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쥐 못 잡는 고양이를 어디에 쓰랴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7. 29. 11:38

- 이백여든한 번째 이야기
2013년 7월 29일 (월)
쥐 못 잡는 고양이를 어디에 쓰랴
  고양이는 온몸이 쥐를 잡는 데 유용하도록 진화된 동물이다. 날카로운 눈초리, 날렵한 몸동작, 뛰어난 후각, 소름이 끼치는 울음소리, 날카로운 이빨 등, 모든 신체 기관이 쥐를 잡는 데 있어서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특화되어 있다. 이 때문에 고양이를 만난 쥐는 고양이가 한번 노려보기만 해도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꼼짝도 못한다. 고양이는 그야말로 쥐의 천적인 것이다. 이런 고양이의 기본 역할은 쥐를 잡는 데 있다. 쥐를 잡지 못하는 고양이는 고양이가 아니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쥐를 잡기 위해 고양이를 기르지는 않는다. 대부분 애완용으로 기르고 있다. 그러나 곡식 생산이 위주였던 예전 농경사회에서는 고양이를 키우는 목적이 이와 달랐다. 곡식을 훔쳐 먹는 쥐를 잡기 위해 키웠다. 고양이는 쥐를 잡는 자신의 기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사람들로부터 크게 사랑을 받았다. 농경사회를 살았던 우리의 선인(先人)들은, 자신들의 생활에 큰 이로움을 주는 고양이와 관련된 글을 종종 남겼다. 다음은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이 지은 글의 일부이다.

  우리 집은 본디 가난하여 창고에 쌓아놓은 곡식이 없기 때문에 쥐로부터 해를 당할 것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을에 추수를 마치고 곡식을 쌓아놓자, 뭇 쥐들이 갑자기 모여들어서는 벽을 뚫고 문틈을 엿보았다. 들보 위에서 시끄럽게 돌아다니거나 혹 침상에서 뛰어다니기도 하였으며, 옷을 쏠아 구멍을 뚫어놓기도 하고, 곡식을 훔쳐서 자신들의 소굴로 가져가기도 하여, 그 피해가 막심하였다.
  그런데 이놈들을 제거할 길이 없었다. 이에 이웃집에서 새끼 고양이 한 마리를 얻어 와서 잘 보살펴 주면서 길렀다. 기른 지 몇 달이 지나자 고양이는 ‘석서(碩鼠)’를 잡는 꾀가 생겨났다. 아침나절에는 담장에 있는 쥐구멍을 엿보고, 저녁나절에는 장독 사이에서 쥐를 노려보다가, 반드시 석서를 잡아 다 뜯어 먹은 다음에야 흡족해하였다. <중략>
  아, 고관(高官)이 되어 나라에서 주는 녹봉을 받아먹으면서 잘살아서 ‘고양이’의 역할을 해야 할 자들이, 나쁜 짓을 하여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는 ‘쥐새끼’들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그런 녹만 축내는 쓸모없는 고관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대개 짐승의 몸을 하고서도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으며,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도 짐승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는 법이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얼굴을 하고서도 쥐새끼 같은 짓을 하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나라에서 주는 옷을 입고 나라에서 주는 곡식을 먹으면서도 자신의 직분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자들이여, 어찌 우리 집의 고양이에게 부끄럽지 않겠는가.

家本貧, 箱庫無儲, 不患有物之害. 而西成揫穀, 則羣鼠忽集, 穿其壁, 窺其戶, 或鬧於樑, 或跳於床, 嚙衣百孔, 竊穀千穴, 害莫極焉. 除之無術, 乃丐鄰家小猫, 慈以育之. 踰數月, 有摶殺碩鼠之謀, 朝傍墻竇, 夕伺甕間, 必食盡其肉, 然後爲足. <中略>
嗚呼, 食肉於國者, 苟不除城狐社鼠, 則將焉用彼相哉? 大率獸身而人心者有之, 人面而獸心者亦有之. 世之人而鼠者多矣. 惜乎, 衣君衣食君食, 不修其職者, 寧無愧於吾猫乎.
 
- 권호문(權好文 1532∼1587), 「고양이를 기르는 데 대한 설[畜猫說]」, 『송암집(松巖集)』

              ▶ 변상벽(卞相壁)의 <묘작도(猫雀圖)>,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우리그림백가지』에서 인용

  이 글을 지은 송암(松巖)은 경상도 안동(安東) 출신으로, 이황(李滉)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같은 문하생인 류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 등과도 교분이 두터웠던 인물이다. 송암은 평생 벼슬길에 나가지 않은 채 자연에 묻혀 살면서 학덕(學德)을 닦았다. 이 때문에 이황은 송암에 대해 ‘소쇄산림지풍(瀟灑山林之風)’이 있다고 평하였고, 류성룡은 ‘강호고사(江湖高士)’라고 칭하였다.

  송암의 이 글에 나오는 ‘석서(碩鼠)’라는 말은, 생쥐와 같은 작은 쥐들보다 훨씬 더 큰 쥐를 말한다. 이 단어는 본디 『시경(詩經)』 「위풍(衛風) 석서」에 나오는 시의 제목에서 유래한 말이다. 이 시에, “큰 쥐야 큰 쥐야, 내 기장을 먹지 말라. 삼 년이나 서로 알고 지냈는데, 나를 돌보아주지 않는구나. [碩鼠碩鼠 無食我黍 三歲貫女 莫我肯顧]”라고 하였다. 이 시로 인하여 후대에 이 석서라는 단어는 ‘난폭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위정자(爲政者)’나 ‘탐욕스러워서 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치는 범죄자(犯罪者)’를 뜻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예전 70년대 박정희의 유신 독재로 인해 아주 암울하였던 시대에 시인(詩人) 김지하(金芝河)는 「오적(五賊)」이란 시를 발표하여 당시의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이 시는 그야말로 우리나라 풍자시의 백미(白眉)이다. 김지하는 이 시에서 재벌(財閥), 국회의원(國會議員), 고급공무원(高級公務員), 장성(將星), 장ㆍ차관(長次官)을 오적으로 지목하였다. 그러면서 이들을 지칭하는 모든 한자에 개견(犭)변을 넣어서 조어(造語)하였다.

  김지하의 이 시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의, 공익은 도외시한 채 사리사욕에만 눈이 먼 자들이 ‘석서’이다. 재물을 긁어 들이기에 혈안이 된 재벌, 하는 일 없이 권세만 누리는 국회의원, 요리조리 눈치만 보면서 사리사욕만을 도모하는 고급공무원, 거들먹거릴 줄만 아는 장성, 이리저리 이권만 찾아 움직이는 장ㆍ차관이 바로 ‘석서’이다.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떵떵거리기만 할 줄 아는 자들, 자신의 지위에 따른 책임은 도외시한 채 사리사욕을 채우는 자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면서 방탕한 생활을 누리는 자들, 그들이 바로 우리 사회에 큰 해독을 끼치는 ‘석서’인 것이다.

  석서란 놈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그 위세가 대단하고, 서로 연줄로 뭉쳐져 있어서 그 생존력이 끈질기다. 그러므로 생쥐나 잡는 힘없는 고양이는 이들을 잡을 수가 없다. 석서에 맞설 만한 위세를 가진 고양이만이 이들을 잡을 수가 있다. 그 고양이가 누구인가? 바로 오늘날 가장 힘 있는 권력기관인 검찰이다. 그동안에 우리 사회는 석서를 잡는 고양이의 역할을 해야 할 검찰이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하여, 석서가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훤하게 드러나 있는 석서만 해도 아주 많다. 재산을 도피시킨 재벌과 고위층, 청탁을 들어주는 대가로 여색을 즐긴 고위 공무원, 자신의 직분을 잊은 채 성희롱을 하여 나라 망신을 시킨 자, 큰 사건을 저질러 언론매체의 사회면 앞머리를 차지하는 자 등이 바로 우리 사회의 대표적인 석서이다. 드러나 있는 석서만 해도 이렇게 많으니, 웅크린 채 음지에 숨어있는 석서는 또 얼마나 많겠는가?

  이 모든 석서 중에 우두머리가 되는 사람이 있다. 그야말로 쥐의 세계에서는 누구도 상대가 될 수 없는 ‘뉴트리아급’의 석서이다. 누구인가? 바로 요즈음 매일같이 언론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인물이다. 이 양반에 대해서 우리의 ‘고양이’가 드디어 칼을 뽑아들었다. 이번에야말로 절단을 내고야 말겠다고 큰소리치면서, 떼로 몰려가서 집에다 빨간딱지를 붙이고, 값나갈 만한 것을 몰수해 왔다.

  고양이의 이런 결기에 대해서 우리 국민들은 대부분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로 끝날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동안에 우리 고양이들이 해 온 작태를 보면, 그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만족할 줄 모르고서 곡식 훔치고,       盜粟何曾滿
옷장의 옷 자주 구멍 뚫어놓누나.       篝衣亦屢穿
못된 석서 없애치울 길이 없기에,       無由除碩鼠
내 차라리 고양이를 죄주고 싶네.       吾欲罪烏圓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에 봉해지고 나중에 영의정(領議政)까지 지낸 인물인 북저(北渚) 김류(金瑬, 1571∼1648)가 읊은 「쥐를 미워하다[憎鼠]」라는 제목의 시이다.

  석서를 잡아야 할 고양이가 자신의 직무에 태만하여 석서를 잡지 못할 경우, 그 고양이는 그 순간부터 고양이가 아니라 석서가 되어 버린다. 국민에게서 박수를 받아야 마땅한 고양이가, 국민에게 해독만 끼치는 석서가 되는 것이다. 석서로 변한 고양이라면 국민 누구나 마음껏 비난해도 괜찮고, 심지어 몽둥이로 때려잡아도 무방하다.

  쥐를 잡는다고 하면서 하찮은 잘못을 저지른 생쥐만 잡을 경우, 제아무리 많이 잡더라도 나라의 기강을 세울 수가 없다. 나라의 기강을 세우기 위해서는, 큰 권력을 가지고 부정부패를 저질러, 국민의 삶에 막대한 해독을 끼친 석서를 잡아야 한다. 소악(小惡)만 잡아서는 기강을 세울 수가 없고, 거악(巨惡)을 잡아야만 기강을 세울 수가 있는 것이다.

  그동안에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국민에게서 지탄을 받고 있던 고양이가 모처럼만에 뉴트리아급의 석서에 대해 칼을 빼 들었다. 만약에 이번에도 또 지난날의 행태를 답습하여 ‘태산명동서일필’로 끝내고 말 경우에는, 국민에게 지탄을 받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며, 몰매를 맡게 될 것이고,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 석서를 잡는 고양이여, 다시 한 번 이를 유념하여, 자신의 직분에 충실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란다.


  

  
정선용 글쓴이 : 정선용
  • 한국고전번역원 수석연구위원
  • 주요저역서
    - 『외로운 밤 찬 서재서 당신 그리오』, 일빛, 2011
    -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해동역사』, 『잠곡유고』, 『학봉집』, 『청음집』, 『우복집』, 『삼탄집』,『동명집』 등 17종 70여 책 번역

'놀라운 공부 > 옛글 모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필갑에 부친 뜻  (0) 2013.08.02
부채 끝에서 떨리는 우주  (0) 2013.08.02
[스크랩] 백의민족  (0) 2013.07.25
[스크랩] 윷놀이  (0) 2013.07.25
[스크랩] 삼재  (0) 2013.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