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후손으로 1895년(고종32)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고 단발령(斷髮令)이 내리자 이에 항거해 의병을 일으킨 구한말의 우국지사입니다. 1910년 8월, 일제에 의해 나라가 병탄되자 향산은 유서를 쓰고 단식 24일 만에 순국하였습니다. 원래는 대사성을 지낸 이휘준(李彙濬)의 아들인데 숙부 이휘철(李彙澈)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위의 글은 향산이 지은 친아버지 복재공 이휘준의 행록에 들어 있는 구절입니다.
복재공이 병인년(1866)에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서양의 군대가 강화도를 함락하여 민심이 흉흉해지고 피난하는 사람들이 꼬리를 물자 복재공은 임금께 아래와 같이 진언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안팎이 산하(山河)로 둘러싸여 있어서 막강한 나라입니다. 수 양제(隋煬帝)와 당 태종(唐太宗)이 온 천하의 병력을 동원하고 사해의 재물을 다 쏟아부었으나 고구려 한 성(城)의 전투력을 당해 내지 못하여 천하 후세에 비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 비록 태평세월이 오래되어 백성들이 전쟁을 모르지만, 저들은 숫자가 적고 우리는 많으며 저들은 사악하고 우리는 정의로우니, 많은 수로 적은 수를 제압하고 정의로 사악함을 토벌한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비록 갑옷을 버리고 맨몸으로 싸우게 하더라도 안 될 일이 없을 것이니, 오로지 민심을 수습하고 충성스럽고 용맹한 이들을 격려하기를 어떤 식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150여 년 전, 한 신하의 적극적인 역사의식과 냉철한 형세판단, 그리고 국가에 대한 충정이 이 몇 줄에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이에 비해 우리는 그동안 스스로를 과소평가하고 외부 세력에 대해 너무 소극적으로 대처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릅니다. 지정학적인 관점에서 열강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다면 역으로 그 열강을 이용해 우리의 영향력을 더 키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만 모르고 있거나, 혹은 인정하지 않으려 드는 우리나라의 장점과 저력, 가능성을 깊이 인식하고 보다 지혜롭고 진취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광복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