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도학자 갈암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1. 6. 27. 23:06

고전의 향기 - 백 일흔 두 번째 이야기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지향한 도학자

2011. 6. 27. (월)

  호(號)는 대개 그 사람의 삶의 지향을 나타내는데, 호가 그 사람의 삶을 은연중에 결정하는 경우도 있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은 도학자로서는 퍽 의외로 무장(武將)인 촉한(蜀漢)의 승상 제갈공명(諸葛孔明)을 평생토록 존모하였다. 그의 호 갈암이 이미 제갈공명을 지향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거니와 그가 함경도 종성(鍾城)에서 이배(移配)되어 72세 때 섬진강 가에 우거한 마을이 갈은리(葛隱里), 즉 ‘갈암이 은거하는 마을’이었다니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영해(寧海)의 북쪽은 땅이 관동(關東)과 경계가 잇닿아 있고 그 속현(屬縣) 영양(英陽)은 부(府)와의 거리가 서쪽으로 80리이다. 이 영양에서 동북쪽으로 40리 거리에 마을이 있으니, 수비(首比)이다. 산봉우리들이 밖을 에워쌌고 지형은 평평하면서도 안쪽이 드넓어 사방으로부터 이 마을로 들어오자면 모두 매우 험준한 산을 넘어서 가파른 길을 수십 리 지나야 한다. 그렇지만 이 마을에 막상 이르면 시야가 후련히 툭 트이고 지세가 드넓어서 사람의 정신이 상쾌해진다.
  토질은 뽕과 삼, 오곡이 잘 자라며, 벼랑과 골짜기를 따라서 나무들은 더욱 늙었고 바위들은 더욱 기이하며, 바위틈으로 흐르는 물이 맑고 얕아서 사랑스럽다. 그러나 지세가 높아서 매서운 바람과 떠다니는 구름이 많은 탓에 서리가 비교적 일찍 내려 겨울이 오기도 전에 날씨가 춥다. 그래서 평소 산림에 은둔할 뜻이 있어 추위와 고생을 꺼리지 않는 사람이 아니면 이 지역에 오래 살고 편안히 머물 수 없다.
  계사년(1653), 내가 아버님을 따라 이곳에 와서 은거하면서 초당을 짓고 ‘갈암(葛庵)’이란 편액을 걸었더니, 어떤 사람이 찾아와 내게 물었다.
  “그대가 사는 곳은 오른쪽은 산이요 왼쪽은 물이라 골짜기는 빼어나고 산은 빛나서 아침저녁으로 풍광이 다르게 바뀌며, 소용돌이쳐서 고이고 휘돌아 물살이 일어서 물의 흐름과 울리는 소리가 공교한 운치를 바친다. 수목으로는 단풍나무ㆍ삼나무ㆍ가래나무ㆍ옻나무 등 좋은 나무들이 많고 풀로는 지초(芝草)ㆍ복령(茯苓)ㆍ삼(蔘)ㆍ백출(白朮) 등 기이한 풀들이 있으며, 심지어 시렁과 벽에는 볼만한 도서(圖書)들로 가득하여 모두 빼어난 경치를 잘 표현하고 그대의 호(號)를 충분히 빛낼 수 있다. 그런데 그대는 이러한 것들을 모두 버리고 오직 ‘칡[葛]’을 취하였으니, 칡의 좋은 의의가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응답하였다.
  “진실로 그렇지만 여기에는 까닭이 있다. 나는 세상에서 자기 사는 곳에 이름을 붙이는 이들이 겉치레에만 치중하고 실질을 중시하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겨왔다. 지금 나는 사실 자체를 두고 그 실상대로 이름을 붙였다. 칡이란 물건을 보면 재질은 질기고 깨끗하며 마디는 길고 부드러워서, 꼬아서 새끼를 만들 수도 있고 짜서 베를 만들 수도 있으며 두건을 만들기에도 좋고 신발을 만들기에도 좋다. 그래서 《시경(詩經)》에서 읊어지고 《예기(禮記)》에 실렸으며 기타 옛 전적들에서 곳곳마다 보이니, 사람에게 쓰여진 지가 이미 오래이다. 이제 내가 칡으로 만든 갈건(葛巾)으로 술을 거르고, 칡으로 만든 신발로 서리를 밟으며, 칡으로 만든 베를 몸에 걸침으로써 더위를 막고, 칡으로 만든 줄로 지붕을 얽어맴으로써 비바람에 대비한다. 그리고 기타 짜고 엮고 동여매고 묶는 도구도 모두 이 칡으로 만들 수 있으니, 칡이 하는 일이 매우 많다. 이로써 나의 일용(日用)이 넉넉하고 나의 분수대로 살며 남에게 도움을 바라지 않고 순박한 천성을 지키며 그럭저럭 자족할 뿐이니, 이런 상태를 극도로 미루어 간다면 아마도 갈천씨(葛天氏)1)의 무리일 것이다. 그래서 나의 집 이름을 삼고 싶은 것으로는 그 의의가 칡[葛]보다 더 큰 것이 없다. 내가 이 때문에 다른 좋은 것들을 다 젖혀두고 이 칡을 취하였던 것이다.”
  그 사람이 말하였다.
  “그대는 의도가 있을 것이다. 옛날 주부자(朱夫子)께서 여산(廬山)의 폭포 아래에서 와룡담(臥龍潭)을 발견하고 그 곁에 와룡암(臥龍菴)이란 초가집을 짓고는 그 집 이름이 와룡(臥龍)이라는 이유로 제갈무후(諸葛武侯)의 사당을 모셨으니, 이름에 따라 의의를 담는 것은 이미 옛날부터 있었다. 이제 집 이름을 갈암(葛庵)이라 했으니 어찌 무후(武侯)의 유상(遺像)을 구해서 벽에 그려둠으로써 그대의 아득한 고인(古人)에 대한 회포2)를 부쳐보지 않는가?”
  내가 대답하였다.
  “진실로 그렇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만한 근거를 상고할 수 없었는데 그대가 말해주니 나의 마음에 썩 부합된다. 삼가 말씀대로 해 보겠다.”
  그 사람이 떠나고, 이어 대화를 서술하여 기(記)로 삼는다.
  무술년 맹추(孟秋)에 안릉(安陵) 이현일(李玄逸)은 기(記)를 쓴다.


1) 갈천씨(葛天氏) : 전설상 상고(上古)의 제왕이다. 이 시대에는 풍속이 순박하여 백성들이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다 한다. 도연명(陶淵明)의 〈오류선생전(五柳先生傳)〉에 “무회씨의 백성인가, 갈천씨의 백성인가?[無懷氏之民歟 葛天氏之民歟]” 하였다. 《古文眞寶 後集 卷2》
2) 아득한 고인(古人)에 대한 회포 : 제갈공명을 흠모하는 마음이다. 주자(朱子)가 제갈량을 흠모하는 뜻을 담아 읊은 와룡암무후사(臥龍菴武侯祠)란 시에 “포슬음(抱膝吟)을 한번 길게 부르노니, 정신으로 사귐을 아득한 고인에게 부치노라.[抱膝一長吟 神交付冥漠]”이라 하였다. 포슬음은 제갈량이 출사(出仕)하기 전 융중(隆中)에 은거할 때 즐겨 불렀다는 노래로, 고사(高士)의 울울한 심회가 담겨 있다고 한다.

 

 

[寧之北, 土與關東界, 屬縣英陽, 去府西八十里. 其東北四十里, 有坊曰首比. 群峯外匝, 平陸中寬, 從四面而入, 皆歷重艱履側徑, 崎嶇數十里, 旣至則豁然開曠, 使人神觀蕭爽. 地宜桑麻五穀, 緣崖傍壑, 樹益老石益奇, 水行巖隙, 淸淺可愛. 然地勢處高, 多洌風飛雲, 雪霜先集, 不冬而慄. 自非雅意林巒, 不憚寒苦者, 不可久也安也. 歲癸巳, 余從家君避地而家焉, 因作草堂其間, 榜曰葛庵. 客或難余曰, “子之居, 右山左水, 谷秀岑光, 朝暮異變, 逆溜回瀾, 流戛獻巧, 木有楓杉梓添之饒, 草有芝苓參朮之異, 至於盈架之實․滿壁之觀, 皆足以侈其勝․榮其號. 子皆棄而違之, 唯葛是取焉, 葛之義何居?” 余應之曰, “固也, 其有說矣. 吾病世之名居者, 以文不以實, 今吾卽事而名其實也. 葛之爲物, 材韌而潔, 節誕而柔, 可綯以索, 可績以絺, 宜巾次, 宜屨業, 詠於詩, 記於禮, 雜出於傳記, 其用尙矣. 今吾戴之以漉酒, 躡之以履霜, 表身以當暑, 縛屋以備風雨, 至他緝綴綁束之具, 皆待以成. 凡葛之事, 不一而足. 于以贍吾用, 任吾分, 而不求資於人, 懷玄抱朴, 苟焉以自足也. 推極其狀, 殆葛天氏之徒歟! 故欲名吾庵者, 義莫近於葛. 吾故違他美而取諸葛.” 客曰, “吾子其有意乎! 昔朱夫子得臥龍潭於廬山瀑布之下, 結草爲庵, 因名庵之義而祠諸葛武侯, 循名寓義, 蓋故事也. 今庵之號葛, 盍求侯遺像而繪之壁間, 以付吾君冥漠之抱耶?” 余謝曰, “固欲云云而未有稽也. 今子命之, 甚符於心. 請得敬奉焉.” 客去, 因次其說以爲記. 戊戌孟秋, 安陵李玄逸記.]

 

- 이현일(李玄逸)  <갈암기(葛庵記)> 《갈암집(葛庵集)》

 

 

 ▶ 경북 영덕에 있는 갈암 종택

[해설]

  영남의 도학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글이다. 갈암은 퇴계학파의 학맥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퇴계의 학설을 비판한 율곡의 학설을 재비판한 그의 학설은 이후 퇴계학파 학설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고, 또한 영남ㆍ기호 양대 학파의 대립에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기도 하였다.

  갈암은 계사년(1653), 27세 때 부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을 따라 경상북도 영양현(英陽縣) 수비(首比)로 가서 은거할 때 갈암이란 편액을 걸었고, 무술년(1568) 32세 때 이 글을 지었다. 그리고 59세 때인 을축년에 남악초당(南嶽草堂)을 짓고 은거할 때에도 문미(門楣)에 이 글을 내걸었으니, 이 글은 갈암의 평생의 정신적 지향을 담고 있는 것이다.

  갈암은 어릴 때부터 독서하는 여가에 병서(兵書)를 즐겨 읽었고, 15,6세 무렵에는 단풍나무를 꺾어서 깃발을 만들고 아이들을 지휘해 제갈공명의 팔진도(八陣圖)를 펼쳤다고 하니, 어릴 때부터 제갈공명을 매우 좋아했음을 알 수 있다. 갈암이 이렇게 제갈공명을 좋아하게 된 것은 나이 10세 때 겪은 병자호란의 치욕이 가장 큰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보다 앞선 9세 때 그는, “장수가 되어 오랑캐를 소탕하고 요동을 수복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히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나라를 위해 심신을 다 바쳐서 죽은 뒤에야 그만둔다.[鞠躬盡瘁死而後已]”는 제갈공명의 <출사표(出師表)>의 구절을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다고 한다.

  위 글에서 어떤 사람이 한 말은 가설이고, 사실은 갈암 자신의 말이다. 그는 칡의 실용성에서 실질을 중시하는 학문 정신을 배우고, 무장인 제갈공명에서 국치(國恥)를 씻고자 하는 자신의 포부를 담는다는 두 가지 취지에서 갈암이란 호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갈암은 68세 때 갑술환국(甲戌換局)을 맞았는데, 그가 63세 때 올린 상소문에서 폐비 인현왕후(仁顯王后)를 별궁에 거처하게 하고 보호하라고 한 것이 반대파에게 빌미를 제공하여 69세 때 함경도 종성(鍾城)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그리고 71세 때 감형되어 호남 광양현(光陽縣)으로 이배(移配)되었다가 72세 때 섬진강 가의 갈은리(葛隱里)란 마을에 우거했다. 갈은리란 마을 이름이 갈암이 은거하는 마을이란 뜻이었으므로 사람들이 퍽 이상하게 생각했다고 하니, 칡[葛]이든 제갈(諸葛)이든, 어쨌든 갈암은 ‘갈(葛)’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이 있었던 것은 분명한 듯하다.

 

    

글쓴이 / 이상하

* 한국고전번역원 부설 고전번역교육원 교무처장
* 주요저서
- 한주 이진상의 주리론 연구, 경인문화사(2007)
- 유학적 사유와 한국문화, 다운샘(2007) 등
* 주요역서
- 읍취헌유고, 월사집, 용재집,아계유고, 석주집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