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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에서도 유락가로 유명한 기온(祇園)의 복판에 임제종 사찰인
겐닌지(建仁寺)가 있다. 흰 분칠의 마이코가 또각또각 걸어가는
이 거리에 선종의 기품 높은 사찰이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성(聖)과 속(俗)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 듯도 하다.
나는 교토에 들를 때마다 겐닌지 경내를 서성거리고는 해 왔다.
성스러운 것을 추구한다면서 속된 흥미를 만족시키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이 사찰에 우리나라 책이 많다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사찰들이 한적을 많이 지니고 있다. 곧, 교토의
고잔지(高山寺), 도후쿠지(東福寺), 난젠지(南禪寺), 지샤쿠인(智積院),
나고야의 신부쿠지(眞福寺), 닛코의 린노지(輪王寺) 지겐인(慈眼院) 등
과 마찬가지로 겐닌지에도 내전과 외전이 대단히 많다.
교토 시시가다니의 호넨인(法然院)을 부흥한 닌쵸(忍澂 1645-1711)가 1706년부터 1710년에 걸쳐 『일체경음의』를 겐닌지 소장 고려판과 교합하고, 그것이 1737년에 제자들에 의해 간행된 것은 유명한 일이다. 닌쵸의 『일체경음의』 교합 작업은 일본의 교감학과 고전연구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겐닌지의 탑두(塔頭, 본사에 속하는 작은 절)인 료소쿠인(兩足院)은 특히 송판본 8부, 원판본 3부를 비롯하여 명판본, 조선판본, 일본 오산판본, 조선통신사 자료 등 모두 2800부나 지니고 있어서, 세계 동양학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7년 전부터는 일본의 서지학자, 중국학자, 국문학자들이 그 한적을 조사해 왔다. 작업에 참여하고 계신 후지모토 유키오 선생님 말씀에 의하면 보고서가 곧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조사 광경을 꼭 보고 싶었기에, 무척 아쉬웠다.
그런데 지난해부터 나는 별도의 이유에서 료소쿠인 묘역을 관람하고 싶어해 왔다. 선인들의 자찬 묘비와 묘지에 대한 공부를 하던 2009년 1월에, 교토대학 김문경 교수로부터 료소쿠인에 상인의 묘비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 묘비를 꼭 가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과문인지 모르지만 고려, 조선시대에는 상인의 묘비가 없었다. 2009년 12월의 한문학회에서 박경남 씨도 명나라 말 왕세정이 상인 및 상인 처를 위해 작성한 묘도문자에 대해 보고하면서, 우리나라에는 상인의 묘비가 없다고 언급했다. 우견과 일치했다. 그렇다면 일본에는 상인의 묘비가 얼마나 존재하는가, 이것이 궁금해졌던 것이다.
금년 6월 7일 교토에서 열리는 고 시라카와 시즈카(白川靜) 탄신 1백주년 기념행사에 초청된 김에, 하루 먼저 교토로 가서 료소쿠인을 참관하기로 했다. 정례의 배관일(拜觀日)이 아닌데다가 신청을 미리 한 것도 아니었지만, 요시무라 히로미치 교수의 도움으로 참관 허락을 받았다.
겐닌지는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미나모토 노요리이에(源頼家)가 일본 연호로 겐닌(建仁) 2년에 해당하는 1202년에 토지를 기증하고 민난 에이사이(明菴榮西, 1141-1215)를 개산(開山, 사원 창설의 승려)으로 삼아 송나라 백장산(百丈山)을 모방해서 만든 절이다. 원호(연호)를 사찰의 호로 삼았다. 무로마치 시대에 교토 고잔(五山, 정부가 주지를 임명하는 선종의 최고 지위에 있는 다섯 사찰)의 하나로 되었고, 에도시대에도 막부에 의해 보호를 받았다.
한편 료소쿠인은 류잔 돗켄(龍山得見, 1284-1358)이 사찰을 열었다. 그는 22세 되던 1305년에 원나라 천동산(天童山) 동림사에서 수행하다가 66세 되던 1349년에 귀국했다. 이때 매처학자(梅妻鶴子) 고사로 유명한 임화정(林和靖, 임포(林逋))의 자손이라는 일족을 데려왔다. 이 임씨가 일본 만두집의 시조가 되었는데, 대대로 료소쿠인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 료소쿠인(兩足院) 묘비
정원 뜰의 도비이시를 밟고 사찰의 뒤로 돌아갔다. 묘역은 크지 않았으나, 납골묘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동쪽 벽 부근에서 붉은 빛이 도는 사석의 묘비를 발견했다. 앞면에 카르티슈처럼 윤곽을 만든 속에 ‘나파우열행재선부군지묘(那波友悅幸齋先府君之墓)’와 ‘감예묘열유인진전씨지묘(感譽妙悅孺人津田氏之墓)’의 글자가 도드라져 있었다. 옆면과 뒷면에는 1693년에 묘주(墓主)의 아들이 작성한 비문 「선고비이군묘갈명병서(先考妣二君墓碣銘幷敍)」가 새겨져 있었으나, 뒷면 아랫부분은 깨어져 땅에 흩어져 있었다.
요시무라 교수와 둘이서 땡볕을 목덜미에 받으면서, 조각을 맞추어보기도 하고 판독 안 되는 부분은 토론하면서 비문을 읽었다. 이렇게 해서 김문경 교수가 소개한 비문 문장에서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의심 가던 문구를 수정했다.
이 묘비가 있는 부근의 무덤들은 대개 나와씨(那波氏)의 것이었다. 나와씨는 사무라이 가문이되, 고베 히메지에 근거지를 두었던 나와씨는 에도 시대 교토의 상인으로서 성공했다. 그들은 료소쿠인을 후원했다. 일대의 무덤들은 풍상을 겪고 이끼가 붙어 음산하면서도 신묘한 느낌을 주었다. 더구나 성묘하러 오는 사람들이 없는 듯, 연고자가 없는 묘로 취급되어 곧 다른 곳에 별치하겠다는 알림 글이 부근에 세워져 있었다.
나바유에츠(那波友悅)는 후지와라세이카(藤原惺窩)의 고제 나바갓쇼(那波活所, 1595−1648)의 숙부이되, 그 자신은 유학자가 아니었다. 이에 대해서는 미우라 도시아키(三浦俊明)라는 분의 연구에 밝혀져 있다. 하지만 그의 아들 나바유요(那波祐予)가 적은 「선고비이군묘갈명병서」에는 그가 상인이었다는 언급이 없다.
나바유요는 양친의 묘갈명에서, 부친이 돌아가신 후 모친이 낙발하여 비구니가 되었다가 다시 환속해 정절을 지키면서 5남 2녀를 키운 이야기, 모친이 돌아가신 후 양친의 유골이 교토의 혼간지(本願寺)와 죠젠지(淨善寺)에 흩어져 있던 것을 료소쿠인에 합장하고 비를 세운 이야기를 적었다.
그 묘갈명에서 나바유에츠가 정직한 경영을 했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표현을 굳이 들자면,“當時以直見稱推(당시이직견칭추), 雖不學先聖道(수불학선성도), 自應似子夏語矣(자응사자하어의)”라는 문장을 꼽을 수 있다. “그 때에 올곧음으로 칭송되고 추대되었으니, 비록 선성(공자)의 도를 공부하지는 않았지만 응당 자하의 말과 같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자하의 말과 같았다는 것은 『논어』 「학이」편의 현현역색(賢賢易色)장을 염두에 둔 듯하다. 곧, 자하는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꿔 하며, 부모를 섬기되 능히 그 힘을 다하며, 군주를 섬기되 능히 그 몸을 바치며, 붕우와 더불어 사귀되 말함에 성실함이 있으면, 비록 배우지 않았다고 할지라도 나는 반드시 그를 배웠다고 이르겠다”라고 했다. 김문경 교수의 자료에는 자하(子夏)가 자척(子隻)으로 되어 있으나, 그러면 뜻이 통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에 상인들의 한문 묘비가 많이 작성되었다. 그러나 에도 상인의 묘비로서 한문으로 작성된 예는 나바유에츠의 묘비가 유일한 듯하다. 기왕의 다른 학자들이 밝혔듯이, 명나라는 상업 국가였으므로 상인의 삶을 존중하고 상인 묘주를 위한 묘비나 묘지를 작성하는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업이 그토록 발달했다고 하는 에도 시대에 상인의 묘비가 드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금년 6월의 답사는 또 하나의 숙제를 품게 만들었다.
조선시대에 상인의 묘비나 묘지가 제작된 사실은 아직 확인할 수 없으나, 19세기 초에 환관의 비갈이 존재했던 것은 분명하다. 여항문인 임광택(林光澤)의 『쌍백당유고(雙柏堂遺稿)』에 「환시비갈설(宦侍碑碣說)」이라는 글이 존재하여 그 사실을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에 환관도 묘갈을 만들었다면, 묘도문자와 관련하여 아무 금령이 없었던 것인지, 의문이 든다.
한자문화권이란 말은 중세적 보편성을 연상케 만들지만, 한자문화권 내에서 한국과 중국, 일본의 이른바 중세는 역사문화가 매우 달랐다. 선인들의 자찬 묘비와 묘지를 정리하여 『내면기행』을 출판하고 선인들의 자서전을 정리하여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간행하면서, 나는 우리 선인들이 계층과 종파에 관계없이 자반(自反)을 진정으로 실천하고자 한 점에서 매우 독특한 문화를 형성한 사실을 깨달았다. 고전의 가르침을 체득(體得)하고 본래성을 육화(肉化)하고자 한 점에서 선인들은 중국이나 일본의 지식인들과 매우 다르다. 그 삶과 그 사색은 숭고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오늘의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바로 이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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