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지은 송암(松巖)은 경상도 안동(安東) 출신으로,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류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송암은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자연에 묻혀 살면서 학덕(學德)을 닦았다. 이 때문에 이황은 송암에 대해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평하였고, 류성룡은 ‘강호고사(江湖高士)’라고 칭하였다.
송암의 이 글에 나오는 ‘석서(碩鼠)’라는 말은, 생쥐와 같은 작은 쥐들보다 훨씬 더 큰 쥐를 말한다. 이 단어는 본디 『시경(詩經)』 「위풍(衛風) 석서」에 나오는 시의 제목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시에, “큰 쥐야 큰 쥐야, 내 기장을 먹지 말라. 삼 년이나 서로 알고 지냈는데, 나를 돌보아주지 않는구나. [碩鼠碩鼠 無食我黍 三歲貫女 莫我肯顧]”라고 하였다. 이 시로 인하여 후대에 이 석서라는 단어는 ‘난폭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위정자(爲政者)’나 ‘탐욕스러워서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치는 범죄자(犯罪者)’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예전 70년대 박정희의 유신 독재로 인해 아주 암울하였던 시대에 시인(詩人) 김지하(金芝河)는 「오적(五賊)」이란 시를 발표하여 당시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 시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풍자시의 백미(白眉)이다. 김지하는 이 시에서 재벌(財閥), 국회의원(國會議員), 고급공무원(高級公務員), 장성(將星), 장ㆍ차관(長次官)을 오적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을 지칭하는 모든 한자에 개견(犭)변을 넣어서 조어(造語)하였다.
김지하의 이 시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공익은 도외시한 채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자들이 ‘석서’이다. 재물을 긁어 들이기에 혈안이 된 재벌, 하는 일 없이 권세만 누리는 국회의원, 요리조리 눈치만 보면서 사리사욕만을 도모하는 고급공무원, 거들먹거릴 줄만 아는 장성, 이리저리 이권만 찾아 움직이는 장ㆍ차관이 바로 ‘석서’이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떵떵거리기만 할 줄 아는 자들, 자신의 지위에 따른 책임은 도외시한 채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방탕한 생활을 누리는 자들, 그들이 바로 우리 사회에 큰 해독을 끼치는 ‘석서’인 것이다.
석서란 놈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 위세가 대단하고, 서로 연줄로 뭉쳐져 있어서 그 생존력이 끈질기다. 그러므로 생쥐나 잡는 힘없는 고양이는 이들을 잡을 수가 없다. 석서에 맞설 만한 위세를 가진 고양이만이 이들을 잡을 수가 있다. 그 고양이가 누구인가? 바로 오늘날 가장 힘 있는 권력기관인 검찰이다. 그동안에 우리 사회는 석서를 잡는 고양이의 역할을 해야 할 검찰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여, 석서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훤하게 드러나 있는 석서만 해도 아주 많다. 재산을 도피시킨 재벌과 고위층, 청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여색을 즐긴 고위 공무원, 자신의 직분을 잊은 채 성희롱을 하여 나라 망신을 시킨 자, 큰 사건을 저질러 언론매체의 사회면 앞머리를 차지하는 자 등이 바로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석서이다. 드러나 있는 석서만 해도 이렇게 많으니, 웅크린 채 음지에 숨어있는 석서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 모든 석서 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이 있다. 그야말로 쥐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상대가 될 수 없는 ‘뉴트리아급’의 석서이다. 누구인가? 바로 요즈음 매일같이 언론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이다. 이 양반에 대해서 우리의 ‘고양이’가 드디어 칼을 뽑아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절단을 내고야 말겠다고 큰소리치면서, 떼로 몰려가서 집에다 빨간딱지를 붙이고, 값나갈 만한 것을 몰수해 왔다.
고양이의 이런 결기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끝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동안에 우리 고양이들이 해 온 작태를 보면,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만족할 줄 모르고서 곡식 훔치고, 盜粟何曾滿 옷장의 옷 자주 구멍 뚫어놓누나. 篝衣亦屢穿 못된 석서 없애치울 길이 없기에, 無由除碩鼠 내 차라리 고양이를 죄주고 싶네. 吾欲罪烏圓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해지고 나중에 영의정(領議政)까지 지낸 인물인 북저(北渚) 김류(金瑬, 1571∼1648)가 읊은 「쥐를 미워하다[憎鼠]」라는 제목의 시이다.
석서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자신의 직무에 태만하여 석서를 잡지 못할 경우, 그 고양이는 그 순간부터 고양이가 아니라 석서가 되어 버린다. 국민에게서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고양이가, 국민에게 해독만 끼치는 석서가 되는 것이다. 석서로 변한 고양이라면 국민 누구나 마음껏 비난해도 괜찮고, 심지어 몽둥이로 때려잡아도 무방하다.
쥐를 잡는다고 하면서 하찮은 잘못을 저지른 생쥐만 잡을 경우, 제아무리 많이 잡더라도 나라의 기강을 세울 수가 없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는, 큰 권력을 가지고 부정부패를 저질러, 국민의 삶에 막대한 해독을 끼친 석서를 잡아야 한다. 소악(小惡)만 잡아서는 기강을 세울 수가 없고, 거악(巨惡)을 잡아야만 기강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에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국민에게서 지탄을 받고 있던 고양이가 모처럼만에 뉴트리아급의 석서에 대해 칼을 빼 들었다. 만약에 이번에도 또 지난날의 행태를 답습하여 ‘태산명동서일필’로 끝내고 말 경우에는, 국민에게 지탄을 받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며, 몰매를 맡게 될 것이고,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석서를 잡는 고양이여, 다시 한 번 이를 유념하여,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