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공부/옛글 모음

부채 끝에서 떨리는 우주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8. 2. 11:55

- 예순네 번째 이야기
2013년 7월 31일 (수)
부채 끝에서 떨리는 우주

에어컨 없이 대도시에서 여름나기

  참 끔찍한 가상이다. 후끈 달아오른 아스팔트와 자동차, 빽빽한 콘크리트건물들이 내뿜는 열기를 어떻게 감당할까. 게다가 잠 못 자게 들볶아대는 열대야는 무슨 수로 넘기고. 폭염이 계속되는 한여름 날, 도시는 하나의 표독스런 섬으로 돌변한다. 그 열섬 현상을 건너가자면 에어컨은 필수다. 사막의 낙타인 셈이니까.

  나무그늘 아래 대청마루에서 여름을 나던 옛사람들은 부채만으로도 너끈했다. 부채는 오랫동안 여름 생필품이었다. 오죽했으면 하로동선(夏爐冬扇)이라는 역설적 표현이 나왔을까. 그토록 가까이하던 물건이지만 철이 뒤바뀌면 어느새 쓸모가 없어져 천덕꾸러기가 돼버린다. 그게 어디 부채나 난로뿐이겠는가. 사람도 그런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생활환경이 변해 이제는 여름 부채마저도 거의 쓸모없는 물건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해마다 여름이면 서재에 어김없이 여러 개의 부채를 꺼내놓는다. 대나무나 연꽃잎, 초충도가 그려진 부채들이다. 부채들은 친분 있는 묵객들에게 술을 사주고 틈틈이 받아놓은 것들이다. 서재에서 글을 쓰거나 독서할 때, 삼베바지를 입고 부채질을 하노라면 솔바람 부는 전원에 나와 있는 기분이다. 서울 도심에서 살 수밖에 없는 얼치기 자연주의자의 애달픈 자기최면이다. 에어컨과 선풍기를 적절히 사용하는 건 물론이다.

  부채 가운데 특별히 아껴서 좀처럼 꺼내놓지 않고 모셔놓다시피 하는 게 있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의 철학사상이 적힌 전주 합죽선인데, 서예가 효봉 여태명 교수가 휘호했다.


 

담일청허자 종역불산(湛一淸虛者終亦不散)

  담일청허자는 존재의 근원이 되는 기(氣)다. 맑고 깊어서 비어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기운은 끝내 흩어지지 않는다. 기운이 모이면 사물이 되고 흩어지면 담일청허자로 돌아간다. 형상은 없어졌지만, 본질적 요소는 사라지는 게 아니다. 다만 모이고 흩어짐을 반복할 뿐이다. 모든 존재의 생성과 소멸은 그 작용이다.

만물은 오고와도 다 오지 않나니
옴이 가까스로 다한 곳에 또 쫓아오네
오고 또 옴은 본래 시작 없음으로부터 오나니
묻노라, 그대는 처음에 어디에서 왔느뇨

만물은 가고가도 다 가지 않나니
감이 가까스로 다한 곳에 아직 가지 않았네
가고 또 가서 끝까지 가도 감은 마치지 않나니
묻노라, 그대는 마침내 어디로 돌아가느뇨

有物來來不盡來
來纔盡處又從來
來來本自來無始
爲問君初何所來

有物歸歸不盡歸
歸纔盡處未曾歸
歸歸到底歸無了
爲問君從何所歸

  화담 서경덕의 ‘유물(有物)’이라는 시(詩)다. 화담은 한국철학사상사에서 매우 독보적인 사상가다. 퇴계와 율곡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인데 다른 성리학자들이 이르지 못한 경계가 있다. 그는 고리타분한 이기론(理氣論)에 매몰되지 않은 철학자다. 자고로 철학은 존재하는 만물의 원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왔는데 화담은 일생동안 그 문제에 천착했다. 개성 화담 고을에서 칩거하며 자연과 사물을 오랫동안 관찰하고 궁구했다. 그리하여 “많은 성인이 전할 수 없었던 미묘한 종지를 비로소 엿보아 깨쳤다”고 자부하기에 이르렀다. 인물평에 일가견이 있던 율곡은 “화담에게는 자득지묘(自得之妙)가 있다”고 했다. 스스로 깨달아 알아낸 묘리란 존재의 근원과 이치다.

  화담에게 존재와 무(無)는 하나의 기운이 모이고 흩어짐에 따라 형태만 바뀌는 영원한 순환구조다. 따라서 ‘무’는 ‘없음’이 아니라 허(虛), 곧 ‘비어서 보이지 않음’일 뿐이다. 이를 일기장존론(一氣長存論)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기운이 어떻게 발동하여 존재를 가능케 하는가. 갑자기 뛰어오르고 문득 열리는 순간이 그 분기점이다. 화담은 그 분기점을 ‘이지시(理之時)’라 명명하고, 그 동태를 ‘숙이약(倏而躍:갑자기 뛰어오름)’, ‘홀이벽(忽而闢:문득 열림)’이라고 언표했다.

  이쯤이면 현대물리학에서 말하는 빅뱅(big bang, 대폭발) 이론의 특이점(特異點, singularity)이 자연스럽게 연상된다. 빅뱅으로 탄생한 우주는 빅클런치(big crunch, 대붕괴)로 수렴하게 된다. 화담의 우주론과 어쩌면 이렇게도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것인지 놀랍다. 한국철학사상사에서 매우 낯설고 독특한 이 사상가는 당시까지 표현할 용어가 없어서 ‘이지시’, ‘숙이약’, ‘홀이벽’으로 만들어 언명했다. 옛 현인들이 보지 못한 경계를 넘어가 우주의 비밀을 성찰한 그의 열락(悅樂)이 어땠을까. 지성 넘어 영성을 지닌 사상가답다.

  화담의 우주론이 온축돼 있는 부채를 펼칠 때마다 그는 늘 현재성으로 살아 돌아온다. 흔히 조선의 유학을 ‘케케묵은 성리학자들의 도돌이표 노래’로 폄하하기 쉬운데 화담이 있어 새뜻해지고 영롱해진다. 차분히 앉아 부채질하면서 화담의 시문을 읽노라면 고정관념이 깨져버린다. 경쇠가 깨지고 비단이 찢기는 통쾌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삼복더위쯤은 물리치고 말 계제가 못된다. 근원을 찾아가는 사색의 숲에서 모든 형체 있는 것들은 그저 왔다가 지나갈뿐이다. 무더위도 때에 이르면 지나가고 부채 끝에는 어느덧 찬바람이 인다. 화담은 그래서 줄 없는 거문고를 예찬했다. 형체 없는 것을 즐기고, 소리 없는 음악을 들을 줄 알아야 자기만의 경계가 열리기에. 얼핏 도가(道家)나 불가(佛家)의 향훈이 배어있는 느낌이다. 그렇다고 어엿한 유가(儒家)인 그를 도가나 불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아니, 그러면 또 어떤가. 차라리 현대물리학자라고 불러주면 어떨까?

  근원을 탐색한 그는 지지(知止)의 철학자이기도 했다. 멈출 줄을 아는 것, 참으로 지혜로운 삶이다. 세상이 시끄러운 까닭의 거개가 멈추지 못한 데서 연유한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는 브레이크가 좀처럼 작동하지 않는다. NLL(북방한계선) 대화록을 두고 치닫는 여야 정치권 역시 마찬가지다. NLL도 DMZ(비무장지대)도 전쟁을 멈추고 강제로 그어놓은 차단막이다. 1953년 정전협정 이후 60년이나 품어온 차단막을 다루면서도 멈출 때를 모르니 국민들은 갑갑하기만 하다. NLL이나 DMZ를 걷어내고 통일을 이룩할 때는 언제일까.

  대저 멈출 줄을 안다는 건 행해야 할 때 행할 줄을 안다는 뜻이기도 하다. 행해야 할 때 행하고, 멈춰야 할 때 멈출 줄 알면 시의에 적중하므로 세상사에 허물이 없다. 역학(易學)에도 밝았던 화담은 『주역』 간(艮)괘의 덕성에서 ‘지지의 행동철학’을 얻었다. 간괘는 산(山)을 뜻하고 산은 멈춤의 대명사와도 같다. 멈춘 산자락이 공부하는 이들의 수행공간인 것은 너무도 맞춤하다. 멈춤은 적절한 행동을 준비하는 과정이니까.

  멈춘 것이 어디 산뿐이랴. 부채질하기 전까지 바람 또한 멈춰 있었다. 부채를 흔들기에 비로소 고요하던 바람이 인다. 바람은 내 한 몸의 더위를 식히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화담은 부채를 이렇게 읊었다. ‘장부는 뭇 생명의 열기를 씻어야 하나니 마땅히 서늘한 바람 온 나라에 퍼지라!’

 
  글쓴이 : 김종록  
  • 작가. 칼럼니스트
  • 주요저서
    - 『소설 풍수』, 나남, 1993
    - 『바이칼』, 문학동네, 2002
    -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RHK, 2005
    - 『달의 제국』, 글로세움, 2010
    - 『근대를 산책하다』, 다산초당, 2012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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