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필갑에 부친 뜻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8. 2. 12:01

- 이백열여섯 번째 이야기
2013년 8월 1일 (목)
필갑에 부친 뜻
배는 얕아서 쉽게 차고, 입은 넓어서 숨길 것이 없네
안팎이 반듯하고 곧으니, 군자가 가까이 두는 까닭이네

腹淺易盈 口闊無隱 外方內廉 君子所近
복천이영 구활무은 외방내렴 군자소근

- 송익필(宋翼弼, 1534~1599)
 「필갑명(筆匣銘)」
 『구봉집(龜峯集)』권3

 

  
  옛 선비들은 일상생활에서 늘 가까이 두고 소중히 여기는 기물(器物)에다 자신의 평소 뜻을 새겨서 경계하고 다짐하는 징표로 삼았습니다. 윗글은 조선 중기의 문인 구봉(龜峯) 송익필이 붓통인 필갑에 새긴 글입니다.

  필갑은 주로 돌아다닐 때 필묵을 간편하게 소지할 수 있도록 만든 필통입니다. 필갑의 모양은 높이가 나지막하여 많이 넣을 수 없고 호리병과 달리 입구가 넓어 뚜껑만 열면 그 안을 한눈에 볼 수 있습니다.

  구봉은 신분의 제약으로 벼슬길에 나아가지 못하고 평생을 독서와 시문 짓는 일로 보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죄에 연루되어 사노(私奴)로 전락하고, 체포령을 피해 도망 다니는 등 불운한 신세를 면치 못하였으니, 그에게 필갑은 어느 무엇보다 소중한 물품이었을 것입니다.

  옛글에는 ‘작은 그릇은 쉽게 찬다[小器易盈]’는 구절이 종종 나오는데, 이 말은 국량(局量능력)이 작아 큰일을 못 한다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나 구봉은 오히려 분수에 넘치는 욕심에 대한 경계로 삼았습니다. ‘우환은 부족한 데 있지 않고 너무 많은 데 있다. [患不在不足而在於多]’는 것이 구봉의 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숨김이 없다[無隱]는 말은 『논어』 「술이(述而)」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내가 숨기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나는 너희에게 숨기는 것이 없다. [二三子 以我爲隱乎 吾無隱乎爾]”고 말한 데서 나오는 말로, 군자는 소소한 언동에서도 부끄러울 것이 없고 따라서 아무 숨길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외방내렴(外方內廉)은, 안팎이 네모반듯하고 곧다는 뜻이니, 『주역』 「곤괘(坤卦) 문언(文言)」에 “군자는 경으로 마음을 곧게 하고, 의로 일을 바르게 하니, 경과 의가 확립되면 덕이 외롭지 않다. [君子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義立而德不孤]”고 하였습니다.

  구봉의 일생은 파란만장하였지만, 당대 팔문장(八文章)의 일인으로 우뚝 이름을 남겼고, 이이(李珥), 성혼(成渾) 등 당대 대학자들이 그와 평생 변함없는 교분을 맺었습니다. 또한 김장생(金長生), 정엽(鄭曄) 등 쟁쟁한 학자들이 그를 찾아가서 스승으로 모시고 가르침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천운(天運)을 따라 분수를 편안히 여긴 겸허한 자세가 오히려 자신의 재능과 학덕을 다 발휘하고 온전한 삶을 지켜내게 한 근간이 되었던 것입니다.

 

글쓴이 : 오세옥(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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