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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체질의학은 심성학과 한의학의 만남이다

남촌선생 - 힐링캠프 2013. 8. 24. 12:25

사상체질의학은 심성학과 한의학의 만남이다

 

우주의 섭리는 미묘하여 어떠한 일이든지 일의 기미없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은 없다. 어떠한 사상이나 행동이 홀로 나온듯 하지만, 실상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해 오래 전부터 영향을 주고 받아 결과가 나온 것이다. 추운 겨울 모든 식물이 죽은듯 하여도 생명을 잉태한 씨앗이 땅속에서 다음 날을 기약하고, 여름에 무성하게 잎이 자라면 그에 만족하지 않고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 준비에 들어가는 것과 같이, 사상과 의학도 성쇠기멸을 반복하며 부단히 유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반만년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에서 문화가 발달하면서 의학도 이에 뒤질세라 발달하게 되니, 그 동안의 축적된 문화를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자랑할만한 사상체질의학이 나오게 된다.

한나라 이후 쇠퇴했던 유교가 불고,도교의 철학적 우주론을 바탕으로 의리 명분론에 입각한 신유학으로 변모되면서 주자성리학으로 집대성되니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선진 사상이었던 것이다. 주자성리학은 우주의 생성원리를 불변적 요소인 이와 가변적 요소인 기의 상호작용으로 보고, 인성과 물성이 모두 그에 의해 결정되니 선을 부양하고 악을 억제함으로써 성정을 다스려야 된다고 하는 유교철학이다. 

이것을 華를 불변의 이로 보고 오랑캐(夷)를 가변적 요소인 기로 보는 화이론과 연결되어 중화의 본질 자체는 절대로 변할 수 없다는 철저한 민족의식을 확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후일 소중화를 자처하는 우리로서는 더욱 민족적 자부심을 가질 수 있었다. 주자가 살던 남송 시대에 비록 중원을 오랑캐인 금나라에 빼앗겼지만, 이는 현상의 변화의 기의 변화로 보았고, 중원의 주인이라는 이는 불변이라는 논리가 지식인들에게 호응을 얻은 것과 같이, 고려말 우리나라가 비록 원나라에게 전쟁에서 졌지만 의식만은 그렇지 않다는 흐름과 맞물려 광범위하게 선진사상인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주자성리학을 받아들인 신진사대부들이 중세 봉건 사회를 타파하는 과정에서 군부 세력과 결탁하여 조선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개창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 퇴계 이황에 의해 이기의 상호작용식에 불변적 요소인 이 자체도 기의 작용에 감응하여 변화한다는 이기이원론이 완벽하게 이해되니 조선초부터 퇴계까지의 시대를 주자성리학이 주도하는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주자성리학이 조선의 주도 이념이 됨에 따라 민족의식이 강화되고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의학인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이 나오게 된다.

주자성리학이 퇴계에 의해 정리된 것에 힘입어 이통기국설을 주장하는 율곡 이이에 의해 조선성리학이 새롭게 전개되니, 이때부터 우리나라 성리학의 시작은 중국에서 되었지만 중국에는 없는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고유사상이 되어 발전하게 되었다. 율곡은 일찍이 금강산으로 출가하여 불교 대장경을 섭렵함으로써 주자성리학의 우주론적 철학체계의 원형인 불교철학을 근본적으로 관통한 실력을 바탕으로,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여, 이기가 서로 작용할때라 할지라도 기만이 작동하고 이는 기에 편승할 뿐이라는 기발이승설을 주장하여 만물의 성정이 기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이기일원론으로 심화시켜 놓는다.

결국 이는 만물이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인데 기만 대상에 따라 국한됨으로써 만물의 차별상이 나타난다는 주장이니, 이를 이통기국설이라 한다. 이는 주자가 아직 발명해내지 못한 심오한 학설이었고 주자성리학이 도달해야 할 궁국의 경지이기도 하였다. 어떻든 성리학의 발원지인 중국에는 없는 이런 고도의 신학설이 성리학의 발전 결과 조선에서 출현하였으니 우리의 고유사상이 된 셈이다. 따라서 이 뿌리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될 것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이로서 조선 고유색을 한껏 드러내면서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는 진경시대(숙종~정조 연간의 125년)가 열리게 된다.

진경시대 이후 사서삼경의 내용을 절대 신봉하고 이에 대한 해석 방법과 원시유학정신으로의 복고를 외치는데 있어서, 조선성리학자들은 주자의 해석을 우선으로 하는 수주자학파와 주자와 다르게 경서를 해석하는 탈주자학파로 나누어진다. 이들은 양명학자와 같이 '성(性)=이(理)'로 보는데 일치하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성리학자에 속한다. 이후 심성이 사단칠정으로 나타나는 것에 대한 해석방법을 둘러싸고 일어난 사단칠정 논쟁과 인간의 성품과 동물의 성품이 같은가 아니면 다른가에 대한 인물성동이론 논쟁이 우리나라에서 200년 넘게 진행되어 심성학 연구에 비약적인 발전이 있어왔다. 이렇게 단일 주제를 놓고 당대의 학자들이 200년간 논쟁을 벌인 일은 다른 나라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이다. 

이렇게 문화의 꽃을 피운 뒤 조선 후기에 다소 공리공담으로 흐르는 말폐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으나, 성리학의 연구 덕택에 인간의 마음을 구조적으로 분석 관찰하는 심성학적인 측면은 더욱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러한 문화적 토대에 힘입어 허준의 <동의보감>이후 더욱 축적된 의학 지식과 고도로 발달한 심성학과의 만남으로 인하여 우리나라가 전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것 중의 하나인 사상체질의학이 탄생하였다.

농업보다는 상업,공업 등이 발달하는 산업사회가 발달되고, 청나라의 앞선 문화가 도입되면서 농업중심 사회를 이끌어가려는 조선 성리학은 더 이상 사회를 지탱할 지도이념 체계가 되지 못하였다. 이에 성리학 이념 논쟁에서 승리한 노론 세력의 후예들로 명문세가의 자손이 주축을 이루고 서얼이나 중인과도 연결되어 청나라의 고증학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조선성리학을 비판하는 북학파가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천주교보다는 당시 새롭게 일고 있는 화엄학파의 변화에 연결되어 오히려 불교에 심취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는 북학파에 영향을 받는 개화파들이 천주교 신자가 아닌 불교신자가 많은 것에서도 확인된다. 성리학을 기본적으로 탈피하려는 북학파는 성리하적 이기철학의 핵심인 오행설을 부정하거나, 성을 기호로 보거나, 이학 자체를 불교영향으로 보아 부정하는 등 '성(性)=이(理)'라는 것을 부정하게 된다. 또한 경전 자체의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하여 원시유교경전을 연구하던 북학 사상가들은 성리학적 사고 방식에서 벗어나 경서를 접근하게 된다.

동무 이제마가 조선성리학의 영향을 받았느냐 아니면 북학파의 영향을 받았느냐에 대하여서는 논란의 소지가 있으나, 동무가 고원군수 재직시 관찰사에게 보낸 편지에 '기자 성인의 유훈을 따른다.'라고 하여 단군에서 기자로 이어지는 정통론을 주장하고 있으며, 사농공상 중에서 공업과 상업보다는 선비와 농업을 중시하는 농업 중심사회를 구상했다는 면에서 조선성리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 한편으론 주자의 해석을 따르지 않고 경서를 해석하려는 탈주자학적 조선성리학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오행설을 부정하고 성을 애로희락에 연결시킨 점에서 보면 조선성리학이 아니라 북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어 학문적 계통을 명확히 하기가 어려운 입장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당대의 대학자들인 조선 성리학자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한 심성학 논쟁을 의학에 접목시켜 나온 것이 사상체질의학이라는 것이다.

[이제마 평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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