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역의 추억
남촌선생 자기 이야기
1984년 - 내나이 35세
일산에 신도시가 들어서기 전
백마역은 넓은 들판 가운데
앙증맞게 예쁜 간이 역이었습니다.
집 에서 바라본 백마역(중앙 힌점)달리는 기차
그 들판에 나의집도
백마역처럼 멀리서 마주보고 있는
벌판의 외딴집
눈이올 때면 고무장화 신고
그 벌판을 가로 질러
백마역에 가다보면
나는 항상 닥터 지바고의 주인공이었다.
이맘때 봄이 오면 집 뒤 작은 언덕에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불붙었습니다.
어린 내 아들 딸이 그 꽃 속으로
줄달음질칩니다.
한달 동안은 녀석들에게는 진달래축제 기간입니다
여름철 우리 집 마당에
고추. 쑥갓. 상추. 들깨. 씀바귀. 들나물
지천으로 자랄 때면
서울의 친구 녀석들은 막걸리
돼지고기 사들고 주말마다 찾아온다.
마당에 멍석 깔고
어름 물 같이 시원한 마당가 펌프
푸덕 푸덕 퍼다 가
서로서로 등목을 해주고
지천으로 깔린 푸성귀 아름 따다가
삼겹살을 구어서 주먹만 하게
쌈을 싸서들고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고는
주먹 쌈 한보따리 아가리가 찢어져라
쳐 넣으면 눈알이 불뚝 튀어 나올라.
저녁에 서울로 외출 할 때면
문은 다 열어 놓고 전기불도 켜 두고
라디오까지 틀어두고 간다.
나는 항상 좀 도둑을 속여 먹는다고 자랑 한다.
좀도둑은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사실은 가져갈 것이 없고
본래 도둑도 없는 동네다.
언제 부턴가 이 순박한 시골 백마역에
민속주점 화 사랑이 들어오더니
종당에는 즐비한 민속주점 저자거리 되고
주말이면 신촌 대학가에서
수천 명의 대학생들 쌍쌍 파티가 열리었다.
그때 까지만 해도
그런대로 낭만이 있었다.
-눈온 날 집 뒤쪽 창문에서 바라본 설경-
어느 날 부턴가 갑자기 검은 안경
부자들 외제차가 줄지어 드나들더니
아니나 다를까?
얼마 후 일산 신 도시 계획 발표되고
이름 없던 그린밸트 땅 白馬가
1990년 庚午年 백말띠의 해 白馬동네가
자기 이름그대로 發音을 하여
출세를 하셨다. 아니 해원(解寃)을 했다.
비싼 땅. 귀한 몸이 되셨단 말이지요
큰비 내리고 한강 뚝 터져 동네가 물 속에 잠기니
본래 비싼 땅과는 인연이 없는 서민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정든 땅 버리고 속절없이
어디론가 뿔뿔이 흩어져 갔다.
한강뚝이 터져 물에 잠긴 우리집-그대로 두고 이집을 떠났다.
백마 땅을 이별 하던 날
제정신으로는 도저히 용기가 없어서
술에 취해서야 정든 곳을 떠날 수가 있었다.
백마역이야 지금도 매양 그 자리에 있지만
더 이상
그때의 천진난만한 백마역은 아니었다.
이제는 거만하고 도도한 땅이 되어
옛 주인을 몰라본다.
나도 내 집 자리 찾을 길 없어
빌딩의 틈새들을 삐끔 거리다
허전하게 돌아 선다.
지금의 저 빌딩 모퉁이 어딘가에
내 아이들 고향의 소중한 어린 추억들
너무도 생생히 아롱져
땅속에 묻혀 있는데
오늘도 저 빌딩 숲들은
오만 불손하고 도도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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