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등반 후기
南村 서 호원
금요일 밤은 수 십 년 내에 보기 드믄 험악한 밤
만주벌판 질주하던 북풍이 겨울기운 몰아온다.
천둥 번개가 밤새 우르릉 쾅 쾅 지축을 흔들고
장대비를 동반한 비바람! 때 아닌 어인 광풍인가?
집 앞 300살 노송이 밤새 부러질 듯 요동을 치더이다.
청량산
높이: 860미터
산의 특징:편마암으로 이루어진 특이한 층암, 암봉-암릉으로 이루어진 산, 주왕산의 암질과 비슷한 데가 있다.
산행특색:능선산행
식생:대부분의 능선엔 소나무숲이 울창하다.
조망: 산의 서쪽으로 낙동강이 흐르며 강은 도산서원 앞을 흘러 안동호로 들어간다.
산행시간:6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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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산행 날에 비라도 뿌릴까 가슴 조였더니
모두가 기우(杞憂)였다. 하늘은 천지를 말끔히 정리하고
10월 18일은 천고마비의 전형적인 에머랄드 창공으로
유림산악회를 창창(蒼蒼) 기다리고 있다.
아직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떠나는 우리들을
배웅하는 정 재삼 등반대장을 뒤로 하고
버스가 출발한 시간은 06:45분 보통 때 보다 30여분 빠르다.
갈 길이 멀어 30분 앞당겼다 한다.
버스는 2자리 정도 여유가 있다.
함양군 향우회/휴천면 향우회 임원진들이 함께
참여 하였다. 반갑고 고마운 일이다.
맑고 푸른 가을하늘 맞닿은 지평선까지 끝 간 데 없이
시원하게 펼쳐진 벌판위로 길게 누운 고속도를 거침없이
내달린다. 고속도로 창문 가득히 누렇게 익어 일렁이는
베 농사 황금물결이 출렁 출렁 파도가 친다.
그 만추(晩秋)의 풍성한 파도가 가슴속으로
왈칵 왈칵 들어 올 때 마다
내 집 곳간에 쌀가마니 가득 쌓인 듯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입지 않아도 등이 따시다.
가을은 결실의 계절
가을은 풍요의 계절
가을이야 말로 1년의 모든 목적을 이루는 계절이다.
그런데도 마음은 쓸쓸하고 허무하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훌쩍 어디론가 홀로 떠나고 싶은 계절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코스모스 하늘거리는 가을길을
코끝에서 단내가 나도록 걸어보고 싶은 계절
매양 복잡하고 분주한 일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계절
그런 가을 타는 사람들에게 향우회 산행은 제격이다
오랜 고향친구를 만나고 별 말이 없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옛 추억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버더리 저수지 아래 실개천에 바글 거리던 가재들/벼름바구 물레방아
/베렝개/국게/옥내장터/화개장터 뻥튀기/경호강 은어/대포/계비내/나무골/숙구지
한징기/화장산 고사리/진가에 나무/웅평 마을 앞개울에 지천으로 반짝이던 피라미 ... ...!
이 세상 누구라서 이 낱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을까?
오직 유림 향우들끼리만 통하는 특별한 비밀 페스워드가 아니던가?
옆에 꾸벅 꾸벅 졸고 있는 향우의 얼굴에서 어렵지 않게
옛 추억을 읽어낸다.
그때는 책을 보자기에 싸서
머시마들은 어깨에 걸머 매고 가시나들은 허리에 찼다.
그리고 이렇게 은빛 억새 흩날리는 가을에
산길/들판 길로 이어진 하교(下校) 길은 우리들의 낙원(樂園)이다.
거무티티 때 절은 삼베자루 주둥이에 대나무를 끼워 묶어 들고
누렇게 익어 일렁이는 논두렁에 들어서면 알밴 누렁 메뚜기가
콩 튀듯 한다.
그렇게 두 시간 뛰놀다 집에 도착하면 잡은 메뚜기가
삼베자루 가득하다. 어머니는 저녁밥 할 때 무쇠 솥 뚜껑에 메뚜기
자루를 올려 메뚜기가 죽으면 그 메뚜기 참기름에 소금 뿌려 볶으면
최고의 도시락 반찬이 된다.
어디 그뿐인가? 가을바람 부는 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뒷동산에 오르면 반짝이는 밤알이 우수수하다
오지랖이 꿰어지도록 밤을 주워와 소죽아궁이 잿불에 구워
조끼주머니. 바지주머니 가득 두고 먹으면 하루 종일이 오지다.
유림은 유난히 감나무가 많은 곳이다. 가을이 깊어진 이맘때
동네 골목마다 단성감/두리감/짱디감/뽀족감들이 가지가 찢어지도록 열리어
쭉 쭉 늘어져 새 빨갛게 익어간다. 이 맘 때면 잘 익어
소름끼치게 달고 감칠맛 나는 감을 동네 어느 골목에서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낙원이 된다. 내 고향 유림은 그렇게 풍요롭고
아름다운 고장이다.
오색 창연한 색깔로 유난히 아름답게 물든 감나무!
그 감나무 단풍! 그냥 밟고 다니기가 못내 아까워 어린 고사리 손으로
한잎 두잎 모아오면 가난한 내 어머니 그것이 100환짜리
돈이라면 얼마나 좋겠노? 탄식 하던 울 엄마가 그리워 뼈가 저려온다.
그 추억 아리어 아리랑 되고
그 추억 쓰리어 쓰리랑 된다.
날 좀 보이소! 날 좀 보이소!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이소!
애걸복걸 외쳐 보지만 세월 속으로 떠나버린 울 엄마 찾을 길이 없다
아스라이 사라진 고향의 향수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옆자리에 졸고 있는 향우들 그 사람이 그 사람 아니던가?
사실이 그러 할진대 향우(鄕友)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던가?
향수에 잠기는 동안 버스가 멈춰 섰다 박달재 휴게소다
옛날 같으면 여러 날 걸릴 길을 고속도로가 생겨 불과 4시간여 만에
도착 하였으니 이것이 축지법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유명한 울고 넘던 박달재답게 기암괴석을 모아다가 절벽위에
정자를 꾸미고 그 아래로 분수를 꾸며두어 잠시 들리는 길손들의
눈을 즐겁게 하여 준다.
버스는 영주와 봉화읍을 지나 낙동강의
시발지라 하는 계곡에 들어서니 기암 절벽사이로 타고 내려온
玉水들이 맑고 푸른 명경수(明鏡水)를 이루고 있다.
강원도 태백시에서 발원하여 경남의 다대포 앞까지
영남의 여러 들판을 골고루 적시며
쌀 수수 만석을 생산해 내는 생명줄 낙동강의 물줄기가 이곳이다.
그 강가로 병풍처럼 늘어선 깎아지른 절벽들이 오색찬란한 단풍으로
울긋불긋 단장을 하고 우리네 길손들을 맞이한다.
그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 산에 오르기도 전에 흐물흐물 취해간다.
이 절경을 보려고 전국 각지에서 참으로 많이도 왔다.
청량산 입구 팻말이 보이는 도로에 오니 관광버스들이
장사진(長蛇陣)을 치고 늘어서서 순서를 기다린다.
경북 봉화군 명호면에 위치한 청량산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져
"소금강"이라고 불리어지는 명산이다.
태백산(太白山)지류인 일월산에서
서남쪽 24km 지점에 솟구쳐 최고봉인 의상봉을 비롯해
보살봉, 금탑봉, 연화봉, 축융봉 등 12개의 암봉이 있고
봉마다 대가 있으며 자락에는 8개굴과 4개 약수가 있다.
우리들이 차에서 하차하여 등산이 시작 된 곳은 청량사로 들어가는
일주문이 있는 곳에서부터였다.
청량사는 신라 문무왕 3년(663년) 원효대사가 처음 기틀을 잡았다.
그때의 이름은 연대사였다. 번성기 때는 망선암 등 27개의 절과
암자를 관리하였을 만큼 규모가 컸다고 전해진다.
법당인 유리보전은 근래에 건축된 건물이나 지방문화재 47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판인 『유리보전』은 공민왕의 친필이다.
산은 가파르고 험준하다. 바위가 특이하다 편마암으로 이루어져서
층암, 암봉-암릉의 산이다. 수백만 년 전에 이곳은 바다 속이었다
진흙 속에 동글한 바다잡석들이 섞여 들어가 바닷물의
압력에 의해 바위가 되었고 그 거대 암반들이 지반의 이동으로
수 10만년에 걸쳐서 밀려 올라가 오늘의 바위 봉우리가 된 것이다.
마치 콘크리트를 친것 같은 바위 모양이 진안 마이산의 바위들과 똑같다.
이렇게 되는 동안 파도에 의해
깎여 나간 자리가 층층 테라스를 이루었고 낮은 테라스에서
한 단계 높은 테라스로 이동하려면 그 경사도는 45도에 육박하는 급사면이 된다.
그러면 다시 능선이 되거나 층암위의 또 다른 테라스가 되거나 한다.
또 지반이 빌려 올라가면서 틈새가 생긴 것이 동굴이다.
그래서 청량산 주위는 신라시대 철인(哲人) 김생이
10여 년 동안 수도생활 하며 글씨공부를 했다는 김생 굴, 원효대사가
팠다는 원효 샘 등 8개굴과 4개 약수터. 신선과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바둑과 노래 그리고 춤을 즐긴다는
신선대, 선녀봉, 의상대사가 수도한 의상대 등의 볼거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또 이렇게 험준한 지세 때문에 공민왕이 1361년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 쌓은 청량산성이 있어 산행의 다채로움을 더해준다.
절 약수터에서 목을 축기고 가파른 길을 조금 오르니
9층 석탑이 절벽 끝에 서 있다. 불자들이 그 석탑에 대고 소원을 빈다.
탑이란 것이 본시
그 탑을 돌면서 자신이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행하고 있는지를
돌아보며 참회하고 참회하여 새사람이 되어 새 운수를 여는 수도장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복을 달라고 기도하여 복이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마음 한 점 고쳐서 스스로 마련하는 것이
참다운 구복(求福)이 아닐런가? 싶다. 그래서 소원을 빈다고 표현 하지 않던가?
45도 급경사 길을 철다리에 의지하여 오르고 또 오르니
연적봉 좌측 능선에 도착 했다. 능선 길을 오르락내리락 가다보니
최근에 완공을 하였다는 하늘다리에 도착 했다. 대둔산 등에도 하늘
다리가 있지만 국내에서 가장 긴 90m 다리라 한다.
봉우리와 봉우리를 이어놓은 하늘다리!
싱그러운 가을바람이 발아래에서 시원하게 불어와
정말 축지법을 하며 하늘을 나는 듯이 건너갔다.
가운데 몇m는 투명으로 만들어 까마득한 절벽 아래를 볼 수 있게 해 놓아서
더욱 스릴이 넘친다.
주봉 장인봉을 오르기 위해 또 한 차려 골자기로 내려갔다가 80도
가까운 절벽에 설치한 철 계단을 오르니 드디어 정상에 다다랐다.
장인봉 해발870m 북쪽으로는 봉화군 남쪽으로는 안동시와 영양군이
내려다보인다. 영양군과 안동시 사이에 안동호가 있으며 안동호
상류에 도산 서원이 있다.
이퇴계가 세계학계가 주목하는 성리학의 대학자로 학문의 깊이를
더하며 후학을 가르쳤던 도산서원은 청량산 옆 낙동강 물길을 따라
얼마 안가면 나온다. 퇴계와 청량산은 관계가 깊다.
자신이 "청량산 육육봉이 아는 이 나와 백구"라고 읊었던 청량산에서
소시적 그는 수학을 했고 자신의 호중의 하나에 청량산인이라는 것도 있다.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조정에서는 나라에 공을 세운 그의 선조 어느 분에게
청량산일대를 봉하였다는 얘기도 전한다.
즉 청량산은 퇴계가문의 산이라는 이야기다. 도산서원에 거주하며
후학을 가르치는 그에게 누군가 물었던 모양이다.
"옛 사람으로 산을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이름난 산을 얻어서 스스로 의탁하였거늘
이제 그대는 청량산에 거하지 않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자
여기에 대해서 퇴계는 청량은 깎아진 듯 만 길을 서 있고
위태롭게 절학을 다다랐는 만큼 늙고 병든 이로서는 편히 있을 수 없었고
또는 메(산)를 사랑하고 물을 사랑함에는 이제 낙천이 청량을 지나치긴 하나
그 산중에서는 물이 보이지 않더구먼. 나도 청량에 거하고파 하는 소원이야 없지 않겠으나
청량산을 뒤에다 미루고는 이곳을 먼저 함은
대체 산수를 겸하며 늙고 병든 몸을 편안하게 함이었네라고 대답했다.
퇴계가 청량산을 두고 한 이 말은 청량산의 특징을 잘 표현해준 말이다.
청량산은 깎아진 듯한 암 봉들이 육육봉(12개봉)이나 되지만 물이 적은 산이다.
물론 산 옆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지만 정작 산 자체는 메마른 산이라 젊다면 모르되
늙은 몸으로는 도산서원이 있는 도산이 오히려 살기에 좋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청량산을 멀리서 바라보는 퇴계의 눈은 항상 청량산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다음 시로 알 수 있다. 그의 "산을 바라보며"라는 시에는
"어느 곳을 가더라도 구름 메(산) 없으리오,
청량산 육육봉이 경개 더욱 맑노매라,
읍청정 이 정자에서 날마다 바라보니, 맑은 기운 하도 하여,
사람 뼈에 사무치네."라며
청량산을 읊고 있는 것만 봐도
그가 청량산을 보는 눈은 변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고: 이 가원저 "퇴계시 역주")
그렇다 영남은 본시 유학(儒學)의 고장이다
동유(東儒) 안동 서유(西儒) 함양이라 했다.
퇴계학파는 배웠으면 국가를 위해 써야 한다고 하여 벼슬길에 나섰고
남명학파는(남명 조식 선생) 청빈과 결백을 주장 하여 선비정신을 고수 하였다.
출세하여 권세하기를 바라지 말고
학문에 열중하여 정심(正心)수신제가(修身齊家)에 힘쓰라는 것으로서
모든 이가 정심 수신제가 하여 조상을 잘 받들고 가족봉양에
충실하면 평천하(平天下)는 저절로 된다는 것
그래서 함양에는 제각(祭閣)이 많고 서당(書堂)이 많은가 보다.
정상에서 기념사진도 찍고 힘들여 싸 짊어지고 온 도시락을 까먹었다.
그리고 능선을 타고 크고 작은 봉우리를 올랐다.
청량산의 봉우리로는 외장인봉, 선학, 연적, 자란, 금탑, 향로, 탁필등
모두 12개 봉우리를 갖고 있어 퇴계도 "청량산 66봉"이라
다 가 볼 수는 없다 했다
우리들은 탁필봉 자소봉을 올랐다.
내려다보이는 경관도 절경이려니와 그 암벽 아래로 아파트의 베란다와 같은
트라스가 형성 되어 그곳이 자연 등산로가 되어 있고
거대한 노송들이 절벽과 어울려 장관이고 그 테라스 아래는 또한 높이를 알 수 없는 기암절벽이다
그곳을 지날 때는 모르다가 돌아 나와서
보면 현기증 나는 암벽을 지나왔음을 알게 된다.
눈이 올 때는 매우 위험한 등산로이다.
1m만 벗어 나도 다시는 못 올 길로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프로 안전 난관을 만들었고 철 계단도 많이 설치 해 두었다.
하산길에 선불교의 창시자 달마도를 잘 그린다는 사람이 옛 골동품들을 모아다
진열해 두고 한방차를 팔고 있다.
옛 추억이 묻어나는 베짜는 바디/가마니 짜는 바디/다리미 등을 마주하여 사진을 찍고
내려오니 오후4시
길 가운데 우뚝 선 선바위를 살펴보며 지각의
변동으로 이 처럼 낮은 곳의 바위들이 해발 870m까지 밀어 올려졌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 하면서 주차장에 내려오니 오늘도 얼큰한 찌계와 밥과 술이 준비 되어 있다.
배불리 먹고 얼큰하게 마시고
서둘러 떠났다. 봉화군에서 서울까지 먼 길이기 때문이다.
청량산을 돌아 흐르는 낙동강 맑은 물과 그 물길을 따라
기암절벽 빼어난 풍광이 수 십리 늘어서서 한양에서 찾아 준 길손들을 배웅한다.
그 아름다운 계곡을 빠져 나오니 석양에 해 떨어지고 어둑어둑
땅거미드니 버스 안에 파리약을 뿌린 듯 모두가 눈 꺼플이 천근이다
바쁘고 피곤한 일상에서 이리 사간을 내어 참석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각박한 도회지 생활에서 운동량이 부족했다가
험한 산길을 장시간 산행 한다는 것이 그리 녹녹치 만은 않았을 터
게다가 산행 후마신 술이 더욱 노곤하게 한다.
두 시간을 그리 달리다 몇몇 사람들의 요청으로 노래방이 열렸다.
역시 너나 할 것 없이 잘도 논다.
필자도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옛 추억을 더듬어 불렀다.
서울에 도착하니 10시다. 예상보다 빨랐다.
1급 기사님의 덕택이다.막히지 않는 길을 잘도 빠져왔기 때문이다.
같은 향우이기 때문에 언제나 자기 일처럼 음식준비도 해주고
자질구레한 일들을 자진해서 해주심에 우리들은 매양 고맙다.
오늘도 수고해 주신 임원진들에게 감사드리며
그 험한 길을 사고 없이 무사히 끝낼 수 있도록
협력해 주신 모든 향우에게 감사드리며
이번에 참여 하지 못한 향우님들도
이 후기 글 통해 함께 즐기시기를 바라며 후기 글을 마칩니다.
2009. 10. 20
-- 南村 서 호원 書--
끝까지 읽어 주시니 감사합니다. -- 南村
'남촌의 글밭 - 詩.書.畵 > 南村先生 詩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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