 몰랐단 말인가.

百濟復興軍에 포위되어 배고픔을 참지 못해 人肉을 뜯던 야만인이 과연 한가하게 탑에다 낙서나 하고 있을 여유가 있었을까. 굶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新羅가 百濟를 멸망시킨 것을 도저히 참지 못했던 蘇定方과 그 부하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포위망을 뚫고 나가 한 짓이었을까. 그 결의로 전투에 임했으면 포위당하는 꼴은 없었을 텐데, 엉뚱한 데로 애국심이 발휘 되었던가?

百濟 멸망과 부흥 전쟁은 중국 대륙 동부와 발해만에서 있었다. 蘇定方도 중국 대륙 동부와 발해만에서 新羅의 三國統一 전쟁을 열심히 방해하고 있었다.

중국의 짓인가. 중국은 그렇게라도 해서 百濟를 唐이 멸망 시켰다고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실상 唐이 百濟 멸망에 아무런 공헌(?)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唐이 百濟를 멸망 시켰다고 우기고 싶었겠는가.

그런데 高句麗, 新羅, 百濟가 곧잘 하듯 왜 번듯한 비석을 세우지 않은 것일까. ‘大唐’은 비석 세울 줄 몰랐던가. ‘大唐’이 하는 짓이 고작 남의 나라에 숨어 들어와 남의 나라 탑에 낙서나 하는 것이었던가. 大唐은 커녕 中國이 기를 쓰고 감추고 싶어 하는 小唐, 오랑캐 唐의 실체를 세상에 알리는 꼴이다.

定林寺址五層石塔의 낙서는 제 주인나라의 역사를 말살하기 위해 안간힘 이었던 倭奴가 새긴 것이다. 그래서 다른 문화재는 다 약탈해 갔으면서도 定林寺址五層石塔은 이 땅에 남겨둔 것이다. 倭奴는 韓半島에 泗泌城이 없고 奈祗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百濟 멸망 후 日本으로 건너간 百濟 유민이 가져간 역사책이 보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大唐平百濟國 碑銘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히 百濟가 이 땅에만 있었다고 착각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百濟滅亡과 復興運動이 이 땅에서 있었다고 착각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누누이 말하지만, 日本도, 中國도 전혀 새로운 창작을 하지 않았다. 기존의 역사에 우리나라 대신, 중국을 집어넣었을 뿐이다. 5 세기 이전의 倭史는 中國倭의 역사이다. 이름이 같다는 점에 착안하여 日本史에 덧붙인 것이다. 그 외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중국 대륙에 있던 倭를 韓半島 남부에 옮겨놓고 任那日本府라 우기는 것처럼.

우리나라 역사가 곧 저들의 역사왜곡 재료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